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비아범은 마주앉아 밥을 먹고 있는 개비에게 슬쩍 물었다. 원래 아들의 이름이 갑(甲)인데 사람들은 자꾸 개비라고 불렀고, 그러다보니 갑이의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개비아범이라고 시장통에서 불렸다. 입 속에 밥을 가득 넣고 우물우물하던 개비는 멀뚱히 아버지를 쳐다보더니 갸웃하며 되물었다.
“혹시 로맨스그레이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개비아범은 큰 눈알을 히뜩 위로 돌리더니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응? 로맨스그레인가? 말의 앞뒤가 바뀌었나?”
개비는 피식 웃더니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왜 물어보세요? 로맨스그레이는 중년을 넘어선 나이에 연애한다는 뜻이에요.”
개비아범은 험험 헛기침을 하고는 얼른 고개를 돌리며 숭늉을 마셨다. 은근히 민망한 생각이 들었다.
평생을 마누라와 시장에서 건어물장사를 하던 개비아범은 요즈음에 인터넷카페에 정신이 빠져 있었다. 전에는 손님도 없는 이른 아침부터 가게 문을 열어놓고 멍하니 앉았었는데, 인터넷을 알고부터는 마누라를 가게에 먼저 내 보내낸 후에 컴퓨터를 끼고 몇 시간씩 앉아있었다. 또한 밤에도 마찬가지였다. 문학카페는 개비아범이 아무것도 모르고 마우스를 딸깍 거리다다 들어간 곳이었다.
개비아범은 시장입구에 있던 컴퓨터가게 주인이 꾸어간 돈을 주지 않자, 화가 난 김에 진열되어 있던 컴퓨터를 뺏어왔다. 아들 방에도 컴퓨터가 있었지만 도저히 돈을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한 개비아범은 뺏어온 컴퓨터를 안방에 들여다 놓고 씩씩댔다. 방구석에 컴퓨터를 놓고 아침저녁으로 대하자니 영 신경질이 나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본전이나 뽑아 보자고 개비에게 보채서 배운 컴퓨터였다.
“중년을 아름답게”
바로 카페의 이름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구경만 했는데......
영상과 음악을 올리는 것을 우연히 배우게 된 것이다. 여기저기서 복사를 해서 올리니깐 흡사 영화를 제작한 기분이었다. 돋보기를 코에 걸치고 매일 남의 글이나 복사하던 개비아범은 어느 날 글을 하나 영상에 써서 올렸다.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 내 고향
버리고 떠난 고향이기에,
수박들 흐려진 선창가 전봇대에
기대서서 울적에
똑딱선 프로펠라 소리가
이 밤도 내 가슴을 울린다.
연분홍 비단실 꽃구름 같이
내 고향에 봄은 어린다.
글 / 개비아범
바로 남인수라는 가수가 불렀던 고향의 그림자라는 노래가사였다. 은은한 경음악과 함께 화면에 뜬 글을 본 사람들은 어디에선가 들어 보았던 노래가사 같았지만 오십 중반의 개비아범이 올린 영상글 밑에 꼬리글을 막 달았다.
“오모나...... 너무 가슴 찡한 글이에요.”
“너무나 슬퍼요. 잘 감상하고 갑니다. 또 좋은 글을 부탁해요.”
“시인이세요? 너무 멋져요.”
개비아범은 이렇게 기분이 째진 적이 없었다. 꼬리글을 단 사람들이 모두 여자였다. 닉네임을 보니깐, 수선화, 이쁜이, 외로운 장미, 등등 가끔 글을 올리는 여자들이었다.
여자들에게 칭송을 듣기는 생천 처음이었다. 그날은 하루 종일 자기가 올린 글을 보고 또 보며 흥얼흥얼 거렸다. 저녁때가 되니깐 꼬리글을 단 사람들이 열 명이 넘었던 것이다. 개비아범은 자신의 존재가 인터넷에서 통용되었다는 사실에 삼사 일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며칠 후에 또 밤새도록 꼼지락거리며 영상글을 올렸다.
부평 같은
내 신세가
너무도
기막혀서
창을 열고
밖을 보니
하늘은
저 편......
글 / 개비아범
고복수가 부른 타향살이라는 노래가사였다. 이번에는 그 곡의 1절이 아니라 2절을 올렸다. 개비아범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옛날 노래가사에 심취되어 갔던 것도 사실이었다. 구구절절 가슴을 치는 노래가사는 특히 2절이 좋았다. 또한 영상글 아래에 “글 / 개비아범”이라고 써서 달 적에는 흡사 자신이 시인처럼 느껴졌다.
이번에도 카페의 회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물론 노래가사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꼬리글을 달면 그 밑에 꼭 고맙다고 인사하는 개비아범의 예의에 감히 태클 거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도 님의 글을 보고 눈물이 났습니다.”
“아~ 정말 허무한 세월이군요. 저도 사십대 중반에 들어서니 괜히 슬퍼지기만.....”
개비아범은 신나서 히쭉 웃었다.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며 자는 아내를 측은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쯧, 이 여자는 도대체 감수성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찾아 볼 수 없으니...... 쯧쯧,”
그 후부터 개비아범은 진짜 시를 쓰려고 했다. 옛날에 막걸리 집에서 젓가락 장단에 맞추어 부르던 노래가사를 기억해 내고는, 얼기설기 그 노래가사를 엮어서 글을 만들었다. 어느 날, 개비엄마는 가게에서 장부책 뒷면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했다.
