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천(李靑天)은 1888년 2월 25일에 서울 삼청동에서 지재선(池在善)의 아들로 출생하였고, 아명(兒名)은 지대형(池大亨)·본명(本名)은 지석규(池錫奎)·호(號)를 백산(白山)이라 했다. 1895년에 서당에 들어가 한문공부를 시작했고 이듬해에는 교동소학교(校洞小學敎)에 편입하였다. 소학교를 졸업한 지 5년 뒤에는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고 YMCA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당시의 계몽운동 분위기에 자극받아 서구지향적 취향을 가졌던 이청천은 보수적이면서 완고한 기풍을 벗어나지 못했던 모친의 의사와 어긋나서 결국 어머니의 거센 반대로 스스로 배재학당을 자퇴하였다. 1907년에는 재종숙인 지석영(池錫永)의 추천으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大韓帝國陸軍武官學校)에 입학하여 군인으로서의 길을 걷기 위해 군사교육을 받았다. 육군무관학교는 초창기에는 군사학 이외에도 외국어나 수학 등 신학문을 아주 높은 수준으로 가르쳤으나 이청천이 재학할 무렵에는 교육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그것은 1905년에 을사늑약(乙巳勒約)이 강요된 다음에 이른바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가 설치되면서 여러 부문에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이 자행되었고, 1907년 초에는 벌써 군대예산이 크게 감액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해 8월에는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 해산되면서 군부는 당연히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고, 육군무관학교 생도들의 정원도 점차 축소되었다. 입학정원도 초창기 2백명에서 이 무렵에는 50명으로 줄어들었다.
이청천이 수학할 당시의 육군무관학교가 장교 양성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어느 정도 수행했는지는 모르지만, 군대가 없는 장교 양성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일제(日帝)의 책동에 의해 1909년 7월에는 육군무관학교가 폐교되면서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궁여지책으로 육군무관학교 재학생들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유학시키기로 하는 방침을 세웠다.
그리하여 이청천은 일정한 시험을 거친 후 1909년 3월에는 동기와 후배 등 43명과 함께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그해 9월에는 일본 도쿄에 있는 육군중앙유년학교 예과 3학년에 편입했다. 이청천이 일본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있을 때인 1910년 8월 29일에 경술병합늑약(庚戌倂合勒約)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한반도는 일본의 새로운 영토로 편입되었다. 조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그 당시 일본 육사 예비과정에 재학하고 있던 한국인 생도들 사이에는 상당한 동요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생도들은 요코하마에 모여 조국이 없어진 마당에 공부를 계속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즉시 포기하고 귀국해야 할 것인가 고민하면서 나라의 멸망에 비분강개(悲憤慷慨)하고 자신들의 거취를 토론했다. 그 가운데 연장자인 이청천은 이왕 군사교육을 받으러 일본에 온 것이니 배울 것은 다 배우고 장교가 되는 날 일제히 군복을 벗어던지고 조국 광복을 위해 총궐기하자고 제안했다. 이같은 제안을 받아들여 생도들은 일본에서의 군사교육이 끝나면 훗날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에 헌신하여 조국 광복을 이룩하기로 맹세했다. 그러나 생도들 가운데 이러한 맹세를 지킨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1912년 5월에 육군유년학교를 졸업하고 12월에 정식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한 이청천은 1914년 5월에 26기로 졸업하고 소위(少尉)로 임관되었다. 일본군 제10사단에서 근무하다가 1915년 초에 일본군이 중국 청도(靑島)에 출병해서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군과 교전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여기에 참전하여 전공(戰功)을 세우고 중위로 진급하였다. 1919년 3월에 거족적인 3·1민족운동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접하자 큰 충격을 받은 이청천은 자신의 진로에 대해 크게 번민과 갈등을 겪는다. 결국 순탄한 삶이 보장된 일본군 장교라는 엘리트 코스를 버리고 험난한 정의의 길을 걷기로 결정한 그는 1919년 5월에 병을 핑계삼아 국내로 돌아오는데 성공하였다. 국내로 돌아와서 망명의 기회를 노리던 그는 일본 육사 3년 선배인 김광서(金光瑞)와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 대열에 뛰어들었다.
