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비가 주륵 주륵~ 술 안마시기로 한지 하루 지났건만 -,.- 술 생각나는 날씨로세 ** 효윤이 합류한 이후 확실히 생활하기가 더 나아졌다. 이전까지의 경멸과 혐오의 눈빛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씩 말을 거는 사람도 늘어났고 아주 조금이지만 동정 어린 시선도 확실히 느껴졌다. 야기로서는 동정이라니 싫어! 따위를 외칠 계제가 아닌지라 감사히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야기는 가게 내에서 이질적인 존재였다. 이토록 시선을 한 몸에 모아본 적이 과연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다녔다. 처음으로 야기는 이형(異形)에 대한 사람들의 배척이 얼마나 격렬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손이라도 닿을라치면 황급히 피하는 사람들, 이전까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같이 밥을 먹었던 사람들이 자신이 등장하면 고개를 돌리고 분분히 흩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리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 배격은 단순히 ‘피하고 싶다’ 의 수준이 아닌 것 같았다. 몇몇 남자직원들은 야기가 듣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슴없이 야기를 빗대 저질스러운 농담까지 나눴다. 그리고 항상 그 이야기의 끝은 ‘더러운 호모새끼’ 였다. 실제 게이가 아닌 야기로서야 그런 말에 상처받을 리 없었지만 정말 게이가 듣는다면 상당히 아플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학교 다닐 적에도 이런 농담을 하는 녀석들이 있었다. 그때는 무관심하게 지나쳤던 말들, 그러나 분명 거기에 아파했던 사람들도 있었으리라. 역지사지라 했던가. 자신의 입장에서는 깨닫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남의 입장이 되어보면 알 수 있다. 야기는 처음으로 그 진실을 알았다. 그 리고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일 받아준다면 꼭. 겨우 하루가 지났다. 야기는 요즘 들어 자신의 생활이 엉망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레스토랑에 나가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나가서 그 사람들의 시선을 대면하기가 너무 무서웠다. 그래도 꼬박꼬박 나가는 이유는 단 하나, 효윤의 눈물 때문이었다. 비겁하고 심약한 자신이지만 그래도 울 정도로 걱정해주는 효윤에게서 도망칠 수는 없었다. “왠지 지쳐 보이네.” 날카로운 준원의 눈에 야기는 피곤함을 느꼈다. 지금처럼 닳아빠진 신경줄로는 준원까지 챙기기는 무리였다. 야기는 억지로 밀어 넣던 밥을 그만 포기하기로 마음먹고 젓가락을 놓았다. “왜? 입맛이 없어?” 걱정스럽게 붇는 준원에게 그냥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 와중에도 준원이만은 이뻐 보이는 걸 보면 참 징그럽게도 반했다. “큰일이네. 요즘 통 밥을 안 먹잖아. 얼굴도 너무 말랐고. 무슨 일 있는거야?” “아냐, 그냥. 늦더위 탓 인가봐. 영 몸에 힘이 없네. 밥도 안 먹히고.” “아니, 확실히 무슨일이 있어.” 준원의 말하는 투가 빨리 불어라 하는 것 같아서 야기는 피식 웃었다. 아직 이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 시간이 아득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물론 견디기 힘들 정도로 하루가 길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금방 지나가던 시간이 추라도 매달았는지 더디게 흘렀다. 준원이와 함께 있는 저녁시간이 아니었다면 야기는 질식해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준원이와 함께여도 숨막히는 건 마찬가지인가. 혹시나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기가 피곤한데도 준원의 곁에 머물러 있고 싶었다. 다 닳아져 끊기기 일보직전의 신경으로 참 잘도 버틴다 싶다. 요즘 들어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면 아무도 없는 일들이 반복된다. 누군가 비웃는 소리가 들려 눈을 들면 혼자 차안에 있을 때도 있었다. 겁이 덜컥 나서 정신과에라도 찾아가볼까 했지만 무서워서 용기가 나지 않았다. 