“도대체 이 양반이 미쳤나? 요즈음에 머리가 이상해졌어.”
혼자서 중얼중얼하며 깨알같이 개비아범이 쓴 글을 들여다보았다. 옛날 노래가사가 잔뜩 적혀있었다.
그대여 우지마라.
내가 있다.
여인의 길을
너는 지켜라.
물론 이 글은 남원의 애수라는 노래가사를 변조한 것이다.
그 진상을 밝히면 이렇다.
춘향아 우지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
그날 밤에 개비엄마는 바스락바스락 거리며 잠을 설치게 하는 개비아범을 피하여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의 방에 가서 잤다.
“얘야, 네 아빠가 왜 그런지 모르겠다. 요즈음에 들어서서 꼭 어린애 닮아가는 것 같다. 어떤 때는 혼자서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도 안하더라. 도대체 나이를 거꾸로 먹어가는 것인지......”
그 말을 들은 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안방으로 톡 뛰어 갔다. 아빠가 눈물까지 글썽인다는 말에 딸은 놀랐던 것이다. 안방 문을 연 순간에 딸은 방에 가득한 음악소리에 더욱 눈을 크게 떴다. 컴퓨터 모니터에는 슬픈 음악과 아울러 영상글이 위로 쭉쭉 올라가고 있었다.
이별 뒤, 그리움
재회는 또 이별
믿지 못할 청춘
영원한 사랑은 약속하지 말자.
생각하면 생각수록
믿지 못할 내 청춘.
글 / 개비아범
마지막에 개비아범이 썼다는 글이 올라오자 딸은 너무도 놀랐다. 매일 가계부나 들여다보고 전화요금과 전기요금이 너무 많이 나왔다는 둥, 도시가스요금이 비싸니깐 밖에 나갈 적에는 꼭 보일러 스위치를 끄고 나가라는 둥, 고리타분한 잔소리만 하던 아빠가 올린 영상글이 믿기지 않았다.
“이 글을 아빠가 쓰신 것 맞아요?”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딸을 옆눈으로 슬쩍 훔쳐본 개비아범은 어깨가 뻣뻣하다는 표정으로 목을 빙빙 돌리며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다른 사람이 달은 꼬리글을 보라는 듯 영상을 쭉 아래로 내렸다. 개비아범을 시인이라고 칭송하는 카페회원의 꼬리글이 열개나 달려 있었다.
“어마나, 아빠가 시인 맞아요? 너무나 멋져~”
고등학교에 다니는 약삭빠른 딸은 내일 아침에 뜯어낼 용돈까지 계산하며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개비아범의 어깨에 매달려 주었다. 또 내심 놀란 것도 사실이었다. 자기 방으로 돌아간 딸은 높은 배를 위로 불쑥 올리고 숨을 들이셨다 내쉬었다 하는 엄마를 보고 말했다.
“아빠가 인터넷 시인이라고 사람들이 난리야.”
개비엄마는 뚱뚱한 몸을 옆으로 돌리며 멀끔한 시선으로 물었다.
“시인? 시인이면 한 달에 얼마나 돈을 번대?”
사실 개비아범은 시인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고 봐야한다. 조금 전에 딸이 본 글만해도 무척 발전한 것이었다. 남인수가 부른 청춘소야곡이라는 노래가사를 변조했는데, 이제는 그 변조가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까지 발전한 것이다. 원래의 노래가사는 이렇다.
헤어지면 보고 싶고
만나보면 시들하고
못난 건 이내 청춘
믿는다 믿어라 변치말자
누가 먼저 말했던가,
아아, 생각하면 생각수록
못 생긴 내 청춘.
꼬리글을 달면 꼭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개비아범은 카페에서 인기를 끌었다. 가금 개인적으로 메일이 날아오기도 했는데, 모두가 팬이라고 자칭하는 여성들이었다.
헤헤, 팬이란 별 것도 아니구나...... 이렇게 생각한 개비아범이었다. 근래에 개비아범을 쫓아다니는 자칭 극성팬이라는 여자가 있었다.
오징어 뒷다리,
그 여자의 닉네임이 오징어 뒷다리라는 것을 본 개비아범은 씩 웃었다.
“오징어 앞다리면 어때서?”하고 중얼거리며 실실 웃는 개비아범은 그 여자가 보내온 메일을 열어보았다. 무척 발랄한 인상의 메일이었다.
“저는 딸 아이 하나를 데리고 사는 사십 후반의 아줌마랍니다. 그렇다고 쭈글쭈글한 여자는 아닙니다. 나이는 그렇게 먹어도 밖에 나가면 저도 짱이에요. 몸매도 끝내주고 얼굴도 팽팽해요. 제 딸하고 다니면 제가 큰 언니 되냐고 사람들이 묻거든요. 호호, 님의 시를 보러 이 카페에 옵니다. 보석처럼 영롱한 글을 자주 올려주세요.”
그 여자는 개비아범이라는 닉네임을 다른 것으로 바꾸자고 카페게시판에 공개적으로 글을 올렸었다. 다른 회원들은 개비아범이라는 닉네임이 너무도 후지다며 오징어뒷다리의 제의에 모두 찬성한 것이다. 그러자 오징어뒷다리는 자기가 직접 닉네임을 지어주겠다며 나서더니 “중세시인”이라는 닉네임을 그럴듯한 설명까지 해가면서 붙였던 것이다.
