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소설] Memories... <제 4 회>

박준욱2004.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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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1월 3일 금요일...

[실화소설] Memories... &lt;제 4 회&gt;

새벽 4시가 훨씬 넘은 시간이기에 아직 창 밖의 세상은 캄캄한 어둠뿐이었습니다.

나의 방안에는 아직 하얀 형광등이 켜진 채 나는 잠을 자지 않았습니다.

아니, 잠이 오지 않을뿐더러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그저 책상에 우두커니 앉아 울리지 않는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며 초조함만 달랠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새벽의 적막을 깨어버리듯 휴대폰에서 우렁찬 벨 소리가 났습니다.

난 휴대폰 외부 LCD화면에 나타난 발신자의 이름도 보지 않고 서둘러 받았습니다.

 

"여보세요...?"

"정말 빨리도 받네. 설마 아직도 자지 안 잤니?"

 

그렇게 기다리던 석재의 전화였습니다.

나의 목소리는 다급해졌습니다.

 

"너 같으면 잠이 오겠어?! 그보다 어떻게 됐니?!"

"잘됐지, 뭐. 산모나 아기나 다 무사해. 그리고 딸이야."

"그래...? 다행이네..."

 

그제야 안도의 한 숨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나는 날이 밝은 대로 병원으로 갈게."

"수고는 무슨 수고... 그 애가 더 고생했지. 아무튼 알았어. 난 아마 아침까지는 같이 있을

생각인데... 너랑 만날 수 있을지나 모르겠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지현이 입원한 병원으로 달려가고 싶건만, 지금까지 방황한

흔적과 그에 따른 아픔들을 애써 부모님께 들키지 않고 지내왔기에 지금 외출한다는 것은

상당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내가 지극한 효자는 아니지만, 부족한 나를 위해 헌신만 하시는 부모님께 지난 일로

하여금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어서 새벽 5시가 되길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집에서 학교까지 1시간이 넘게 소요되며 버스의 승객도 많기 때문에 항상 집에서 일찍 나서

야 하니 학교에 간다는 핑계야말로 일찍 집에서 나갈 수 있는 좋은 구실이었습니다.

[실화소설] Memories... &lt;제 4 회&gt;

한 시간도 자지 못한 채 몽롱한 상태에서 여느 때처럼 새벽 5시에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여느 때처럼 샤워를 하고 간단히 아침을 먹고는 학교에 다녀온다고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는

집에서 나왔습니다.

하지만 버스 정류장을 지나치고는 한시라도 빨리 지현이가 입원한 병원에 가고 싶다는 마음

에 택시를 탔습니다.

병원의 정문에 도착하자 담배를 태우며 우두커니 서있는 철민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철민도 택시에서 내린 나의 모습을 보았는지 급히 태우던 담배의 불씨를 끄고는 다가왔습니다.

 

"박준우... 와줘서 고맙다..."

"고맙긴, 좀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오히려 미안하다."

"너 사정 내가 잘 아는데, 뭐. 들어가자."

"응. 근데 석재는?"

"어제 나랑 밤새도록 같이 있었는데 피곤할 것 같아서 먼저 보냈어."

"내가 보기엔 네가 더 피곤할 것 같은데..."

"설마 지현이 보다 더 하겠니?"

"그렇긴 하겠다..."

 

병원으로 들어서 신생아실 안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넓은 창에 달했습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한 간호사가 눈도 제대로 뜨는 못한 채 옹알대는 어느 아기를 안고는

우리에게 보여줬습니다.

난 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철민이는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일을 열었습니다.

 

"우리 아기... 정말 귀엽고 예쁘지 않니...?"

"응, 정말 예쁘네. 근데 이름은 뭐니?"

"민지, 장민지. 석재 녀석이 유명한 역술원에서 지어서 왔더라고. 나는 무식해서 애 이름조

차 잘 짓지 못할뿐더러 지현이도 민지란 이름에 동의하니깐 그냥 그렇게 했어."

"괜찮네, 장민지... 이름도 예쁜데, 뭐."

"준우야, 나 있잖아..."

 

좀 전과는 달리 갑작스런 철민의 나직한 목소리에 잠시 아기에서 철민에게 눈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그의 눈가엔 촉촉한 기운과 함께 이번엔 강경한 그의 목소리가 들여왔습니다.

 

"난 민지를 내 애처럼... 내 자식처럼 키울 거야. 그래서 나나 지현이 처럼 불우하게 살게 만

들지 않을 거야. 정말 지현이랑 같이 행복하게 해줄 거야."

 

이내 그의 얼굴엔 다시 함박 웃음이 찾아왔습니다.

난 어느새 처진 그의 어깨를 토닥였습니다.