준원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한 채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야기를 보며 한기마저 느꼈다. 무언가 분명히 벌어지고 있는데 야기는 말을 해주지도 않고 핼쓱한 얼굴로 괜찮다며 웃기만 한다. 원망스럽게 야기를 바라보다가 준원은 다시 한번 모른척 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굳이 괜찮다는 사람을 다그쳐 알아내는 취미도 없고 안다고 해도 자신의 손에 닿지 않는 일이면 더 힘들게 만들수도 있다. 준원은 사람과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기억했다. 껍질 속에 웅크리고 앉아 닿는 모든 것을 거부했었던 시절에 가졌던 소원은 단 하나, ‘제발 좀 내버려둬 였다.’ 말하고 싶지 않다면 듣지 않겠다. 다만 곁에서 지켜봐주는 걸로 족하다. 준원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리고 나중에 야기가 필요로 할 때 있어주면 된다. 말없이 있어주는 것만으로 사람이 얼마나 힘을 얻는지는 자신이 잘 알았다. “별일 아니야.” “너 혹시… 우진씨랑 헤어졌어?” 눈을 찡긋 하면서 장난스럽게 묻는 준원의 말에 야기의 얼굴이 급속히 굳었다. 야기로서는 그날 이후 한번도 우진의 화제를 꺼내지 않았다는데 생각이 미처 그런 것이지만 준원은 야기의 반응에 놀랐다. “저, 정말이야?” 마모된 신경줄을 단 머리가 제대로 움직여 줄 리 없다. 야기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그저 묵묵히 있었다. 여기서 섣불리 뭐라 꾸며대야 좋을지 자신도 없었다. “미, 미안!” 준원은 황급히 고개를 숙여 사과하다가 식탁에 쾅 부딪혔다. 아픈 이마를 어루만지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그러면 완전히 코미디다. 잠깐 야기의 얼굴이 이상하게 비틀렸다. ‘어떡해, 울려나봐.’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 는 다소 희극적인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리고 준원은 그 말이 얼마나 슬픈 뜻이었는지 알아야 했다. 맞아 죽는 개구리에게는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 있는 대로 얼굴을 찡그리고 주먹을 꼭 쥔 채 비장하게 머리를 숙인 준원의 정수리에 대고 야기가 입을 열었다. “푸하하하핫…” 어안이 벙벙해진 준원이 쓱 눈을 들어 올려다보자 울 거라고 생각했던 야기는 배꼽이 빠져라 웃고 있었다. ‘얘가 실연의 충격으로 미쳐버렸나…’ 걱정스런 눈으로 야기를 살피는데 야기가 손가락을 들어 준원을 가리키면서 부들부들 떨었다. “너… 너… 쌍코피나…” “뭐?” 준원은 놀라서 슥 코밑을 문질렀다. 조금이었지만 정말로 피가 묻어난다. 피를 보고서야 놀란 준원이 욕실로 달려갔다. 거울을 보자 오른쪽 볼까지 그려진 코피자국이 보였다. “야, 이야기! 너 죽었어!” “미안! 그치만 너무 웃겨서…” 준원은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야기를 저주했다. 나쁜 자식, 기껏 걱정했더니… 준원은 뽀득뽀득 코피를 씻어내고 조심스럽게 코 안도 헹군 다음 코피가 더 이상 나지 않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거울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생긋 웃어버렸다. 요근래 들어 야기가 저렇게 크게 웃는 건 처음이다. 빨갛게 부어오른 이마에 역시 빨간 코끝. 그래도 이상하게 기분은 좋았다. “웃!” 아, 아프다… ㅠ.ㅠ 식탁으로 나갔더니 야기가 아까보다는 조금 밝아진 모습으로 차를 끓이고 있었다. 민망함과 심술에 준원은 입술을 툭 내밀었다. “뭐야, 늘 밥도 먹는둥마는둥 방으로 휙 들어가버리더니…” “미안했어, 그 동안.” 환하게 웃는 야기를 보자 더 이상 화를 낼 수가 없어져서 준원은 험험 헛기침을 하며 의자에 앉았다. 사람에게 칼 같고 냉정하다는 평을 듣는 자신인데 야기에게만은 무르다. 아마 한참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던 고3때 애들이 지금의 자신을 보면 놀라 뒤집어졌을 거다. 모르는 사이 상처 준 사람도 있었을텐데… 그때를 생각하면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 그것이 자신을 방어하는 방법이었지만 그래도 참 유치했었다 싶은 생각이 든다. 지금이라면 좀 더 부드럽게 빠져나갈테지만 그때는 너무 어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과 그다지 부딪히고 싶지 않다는 건 같지만 언제 어느때 가시를 세워야 하는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게 되었으니 시간이 흐르긴 흘렀나 보다. “자, 마셔.” “응, 땡큐. 