이청천은 1920년 5월에 남만주의 유하현(柳河縣) 합니하(哈泥河)에 있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교관으로 발탁되어 독립군 간부 양성에 진력하였다. 그 해 10월에는 일제(日帝)의 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領部)가 소위 간도의 반일세력을 모두 토벌하겠다는 작전계획인 '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域不逞鮮人剿討計劃)'을 작성하여 대규모 병력을 중국 동북지방에 대거 침투시켰다. 이 과정에서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등 독립군들은 화룡현(和龍縣) 청산리(靑山里) 일대에서 일본군과 10여회의 전투를 벌여 2천여명의 적병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리고 만주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이 때에 이청천은 신흥무관학교의 재학생과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전투병력을 거느리고 백두산 근처로 이동했다.
그 무렵 소련 정부가 애초부터 약소민족의 민족해방운동을 크게 지원하겠다고 선전하고 러시아 영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간부들이 독립군 부대를 연해주로 이동하도록 이끌자 1921년 1월에는 독립군 장병들과 함께 연해주 이만으로 건너갔다. 3월에는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의 참모부원으로 선출되었고, 4월에는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의 군사고문으로 추대되어 알렉세예프스크로 이동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이청천 휘하의 병력이 홍범도(洪範圖)·안무(安武) 등의 부대와 함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의해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의 제3연대로 편성되었다. 러시아에 들어온 이후 이청천은 항일전(抗日戰)의 상승장군(常勝將軍) 홍범도와 아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으며, 이때는 코민테른과 러시아 적군(赤軍) 등에 대해서 우호적 태도를 보였다.
이청천의 이같은 유연한 자세는 무장항일투쟁 역량의 보존에 큰 보탬이 되었다. 그 해 6월 28일에 발생한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의 와중에 최진동(崔振東)과 허근(許根) 등의 부대는 큰 피해를 입은 반면, 그가 인솔하는 부대는 거의 피해가 없었다. 1921년 8월 자유시사번 이후 한국인 무장세력은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소비에트 적군(赤軍) 제5군단 직속 한국인 여단으로 개편되는데, 이때 그는 예편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해 말에 러시아 원동(遠東)정부의 원조로 이르쿠츠크에 설립된 고려혁명군관학교(高麗革命軍官學校) 교장에 취임하였으나, 민족주의 교육방침 문제로 원동정부 및 코민테른 세력과 대립하다가 체포되어 1922년 4월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7월경 임시정부의 항의와 민족 지도자들의 구명운동 결과 가까스로 풀려나게 되고 이해 말경 그는 러시아에서 만주로 돌아왔다.
1925년 5월에는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의 군무위원으로 선임되고, 9월 초부터 이듬해 2월 말까지는 코민테른과 한명세(韓明世)·이동휘(李東揮) 등 러시아 주재 한국인 민족운동 지도자들에게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신숙(申肅)·김규식(金奎植)·원세훈(元世勳)과 더불어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하게 된다. 이들은 코민테른의 동양부장 대리인 파인불크를 만나서 협의한 결과 상당한 지원 약속을 받아냈지만, 1924년 초 독일의 사회주의 혁명이 실패하고 레닌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별 성과없이 실패했다고 한다.
1925년에는 정의부(正義府)의 군사위원장과 의용군 사령관을 겸했고, 당시 만주와 중국 본토에 산재해 있던 여러 독립운동 단체를 하나로 통합하여 결집된 역량을 바탕으로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하자는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을 적극 지지하여 정의부(正義府)·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 등 삼부(三府)의 단합을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1928년에는 삼부가 내부분열로 인해 혁신의회(革新議會)와 국민부(國民府)로 분립되자 좌우합작에 의한 민족유일당을 조직하고자 했던 혁신의회에 가담해 군사위원에 선임되었다. 혁신의회의 활동이 지지부진하여 해체된 뒤 1929년에 신민부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가 결성되었는데 1930년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의 영웅 김좌진(金佐鎭)이 공산주의자 박상실(朴尙實)에게 암살당한 이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흡수되었다. 한편, 1929년 5월 길림성(吉林省)에서는 신민부의 민정위원회 측과 참의부의 심용준(沈龍俊) 계열, 정의부의 현익철(玄益哲)·고할신(高豁信) 계열이 군정위원회 성격을 띤 국민부(國民府)를 결성했는데 이들은 이당치국(以黨治國), 이당공작(以黨工作)의 원칙에 입각하여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과 무장세력으로 조선혁명군(朝鮮革命黨)을 따로 두었다. 이리하여 1930년대 초반 항일독립운동 진영은 북만주에서는 한족총연합회·한국독립당·한국독립군으로, 남만주에서는 국민부·조선혁명당·조선혁명군으로 정리된 것이다.