“중세에는 높은 성벽 아래서 노래를 부르던 음유시인이 있었답니다. 상상만 해도 가슴 설레죠? 망토를 길게 늘어뜨리고 달이 환한 밤에 시인이 노래를 부르면 저는 창가에 앉아 밤새도록 시인의 가슴만 생각하며 잠을 못 이룰 것입니다. 찬성하시면 꼬리글을 많이많이 부탁 합니다.”
그러자마자 박수치는 소리가 꼬리글로 쫙 달렸다. 이렇게 낙착된 중세시인이라는 개비아범의 닉네임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카페의 시샵이 메일을 보내왔다. 이번에 정기모임을 하는데 회원들이 “중세시인”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니 꼭 참석해 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개비아범도 은근히 참석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왜냐하면 카페에서 열렬히 자기를 쫓아다니는 오징어뒷다리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호호호, 중세시인님...... 오늘 올리신 글 때문에 잠을 못 이루겠어요.”하며 노골적으로 개비아범에게 은근한 정을 표현하기도 했으니, 다른 회원들은 덩달아서 둘의 로맨스가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저처럼 하찮은 여자가 어떻게 중세시인님을 넘보겠어요? 그렇지만 데이트를 한번만 했으면 하는 소망은 있답니다.”하고 대답하는 오징어뒷다리였다.
“로맨스그레이...... 너무도 멋지지 않으세요? 아...... 선택받고 싶어라.”하며 다른 회원들이 연속적인 꼬리글을 달기도 했다.
하여튼 인사성 밝은 개비아범의 인기는 날로 높아만 갔으며 하루라도 안 보이면 회원들은 궁금하다고 안부를 물어왔다.
로맨스그레이...... 그 말이 뭔 소리인가 해서 아들에게 물었더니, 중년을 넘어선 나이에 연애하는 것이라고......
개비아범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레이로맨스라...... 흠흠, 아니다. 로맨스그레이라고 했지? 자꾸 말의 앞뒤가 바뀌네.”
2.
개비아범은 옷장을 뒤지며 마땅한 외출복을 찾았다. 오래전에 산 곤색 춘추복이 딱 한 벌 있었다. 봄가을에 날아오는 결혼청첩장을 받으면 겨우 꺼내 입고 나가는 예복이라고 할까, 하여튼 십년 가까운 세월을 이 양복 하나로 버티며 주변의 경조사에 참석했다. 양복이야 그럭저럭 입는다고 해도 넥타이가 문제였다. 넥타이도 십년 가까이 옷장과 개비아범의 목을 오갔으니, 그 색상이 바란 것이다. 이 넥타이 저 넥타이를 목에 걸어보는데 딸이 방에 들어서며 조그만 상자를 내밀었다.
“아빠, 오늘 누구 결혼식에 가신다고 했죠? 내가 넥타이를 하나 사왔어요. 삼 만원 자리야.”
사실 어제에 저녁을 먹으며 마누라에게 오늘 결혼식이 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 말을 옆에서 듣던 딸이 빨간색 장미무늬가 박혀있는 넥타이를 사왔으니 참 기특한 일이다. 개비아범은 삼만 원을 주고 샀다는 넥타이를 흡족한 얼굴로 목에 메었지만 속으로는 갸웃했다.
“삼만 원이라고 공갈치는군..... 쯧, 내가 모를 줄 알고? 만원 자리를 삼만 원으로 둔갑시키다니......”
그러나 넥타이 때문에 고민하던 순간에 쏙 빼어 맞추듯 가져온 넥타이인 것이다. 개비아범은 딸을 흘낏 보았다. 지 어멈과는 달리 여우같은 구석이 있는 딸이었다. 눈치가 말짱해서 용돈을 거나하게 뜯어낼 기회를 잘 포착하는 녀석이다.
“좋아. 기분이다. 내가 이만 원을 더 얹어서 오만 원을 줄게.”
딸은 입이 귀에 걸리며 손을 쑥 앞으로 내밀었다.
“헤헤, 역시 아빠는 멋져. 오만 원을 지금 줘요.”
오징어뒷다리가 궁금했다.
분명히 몸매가 짱이고 얼굴도 팽팽하다고 했으니 사십대 후반의 여자라도 아마 사십 초반으로 보일 것이다. 버스에서 내린 개비아범은 멀리 보이는 덕수궁 정문을 향하여 터벅터벅 걸었다. 아래를 보니 구두코에 먼지가 쌓인 것 같았다. 얼른 휴지를 꺼내어 구두코를 닦았다. 슬슬 만나기로 한 장소에 가까이 다가가니 열 명쯤 되는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서 서로 인사를 하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대여섯 명의 여자들 틈에 오징어뒷다리가 있을 것 같았다.
흠흠...... 어떤 여자일까? 혹시 저기 있는 여자가 아닐까?
사십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를 눈여겨보며 그들 앞에 섰다.
“저...... 중년을 아름답게라는 클럽의 모임이 맞죠?”
정중하게 묻는 개비아범을 보며 사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꾸벅 인사를 하며 물었다.
“네, 맞습니다. 닉네임이 어떻게 되시는지?”
사실 오징어뒷다리가 지어준 닉네임인 중세시인이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차마 시인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머쓱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개비아범입니다.”
사십 초반의 남자는 반갑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저는 시샵인 개똥벌레입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아...... 개똥벌레님이시군요.“
개똥벌레라는 말을 하는 순간에 개비아범은 터지려는 웃음을 감추려 일부러 인상을 찡그렸다. 시샵은 다른 사람을 향하여 큰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중세시인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러자 여자들이 생글생글 웃으며 가까이 다가오며 인사를 했다.
