여요전쟁(麗遼戰爭), 자랑스러운 고려(高麗)의 승리!

조의선인2009.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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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3년 요나라의 제1차 고려 침입부터 1018년의 제3차 침입에 이르는 대거란전(對契丹戰)은 고려의 승리였다. 우리 민족은 고조선(古朝鮮) 시기 이래 수많은 외적의 침입을 받았지만, 이때만큼 자주적인 입장에서 실리적인 외교와 철저한 군사적 준비로 적극적인 대처를 한 적은 거의 없었다.

거란족(契丹族)의 추장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10세기초 당(唐) 말기의 혼란을 틈타 여러 부족을 통일해 거란 제국을 수립했다. 부족의 힘을 한데로 모은 야율아보기는 단번에 발해(渤海)를 멸망시키고 화북의 연운 16주를 점령하여 947년 나라의 이름을 요(遼)로 바꾸며 대제국 건설의 야망을 키워갔다. 그러나 후주(後周)의 절도사 출신인 한족(漢族) 조광윤(趙匡胤)이 당말오대(唐末五代)의 혼란을 수습하고 송(宋)을 건국했다. 이렇게 해서 동아시아는 남쪽의 송(宋), 북방의 요(遼), 그리고 동쪽의 고려(高麗), 삼각의 세력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 중 가장 공세적이었던 요는 송을 치기 전에 고려와의 관계를 정립해두려 했다. 군사적인 힘으로 복속시키든지,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든지, 어떻게든 요가 송을 칠 때 고려의 개입을 막아야 했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면 남과 북에서 동시에 두 전쟁을 치러야 하는데 요나라로서는 그럴 여력이 없었다.

942년에 거란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며 낙타 50마리를 선물로 바쳤을 때, 태조(太祖)는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나라라고 비난하면서 사신은 유배 보내고 낙타들은 개성의 문부교 아래 매달아 굶겨 죽였다. 태조는 발해에 대해 동족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요나라는 연운 16주를 둘러싼 송나라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고려를 침입했다. 이제 고려만 영향권 안에 넣으면 송의 숨통을 끊어놓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993년 요나라의 장수 소손녕(蕭遜寧)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왔다. 소손녕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봉산군을 빼앗고 고려에 항복을 강요했다. 그러자 대부분의 고려 관신(官臣)들은 서경 이북의 땅을 넘겨주자는 할지론(割地論)을 주장했다. 그 주장이 곧 관철될 듯 보였다. 그러나 서희(徐熙)는 요나라의 전략적 목표가 영토 획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려와 송의 국교 단절, 고려와 요의 외교관계 회복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서희는 소손녕과의 담판을 통해 요와 통교를 하고자 해도 여진족(女眞族)이 방해가 된다며 두가지 요구사항을 내걸었다. 즉, 요나라의 군사들이 여진족을 내쫓아줄 것과 압록강 유역의 땅을 고려에 넘겨줘 통교할 길을 트게 해달하는 것이었다. 고려와의 싸움에 적극적인 의사가 없었던 요나라는 이를 쉽게 받아들였다. 요는 압록강 이동의 280리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고려에 넘겨주는 대신, 고려가 송과 관계를 끊고 요와 통교하는 조건의 화약(和約)을 맺었다. 이것으로 제1차 여요전쟁(麗遼戰爭)은 종료되었다.

송과의 국교 단절도 절묘했다. 고려는 이듬해 6월 송에 사신을 파견하여 요의 침입을 알리며 구원병을 요청했다. 패전한 지 얼마 안 된 송나라가 이를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이로써 송나라와의 단절은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곧이어 서희는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족을 몰아내면서 흥화진(興化鎭), 통주(通州), 용주(龍州), 곽주(郭州), 귀주(龜州), 철주(鐵州) 등에 강동 6주를 설치하였다. 고려 측 병력의 피해가 전혀 없이 청천강에서 압록강에 이르는 땅을 확보한 것이다. 강동 6주는 영토 확장의 의미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전략적 요충지로서 이후 제2차, 제3차 여요전쟁(麗遼戰爭)을 승리로 이끄는 거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국제정세를 주체적 입장에서 면밀히 궤뚫어본 한 외교관의 지혜와 담력 덕에, 고려는 동아시아 3개국의 각축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외교전(外交戰)의 통쾌한 승리였다.

