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임게이(i'm gay) - #4-4

夜記(야기)2004.04.20
조회281

** 제글을 읽어 주시는 분들이 매일 매일 100명도 넘는다는 사실이 정말 흐믓~ 합니다 ^^ 정말로요. 날씨 좋아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 굴뚝이지만 오늘도 열심히!! **

 

 

야기는 가게로 가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게에서 오는 전화도 받고 싶지 않아 핸드폰도 꺼버렸다.

준원이가 집에 있으면 어쩌나 잠깐 문 앞에서 망설였지만 지금은 어디든 숨을 곳이 필요했다.

눈 언저리가 쿡쿡 쑤셔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야기는 살며시 문을 열었다.

다행히 집안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야기는 재빨리 방으로 들어가 옷도 벗지 않고 침대에 파묻혔다.

베개로 귀를 틀어막고 이불속으로 파고들어가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자신을 해치는 것이 바로 자신의 거짓말이라는 아이러니한 사실에 야기는 그저 둥글게 몸을 말았다.

현실과 닿는 면을 최소화하겠다는 듯이…

 

“어머? 야기 와 있네.”

 

준원의 목소리가 들리고 노크소리가 나더니 곧 방문이 열렸다.

스스럼 없어진 것은 좋지만 준원은 가끔 이렇게 확인도 하지 않고 문을 연다.

이불 속에 들어가 있는 야기를 발견하고는 조금 놀란 눈치다.

 

“야기야? 어디 아파?”

“그냥 좀 추워서…”

“날씨가 이렇게 더운데… 감기 걸린 거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

“그래? 약 지어다 줄까?”

“아니, 그냥 잘래.”

“그래, 그럼. 나 결혼식에 가. 올 때 엄마아빠랑 같이 올 건데… 같이 저녁 먹는 건 무리겠다.”

“아니야, 모시고 와. 그때면 아마 일어날 수 있을 거야.”

“응.”

 

준원이 나가는 소리를 멍하니 들었다. 피곤했다.

이대로 잠들어 다시는 깨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피로였다.

 

언뜻 잠이 들었던 걸까. 야기는 축축하게 들러붙은 옷에 불쾌감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더운 날씨에 이불을 둘러쓰고 자서인지 몸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꿈도 별로였던 것 같다. 일단 샤워를 하자고 마음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 샤워를 하고 나와 에어컨을 틀었다. 더위를 많이 타는 야기는 여름이 되면 에어컨을 끼고 살았다. 시원한 공기와 함께 퀴퀴한 냄새가 나서 눈쌀을 찌푸렸다. 오늘 쉬는 김에 에어컨 청소나 해야 할 것 같았다.

 

“어, 일어났네?”

 

준원이 들어오다가 야기를 보고 생긋 웃었다.

이럴 때 야기는 정말로 자신이 준원을 좋아하고 있다는 실감이 났다.

눈가를 가늘게 접으며 웃는 준원의 표정이 참 좋았다.

 

“들어오세요.”

 

비켜선 준원의 옆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고 야기는 흠칫 했다가 바로 그분들이 준원의 부모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벌떡 일어났다.

 

“실례합니다.”

 

한 눈에 봐도 준원의 부모님임을 알 수 있는 분들이었다. 고운 중년의 부인과 강한 눈빛의 남편은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잘 어울렸다. 누가 봐도 부부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야기는 잔뜩 긴장해서 90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샤워 후라는데 생각이 미쳐 급히 옷을 둘러보았지만 다행히 반바지 차림은 아니었다. 여름에는 반바지에 나시라는 철칙을 가진 자신인데 일이 잘 될 징조인 듯 하다고 멋대로 생각하니 그나마 조금 용기가 난다.

 

“이리로 앉으십시오. 밖이 많이 덥던데…”

“아니에요, 차가 냉방이 너무 잘 돼 있어서 추워서 혼났지 뭐.”