“저는 수선화에요. 시인님을 뵙게 되어서 반가워요.”
개비아범은 꾸벅 인사를 했다.
“저는 외로운 장미에요. 잘 아시죠? 오늘 시인님을 뵙게 되니 참 영광이에요.”
또 개비아범은 꾸벅 인사를 했다.
“어머나...... 시인님이시구나. 저도 인사드려요. 예쁜 멍멍이랍니다.”
또 굽실 인사를 하는 개비아범......
그러나 보고 싶었던 오징어뒷다리는 안 나온 것 같았다. 그렇다고 “오징어뒷다리님은 어디 계시나요?” 하고 물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눈치를 보며 새로 도착하는 여자를 눈여겨보며 기다렸다.
모두 자기를 시인이라고 부르니 별안간 진짜 시인이 된 기분이었다. 구체적으로 자기가 올린 글을 입에 올리면서 칭송하는 분위기였으니 “어이~”하며 시장통에서 사람을 부르던 습관이 쑥 들어가 버리고, 목소리마저 아래로 쫙 깔렸다.
“저...... 하찮은 글입니다. 부끄럽습니다. 허허허”
모두 모였지만 원하는 사람은 오지 않았다. 개비아범은 순식간에 시인으로 추앙받는 분위에서 진짜 시인이라는 여자 한 명을 소개받았다. 참으로 영광이었다. 옛날 노래가사로 시작한 개비아범의 시였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독창적인 중얼거림도 곧잘 시의 형식을 갖추어 올리는 편이니, 여류시인은 개비아범을 일컬어 놀라운 감수성의 소유자라는 칭찬을 퍼부었다. 여류시인의 닉네임은 캐더린이었다.
캐더린? 닉네임을 처음 보는 순간에 뭘 캐다가 만 것인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캐더린이라는 닉네임은 무슨 뜻이 있나요? 저는 캐더린이라는 닉네임을 보면 꼭 석탄을 캐다만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요.”
개비아범은 마주앉아 식사를 하며 물었다. 여류시인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시인님은 참 재미있으신 분이네요. 캐더린이란, 서양여자들의 이름인데, 사실은 캐더린여제라는 러시아제국여왕의 이름을 본 딴 것이에요. 무척 문학과 예술을 좋아했던 여왕이었거든요.”
“아, 그러시구나. 헤헤, 저는 엉뚱한 상상만 했군요. 죄송합니다.”
옆에 있던 시샵인 개똥벌레가 깜빡 했다며 말했다.
“오징어뒷다리님 아시죠?”
개비아범은 귀가 번쩍 띄었다.
“그 분이 오늘 참석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어젯밤에 메일을 보내왔어요. 따님이 한 분 계시는데, 별안간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더군요. 혼자 사시는 분이라 따님을 간호해야 되나 봐요. 특히 중세시인님께 미안하다는 말씀을 전해달라고 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개비아범은 실망했던 마음이 싹 가셨다. 그런 사정이 있었기에 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자기에게 특히 미안한 마음을 전해 달라고 했으니 어찌 보면 반갑기도 한 것이다. 혼자 사는 여자가 딸자식이 아프다고 하니 얼마나 속이 상할까......
별안간 측은함과 보고 싶다는 마음이 불길처럼 일었다.
“딸이 크게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흐려지는 표정을 감추듯 웃으며 개비아범은 말했다.
그날 개비아범은 여류시인과 단짝이 되어서 덕수궁뒷길을 걸었다. 봄날의 석양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밟으며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걷다가 여류시인은 길거리에서 파는 오징어를 한 마리 샀다. 같이 먹자고 내미는 오징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개비아범에게 여류시인은 말했다.
“오징어뒷다리부터 드실래요? 오징어를 먹을 줄 아는 사람은 눈깔하고 뒷다리부터 먹거든요.”
뚝 오징어뒷다리를 떼어주는 여류시인의 손길에 아픔을 왜 개비아범이 느꼈는지 모른다. 또 받아든 오징어뒷다리를 씹는 턱에 힘이 왜 빠지는지......
“쯧, 하필이면 오징어뒷다리는 또 뭐람?”
가슴팍 한가운데를 흐르는 찌르르한 전율을 느끼며 개비아범은 중얼거렸다.
다음 날,
개비아범의 딸인 미영이는 피시방에 앉아있었다. 아빠가 준 오만을 신나게 쓰고 다니는 중이었다.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미영이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빠가 나를 사랑하나 봐~”
엄마의 주민등록번호로 가입한 클럽 “중년을 아름답게”
오징어뒷다리에게 중세시인의 메일이 한통 와 있었다.
“어제는 무척 쓸쓸했습니다.
오징어뒷다리님께서 딸이 아파서 정기모임에 참석 못한다는, 또한 저에게 미안하다는 말씀을 전해달라는 전갈을 듣고는 제 가슴도 왜 아려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소개받은 여류시인인 캐더린님과 덕수궁뒷길을 걸으면서도 마음은 오징어뒷다리님께 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저도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있는데 참 귀엽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여운 녀석인데, 오징어뒷다리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 따님이 아프시다니...... 참 애석한 일입니다. 하루빨리 완쾌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꼭 얼굴을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넷시인 개비아범
인터넷 시인 개비아범
1.
“얘, 그레이 로맨스가 뭐냐?”