1930년 1월 북만주의 위하현(韋河縣)에서 홍진(洪震)·신숙(申肅)·이장녕(李章寧) 등에 의해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결성되자 여기에 가담하여 군사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이어서 1931년 9월에 만주사변(滿洲事變)이 발발하자 동당(同黨)의 군사조직인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을 편성하고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본격적인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에 나섰다. 이청천이 이끄는 한국독립군은 중국호로군(中國護路軍)·길림구국군(吉林救國軍) 등 중국의 반일의용군 세력과 연합작전을 펼쳐 1932년 쌍성보전투(雙城堡戰鬪), 1933년 경박호전투(鏡泊湖戰鬪), 사도하자전투(四道河子戰鬪), 동경성전투(東京城戰鬪) 등을 치르며 일본군 및 만주국군에 심대한 타격을 가했다. 특히 1933년 6월 대전자령전투(大甸子嶺戰鬪)에서는 일본군 1천 3백여명을 살상하고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1933년 9월에는 오의성(吳義成)이 지휘하는 중국군이 사전 약속을 어기고 한국독립군을 지원하지 않아 동녕현전투(東寧縣戰鬪)에서 패배하고 결국 한중양군(韓中兩軍)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게 되어 한국독립군 병사들은 중국군의 포위를 받아 강제로 무장해제를 당하고 이청천을 비롯해 조경한(趙擎韓)·오광선(吳光鮮) 등 독립군 간부들이 구금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임시정부에서는 중국 국민당 정권의 지원을 받아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국인특별반을 설립하게 되자 이청천은 한국독립군 장병 40여명을 거느리고 중국 관내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청천은 한국인특별반의 총책임자가 되어 한국인 청년 90명의 군사훈련을 담당했다. 1934년에는 임시정부를 이끌고 있던 김구(金九)와 갈등을 겪고 김구와 대립관계에 있던 김원봉(金元鳳) 등과 합세하여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창당하였다. 그러나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의열단(義烈團) 계열이 당권을 장악하고 독주하자 이에 불만을 갖고 3년 뒤에 민족혁명당에서 탈당하였다. 1937년 8월에는 임시정부의 여당인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가세하여 '한국 광복운동 단체 협의회'를 설립하고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였다. 이듬해에는 임시정부의 군사학편수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1939년 10월에는 임시정부의 군무위원으로 선출된 뒤 다시 군무부장을 겸하게 되었다. 1937년 9월에 중일전쟁(中日戰爭)이 발발하면서 임시정부에서는 군사부문의 활동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었는데, 대일항전(對日抗戰) 경험이 풍부한 이청천이 그 공백을 메울 수 있었다.
1940년 9월 17일에는 중국 중경(重慶)에서 임시정부의 군대인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이 창군되는데, 이청천은 이때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해방 직후까지 줄곧 광복군을 지도하여 독립운동에 매진하게 된다. 물론 광복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실질적인 전투를 벌이지 못하였지만 이 군대가 중국이나 미국, 영국 등 열강에 미친 정치적 심리적 선전효과는 매우 컸다. 즉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과 영국 등 열강이 한국 국민들을 일본의 침략에 의한 식민지 노예로 인식하고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게 되는 점도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비롯한 기타 독립운동 진영의 줄기찬 투쟁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중국 관내지역에서 활동한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중국 국민당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중국 측의 상당한 관심사가 될 수 있었다.