 

조근조근 말하는 준원의 어머니는 어딘지 자신의 어머니와도 닮은 데가 있어서 호감이 간다.

 

“자, 시원한 보리차예요. 갈증 나시죠?”

“것 참 반가운 소리다.”

 

꼭 빼닮은 부녀는 평소에도 사이가 좋은 모양인지 자연스럽게 호흡이 맞는다. 야기는 화목한 가족의 전형처럼 보이는 세 사람의 모습이 보기 좋아 한결 마음을 놓았다.

 

“야기군이라고 들었는데…”

“예,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그래, 내 처음에 이 녀석한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 펄쩍 뛰었었지.”

“예…”

“고집이 어찌나 센지 결국은 허락하고 말았네만 지금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 고집이 누구한테서 온 건데요.”

 

웃으며 핀잔을 주는 준원의 어머니 덕에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게 풀렸다.

 

“자네랑 있으면서 이 녀석이 참 많이 유해졌어. 지 말로도 자네가 너무 잘 해준다고, 사람한테 자네처럼 대하고 싶다고 하더군. 많이 배운 모양이야.”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내 딸이랑 잘 지내주게.”

“명심하겠습니다.”

 

상견례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야기는 수줍게 웃는 준원을 보면서 부모님 모르게 브이 자를 그려 보였다.

 

“그나저나… 말은 들었지만 정말 아깝더군.”

“엄마!”

“어머나, 얘는. 칭찬이야, 칭찬.”

“그런 이야기 뭐하러 해요?”

“아휴, 알았다. 입 꼭 다물고 있을게. 됐니?”

“말씀하세요. 준원이 신경쓰지 마시구요.”

“그래도 될까? 내가 직접 이렇게 보니까 너무 아까워서 그래.”

“엄마아!”

“귀 안 먹었다.”

“준원이 가만 있어봐라.”

“하지만 아빠, 그건 프라이버시라구요.”

“괜찮으니까 들을게. 말씀하세요.”

 

잔뜩 못마땅한 얼굴로 준원이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인 어머니를 만류했다.

그러나 야기와 아버지의 등쌀에 밀려 결국은 입을 다물었다.

 

“이런 말 한다고 고깝게 듣지 말고. 기분 나빠하지도 말았으면 좋겠어.”

“예, 걱정말고 말씀하세요.”

“난 게이니 뭐니 그런 것들은 잘 모르지만…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이치야. 여자를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게 얼마나 큰 축복이고 기쁨인지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그래. 세상은 이치대로 돌아가는 법이고 이치에 어긋나면 많은 아픔을 겪게 돼. 난 야기군이 참 마음에 드네, 사위삼고 싶을 정도로. 어머니 같은 사람이 걱정해서 하는 말이니까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봐 줬으면 좋겠어.”

 

순간 야기의 머리 속에 폭죽이 터졌다.

사위삼고 싶을 정도로… 사위삼고 싶을 정도로…

사위…

 

황홀한 눈으로 준원과 결혼한 자신의 미래를 그려본다.

준원이를 닮은 예쁜 딸을 안고 장인 장모가 버선발로 반기는 처가에 준원의 손을 잡고 들어가는 상상. 그것이 바로 자신이 그리던 미래가 아닌가!

그러나 그 행복한 백일몽은 준원의 힐난하는 듯한 목소리로 파삭 깨어졌다.

 