그 동안 네가 끓여주는 차가 얼마나 마시고 싶었다고.” “그랬어? 말을 하지.” “이마에 이~렇게 줄을 좍 그어갖고 다니면서 무슨.” “내가 그랬었어?” 준원은 이 따스하고 포근한 공기가 좋았다. 어디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안락함. 마치 이곳이 네가 있을 곳이라고 일러주는 듯한. 별것 아닌 이야기로 투닥거리는 것도, 향기로운 한잔의 차도, 늦은밤 야식집에 배달시켜 먹는 족발과 소주… 일상 속에 녹아들어간 즐거운 시간들. “그래요, 무로이상.” “야아~ 너무했다~” 늘 같이 챙겨보던 일본드라마의 캐릭터 이야기가 나오자 야기가 웃었다. 이 웃는 얼굴이 좋다. 늘 웃는 얼굴로, 부드러운 미소로 준원을 바라봐주는 야기니까 앞으로도 계속 그대로의 모습이길 바란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난데없는 전화벨 소리에 준원과 야기는 동시에 얼굴을 봤다가 각자 핸드폰을 찾았다. “내거야.” 준원은 발신번호를 보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집이네. 여보세요?” 준원이 통화를 시작하자 야기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피해 소파에 앉았다. 티비를 켜긴 했지만 신경은 온통 통화내용에 쏠렸다. 집이라니 무슨 일이지? 6개월 가까이 되는 시간을 같이 살다보니 준원을 자기 식구인줄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한번도 준원이 부모님에 대해서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하긴 준원이도 엄마아빠가 있고 형제들도 있고-아니, 형제는 없었다. 외동이라고 들은 기억이 난다.- 아무튼 자기의 백그라운드가 있는 사람이겠지. 하지만 그 생각만으로도 엄청나게 어색하다. 부모님앞에 어린 딸로 서 있는 준원이 그림이 도무지 상상이 안 돼. “야기야, 뭐해? 쿠션은 왜 쥐어뜯어?” 야기는 헛헛 웃으며 들고 있던 쿠션을 툭툭 때려 편 다음에 곱게 옆에 내려놓았다. “무슨 일 있으시대?” “엄마랑 아빠가 이번주 결혼식이 있어 오신대. 오신 김에 집도 좀 보고 싶고 너도 만나고 싶으시다는데.” “에? 너, 내 이야길 한 거야?” “당연하잖아. 같이 살 사람인데…” 야기는 등을 돌리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뭔가 뿌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니까 준원이가 나를 부모님께 이야기해놓은 데다가 이제 인사까지 시킨다는 거지… 아빠, 엄마, 이 사람이 제가 말씀드린 그 사람이예요… 히히… 이 기회에 부모님한테 확실히 점수를 따야겠군. 아아, 장인어른께서 예끼, 이 도둑놈! 이라고 하시면 어떡하지?’ 몸을 비비 꼬아가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야기. 히죽거리는 야기를 준원이 이상한 눈으로 보다가 조금 떨어져 앉았다. 에비~ 아침부터 급한 학교의 연락을 받은 야기는 서둘러 시동을 걸었다. 그러고보니 휴학 연장해야 하는데 깜빡 잊고 있었다. 기간이 다 되도록 나타나지 않는 야기에게 전화를 건 조교는 약간 짜증이 밴 목소리였다. 아마도 이런 잔일을 일일이 챙겨줘야 한다는 사실이 화가 났던 모양이다. 빈말로라도 잘했다고는 볼 수 없는 처지라 야기는 그저 순순히 죄송하다고 전화를 끊었다. 오래간만에 학교로 향했다. 길 하나하나가 새로워 보이는 것이 그래도 학교라고 마음 속으로 그리워하고 있었던가 하는 묘한 감흥마저 들었다. ‘내년엔 슬슬 복학준비를 해볼까. 가게 일이 이제야 손에 붙기 시작했는데…’ 하지만 그 가게는 더 이상 즐겁고 편안한 곳이 되지 못한다. 가슴이 아팠다.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없었지만 오픈 전부터 시작된 준비작업에서부터 지금까지 들인 시간과 열정만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모르는만큼 더 발로 뛰고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여가며 배워서 이제야 겨우 자리를 잡기 시작했는데… ‘부르고뉴’는 자신의 가게였다. 거 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추억이 묻어 있었다. 오픈 전 공사현장에서 처음 만난 ‘부르고뉴’,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오픈 첫손님을 받던 감격과 설레임, 엄청 긴장한 얼굴로 장관의 접대를 했던 일, 한달 마감 후 직원들과의 회식… 생각할수록 점점 더 많이 떠오르는 그곳에서의 기억들.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야기의 ‘부르고뉴’는 화목하고 아담했다. 누구에게라도 자신있게 권해줄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장소라고 자부했다. 