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의 침략을 막아낸 베트남의 민족 영웅 쩐흥다오(Tran Hungda

조의선인2009.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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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越人)이 거주하는 동안 중국 남부에서 통킹 지방에 걸친 지역은 진(秦)의 시황제(始皇帝) 때 정복되고 진대(秦代) 말기에 한때 남월국(南越國)으로 자립했다. 그 후 기원전 2세기 말에 전한(前漢) 세종(世宗)에 의해 멸망되어 베트남 북부에는 현재의 하노이에 쟈오즈군, 현재의 탄호아에 저오전군, 현재의 유에 지역에 르난군 등이 각각 설치되었다. 그로부터 천년 동안 베트남은 중원 여러 왕조들의 지배하에 놓여 중국화되었고, 인도 문명의 영향이 강한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중국문명권에 편입되었다. 다른 한편, 베트남에서는 한족(漢族) 관료와 상인의 가혹한 통치에 대해 저항운동이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다. 남부에서는 2세기 말에 어민인 참인(參人)이 인도문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교역국가 참파(Champa)를 세웠다.

 

한인(漢人) 세력의 지배에 대한 저항운동 가운데 유명한 것은 후한(後漢) 초기인 1세기에 일어난 쯩짝(Trung Trac), 쯩니(Trung Nhi) 자매가 일으킨 봉기와 당(唐) 현종(玄宗) 재위기에 일어난 마이 툭 로안(Mai Thuc Loan)의 반란이다.

 

쯩짝, 쯩니의 봉기는 베트남 역사상 최초의 반한봉기(反漢蜂起)로, 40년에 자매는 65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군왕을 칭했지만 3년 후에 한나라 군사 3만명의 공격으로 진압되었다.

 

당나라는 하노이 부근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설치했는데, 722년에 마이 툭 로안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군은 참파와 캄보디아인의 진랍(眞臘)과도 제휴하여 도호부를 점령하고 마이 툭 로안은 흑제(黑帝)라는 칭호로 불리며 지배체제를 갖추었다. 당은 환관을 지휘관으로 파견하여 진압에 나섰지만 저항이 격렬하여 현지에서 병사를 모집해 가까스로 반란을 진압했다. 그 후에 안남도호부는 진남도호부(眞南都護府)로 개칭되었는데, 장관으로 파견된 사람이 일본인으로 당의 고관이 되었던 아베 노나카마로[阿倍仲間呂]였다.

 

당이 멸망한 후에 중국이 오대십국(五代十國)의 혼란기에 접어들면서 베트남은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10세기 중엽부터 오조(吳朝, 939년~965년), 정조(丁朝, 968년~980년), 전량조(前梁朝, 980년~1009년) 등과 같이 단명으로 끝난 왕조가 흥망을 반복한 끝에 최초로 안정된 왕조였던 이조(李朝, 1010년~1225년)가 하노이를 도읍으로 수립되었다. 이 왕조는 송(宋) 조정으로부터 안남국왕(安南國王)이라는 왕호로 책봉받고 중화질서에 편입되었다. 그 후로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국인들은 베트남을 안남(安南)이라고 불렀다.

 

베트남 다이비엣(Daiviet) 이조(李朝)는 송의 관료 시스템과 과거제도를 도입하여 체제를 정비했다. 유학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립대학을 설립하여 귀족 자제를 한인식으로 교육했다. 또한 송나라에서 불전(佛典)을 받아들이는 등 중국식 불교 도입에 힘써 많은 불교사원을 지었다. 이조는 1224년 찌에우 호앙(Trieu Hoang)이 부황인 후에 똥(Hue Tong)에게 양위받아 베트남 역사상 최초의 여황제가 되었는데, 이듬해에 국상(國相)인 쩐 투도(Tran Thudo)에게 제위를 찬탈당함으로써 멸망하고 말았다.

 

진조(陳朝)의 시조인 타이 똥(Tai Tong)은 인도(人道)를 거스른 사악한 황제로 평가받고는 있지만 이조 말기에 지방에서 일어나던 반란을 진압하고 사회를 안정시켰으며 정치 제도와 군사 조직을 개혁하고 강화해서 몽골의 침입을 막아낼 수 있는 기반을 다진 유능한 행정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던 인물이었다.