고려와 화약(和約)을 맺었던 요는 1004년 송과 본격적인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끝내 송을 굴복시키며 '전연(澶淵)의 맹약(盟約)'을 체결하도록 했다. 이것은 패전국인 송나라가 요나라에게 매년 은 10만냥, 비단 20필을 바쳐야 하는 굴욕적인 강화조약(講和條約)이었다. 또한 중원의 연운 16주를 요나라에 넘겨줘야 했다. 이제 동아시아의 최강자로 군림하게 된 요나라는 고려를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 1010년 제2차 여요전쟁(麗遼戰爭)을 일으켰다.

1009년 무신(武臣) 강조(康兆)가 목종(穆宗)을 폐위시키고 현종(顯宗)을 즉위시킨 정변을 전쟁 구실로 삼아 강동 6주를 반환받기 위해 다시 고려를 침략한 요나라는 먼저 강동 6주를 공격했지만 양규(楊規), 이수화(李守和) 등의 강력한 저항으로 점령에 실패했다. 요황(遼皇) 성종(聖宗)은 대신 군대를 우회시켜 이듬해 1월 개경을 점령했고, 현종은 이미 나주까지 몽진(蒙塵)을 떠난 뒤였다. 요나라 군사들은 강동 6주에서 벌어졌던 교전으로 타격을 입고 전투력을 유지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개경을 점령한지 7일만에 고려 국왕의 친조(親朝)를 조건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요나라 군사들은 강동 6주를 장악하고 있던 양규(楊規), 김숙흥(金叔興) 등의 유격작전(遊擊作戰)에 말려들어 다시 한 번 퇴로를 차단당한 채 엄청난 전력 손실을 입고서야 겨우 퇴각했다.

요나라 군사들이 물러난 뒤 고려는 친조를 하지 않았다. 현종의 와병을 핑계로 거부했다. 이는 고려의 국권이 달린 문제였으므로 벼랑끝 외교로 끝내 굴복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러자 요나라는 다시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했다. 고려는 한번 확보한 전략적 거점을 내줄 수는 없었다. 고려는 1014년 송에 사신을 파견하여 국교 재개를 요청했다. 다음해에도 사신을 파견하여 유사시에 군사를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요나라와 외교적 관계를 중단한다는 의미에서 요나라의 연호 대신 송나라의 연호를 사용했다.

고려의 이러한 일련의 조치에 대해 요나라는 제3차 고려 침공을 개시했다. 1014년부터 1019년까지 네 차례의 대접전(大接戰)이 있었던 제3차 여요전쟁(麗遼戰爭)에서 고려는 완승을 거두었다. 이 중 가장 큰 전투는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한 1018년에 있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이미 요나라 군사들이 쳐들어올 것을 대비해 20만 대군을 준비해둔 상태였다. 흥화진(興化鎭)에서 벌어진 첫 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소배압의 군대는 무모하게 개경까지 진격했다가 강민첨(姜民瞻), 김종현(金宗鉉) 등의 부대에 기습 공격을 받고 퇴각하던 중, 귀주성(龜州城) 동쪽 벌판에서 강감찬(姜邯贊)이 지휘하는 고려군 주력부대에게 포위되어 거의 전멸되었다. 1019년 2월 1일에 벌어진 귀주대첩(龜州大捷)에서 고려에 침입한 요나라의 10만 군사 중 불과 2, 3천여명의 병사만 살아 돌아갔으니, 이 전투는 살수대첩(薩水大捷),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과 함께 우리 민족의 역사에 길이 빛날 전승(戰勝)으로 기록되었다.

제3차 여요전쟁(麗遼戰爭)에서 패배한 뒤 요나라는 고려에 화친을 제의해왔다. 고려는 화친을 받아들인 뒤 강감찬의 건의로 북쪽 국경일대에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았다. 또한 요나라와 전쟁기간 중에도 수시로 고려 국경을 침범했던 여진족 등 북방의 소수민족도 다독여 국방의 안정을 도모했다.

30년 동안 3차에 걸쳐 벌어졌던 여요전쟁(麗遼戰爭)은 고려, 요(遼), 송(宋) 등 동아시아 3개국의 각축이라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맞아, 고려가 유연한 외교정책과 강력한 군사력으로써 능동적으로 대응했던 우리 역사의 자랑스런 대목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