 

"무슨 소리야? 민지는 네 자식이야. 네 자식인데 네 자식처럼 키운다니 그게 무슨 이상한

소리니? 석재나 나나 지현의 아픔을 아는 사람들은 민지가 다 네 자식이라고 생각해. 아니,

네 자식이야!"

"그래, 민지는 내 자식이야...!"

 

어느새 그의 눈엔 눈물이 떨어졌고 쑥스러운 듯 서둘러 옷소매로 닦아냈습니다.

그리고 아직 촉촉한 흔적이 역력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이제 지현이 만나러 가야지?"

 

난 그의 말에 순간 입을 열 수 없었습니다.

 

"아직도 그 일에 대해 자책하고 있는 거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잖아."

"네가 그러면 그럴수록 지현이도 너에 대한 죄책감을 영원히 떨쳐버릴 수는 없을 거야."

"그게 무슨 소리니? 다 내 잘못인걸."

"우선 지현이나 만나러 가자. 참! 근데 너, 세희씨라는 사람을 아니?"

"세희? 글세..? 처음 듣는 이름인데? 왜?"

"아니, 그냥... 아무튼 빨리 가자."

 

철민은 나의 물음에 대충 무마한 듯 했습니다.

그리고 민지를 들고 있는 간호사에게 간단한 목례를 하고는 먼저 발걸음하기 시작했습니다.

난 그저 앞서가는 그의 뒤를 따를 뿐이었습니다.

어느덧 어느 병실에 도착했습니다.

병실의 문에는 [윤지현]이라는 이름 석자가 있었습니다.

철민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는 말했습니다.

 

"어서 들어가 봐."

"넌? 너는 안 들어가니?"

"둘이 할 얘기가 있을 것 같으니깐 난 담배나 한 대 피고 들어갈게."

 

그는 내가 말할 틈도 없이 마치 피하기라도 하듯 재빨리 등을 돌리곤 걸음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나 홀로 약간 열린 문을 비집고 들어섰습니다.

너무나 고요했습니다.

그저 가습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뿌연 김 소리만이 미세하게나마 들릴 뿐이었습니다.  

몇 발걸음 더하자 침대에 고스란히 누워 잠들어 있는 지현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난 침대 옆에 놓여있는 의자에 조심스레 앉아서는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간밤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너무나 나른해 보였습니다.

아직까지 가시지 않은... 지현이를 직접적으로 이렇게 만든 그 남자와 그 무리들에 대한 울

분과 지현에 대한 죄책감으로 나의 눈시울은 붉어졌습니다.

그런 복잡한 심정에 나의 두 주먹엔 잔뜩 힘이 들어갔고 어느새 나의 고개는 나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과 함께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그때 갑작스레 따스한 지현의 손이 나의 손을 감싸더니 나직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여왔습니다.

 

"왔니...?"

 

난 황급한 마음에 허둥지둥 눈물을 닦고는 애써 웃음으로 맞이했습니다.

 

"일어났구나... 몸은 괜찮은 거니?"

 

그녀는 그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 답했습니다.

난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말했습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녀는 짧은 한 숨과 내쉬곤 나직이 말했습니다.

 

"준우야, 이제 그런 죄책감은 버려... 결코 너 잘못이 아닐뿐더러 그 누구도 널 원망하지 않아."

"아니! 내가 만약 그 날... 집에까지 바래다주었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거야..."

 

여전히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내가 답답했는지 지현은 또 다시 짧은 한숨을 내쉬

었습니다.

그리고 늘어진 머릿결을 쓸어 올리며 다소 머뭇거리듯 말했습니다.

 

"네가 계속 그 일로 자책하니 끝까지 네게만은 숨기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이제는 말해

야겠구나."

 

그녀의 모호한 말에 자연스레 고개가 들려졌습니다.

그녀는 나의 시선을 회피하듯 블라인드로 가려져 있는 창문을 보며 말을 이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되고 네가 그렇게 증오하면서 두들겨 팬 남자애는... 사실, 내가 철없던 시절에

잠시 사귀었던 오빠였어..."

 

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행여나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다시 반문했습니다.

 

"뭐라고?!"

 

어느새 그녀의 시선은 내게로 향했고 그녀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 말했습니다.

 

"말 그대로 잠시나마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다시 그녀의 말을 들은 나로선 더 이상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난 그저 인근 불량배로만 생각했었는데 그녀로 하여금 이제서야 밝혀진 사실은 다소 충격적

이었습니다.

그 순간에도 그녀의 말은 계속 되었습니다.

 

"물론 그 오빠... 아니 그 남자한테 그런 꼴을 당한 그 순간에는 치가 떨릴 정도로 분했지만

그런 사람을 사랑했던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 어쩌면 그런 남자를 사랑했던 자체

가 잘못이었고 그 잘못을 고스란히 내가..."

"그만해!"