해방 이후 광복군이 연합군 사령부에 의해 정식 교전단체로 인정받지 못해 1947년 4월 말에 이청천은 뒤늦게 개인 자격으로 조국에 돌아왔다. 일본의 군사전술을 공부해 무력독립운동(武力獨立運動)에서 활용하겠다는 일념으로 일본의 군복을 벗고 만주에 망명한 지 27년만의 귀국이었다. 그 해 9월에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이라는 정치단체가 조직되자 그 단장이 되어 반공운동(反共運動)을 주도하였고 1948년에는 제헌국회 의원에 당선되었으며 계속해서 국회 외무위원장 및 국방위원장, 무임소 장관, 민주국민당 최고대표위원, 대한적십자사 중앙집행위원, 대한군인유가족회 회장, 반공통일연맹 최고위원, 자유당 원내 대표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정치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1957년 1월 15일 노환으로 병세가 깊어져 만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 광복을 위해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에 진력한 그의 공로가 인정되어 1962년에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을 총지휘한 독립군의 정신적 지주 이청천(李靑天
이청천(李靑天)은 1888년 2월 25일에 서울 삼청동에서 지재선(池在善)의 아들로 출생하였고, 아명(兒名)은 지대형(池大亨)·본명(本名)은 지석규(池錫奎)·호(號)를 백산(白山)이라 했다. 1895년에 서당에 들어가 한문공부를 시작했고 이듬해에는 교동소학교(校洞小學敎)에 편입하였다. 소학교를 졸업한 지 5년 뒤에는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고 YMCA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당시의 계몽운동 분위기에 자극받아 서구지향적 취향을 가졌던 이청천은 보수적이면서 완고한 기풍을 벗어나지 못했던 모친의 의사와 어긋나서 결국 어머니의 거센 반대로 스스로 배재학당을 자퇴하였다. 1907년에는 재종숙인 지석영(池錫永)의 추천으로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大韓帝國陸軍武官學校)에 입학하여 군인으로서의 길을 걷기 위해 군사교육을 받았다. 육군무관학교는 초창기에는 군사학 이외에도 외국어나 수학 등 신학문을 아주 높은 수준으로 가르쳤으나 이청천이 재학할 무렵에는 교육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그것은 1905년에 을사늑약(乙巳勒約)이 강요된 다음에 이른바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가 설치되면서 여러 부문에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이 자행되었고, 1907년 초에는 벌써 군대예산이 크게 감액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해 8월에는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 해산되면서 군부는 당연히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고, 육군무관학교 생도들의 정원도 점차 축소되었다. 입학정원도 초창기 2백명에서 이 무렵에는 50명으로 줄어들었다.
이청천이 수학할 당시의 육군무관학교가 장교 양성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어느 정도 수행했는지는 모르지만, 군대가 없는 장교 양성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일제(日帝)의 책동에 의해 1909년 7월에는 육군무관학교가 폐교되면서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궁여지책으로 육군무관학교 재학생들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유학시키기로 하는 방침을 세웠다.
그리하여 이청천은 일정한 시험을 거친 후 1909년 3월에는 동기와 후배 등 43명과 함께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그해 9월에는 일본 도쿄에 있는 육군중앙유년학교 예과 3학년에 편입했다. 이청천이 일본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있을 때인 1910년 8월 29일에 경술병합늑약(庚戌倂合勒約)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한반도는 일본의 새로운 영토로 편입되었다. 조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그 당시 일본 육사 예비과정에 재학하고 있던 한국인 생도들 사이에는 상당한 동요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생도들은 요코하마에 모여 조국이 없어진 마당에 공부를 계속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즉시 포기하고 귀국해야 할 것인가 고민하면서 나라의 멸망에 비분강개(悲憤慷慨)하고 자신들의 거취를 토론했다. 그 가운데 연장자인 이청천은 이왕 군사교육을 받으러 일본에 온 것이니 배울 것은 다 배우고 장교가 되는 날 일제히 군복을 벗어던지고 조국 광복을 위해 총궐기하자고 제안했다. 이같은 제안을 받아들여 생도들은 일본에서의 군사교육이 끝나면 훗날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에 헌신하여 조국 광복을 이룩하기로 맹세했다. 그러나 생도들 가운데 이러한 맹세를 지킨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1912년 5월에 육군유년학교를 졸업하고 12월에 정식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한 이청천은 1914년 5월에 26기로 졸업하고 소위(少尉)로 임관되었다. 일본군 제10사단에서 근무하다가 1915년 초에 일본군이 중국 청도(靑島)에 출병해서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군과 교전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여기에 참전하여 전공(戰功)을 세우고 중위로 진급하였다. 1919년 3월에 거족적인 3·1민족운동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접하자 큰 충격을 받은 이청천은 자신의 진로에 대해 크게 번민과 갈등을 겪는다. 결국 순탄한 삶이 보장된 일본군 장교라는 엘리트 코스를 버리고 험난한 정의의 길을 걷기로 결정한 그는 1919년 5월에 병을 핑계삼아 국내로 돌아오는데 성공하였다. 국내로 돌아와서 망명의 기회를 노리던 그는 일본 육사 3년 선배인 김광서(金光瑞)와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 대열에 뛰어들었다.