 

13세기 초에 칭기즈칸(Chinggis Khan)이 건국한 몽골 제국은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영토를 크게 넓혀 서쪽으로는 러시아, 투르크, 페르시아, 동쪽으로는 티베트, 중국, 고려를 정복해서 광대한 대제국을 구축했다. 몽골 제국의 다섯번째 제왕인 쿠빌라이칸(Kublai Khan)은 이를 바탕으로 중국 경영에 착수해서 1271년에 국호를 원(元)이라 개칭하고 초대 황제인 세조(世祖)가 되었다.

 

중국을 지배한 원의 목표는 남방 교역, 넓게는 아시아의 교역을 주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동남아시아 지역에 있던 나라들은 원의 남하 정책에 의해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1252년에 쿠빌라이칸이 보낸 몽골 군대가 운남 지방에 있던 대리를 정복하니, 다이비엣과 몽골 제국이 국경을 접하게 됐다.

 

운남에 머물면서 남방에 있는 여러 민족들을 정복하던 몽골의 장수 우리양카다이는 1257년에 사절을 보내 다이비엣을 거쳐 송을 공격해야 겠으니 몽골군이 통과할 길을 빌려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다이비엣은 우리양카다이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방비를 더욱 강화했다. 그러자 우리양카다이가 이끄는 몽골군은 홍하 유역을 따라 남하해서 다이비엣의 영내로 들어와 단숨에 수도인 탕 롱을 함락시켰다. 몽골군이 침략하자 탕 롱의 주민들은 가옥을 모두 불태우고 적군을 피해 수도를 빠져 나갔다.

 

우리양키다이는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텅 빈 도시에서 식량을 조달할 수 없었던 데다가, 지독한 더위 때문에 군사들 사이에 질병이 만연해 다시 운남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다이비엣의 군사들이 철수하는 몽골군을 추격해서 크게 무찔렀다. 다이비엣 왕국은 이듬해 송나라에 군사동맹을 의뢰하는 사자를 보냈고, 몽골에서도 다이비엣에 사절을 보내 조공을 요구했다. 이에 다이비엣은 몽골의 요구를 받아들여 3년에 한 번씩 조공을 보내기로 약속했다.

 

1276년 원(元) 세조(世祖)는 다이비엣에 새로운 요구를 제시했다. 그것은 다이비엣의 황제가 직접 원나라의 황제를 알현하고 다이비엣의 황태자를 인질로 보내며 호적 장부를 원에 제출해야 한다는 요구였다. 진조의 황제 타인 똥(Tain Tong)은 원의 요구에 격노했지만, 아무런 방도도 취하지 못한 채 이듬해에 죽었다. 1278년에 남송을 완전히 멸망시킨 원은 다이비엣에 대해서도 더욱 강압적으로 나왔다.

 

타인 똥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연 똥(Yun Tong)은 쩐 흥다오(Tran Hungdao)를 국공(國公)으로 임명해 다이비엣의 군대를 총지휘하게 했다. 쩐 흥다오는 본명이 쩐 꾸옥뚜언(Tran Quoctuan)으로 다이비엣 진조(陳朝)의 왕족이라고 알려져 있는 인물인데, 한국사의 3대 전쟁 영웅인 을지문덕(乙支文德), 강감찬(姜邯贊), 이순신(李舜臣) 등과 마찬가지로 베트남 역사에서는 구국영웅(救國英雄)으로 평가받고 있다.

 

원나라의 남진은 계속되어 1282년 캄보디아를 공격하고 1283년에는 참파 왕국을 공격했으며, 1287년에는 미얀마를 침공해서 파간 왕조를 멸망시켰다. 1292년부터 1293년까지는 자바를 정벌했다.

 

1285년 원나라 장수 우마루가 마침내 80만 대군을 이끌고 다이비엣을 침공했다. 다이비엣의 군사들은 필사적으로 침략군을 맞아 싸웠지만 몽골군의 강력한 군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연전연패(連戰連敗)했으며 투항자가 속출했다. 결국 원나라 군사들은 수도인 탕 롱을 점령했으며 다이비엣의 장수 쩐 빈쫑(Tran Binhtrong)이 결사항전을 벌이다가 포로가 되었다. 우마루는 쩐 빈쫑에게 귀순을 권유했지만 그가 회유에 말려들지 않자 참수형(斬首刑)에 처했다.