 

난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듣고 싶지 않았기에 그녀의 손까지 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

섰습니다.

 

"윤지현! 네가 그렇게 말하면 너에 대한 죄책감이 사라지는 줄 아니?! 네가 그 새끼랑 한때

나마 사랑하는 사이었다고 해도 난 그 새끼를 평생 용서할 수 없고 너에 대한 죄책감도 사

라지지 않는다고!"

 

쉽게 사라지지 않는 부아난 마음에 그녀에게 등까지 돌렸습니다.

 

"준우야...?"

"왜...?!"

 

난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냉랭히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그때 그녀는 나의 손을 다시 잡고는 말했습니다.

 

"그렇게 계속 나한테 등 돌리고 있을 거니? 나, 안볼 거야?"

 

난 그녀의 애처로운 목소리에 다시 돌아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제야 그녀는 흐뭇한 표정을 짓곤 나의 손을 유심히 바라보았습니다.

 

"너, 남자 손치고는 곱고 아담한 것 같애. 그런데 이 손가지고 그렇게 싸움을 잘했다니... 철

민이 손하고는 정말 다르네..."

"내가 무슨 싸움을 잘했다고 그러니?"

"왜? 철민이나 석재 얘기 들어보면 정말 잘 했던 것 같은데..."

"그거야... 그때는 너무 철없던 시절이었기에 가능했던 거지. 지금은 아냐. 다신 싸움은 하고

싶지 않고 다신 하지 않을 거야...!"

"그 말, 나랑 약속할 수 있지?"

"물론...! 내가 누군가에게 얻어터지는 경우가 있더라도 싸움은 하지 않을 거야...!"

 

그녀의 얼굴엔 더욱 환한 표정이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할말이 떠오르기라도 하듯 짧게 손벽을 쳤습니다.

 

"참! 석재한테 들었는데 너,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순간 그녀의 물음에 당황했습니다.

 

"또 석재 녀석이 쓸데없는 말을 지껄였나 보군."

"그럼 석재 말이 진짜야?"

"그냥... 자꾸 보고 싶은 사림이야. 하여간 석재 녀석..."

"다행이야..."

 

그녀의 목소리가 들였지만, 워낙 작은 소리였기에 다시 반문했습니다.

 

"뭐라고?"

"다행이라고. 난 네가 괜히 나랑 그 언니 때문에 평생 괜한 죄책감에 시달려 살면서 다시는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으면 어떡해 하나 걱정했는데..."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마. 아직은 좋아한다는 단계는 아니고 그냥 느낌이 좋다는 것 뿐이

야. 게다가 그 사람은 내 존재조차 모르는 걸."

"그 사람? 역시 석재 말이 맞네."

"또 뭐가?"

"넌 언제나 그 언니를 그 사람이라고 했는데 네가 지금 좋아하는 여자한테도 그 사람이라고

하잖아. 그 말은 너한테 있어서 그 언니만큼이나 소중하다는 거 아니겠어?"

 

어쩌면 그녀의 말이 사실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현이 앞에서 굳이 그렇다고 들어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들어내지 않음이 당연했습니다.

지현은 나로 인해 이렇게 불행하게 됐는데 내가 그런 그녀 앞에서 그런 감정을 드러내는 것

은 너무나 잔인한 짓인 것 같았습니다.

난 그녀의 그런 말에 애써 부정했습니다.

물론 내가 이렇게 부정해도 그녀는 눈치를 채겠지만, 그래도 부정할 뿐이었습니다.

 

"아냐, 아니라고! 그냥 마땅한 호칭이 없어서 그렇게 칭하는 거야!"

 

난 괜한 열까지 내며 부정한 나머지 잠시 후 나의 그런 모습들이 괜스레 무색했습니다.

그런 무색함을 없애고자 시계를 보니 벌써 내가 여기에 들어온지도 10분이 훨씬 넘었는데

철민은 들어올 기미가 없었습니다.

 

"철민이 녀석은 왜 이렇게 안 들어오지? 담배 한 대만 피고 들어온다던 녀석이."

"곧 들어오겠지. 왜 나랑 단 둘이 있는 게 불편하니?"

"아니, 불편하기 보다... 좋아, 솔직히 말해서 너의 이런 모습 보니깐 가슴이 아프다."

 

어느새 내 표정엔 씁쓸함이 묻어나 있었습니다.

또 괜히 나의 이런 심상한 표정으로 지현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가 잠깐 나가서 철민이 녀석 데리고 올게."

 

난 얼른 등을 돌렸고 병실 문 쪽으로 발걸음을 바삐 움직일 찰나였습니다.

 

"준우야...!"

 

그녀의 목소리가 들여왔습니다.

나의 씁쓸한 표정을 봤던 것일까?