이청천은 1920년 5월에 남만주의 유하현(柳河縣) 합니하(哈泥河)에 있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교관으로 발탁되어 독립군 간부 양성에 진력하였다. 그 해 10월에는 일제(日帝)의 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領部)가 소위 간도의 반일세력을 모두 토벌하겠다는 작전계획인 '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域不逞鮮人剿討計劃)'을 작성하여 대규모 병력을 중국 동북지방에 대거 침투시켰다. 이 과정에서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등 독립군들은 화룡현(和龍縣) 청산리(靑山里) 일대에서 일본군과 10여회의 전투를 벌여 2천여명의 적병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리고 만주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이 때에 이청천은 신흥무관학교의 재학생과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전투병력을 거느리고 백두산 근처로 이동했다.
그 무렵 소련 정부가 애초부터 약소민족의 민족해방운동을 크게 지원하겠다고 선전하고 러시아 영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간부들이 독립군 부대를 연해주로 이동하도록 이끌자 1921년 1월에는 독립군 장병들과 함께 연해주 이만으로 건너갔다. 3월에는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의 참모부원으로 선출되었고, 4월에는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의 군사고문으로 추대되어 알렉세예프스크로 이동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이청천 휘하의 병력이 홍범도(洪範圖)·안무(安武) 등의 부대와 함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의해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의 제3연대로 편성되었다. 러시아에 들어온 이후 이청천은 항일전(抗日戰)의 상승장군(常勝將軍) 홍범도와 아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으며, 이때는 코민테른과 러시아 적군(赤軍) 등에 대해서 우호적 태도를 보였다.
이청천의 이같은 유연한 자세는 무장항일투쟁 역량의 보존에 큰 보탬이 되었다. 그 해 6월 28일에 발생한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의 와중에 최진동(崔振東)과 허근(許根) 등의 부대는 큰 피해를 입은 반면, 그가 인솔하는 부대는 거의 피해가 없었다. 1921년 8월 자유시사번 이후 한국인 무장세력은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소비에트 적군(赤軍) 제5군단 직속 한국인 여단으로 개편되는데, 이때 그는 예편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해 말에 러시아 원동(遠東)정부의 원조로 이르쿠츠크에 설립된 고려혁명군관학교(高麗革命軍官學校) 교장에 취임하였으나, 민족주의 교육방침 문제로 원동정부 및 코민테른 세력과 대립하다가 체포되어 1922년 4월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7월경 임시정부의 항의와 민족 지도자들의 구명운동 결과 가까스로 풀려나게 되고 이해 말경 그는 러시아에서 만주로 돌아왔다.
1925년 5월에는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의 군무위원으로 선임되고, 9월 초부터 이듬해 2월 말까지는 코민테른과 한명세(韓明世)·이동휘(李東揮) 등 러시아 주재 한국인 민족운동 지도자들에게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신숙(申肅)·김규식(金奎植)·원세훈(元世勳)과 더불어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하게 된다. 이들은 코민테른의 동양부장 대리인 파인불크를 만나서 협의한 결과 상당한 지원 약속을 받아냈지만, 1924년 초 독일의 사회주의 혁명이 실패하고 레닌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별 성과없이 실패했다고 한다.
1925년에는 정의부(正義府)의 군사위원장과 의용군 사령관을 겸했고, 당시 만주와 중국 본토에 산재해 있던 여러 독립운동 단체를 하나로 통합하여 결집된 역량을 바탕으로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하자는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을 적극 지지하여 정의부(正義府)·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 등 삼부(三府)의 단합을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1928년에는 삼부가 내부분열로 인해 혁신의회(革新議會)와 국민부(國民府)로 분립되자 좌우합작에 의한 민족유일당을 조직하고자 했던 혁신의회에 가담해 군사위원에 선임되었다. 혁신의회의 활동이 지지부진하여 해체된 뒤 1929년에 신민부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가 결성되었는데 1930년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의 영웅 김좌진(金佐鎭)이 공산주의자 박상실(朴尙實)에게 암살당한 이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흡수되었다. 한편, 1929년 5월 길림성(吉林省)에서는 신민부의 민정위원회 측과 참의부의 심용준(沈龍俊) 계열, 정의부의 현익철(玄益哲)·고할신(高豁信) 계열이 군정위원회 성격을 띤 국민부(國民府)를 결성했는데 이들은 이당치국(以黨治國), 이당공작(以黨工作)의 원칙에 입각하여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과 무장세력으로 조선혁명군(朝鮮革命黨)을 따로 두었다. 이리하여 1930년대 초반 항일독립운동 진영은 북만주에서는 한족총연합회·한국독립당·한국독립군으로, 남만주에서는 국민부·조선혁명당·조선혁명군으로 정리된 것이다.