그런데 요즘의 그곳은 전과는 달랐다. 서먹서먹해진 직원들, 그에 비례해 싸늘해진 가게의 분위기. 장소를 만드는 것은 사람들이라는 진실을 깨달았다. 그 소담한 정취가 사라진 후 매상도 많이 줄었다. 음식은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단골손님들은 변했다는 말을 심심찮게 던졌다. 야기는 그게 자신의 탓이라는 사실을 괴롭게 인정했다. 정말로 나와야 할려나… 자신이 없어지면 다시 예전처럼 될까? 그렇다고 하면 과연 스스로가 택할 길이 무엇일까? 주차하고 차에서 내려서면서까지 야기는 고민을 거듭했다. 휴학신청을 해야 하는지, 그게 아니라면… 그냥 복학신청을 해야 하는 건지. 1년 반만에 온 학교는 그다지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시험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 학교에는 예상외로 많은 학생들이 분주히 걷고 있었다. 야기는 가만히 자리에 서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어서 와. 이야기?” “예.” 조교는 야기가 다닐 때와 다른 사람이었다. 약간 신경질적으로 생긴 남자는 건성으로 야기를 훑어보고 용지를 내주었다. “휴학 계속 할 거야?” 야기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곧 용지를 받아 들었다. “그럴 생각입니다.” “이거 기입해서 학생과에 제출해.” “예.” “그리고 이것도 가져가고.” 남자가 다른 종이 한장을 내밀었다. 노랑색 손바닥만한 종이에는 ’03 모임’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게 뭐죠?” “이번 03이 유난히 휴학자가 많아서 한번 모이자더라. 한번 가봐. 국적은 바꿔도 학번은 못 바꾸는 법이야. 동기들끼리는 친하게 지내는 게 나중에도 도움이 되니까 바빠도 잊지 말고 들르라고.” 의외로 자상한 조교의 말에 야기는 역시 사람을 첫인상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반성을 했다. 그러고보면 휴학신청도 일부러 알려 준 건가. 조금 미안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끼며 야기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야기와 엇갈려 한 무리가 소란스럽게 과실로 들어갔다. 낯이 익은 얼굴들인 것을 보니 동기인가 보다. 학교를 다닌 시간도 두어달 남짓 밖에 안 되는 야기로서는 인사를 하기도 뭐한 상황이라 그냥 돌아섰다. 막 모퉁이를 돌려는 순간 안에서 자신의 이름이 들렸다. “아까 걔, 이야긴가 걔 아냐?” “아는 사람이야?” “우리 동기잖아, 띨박아.” “그래? 전혀 모르겠던데.” “뭐, 학교 별로 안 나왔었으니까. 나랑 교양 같이 들었어.” “그런데 왜?” “쟤, 요즘 이상한 소문 돌더라.” “오지랖도 넓다, 임마.” “아냐, 우리 누나가 부르고뉴에서 일하는데 쟤를 알더라고. 우리 학교 아니냐고 묻더라.” “그게 왜?” “저 녀석 호모라던데.” “게이가 정확한 명칭이다. 팔푼아.” “형은 꼭 그런거 따지더라. 형도 수상해.” “임마, 지성인답게 대화하자.” “아무튼 거기선 모르는 사람이 없대.” 야기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추스리고 벽에 기댔다. 장난처럼 시작했던 거짓말이 이렇게 차디찬 칼날을 들이밀다니… “03 모임 나오라고 했는데.” “어, 형, 그 녀석한테 모임소식지 준 거야?” “응, 휴학건으로 학교에 왔길래 줬지.” “뭐야, 나 그 녀석 나오면 안 갈래.” “나도. 기분나빠.” “지성인답게 대화하라는 게 니들한텐 너무 무리한 주문이었냐?” “그래도 좀 그렇단 말야. 괜히 나까지 소문 이상하게 나면 장가는 어찌 가누.” “파하핫, 자식, 너한텐 그럴 일 전혀 없으니까 걱정마라.” 야기는 뒤돌아 서서 차가 있는 곳을 향해 뛰었다. 어깻죽지를 달리는 한기에 소름이 돋았다. 자신의 거짓말이 들이댄 의외의 상황에 온 몸이 떨려온다. 차안에 밀어 넣듯이 몸을 구겨넣고 야기는 한참 동안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자신을 게이라고 매도하는 목소리에 놀란 것이 아니다. 사람 사는 데가 한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라지만 이런 식으로 돌아돌아 근원지로 오는 것일까 생각하니 공포가 밀려온다. 한 여름의 차 안에서 야기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연신 춥다고 중얼거렸다. 온 몸이 차가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계속됩니다~1
- 아임게이(i'm gay) - #4-3
** 봄비가 주륵 주륵~ 술 안마시기로 한지 하루 지났건만 -,.- 술 생각나는 날씨로세 **
효윤이 합류한 이후 확실히 생활하기가 더 나아졌다.