그녀의 목소리에 처연함이 느껴졌습니다.

결국 나의 재촉이던 발걸음은 그녀의 목소리로 하여금 잠시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걸음과 함께 시선까지 그녀에게 돌렸습니다.

지현은 아직 완쾌되지 않은 몸으로 침대에 일어날 형세였고 난 그런 그녀의 무모함에 얼른

다가가 부축이었습니다.

그러자 느닷없이 그녀는 나를 감싸안았습니다.

생전 여자에게 감싸 안기기는커녕 감싸보지도 못했던 나로서는 지현의 이런 행동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행여나 그녀가 무안할까봐 그녀의 품에서 벗어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여자의 품을 처음으로 느껴본 나로서는 그리 싫지만은 않았습니다.

아무튼 삽시간에 이런저런 상념이 교차되는 순간에 그녀의 나직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 들렸

습니다.

 

"나, 너한테 또 한가지 고백할 게 있어. 철민이한테는 미안하지만... 아니, 철민이도 알고 있

는 사실이지만, 사실 널 많이 좋아했어."

 

오늘 그녀의 말에 두 번이나 놀랐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저 농담이라는 생각에 피식거리는 웃음이 나왔습니다.

 

"치∼. 거짓말 하기는."

"정말이야..."

"그래, 정말이라고 하자. 근데 날 좋아한다는 사람이 내가 그렇게 작업했는데도 불구하고 계

속 거절했니?"

 

순간 그녀는 울먹이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한 건 아닐까 금방 내뱉었던 말들을 상기시켜 보지만 그녀가 울

만한 실수는 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좀 더 상기시켜 보고 싶었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들여왔습니다.

 

"바보... 내 입장에서는 널 거절할 수밖에 없잖아. 너와 나는 여태 살아온 길이 너무나 다른

걸. 넌 나보다 더 좋은 여자를 만나야되지 나 같은 여자 만나면 불행해질게 뻔해... 너한테

항상 짐만 될 게 뻔하다고... 그리고 언젠가는... 아니, 조만간 지금 너의 새로운 삶을 위해서

어두운 과거를 함께 했던 철민이와 나는 네 곁에서 떠나는 함이 옳다고 생각해..."

 

그녀의 뒤늦은 고백에 약간의 기쁨도 있었지만, 언젠가는 내 곁에서 떠난다는 그녀의 말에...

그녀의 그런 의지에 서운함이 더 지배적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런 서운함에서 파생된 침잠한 심정과 그녀의 울먹이는 목소리는 더욱 나의 눈시울

을 자극했습니다.

난 억지로 눈물을 삼키려고 하지만, 그건 나의 의지일 뿐, 어느새 나의 두 눈에는 촉촉한 기

운이 감돌았습니다.  

 

"윤지현... 너야말로 진짜 바보야. 네가 어디가 어때서? 잠시 방황했지만, 넌 얼굴도 예쁘고

요리도 잘하고... 네가 얼마나 좋은 여잔데. 나야말로 너한테나 헤어진 그 사람한테나 너무

모자란 사람이지."

 

하지만 지현은 나의 말에 동의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래 흔들었습니다.

 

"아냐, 내가 보기엔 네가 좋은 사람이야. 게다가 지난 날 방황한 날들을 돌이켜 보면 넌 너

의 착하고 여린 심성을 감추려고 일부러 강하게 악하게 나갔다는 것도 알아."

"아니, 지난 날의 악한 모습이 어쩌면 나의 진짜 모습일지도 모르지. 그리고 지금은 일부러

착하게 보이려고 애쓰는 것이고."

"나도 그렇지만 재석이, 철민이가 보기도 그렇지 않다고 생각들 해. 넌 아주 착하고 마음이

너무 여려. 그래서 항상 그게 마음에 걸리더라. 앞으로 더 좋은 여자를 만나야 되는데 괜한

나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네 앞길을 막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파. 이제 그만 내게 죄책감 가

지지마. 앞으로 네게 다가올 새로운 사랑을 위해서라도 이젠 나에 대한 죄책감 따윈 버려.

부탁이야. 그것만이 내가 너한테 용서를 빌 수 있는 방법이야.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

같은 여자 때문에 네가 지금까지 괜한 죄책감에 아파하며 힘들지 않았을 텐데... 너만 보면

너무 슬퍼. 너만 보면 너무 미안하단 말이야..."

 

그녀의 눈물은 그녀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려 나의 어깨를 적셨습니다.

게다가 그녀의 흐느낌은 나의 눈시울을 더욱 자극했습니다.

이젠 나의 지독한 이성도 나의 눈물을 거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입에선 약간의 떨림과 말 한마디만이 겨우 튀어 나왔습니다.

 

"미안해..."

 

그 말만이 지금 내가 그녀의 부탁에 답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