 

1285년 3월에 다비비엣의 황제 연 똥은 근거지를 타인 호아(Thanh Hoa)로 옮겨서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원나라 군사들의 공세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소국왕(昭國王)인 쩐 익타익(Tran Ichthach)를 비롯한 유력한 황족들 가운데서도 항복하는 자가 속출했다. 원나라는 궁지에 몰린 다이비엣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해 별동대 50만 병력을 더 파견했다. 새로 파견된 별동대는 운남에서 라오스를 거쳐 참파까지 가서 북쪽으로 우회하기로 작전을 세우고 먼저 다이비엣의 남쪽을 공격했다.

 

원나라가 병력은 월등하지만 세력이 분산돼 있고, 보루의 방비도 견고하지 않음을 간파한 쩐 흥다오는 다이비엣의 군대를 정글이나 산악지대로 퇴각시킨 뒤 유격작전으로 반격했다. 다이비엣군의 저항이 수그러들지 않고 계속되는 데다가 홍하 델타 주민들이 식량을 감추고 도망쳐 버려 식량 확보가 어려워진 원군(元軍)은 곧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계속되는 패전에도 불구하고 사기를 잃지 않은 다이비엣군은 여기저기에서 대대적인 반격을 전개했다. 특히 홍하 델타 지역에서 원나라 군사들에게 타격을 가한 다이비엣군은 1285년에 수도인 탕 롱을 탈환했고 원군 5만명을 포로로 잡았다. 탕 롱으로 귀환한 연 똥은 이듬해에 원군 포로들을 돌려보냈다.

 

두 차례에 걸친 패배에 격노한 원나라의 황제 세조는 일본 원정 계획을 중지하고 1287년 말에 다시 다이비엣을 침공했다.

 

원군은 앞서 두 번의 침입 때에 식량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던 경험을 살려 군선 5백척을 건조하고 식량 수송 계획을 세웠다. 다이비엣의 군사 총사령관인 쩐 흥다오도 원이 다시 침입할 때를 대비해서 군사를 훈련시키고 무기와 전함을 건조해 두고 있었다.

 

1287년 12월에 원나라 장수 트아호안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수륙 양면으로 다이비엣을 침공하였다. 탕 롱의 주민들은 식량을 감추고 철수했으며, 다이비엣의 수도를 점령한 원군은 가옥을 불태웠다. 그러나 지금의 홍가이(Hong Gai) 부근 바다에서 쩐 카인즈(Tran Khanhdu) 장군이 이끄는 다이비엣의 특공대가 원나라의 수송선단을 기습하여 식량과 군수품을 빼앗고 선박 3백여척을 불살라 버렸다. 보급로가 끊긴 원군은 식량이 부족한 데가 우기까지 시작되자, 원정을 포기하고 수륙 양로로 나누어 퇴각하기 사작했다.

 

다이비엣의 총사령관 쩐 흥다오 장군은 미리 팜 응우라오(Pham Ngu Lao)의 부대를 중국과 다이비엣 국경지대에 있는 랑썬에 매복시켜 원군의 퇴각로를 끊게 한 뒤 바익당 강으로 가서 말뚝을 박아 놓았다. 그리고 원나라의 전투선단이 진격해 오자 밀물 때를 가늠해서 도망가는 척 해서 유인했다. 물이 빠지기 시작하자 원나라의 군선들은 말뚝에 가로막혀 움직일 수 없게 됐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다이비엣의 수군이 뱃머리를 돌려 반격했고, 강 양쪽에 매복해 있던 육군도 가담해서 분전한 끝에 원나라 군사 4만여명을 죽이거나 생포했다. 육로로 퇴각하던 원나라 군사들도 랑썬에 있던 다이비엣군의 기습공격에 여지없이 대패하고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원나라와 벌인 세 차례의 전쟁으로 다이비엣은 토지가 황폐해졌고 인구가 많이 줄었으며 1290년에는 기근이 심해서 많은 사람이 굶어 죽거나 비참한 생활을 하기도 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원나라의 침입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둔 경험은 다이비엣 사람들에게 자신감과 민족 의식을 고취시켰다.

 

1300년에 원나라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 쩐 흥다오 장군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군대는 부모와 자식 사이처럼 마음을 하나로 해서 일치단결하지 않으면 막강한 전투력을 과시할 수 없습니다. 민중의 힘을 길러 산 속에 길을 뚫어서 오래 쓸 기지를 건설하듯이 힘을 쌓아야 합니다." 하고 유언을 남겼는데, 훗날 프랑스의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과 독립전쟁, 미국과의 전쟁을 치르는 베트남 민중에게 큰 교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