이전까지의 경멸과 혐오의 눈빛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씩 말을 거는 사람도 늘어났고 아주 조금이지만 동정 어린 시선도 확실히 느껴졌다.
야기로서는 동정이라니 싫어! 따위를 외칠 계제가 아닌지라 감사히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야기는 가게 내에서 이질적인 존재였다.
이토록 시선을 한 몸에 모아본 적이 과연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다녔다.
처음으로 야기는 이형(異形)에 대한 사람들의 배척이 얼마나 격렬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손이라도 닿을라치면 황급히 피하는 사람들, 이전까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같이 밥을 먹었던 사람들이 자신이 등장하면 고개를 돌리고 분분히 흩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리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 배격은 단순히 ‘피하고 싶다’ 의 수준이 아닌 것 같았다.
몇몇 남자직원들은 야기가 듣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슴없이 야기를 빗대 저질스러운 농담까지 나눴다. 그리고 항상 그 이야기의 끝은 ‘더러운 호모새끼’ 였다. 실제 게이가 아닌 야기로서야 그런 말에 상처받을 리 없었지만 정말 게이가 듣는다면 상당히 아플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학교 다닐 적에도 이런 농담을 하는 녀석들이 있었다. 그때는 무관심하게 지나쳤던 말들, 그러나 분명 거기에 아파했던 사람들도 있었으리라.
역지사지라 했던가. 자신의 입장에서는 깨닫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남의 입장이 되어보면 알 수 있다. 야기는 처음으로 그 진실을 알았다. 그
리고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일 받아준다면 꼭.
겨우 하루가 지났다. 야기는 요즘 들어 자신의 생활이 엉망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레스토랑에 나가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나가서 그 사람들의 시선을 대면하기가 너무 무서웠다.
그래도 꼬박꼬박 나가는 이유는 단 하나, 효윤의 눈물 때문이었다.
비겁하고 심약한 자신이지만 그래도 울 정도로 걱정해주는 효윤에게서 도망칠 수는 없었다.
“왠지 지쳐 보이네.”
날카로운 준원의 눈에 야기는 피곤함을 느꼈다.
지금처럼 닳아빠진 신경줄로는 준원까지 챙기기는 무리였다.
야기는 억지로 밀어 넣던 밥을 그만 포기하기로 마음먹고 젓가락을 놓았다.
“왜? 입맛이 없어?”
걱정스럽게 붇는 준원에게 그냥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 와중에도 준원이만은 이뻐 보이는 걸 보면 참 징그럽게도 반했다.
“큰일이네. 요즘 통 밥을 안 먹잖아. 얼굴도 너무 말랐고. 무슨 일 있는거야?”
“아냐, 그냥. 늦더위 탓 인가봐. 영 몸에 힘이 없네. 밥도 안 먹히고.”
“아니, 확실히 무슨일이 있어.”
준원의 말하는 투가 빨리 불어라 하는 것 같아서 야기는 피식 웃었다.
아직 이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 시간이 아득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물론 견디기 힘들 정도로 하루가 길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금방 지나가던 시간이 추라도 매달았는지 더디게 흘렀다.
준원이와 함께 있는 저녁시간이 아니었다면 야기는 질식해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준원이와 함께여도 숨막히는 건 마찬가지인가.
혹시나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기가 피곤한데도 준원의 곁에 머물러 있고 싶었다. 다 닳아져 끊기기 일보직전의 신경으로 참 잘도 버틴다 싶다.
요즘 들어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면 아무도 없는 일들이 반복된다.
누군가 비웃는 소리가 들려 눈을 들면 혼자 차안에 있을 때도 있었다.
겁이 덜컥 나서 정신과에라도 찾아가볼까 했지만 무서워서 용기가 나지 않았다.
준원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한 채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야기를 보며 한기마저 느꼈다.
무언가 분명히 벌어지고 있는데 야기는 말을 해주지도 않고 핼쓱한 얼굴로 괜찮다며 웃기만 한다.
원망스럽게 야기를 바라보다가 준원은 다시 한번 모른척 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굳이 괜찮다는 사람을 다그쳐 알아내는 취미도 없고 안다고 해도 자신의 손에 닿지 않는 일이면 더 힘들게 만들수도 있다.
준원은 사람과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기억했다.
껍질 속에 웅크리고 앉아 닿는 모든 것을 거부했었던 시절에 가졌던 소원은 단 하나,
‘제발 좀 내버려둬 였다.’