개비아범은 마주앉아 밥을 먹고 있는 개비에게 슬쩍 물었다. 원래 아들의 이름이 갑(甲)인데 사람들은 자꾸 개비라고 불렀고, 그러다보니 갑이의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개비아범이라고 시장통에서 불렸다. 입 속에 밥을 가득 넣고 우물우물하던 개비는 멀뚱히 아버지를 쳐다보더니 갸웃하며 되물었다.
“혹시 로맨스그레이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에요?”
개비아범은 큰 눈알을 히뜩 위로 돌리더니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응? 로맨스그레인가? 말의 앞뒤가 바뀌었나?”
개비는 피식 웃더니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왜 물어보세요? 로맨스그레이는 중년을 넘어선 나이에 연애한다는 뜻이에요.”
개비아범은 험험 헛기침을 하고는 얼른 고개를 돌리며 숭늉을 마셨다. 은근히 민망한 생각이 들었다.
평생을 마누라와 시장에서 건어물장사를 하던 개비아범은 요즈음에 인터넷카페에 정신이 빠져 있었다. 전에는 손님도 없는 이른 아침부터 가게 문을 열어놓고 멍하니 앉았었는데, 인터넷을 알고부터는 마누라를 가게에 먼저 내 보내낸 후에 컴퓨터를 끼고 몇 시간씩 앉아있었다. 또한 밤에도 마찬가지였다. 문학카페는 개비아범이 아무것도 모르고 마우스를 딸깍 거리다다 들어간 곳이었다.
개비아범은 시장입구에 있던 컴퓨터가게 주인이 꾸어간 돈을 주지 않자, 화가 난 김에 진열되어 있던 컴퓨터를 뺏어왔다. 아들 방에도 컴퓨터가 있었지만 도저히 돈을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한 개비아범은 뺏어온 컴퓨터를 안방에 들여다 놓고 씩씩댔다. 방구석에 컴퓨터를 놓고 아침저녁으로 대하자니 영 신경질이 나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본전이나 뽑아 보자고 개비에게 보채서 배운 컴퓨터였다.
“중년을 아름답게”
바로 카페의 이름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구경만 했는데......
영상과 음악을 올리는 것을 우연히 배우게 된 것이다. 여기저기서 복사를 해서 올리니깐 흡사 영화를 제작한 기분이었다. 돋보기를 코에 걸치고 매일 남의 글이나 복사하던 개비아범은 어느 날 글을 하나 영상에 써서 올렸다.
찾아갈 곳은 못 되더라 내 고향
버리고 떠난 고향이기에,
수박들 흐려진 선창가 전봇대에
기대서서 울적에
똑딱선 프로펠라 소리가
이 밤도 내 가슴을 울린다.
연분홍 비단실 꽃구름 같이
내 고향에 봄은 어린다.
글 / 개비아범
바로 남인수라는 가수가 불렀던 고향의 그림자라는 노래가사였다. 은은한 경음악과 함께 화면에 뜬 글을 본 사람들은 어디에선가 들어 보았던 노래가사 같았지만 오십 중반의 개비아범이 올린 영상글 밑에 꼬리글을 막 달았다.
“오모나...... 너무 가슴 찡한 글이에요.”
“너무나 슬퍼요. 잘 감상하고 갑니다. 또 좋은 글을 부탁해요.”
“시인이세요? 너무 멋져요.”
개비아범은 이렇게 기분이 째진 적이 없었다. 꼬리글을 단 사람들이 모두 여자였다. 닉네임을 보니깐, 수선화, 이쁜이, 외로운 장미, 등등 가끔 글을 올리는 여자들이었다.
여자들에게 칭송을 듣기는 생천 처음이었다. 그날은 하루 종일 자기가 올린 글을 보고 또 보며 흥얼흥얼 거렸다. 저녁때가 되니깐 꼬리글을 단 사람들이 열 명이 넘었던 것이다. 개비아범은 자신의 존재가 인터넷에서 통용되었다는 사실에 삼사 일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며칠 후에 또 밤새도록 꼼지락거리며 영상글을 올렸다.
부평 같은
내 신세가
너무도
기막혀서
창을 열고
밖을 보니
하늘은
저 편......
글 / 개비아범
고복수가 부른 타향살이라는 노래가사였다. 이번에는 그 곡의 1절이 아니라 2절을 올렸다. 개비아범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옛날 노래가사에 심취되어 갔던 것도 사실이었다. 구구절절 가슴을 치는 노래가사는 특히 2절이 좋았다. 또한 영상글 아래에 “글 / 개비아범”이라고 써서 달 적에는 흡사 자신이 시인처럼 느껴졌다.
이번에도 카페의 회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물론 노래가사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꼬리글을 달면 그 밑에 꼭 고맙다고 인사하는 개비아범의 예의에 감히 태클 거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도 님의 글을 보고 눈물이 났습니다.”
“아~ 정말 허무한 세월이군요. 저도 사십대 중반에 들어서니 괜히 슬퍼지기만.....”
개비아범은 신나서 히쭉 웃었다.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며 자는 아내를 측은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쯧, 이 여자는 도대체 감수성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찾아 볼 수 없으니...... 쯧쯧,”
그 후부터 개비아범은 진짜 시를 쓰려고 했다. 옛날에 막걸리 집에서 젓가락 장단에 맞추어 부르던 노래가사를 기억해 내고는, 얼기설기 그 노래가사를 엮어서 글을 만들었다. 어느 날, 개비엄마는 가게에서 장부책 뒷면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했다.