“엄마, 그건 자신의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니야. 자신의 의지대로 되는 일들만 세상에 있으면 좋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도 가끔 있잖아요. 남자를 좋아한다, 여자를 좋아한다 그딴게 다 무슨 소용이예요. 여자나 남자나 다 같은 사람인데 사람을 좋아하는 건 축복이지 죄가 아니잖아요. 의지대로 고를 수 있다면 누가 굳이 그렇게 손가락질 받는 삶을 선택하겠어요. 엄청나게 힘들고 괴로운 길이라도 어쩔 수 없으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한길이기 때문에 걷는 것 뿐이야. 그러니까 우리만이라도 따뜻하고 다정한 눈으로 봐주면 되는 거잖아. 이건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라구요. 누구든 외로우니까 다른 사람이 필요해요. 다만 그 대상이 같은 성이라는 것 뿐이야. 그게 뭐가 그렇게 이상하고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야. 그냥 그러려니 하고 봐주면 돼요. 저 사람들 이상하다 색안경끼지 말고 있는 그대로 예쁘게 사랑하느구나 흐뭇하게 보면 되는 거야. 안 그래도 힘든 사람들이야. 우리까지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설교할 건 없잖아요.”

 

준원의 설득에 어머니는 얼굴을 붉혔다.

 

“얘는 사람 무안하게… 알았으니까 그만 해라. 내가 잘못 생각했어.”

“야기는 더 무안해요, 엄마.”

“미안해, 야기군. 내가 그만 생각없이… 준원이한테 처음 이야기 듣고도 이래서 엄청나게 야단 맞았는데 또 그러네. 늙으면 머리가 굳어서 자기 살아온 대로만 세상을 보려고 해. 그러니까 이해하고 너무 서운해하지 말아요, 응?”

“아닙니다. 절대 아니니까 마음 쓰지 마세요.”

 

연신 미안하다며 고개를 들지 못하는 준원의 어머니에게 웃어 보이면서도 야기의 머리속은 복잡했다. 준원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 줄은 몰랐다.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고 좋아만 했지, 준원이 이 정도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부모님에게까지 이야기하고 있는 줄은 정말로 몰랐다.

야기는 다시 한번 스스로의 거짓말에 상처 입었다.

그들을 이용해 거짓말을 하고 준원에게 동정을 끌어내고 사람들에게 배격 당하고…

대체 지금 야기는 스스로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혼란스러웠다.

 

“힘들었겠네. 나 같은 사람들이 많아서 많이 힘들었지? 정말 미안해.”

 

야기의 손을 쥔 어머니의 따스한 말에 야기는 눈가가 시큰거리는 것을 꾹 참았다.

준원이뿐 아니라 이렇게 좋으신 분들에게까지 거짓말을 하다니 스스로가 너무도 부끄러웠다.

진심어린 어머니의 눈동자, 동정과 연민으로 안타까워하는 그 눈을 감히 마주할 수가 없었다.

 

“힘내게, 야기군. 세상은 자기가 사는 거야. 남들 눈치보면서 살아봤자 한세상 끝나고 나면 허무하기만 할 뿐이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 자신이 행복한 길을 찾아 옆길에서 우혹하는 목소리들을 거부한 채 묵묵히 걷는 것이 인생이라네.”

 

준원의 아버지는 툭툭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 손에 어린 온기가 너무 따뜻해서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 다정한 격려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나 슬펐다.

 

한 식구처럼 대해주는 어른들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마음에 걸려서 야기는 저녁을 먹는 내내 웃는 얼굴을 유지하느라 고생했다. 다행히 가게에서 다져진 솜씨라 준원마저도 눈치채지는 못한 것 같았지만 여전히 마음은 불편했다.

 

 

상황은 날로 심각해졌다.

야기는 날이 갈수록 레스토랑에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효윤이 다 괜찮아질 거라고 아무리 격려해줘도 도무지 상황은 나아질 기미조차 없었다.

 

“매니저님, 여기 오늘 예약명단이요.”

 

직원 중 최고참인 희정씨, 이전까지는 야기에게 다정한 웃음을 지어주던 사람이었는데 요즘에 와서는 완전히 태도가 달라졌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것은 기본이요, 업무상 관련해서도 야기와 한자리에 있고 싶어하지 않았다.

 

“네, 고맙습니다.”