말하고 싶지 않다면 듣지 않겠다.
다만 곁에서 지켜봐주는 걸로 족하다.
준원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리고 나중에 야기가 필요로 할 때 있어주면 된다.
말없이 있어주는 것만으로 사람이 얼마나 힘을 얻는지는 자신이 잘 알았다.
“별일 아니야.”
“너 혹시… 우진씨랑 헤어졌어?”
눈을 찡긋 하면서 장난스럽게 묻는 준원의 말에 야기의 얼굴이 급속히 굳었다.
야기로서는 그날 이후 한번도 우진의 화제를 꺼내지 않았다는데 생각이 미처 그런 것이지만 준원은 야기의 반응에 놀랐다.
“저, 정말이야?”
마모된 신경줄을 단 머리가 제대로 움직여 줄 리 없다.
야기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그저 묵묵히 있었다.
여기서 섣불리 뭐라 꾸며대야 좋을지 자신도 없었다.
“미, 미안!”
준원은 황급히 고개를 숙여 사과하다가 식탁에 쾅 부딪혔다. 아픈 이마를 어루만지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그러면 완전히 코미디다. 잠깐 야기의 얼굴이 이상하게 비틀렸다.
‘어떡해, 울려나봐.’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 는 다소 희극적인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리고 준원은 그 말이 얼마나 슬픈 뜻이었는지 알아야 했다. 맞아 죽는 개구리에게는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 있는 대로 얼굴을 찡그리고 주먹을 꼭 쥔 채 비장하게 머리를 숙인 준원의 정수리에 대고 야기가 입을 열었다.
“푸하하하핫…”
어안이 벙벙해진 준원이 쓱 눈을 들어 올려다보자 울 거라고 생각했던 야기는 배꼽이 빠져라 웃고 있었다.
‘얘가 실연의 충격으로 미쳐버렸나…’
걱정스런 눈으로 야기를 살피는데 야기가 손가락을 들어 준원을 가리키면서 부들부들 떨었다.
“너… 너… 쌍코피나…”
“뭐?”
준원은 놀라서 슥 코밑을 문질렀다. 조금이었지만 정말로 피가 묻어난다.
피를 보고서야 놀란 준원이 욕실로 달려갔다.
거울을 보자 오른쪽 볼까지 그려진 코피자국이 보였다.
“야, 이야기! 너 죽었어!”
“미안! 그치만 너무 웃겨서…”
준원은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야기를 저주했다.
나쁜 자식, 기껏 걱정했더니…
준원은 뽀득뽀득 코피를 씻어내고 조심스럽게 코 안도 헹군 다음 코피가 더 이상 나지 않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거울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생긋 웃어버렸다.
요근래 들어 야기가 저렇게 크게 웃는 건 처음이다. 빨갛게 부어오른 이마에 역시 빨간 코끝.
그래도 이상하게 기분은 좋았다.
“웃!”
아, 아프다… ㅠ.ㅠ
식탁으로 나갔더니 야기가 아까보다는 조금 밝아진 모습으로 차를 끓이고 있었다.
민망함과 심술에 준원은 입술을 툭 내밀었다.
“뭐야, 늘 밥도 먹는둥마는둥 방으로 휙 들어가버리더니…”
“미안했어, 그 동안.”
환하게 웃는 야기를 보자 더 이상 화를 낼 수가 없어져서 준원은 험험 헛기침을 하며 의자에 앉았다. 사람에게 칼 같고 냉정하다는 평을 듣는 자신인데 야기에게만은 무르다.
아마 한참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던 고3때 애들이 지금의 자신을 보면 놀라 뒤집어졌을 거다.
모르는 사이 상처 준 사람도 있었을텐데… 그때를 생각하면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
그것이 자신을 방어하는 방법이었지만 그래도 참 유치했었다 싶은 생각이 든다.
지금이라면 좀 더 부드럽게 빠져나갈테지만 그때는 너무 어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과 그다지 부딪히고 싶지 않다는 건 같지만 언제 어느때 가시를 세워야 하는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게 되었으니 시간이 흐르긴 흘렀나 보다.
“자, 마셔.”
“응, 땡큐. 그 동안 네가 끓여주는 차가 얼마나 마시고 싶었다고.”
“그랬어? 말을 하지.”
“이마에 이~렇게 줄을 좍 그어갖고 다니면서 무슨.”
“내가 그랬었어?”
준원은 이 따스하고 포근한 공기가 좋았다. 어디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안락함.
마치 이곳이 네가 있을 곳이라고 일러주는 듯한.