“도대체 이 양반이 미쳤나? 요즈음에 머리가 이상해졌어.”
혼자서 중얼중얼하며 깨알같이 개비아범이 쓴 글을 들여다보았다. 옛날 노래가사가 잔뜩 적혀있었다.
그대여 우지마라.
내가 있다.
여인의 길을
너는 지켜라.
물론 이 글은 남원의 애수라는 노래가사를 변조한 것이다.
그 진상을 밝히면 이렇다.
춘향아 우지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
그날 밤에 개비엄마는 바스락바스락 거리며 잠을 설치게 하는 개비아범을 피하여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의 방에 가서 잤다.
“얘야, 네 아빠가 왜 그런지 모르겠다. 요즈음에 들어서서 꼭 어린애 닮아가는 것 같다. 어떤 때는 혼자서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도 안하더라. 도대체 나이를 거꾸로 먹어가는 것인지......”
그 말을 들은 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안방으로 톡 뛰어 갔다. 아빠가 눈물까지 글썽인다는 말에 딸은 놀랐던 것이다. 안방 문을 연 순간에 딸은 방에 가득한 음악소리에 더욱 눈을 크게 떴다. 컴퓨터 모니터에는 슬픈 음악과 아울러 영상글이 위로 쭉쭉 올라가고 있었다.
이별 뒤, 그리움
재회는 또 이별
믿지 못할 청춘
영원한 사랑은 약속하지 말자.
생각하면 생각수록
믿지 못할 내 청춘.
글 / 개비아범
마지막에 개비아범이 썼다는 글이 올라오자 딸은 너무도 놀랐다. 매일 가계부나 들여다보고 전화요금과 전기요금이 너무 많이 나왔다는 둥, 도시가스요금이 비싸니깐 밖에 나갈 적에는 꼭 보일러 스위치를 끄고 나가라는 둥, 고리타분한 잔소리만 하던 아빠가 올린 영상글이 믿기지 않았다.
“이 글을 아빠가 쓰신 것 맞아요?”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딸을 옆눈으로 슬쩍 훔쳐본 개비아범은 어깨가 뻣뻣하다는 표정으로 목을 빙빙 돌리며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다른 사람이 달은 꼬리글을 보라는 듯 영상을 쭉 아래로 내렸다. 개비아범을 시인이라고 칭송하는 카페회원의 꼬리글이 열개나 달려 있었다.
“어마나, 아빠가 시인 맞아요? 너무나 멋져~”
고등학교에 다니는 약삭빠른 딸은 내일 아침에 뜯어낼 용돈까지 계산하며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개비아범의 어깨에 매달려 주었다. 또 내심 놀란 것도 사실이었다. 자기 방으로 돌아간 딸은 높은 배를 위로 불쑥 올리고 숨을 들이셨다 내쉬었다 하는 엄마를 보고 말했다.
“아빠가 인터넷 시인이라고 사람들이 난리야.”
개비엄마는 뚱뚱한 몸을 옆으로 돌리며 멀끔한 시선으로 물었다.
“시인? 시인이면 한 달에 얼마나 돈을 번대?”
사실 개비아범은 시인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고 봐야한다. 조금 전에 딸이 본 글만해도 무척 발전한 것이었다. 남인수가 부른 청춘소야곡이라는 노래가사를 변조했는데, 이제는 그 변조가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까지 발전한 것이다. 원래의 노래가사는 이렇다.
헤어지면 보고 싶고
만나보면 시들하고
못난 건 이내 청춘
믿는다 믿어라 변치말자
누가 먼저 말했던가,
아아, 생각하면 생각수록
못 생긴 내 청춘.
꼬리글을 달면 꼭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개비아범은 카페에서 인기를 끌었다. 가금 개인적으로 메일이 날아오기도 했는데, 모두가 팬이라고 자칭하는 여성들이었다.
헤헤, 팬이란 별 것도 아니구나...... 이렇게 생각한 개비아범이었다. 근래에 개비아범을 쫓아다니는 자칭 극성팬이라는 여자가 있었다.
오징어 뒷다리,
그 여자의 닉네임이 오징어 뒷다리라는 것을 본 개비아범은 씩 웃었다.
“오징어 앞다리면 어때서?”하고 중얼거리며 실실 웃는 개비아범은 그 여자가 보내온 메일을 열어보았다. 무척 발랄한 인상의 메일이었다.
“저는 딸 아이 하나를 데리고 사는 사십 후반의 아줌마랍니다. 그렇다고 쭈글쭈글한 여자는 아닙니다. 나이는 그렇게 먹어도 밖에 나가면 저도 짱이에요. 몸매도 끝내주고 얼굴도 팽팽해요. 제 딸하고 다니면 제가 큰 언니 되냐고 사람들이 묻거든요. 호호, 님의 시를 보러 이 카페에 옵니다. 보석처럼 영롱한 글을 자주 올려주세요.”
그 여자는 개비아범이라는 닉네임을 다른 것으로 바꾸자고 카페게시판에 공개적으로 글을 올렸었다. 다른 회원들은 개비아범이라는 닉네임이 너무도 후지다며 오징어뒷다리의 제의에 모두 찬성한 것이다. 그러자 오징어뒷다리는 자기가 직접 닉네임을 지어주겠다며 나서더니 “중세시인”이라는 닉네임을 그럴듯한 설명까지 해가면서 붙였던 것이다.