1930년 1월 북만주의 위하현(韋河縣)에서 홍진(洪震)·신숙(申肅)·이장녕(李章寧) 등에 의해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결성되자 여기에 가담하여 군사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이어서 1931년 9월에 만주사변(滿洲事變)이 발발하자 동당(同黨)의 군사조직인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을 편성하고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본격적인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에 나섰다. 이청천이 이끄는 한국독립군은 중국호로군(中國護路軍)·길림구국군(吉林救國軍) 등 중국의 반일의용군 세력과 연합작전을 펼쳐 1932년 쌍성보전투(雙城堡戰鬪), 1933년 경박호전투(鏡泊湖戰鬪), 사도하자전투(四道河子戰鬪), 동경성전투(東京城戰鬪) 등을 치르며 일본군 및 만주국군에 심대한 타격을 가했다. 특히 1933년 6월 대전자령전투(大甸子嶺戰鬪)에서는 일본군 1천 3백여명을 살상하고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1933년 9월에는 오의성(吳義成)이 지휘하는 중국군이 사전 약속을 어기고 한국독립군을 지원하지 않아 동녕현전투(東寧縣戰鬪)에서 패배하고 결국 한중양군(韓中兩軍)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게 되어 한국독립군 병사들은 중국군의 포위를 받아 강제로 무장해제를 당하고 이청천을 비롯해 조경한(趙擎韓)·오광선(吳光鮮) 등 독립군 간부들이 구금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임시정부에서는 중국 국민당 정권의 지원을 받아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국인특별반을 설립하게 되자 이청천은 한국독립군 장병 40여명을 거느리고 중국 관내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청천은 한국인특별반의 총책임자가 되어 한국인 청년 90명의 군사훈련을 담당했다. 1934년에는 임시정부를 이끌고 있던 김구(金九)와 갈등을 겪고 김구와 대립관계에 있던 김원봉(金元鳳) 등과 합세하여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창당하였다. 그러나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의열단(義烈團) 계열이 당권을 장악하고 독주하자 이에 불만을 갖고 3년 뒤에 민족혁명당에서 탈당하였다. 1937년 8월에는 임시정부의 여당인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가세하여 '한국 광복운동 단체 협의회'를 설립하고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였다. 이듬해에는 임시정부의 군사학편수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1939년 10월에는 임시정부의 군무위원으로 선출된 뒤 다시 군무부장을 겸하게 되었다. 1937년 9월에 중일전쟁(中日戰爭)이 발발하면서 임시정부에서는 군사부문의 활동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었는데, 대일항전(對日抗戰) 경험이 풍부한 이청천이 그 공백을 메울 수 있었다.
1940년 9월 17일에는 중국 중경(重慶)에서 임시정부의 군대인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이 창군되는데, 이청천은 이때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해방 직후까지 줄곧 광복군을 지도하여 독립운동에 매진하게 된다. 물론 광복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실질적인 전투를 벌이지 못하였지만 이 군대가 중국이나 미국, 영국 등 열강에 미친 정치적 심리적 선전효과는 매우 컸다. 즉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과 영국 등 열강이 한국 국민들을 일본의 침략에 의한 식민지 노예로 인식하고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게 되는 점도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비롯한 기타 독립운동 진영의 줄기찬 투쟁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중국 관내지역에서 활동한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중국 국민당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중국 측의 상당한 관심사가 될 수 있었다.
해방 이후 광복군이 연합군 사령부에 의해 정식 교전단체로 인정받지 못해 1947년 4월 말에 이청천은 뒤늦게 개인 자격으로 조국에 돌아왔다. 일본의 군사전술을 공부해 무력독립운동(武力獨立運動)에서 활용하겠다는 일념으로 일본의 군복을 벗고 만주에 망명한 지 27년만의 귀국이었다. 그 해 9월에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이라는 정치단체가 조직되자 그 단장이 되어 반공운동(反共運動)을 주도하였고 1948년에는 제헌국회 의원에 당선되었으며 계속해서 국회 외무위원장 및 국방위원장, 무임소 장관, 민주국민당 최고대표위원, 대한적십자사 중앙집행위원, 대한군인유가족회 회장, 반공통일연맹 최고위원, 자유당 원내 대표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정치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1957년 1월 15일 노환으로 병세가 깊어져 만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 광복을 위해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에 진력한 그의 공로가 인정되어 1962년에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