별것 아닌 이야기로 투닥거리는 것도, 향기로운 한잔의 차도, 늦은밤 야식집에 배달시켜 먹는 족발과 소주… 일상 속에 녹아들어간 즐거운 시간들.
“그래요, 무로이상.”
“야아~ 너무했다~”
늘 같이 챙겨보던 일본드라마의 캐릭터 이야기가 나오자 야기가 웃었다.
이 웃는 얼굴이 좋다. 늘 웃는 얼굴로, 부드러운 미소로 준원을 바라봐주는 야기니까 앞으로도 계속 그대로의 모습이길 바란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난데없는 전화벨 소리에 준원과 야기는 동시에 얼굴을 봤다가 각자 핸드폰을 찾았다.
“내거야.”
준원은 발신번호를 보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집이네. 여보세요?”
준원이 통화를 시작하자 야기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피해 소파에 앉았다.
티비를 켜긴 했지만 신경은 온통 통화내용에 쏠렸다. 집이라니 무슨 일이지?
6개월 가까이 되는 시간을 같이 살다보니 준원을 자기 식구인줄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한번도 준원이 부모님에 대해서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하긴 준원이도 엄마아빠가 있고 형제들도 있고-아니, 형제는 없었다. 외동이라고 들은 기억이 난다.- 아무튼 자기의 백그라운드가 있는 사람이겠지.
하지만 그 생각만으로도 엄청나게 어색하다.
부모님앞에 어린 딸로 서 있는 준원이 그림이 도무지 상상이 안 돼.
“야기야, 뭐해? 쿠션은 왜 쥐어뜯어?”
야기는 헛헛 웃으며 들고 있던 쿠션을 툭툭 때려 편 다음에 곱게 옆에 내려놓았다.
“무슨 일 있으시대?”
“엄마랑 아빠가 이번주 결혼식이 있어 오신대. 오신 김에 집도 좀 보고 싶고 너도 만나고 싶으시다는데.”
“에? 너, 내 이야길 한 거야?”
“당연하잖아. 같이 살 사람인데…”
야기는 등을 돌리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뭔가 뿌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니까 준원이가 나를 부모님께 이야기해놓은 데다가 이제 인사까지 시킨다는 거지… 아빠, 엄마, 이 사람이 제가 말씀드린 그 사람이예요… 히히… 이 기회에 부모님한테 확실히 점수를 따야겠군. 아아, 장인어른께서 예끼, 이 도둑놈! 이라고 하시면 어떡하지?’
몸을 비비 꼬아가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야기. 히죽거리는 야기를 준원이 이상한 눈으로 보다가 조금 떨어져 앉았다. 에비~
아침부터 급한 학교의 연락을 받은 야기는 서둘러 시동을 걸었다.
그러고보니 휴학 연장해야 하는데 깜빡 잊고 있었다.
기간이 다 되도록 나타나지 않는 야기에게 전화를 건 조교는 약간 짜증이 밴 목소리였다.
아마도 이런 잔일을 일일이 챙겨줘야 한다는 사실이 화가 났던 모양이다.
빈말로라도 잘했다고는 볼 수 없는 처지라 야기는 그저 순순히 죄송하다고 전화를 끊었다.
오래간만에 학교로 향했다. 길 하나하나가 새로워 보이는 것이 그래도 학교라고 마음 속으로 그리워하고 있었던가 하는 묘한 감흥마저 들었다.
‘내년엔 슬슬 복학준비를 해볼까. 가게 일이 이제야 손에 붙기 시작했는데…’
하지만 그 가게는 더 이상 즐겁고 편안한 곳이 되지 못한다.
가슴이 아팠다.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없었지만 오픈 전부터 시작된 준비작업에서부터 지금까지 들인 시간과 열정만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모르는만큼 더 발로 뛰고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여가며 배워서 이제야 겨우 자리를 잡기 시작했는데…
‘부르고뉴’는 자신의 가게였다. 거
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추억이 묻어 있었다.
오픈 전 공사현장에서 처음 만난 ‘부르고뉴’,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오픈 첫손님을 받던 감격과 설레임, 엄청 긴장한 얼굴로 장관의 접대를 했던 일, 한달 마감 후 직원들과의 회식… 생각할수록 점점 더 많이 떠오르는 그곳에서의 기억들.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야기의 ‘부르고뉴’는 화목하고 아담했다.
누구에게라도 자신있게 권해줄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장소라고 자부했다.
그런데 요즘의 그곳은 전과는 달랐다.
서먹서먹해진 직원들, 그에 비례해 싸늘해진 가게의 분위기.