“중세에는 높은 성벽 아래서 노래를 부르던 음유시인이 있었답니다. 상상만 해도 가슴 설레죠? 망토를 길게 늘어뜨리고 달이 환한 밤에 시인이 노래를 부르면 저는 창가에 앉아 밤새도록 시인의 가슴만 생각하며 잠을 못 이룰 것입니다. 찬성하시면 꼬리글을 많이많이 부탁 합니다.”
그러자마자 박수치는 소리가 꼬리글로 쫙 달렸다. 이렇게 낙착된 중세시인이라는 개비아범의 닉네임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카페의 시샵이 메일을 보내왔다. 이번에 정기모임을 하는데 회원들이 “중세시인”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하니 꼭 참석해 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개비아범도 은근히 참석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왜냐하면 카페에서 열렬히 자기를 쫓아다니는 오징어뒷다리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호호호, 중세시인님...... 오늘 올리신 글 때문에 잠을 못 이루겠어요.”하며 노골적으로 개비아범에게 은근한 정을 표현하기도 했으니, 다른 회원들은 덩달아서 둘의 로맨스가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저처럼 하찮은 여자가 어떻게 중세시인님을 넘보겠어요? 그렇지만 데이트를 한번만 했으면 하는 소망은 있답니다.”하고 대답하는 오징어뒷다리였다.
“로맨스그레이...... 너무도 멋지지 않으세요? 아...... 선택받고 싶어라.”하며 다른 회원들이 연속적인 꼬리글을 달기도 했다.
하여튼 인사성 밝은 개비아범의 인기는 날로 높아만 갔으며 하루라도 안 보이면 회원들은 궁금하다고 안부를 물어왔다.
로맨스그레이...... 그 말이 뭔 소리인가 해서 아들에게 물었더니, 중년을 넘어선 나이에 연애하는 것이라고......
개비아범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레이로맨스라...... 흠흠, 아니다. 로맨스그레이라고 했지? 자꾸 말의 앞뒤가 바뀌네.”
2.
개비아범은 옷장을 뒤지며 마땅한 외출복을 찾았다. 오래전에 산 곤색 춘추복이 딱 한 벌 있었다. 봄가을에 날아오는 결혼청첩장을 받으면 겨우 꺼내 입고 나가는 예복이라고 할까, 하여튼 십년 가까운 세월을 이 양복 하나로 버티며 주변의 경조사에 참석했다. 양복이야 그럭저럭 입는다고 해도 넥타이가 문제였다. 넥타이도 십년 가까이 옷장과 개비아범의 목을 오갔으니, 그 색상이 바란 것이다. 이 넥타이 저 넥타이를 목에 걸어보는데 딸이 방에 들어서며 조그만 상자를 내밀었다.
“아빠, 오늘 누구 결혼식에 가신다고 했죠? 내가 넥타이를 하나 사왔어요. 삼 만원 자리야.”
사실 어제에 저녁을 먹으며 마누라에게 오늘 결혼식이 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그 말을 옆에서 듣던 딸이 빨간색 장미무늬가 박혀있는 넥타이를 사왔으니 참 기특한 일이다. 개비아범은 삼만 원을 주고 샀다는 넥타이를 흡족한 얼굴로 목에 메었지만 속으로는 갸웃했다.
“삼만 원이라고 공갈치는군..... 쯧, 내가 모를 줄 알고? 만원 자리를 삼만 원으로 둔갑시키다니......”
그러나 넥타이 때문에 고민하던 순간에 쏙 빼어 맞추듯 가져온 넥타이인 것이다. 개비아범은 딸을 흘낏 보았다. 지 어멈과는 달리 여우같은 구석이 있는 딸이었다. 눈치가 말짱해서 용돈을 거나하게 뜯어낼 기회를 잘 포착하는 녀석이다.
“좋아. 기분이다. 내가 이만 원을 더 얹어서 오만 원을 줄게.”
딸은 입이 귀에 걸리며 손을 쑥 앞으로 내밀었다.
“헤헤, 역시 아빠는 멋져. 오만 원을 지금 줘요.”
오징어뒷다리가 궁금했다.
분명히 몸매가 짱이고 얼굴도 팽팽하다고 했으니 사십대 후반의 여자라도 아마 사십 초반으로 보일 것이다. 버스에서 내린 개비아범은 멀리 보이는 덕수궁 정문을 향하여 터벅터벅 걸었다. 아래를 보니 구두코에 먼지가 쌓인 것 같았다. 얼른 휴지를 꺼내어 구두코를 닦았다. 슬슬 만나기로 한 장소에 가까이 다가가니 열 명쯤 되는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서 서로 인사를 하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대여섯 명의 여자들 틈에 오징어뒷다리가 있을 것 같았다.
흠흠...... 어떤 여자일까? 혹시 저기 있는 여자가 아닐까?
사십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를 눈여겨보며 그들 앞에 섰다.
“저...... 중년을 아름답게라는 클럽의 모임이 맞죠?”
정중하게 묻는 개비아범을 보며 사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꾸벅 인사를 하며 물었다.
“네, 맞습니다. 닉네임이 어떻게 되시는지?”
사실 오징어뒷다리가 지어준 닉네임인 중세시인이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차마 시인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머쓱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개비아범입니다.”
사십 초반의 남자는 반갑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저는 시샵인 개똥벌레입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아...... 개똥벌레님이시군요.“
개똥벌레라는 말을 하는 순간에 개비아범은 터지려는 웃음을 감추려 일부러 인상을 찡그렸다. 시샵은 다른 사람을 향하여 큰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중세시인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러자 여자들이 생글생글 웃으며 가까이 다가오며 인사를 했다.