 

야기가 파일을 받아 들면서 잠깐 손이 스쳤다. 순간 그녀는 작은 비명을 삼키면서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야기는 참담한 심정으로 그녀와 야기 사이에서 날리는 종이들을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야기를 바라보던 희정에게 야기는 그냥 나가라는 손짓을 해보이고 천천히 무릎을 굽혀 바닥에 떨어진 종이와 파일표지를 줍기 시작했다.

 

“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그만…”

“괜찮으니까 나가줄래요? 여기 정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속에서 울컥 넘어오는 울음을 간신히 누르고 말하는 야기에게 희정은 잠시 무슨 말을 할 듯 머뭇거리더니 그냥 고개를 숙여 보이고 문을 열었다. 야기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숨을 내쉬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서 열이 났다.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는 눈물을 보며 야기는 자신이 지금 얼마나 위로가 필요한지, 얼마나 약해져 있는지를 깨달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렇게는…

더 버티기 힘들었다.

 

“나야.”

-어… 야기냐.

“저녁에 뭐하냐? 시간 좀 있어?”

-오늘 저녁? 저기, 좀 바쁜데…

“그럼 내일은? 왠만하면 시간 좀 내줄래?”

-……글쎄.

 

야기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하긴, 학교에까지 들어간 소문이 몇 안 되는 친구녀석한테 안 들어갈 이유는 없었다. 고작 이런 일로 깨질 사이였던가 하는 의문도 있었지만 야기는 피식 웃었다.

그런 것까지 따져서 욕을 할 힘도 없다. 그저 피곤했다.

 

“알았다. 앞으로 연락 안 하마.”

-야기야, 그게…

“됐다니까. 곤란하게 해서 미안하다. 니들도 다 들었나 보구나. 그럼 다른 녀석들도 다 마찬가지겠네.”

-자식아, 우리라고 뭐 편한줄 아냐?

“그러니까 안 불편하게 연락 끊어주겠다잖아. 니들도 주위에 호모새끼가 알짱대면 창피하고 불안해서 어디 살겠냐. 깨끗하게 물러날 테니 걱정마라. 어디 가서 니들이랑 친구라는 이야기는 입도 뻥긋 안 할 테니 걱정말고.”

-야, 이 새끼야! 나한테도 시간 좀 주면 안 되냐? 갑자기 그런 이야길 들으면 당황하는게 당연하잖아!

“무슨 시간? 생각할 시간? 처치곤란한 호모새끼가 너한테 득이 될지 손이 될지 계산해볼 시간? 됐다. 너한테 화내서 뭐하냐. 더러운 호모새끼가 처분이나 기다려야지. 미안하지만 그럴 마음 없으니까 그 새끼들한테도 다시는 낯짝 쳐들고 오지 말라고 전해둬. 니들 같은 것들, 나도 안 반가워. 한때 몰려다녔던 걸로 친하다고 믿었던 내가 병신이지. 끊는다.”

-야, 이 개새…

 

야기는 핸드폰을 닫고 바로 배터리를 뽑아버렸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단순하게 준원이와 있고 싶은 마음에 시작했던 거짓말이 이런 사태까지 될줄 몰랐다.

그 웃기는 장난 같은 말 한 마디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자신을 갈라놓을 줄은 몰랐다.

평생 다시 없을 친구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믿었었는데… 적어도 힘들 때 술한잔은 할 수 있는 사이라고 믿었는데…

 

“와아악!”

 

야기는 책상 위를 휘저었다. 하나도 속이 안 시원했다. 대체 영화 같은 데선 왜 이런 짓을 하는걸까.

기껏 주워 정리해놓은 파일이 다시 팔랑거리며 떨어져 내리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던 야기가 픽 웃었다. 어딘가 퓨즈가 나간 것 같다. 아까까지 느끼던 분노와 서운함, 알 수 없는 슬픔들이 한겹 필터를 씌운듯 불분명해졌다. 아니, 조금전까지 왜 그렇게 화를 냈던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책상 위에 앉아 멍하니 천정을 올려다보며 야기는 소리내 웃었다.

 

계속 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