장소를 만드는 것은 사람들이라는 진실을 깨달았다.
그 소담한 정취가 사라진 후 매상도 많이 줄었다.
음식은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단골손님들은 변했다는 말을 심심찮게 던졌다.
야기는 그게 자신의 탓이라는 사실을 괴롭게 인정했다.
정말로 나와야 할려나… 자신이 없어지면 다시 예전처럼 될까? 그렇다고 하면 과연 스스로가 택할 길이 무엇일까?
주차하고 차에서 내려서면서까지 야기는 고민을 거듭했다. 휴학신청을 해야 하는지, 그게 아니라면… 그냥 복학신청을 해야 하는 건지.
1년 반만에 온 학교는 그다지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시험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 학교에는 예상외로 많은 학생들이 분주히 걷고 있었다.
야기는 가만히 자리에 서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어서 와. 이야기?”
“예.”
조교는 야기가 다닐 때와 다른 사람이었다.
약간 신경질적으로 생긴 남자는 건성으로 야기를 훑어보고 용지를 내주었다.
“휴학 계속 할 거야?”
야기는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곧 용지를 받아 들었다.
“그럴 생각입니다.”
“이거 기입해서 학생과에 제출해.”
“예.”
“그리고 이것도 가져가고.”
남자가 다른 종이 한장을 내밀었다.
노랑색 손바닥만한 종이에는 ’03 모임’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게 뭐죠?”
“이번 03이 유난히 휴학자가 많아서 한번 모이자더라. 한번 가봐. 국적은 바꿔도 학번은 못 바꾸는 법이야. 동기들끼리는 친하게 지내는 게 나중에도 도움이 되니까 바빠도 잊지 말고 들르라고.”
의외로 자상한 조교의 말에 야기는 역시 사람을 첫인상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반성을 했다.
그러고보면 휴학신청도 일부러 알려 준 건가.
조금 미안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끼며 야기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야기와 엇갈려 한 무리가 소란스럽게 과실로 들어갔다. 낯이 익은 얼굴들인 것을 보니 동기인가 보다. 학교를 다닌 시간도 두어달 남짓 밖에 안 되는 야기로서는 인사를 하기도 뭐한 상황이라 그냥 돌아섰다. 막 모퉁이를 돌려는 순간 안에서 자신의 이름이 들렸다.
“아까 걔, 이야긴가 걔 아냐?”
“아는 사람이야?”
“우리 동기잖아, 띨박아.”
“그래? 전혀 모르겠던데.”
“뭐, 학교 별로 안 나왔었으니까. 나랑 교양 같이 들었어.”
“그런데 왜?”
“쟤, 요즘 이상한 소문 돌더라.”
“오지랖도 넓다, 임마.”
“아냐, 우리 누나가 부르고뉴에서 일하는데 쟤를 알더라고. 우리 학교 아니냐고 묻더라.”
“그게 왜?”
“저 녀석 호모라던데.”
“게이가 정확한 명칭이다. 팔푼아.”
“형은 꼭 그런거 따지더라. 형도 수상해.”
“임마, 지성인답게 대화하자.”
“아무튼 거기선 모르는 사람이 없대.”
야기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추스리고 벽에 기댔다.
장난처럼 시작했던 거짓말이 이렇게 차디찬 칼날을 들이밀다니…
“03 모임 나오라고 했는데.”
“어, 형, 그 녀석한테 모임소식지 준 거야?”
“응, 휴학건으로 학교에 왔길래 줬지.”
“뭐야, 나 그 녀석 나오면 안 갈래.”
“나도. 기분나빠.”
“지성인답게 대화하라는 게 니들한텐 너무 무리한 주문이었냐?”
“그래도 좀 그렇단 말야. 괜히 나까지 소문 이상하게 나면 장가는 어찌 가누.”
“파하핫, 자식, 너한텐 그럴 일 전혀 없으니까 걱정마라.”
야기는 뒤돌아 서서 차가 있는 곳을 향해 뛰었다.
어깻죽지를 달리는 한기에 소름이 돋았다.
자신의 거짓말이 들이댄 의외의 상황에 온 몸이 떨려온다.
차안에 밀어 넣듯이 몸을 구겨넣고 야기는 한참 동안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자신을 게이라고 매도하는 목소리에 놀란 것이 아니다.
사람 사는 데가 한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라지만 이런 식으로 돌아돌아 근원지로 오는 것일까 생각하니 공포가 밀려온다. 한 여름의 차 안에서 야기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연신 춥다고 중얼거렸다.
온 몸이 차가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