“저는 수선화에요. 시인님을 뵙게 되어서 반가워요.”
개비아범은 꾸벅 인사를 했다.
“저는 외로운 장미에요. 잘 아시죠? 오늘 시인님을 뵙게 되니 참 영광이에요.”
또 개비아범은 꾸벅 인사를 했다.
“어머나...... 시인님이시구나. 저도 인사드려요. 예쁜 멍멍이랍니다.”
또 굽실 인사를 하는 개비아범......
그러나 보고 싶었던 오징어뒷다리는 안 나온 것 같았다. 그렇다고 “오징어뒷다리님은 어디 계시나요?” 하고 물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눈치를 보며 새로 도착하는 여자를 눈여겨보며 기다렸다.
모두 자기를 시인이라고 부르니 별안간 진짜 시인이 된 기분이었다. 구체적으로 자기가 올린 글을 입에 올리면서 칭송하는 분위기였으니 “어이~”하며 시장통에서 사람을 부르던 습관이 쑥 들어가 버리고, 목소리마저 아래로 쫙 깔렸다.
“저...... 하찮은 글입니다. 부끄럽습니다. 허허허”
모두 모였지만 원하는 사람은 오지 않았다. 개비아범은 순식간에 시인으로 추앙받는 분위에서 진짜 시인이라는 여자 한 명을 소개받았다. 참으로 영광이었다. 옛날 노래가사로 시작한 개비아범의 시였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독창적인 중얼거림도 곧잘 시의 형식을 갖추어 올리는 편이니, 여류시인은 개비아범을 일컬어 놀라운 감수성의 소유자라는 칭찬을 퍼부었다. 여류시인의 닉네임은 캐더린이었다.
캐더린? 닉네임을 처음 보는 순간에 뭘 캐다가 만 것인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캐더린이라는 닉네임은 무슨 뜻이 있나요? 저는 캐더린이라는 닉네임을 보면 꼭 석탄을 캐다만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요.”
개비아범은 마주앉아 식사를 하며 물었다. 여류시인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시인님은 참 재미있으신 분이네요. 캐더린이란, 서양여자들의 이름인데, 사실은 캐더린여제라는 러시아제국여왕의 이름을 본 딴 것이에요. 무척 문학과 예술을 좋아했던 여왕이었거든요.”
“아, 그러시구나. 헤헤, 저는 엉뚱한 상상만 했군요. 죄송합니다.”
옆에 있던 시샵인 개똥벌레가 깜빡 했다며 말했다.
“오징어뒷다리님 아시죠?”
개비아범은 귀가 번쩍 띄었다.
“그 분이 오늘 참석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어젯밤에 메일을 보내왔어요. 따님이 한 분 계시는데, 별안간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더군요. 혼자 사시는 분이라 따님을 간호해야 되나 봐요. 특히 중세시인님께 미안하다는 말씀을 전해달라고 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개비아범은 실망했던 마음이 싹 가셨다. 그런 사정이 있었기에 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자기에게 특히 미안한 마음을 전해 달라고 했으니 어찌 보면 반갑기도 한 것이다. 혼자 사는 여자가 딸자식이 아프다고 하니 얼마나 속이 상할까......
별안간 측은함과 보고 싶다는 마음이 불길처럼 일었다.
“딸이 크게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흐려지는 표정을 감추듯 웃으며 개비아범은 말했다.
그날 개비아범은 여류시인과 단짝이 되어서 덕수궁뒷길을 걸었다. 봄날의 석양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밟으며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걷다가 여류시인은 길거리에서 파는 오징어를 한 마리 샀다. 같이 먹자고 내미는 오징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개비아범에게 여류시인은 말했다.
“오징어뒷다리부터 드실래요? 오징어를 먹을 줄 아는 사람은 눈깔하고 뒷다리부터 먹거든요.”
뚝 오징어뒷다리를 떼어주는 여류시인의 손길에 아픔을 왜 개비아범이 느꼈는지 모른다. 또 받아든 오징어뒷다리를 씹는 턱에 힘이 왜 빠지는지......
“쯧, 하필이면 오징어뒷다리는 또 뭐람?”
가슴팍 한가운데를 흐르는 찌르르한 전율을 느끼며 개비아범은 중얼거렸다.
다음 날,
개비아범의 딸인 미영이는 피시방에 앉아있었다. 아빠가 준 오만을 신나게 쓰고 다니는 중이었다.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미영이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빠가 나를 사랑하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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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뒷다리에게 중세시인의 메일이 한통 와 있었다.
“어제는 무척 쓸쓸했습니다.
오징어뒷다리님께서 딸이 아파서 정기모임에 참석 못한다는, 또한 저에게 미안하다는 말씀을 전해달라는 전갈을 듣고는 제 가슴도 왜 아려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소개받은 여류시인인 캐더린님과 덕수궁뒷길을 걸으면서도 마음은 오징어뒷다리님께 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저도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있는데 참 귀엽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귀여운 녀석인데, 오징어뒷다리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 따님이 아프시다니...... 참 애석한 일입니다. 하루빨리 완쾌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꼭 얼굴을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미영이는 배꼽을 쥐며 웃었다.
“어휴~ 아빠가 진짜 시인 같아. 다음 정기모임 때에는 엄마를 모시고 나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