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레를 능가하는 레전드 알프레도디스테파노

오호2009.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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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축구의 살아있는 전설 알프레도 디 스테파뇨는 펠레의 뒤를 이어 FIFA가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축구 선수' 2위에 올랐다. 그리고 유서깊은 축구 전문지 '프랑스 풋볼'은 요한 크라이프, 프란츠 베켄바워, 보비 찰튼이 아닌 디 스테파뇨를 '금세기 유럽 최고의 선수'로 꼽았다. 그러나 그는 월드컵 무대에서는 단 1분도 활약하지 못했다. 이 불세출의 스타가 월드컵에 출전할 수 없었던 사연은 매우 복잡하다.

디 스테파뇨의 고향은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다. 그는 이탈리아 출신의 부모에게서 태어났고, 그의 몸에는 이탈리아인의 피가 흐른다. 그러나 디 스테파뇨의 조국은 아르헨티나였다. 지금은 완전히 스페인 사람이 되어 있지만, 그의 아르헨티나를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히 남다르다고 한다.

흔히 디 스테파뇨를 가리켜 보기 드문 '정력가'라 부르는 사람이 많다. 그는 현역 시절에 엄청난 스테미너를 바탕으로 90분내내 그라운드를 누볐고, 공격과 미드필드, 수비를 가리지 않고 팀에 공헌했다. 당시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이었던 미구엘 무뇨스는, "디 스테파뇨를 한 팀에 두는 순간, 당신은 22명의 선수(포지션별로 두명씩)를 데리고 경기하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카데나치오'의 창시자 엘레니오 에레라의 표현을 빌리자면 디 스테파뇨는 가장 무서운 공격수이자, 최고의 미드필더였고, 훌륭한 수비수였다.

디 스테파뇨는 자신이 이처럼 놀라운 체력을 갖게 된 이유를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찾는다. 그는 집안이 가난한 관계로 매일 농장에서 고된 일을 반복해야 했고, 조금이라도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야 했다. 그러나 디 스테파뇨는 당시의 기억을 매우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지칠 줄 모르는 스테미너가 바로 농장에서 힘든 일을 하던 때에 저절로 생겨난 것이라고 말한다.

리베르 플라테를 어릴적부터 동경해왔던 디 스테파뇨는 15세의 어린 나이로 이 명문 클럽에 합류하는 영광을 누린다. 그러나 페데르네라, 라브루나등 스타 플레이어들이 즐비했던 까닭에 '풋내기' 디 스테파뇨는 우라칸(Huracan)으로 임대 생활을 떠나야 했다. 자신의 천재성을 몰라본 리베르에게 분노를 느꼈던 것일까? 그는 친정팀 리베르를 상대로 가졌던 리그전에서 경기 시작 15초만에 골을 터뜨리는 저력을 발휘한다. 이것은 아직도 아르헨티나 리그 역사상 '가장 빠른 골'로 기록되고 있다.

디 스테파뇨는 1947년에 아르헨티나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고, 대표팀에 발탁되어 코파 아메리카 대회에도 참가했다. 그는 5골을 몰아넣으며 아르헨티나가 브라질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30년 월드컵 준우승 이후, 국제 무대에서 뚜렷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던 아르헨티나 축구의 미래는 이 '젊은 영웅'과 함께 최고의 순간을 맞이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1949년,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여져 있던 아르헨티나에서는 대대적인 선수 파업이 일어났고, 디 스테파뇨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콜롬비아의 밀론나리오스로 이적했고, 이곳에서 무려 262골을 터뜨리는 경이로운 기록을 남겼다. 이는 클럽 역사상 2번째에 해당하는 대기록이었는데, 중요한 것은 디 스테파뇨가 불과 4년만에 200골 이상의 득점을 성공시켰다는 사실이다.

디 스테파뇨에 대한 소문은 유럽 축구에까지 흘러들어갔다.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유벤투스등이 그의 영입을 위해 경쟁했고, 결국 7만 달러(당시 최고 이적료)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한 레알이 이 싸움에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디 스테파뇨는 마드리드에 도착하자마자 엄청난 환대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팬들의 기대에 곧바로 부응한다. 이적 직후에 펼쳐졌던 바르셀로나와의 '클래식 더비'에서 혼자 4골을 터뜨리는 원맨쇼를 선보이며 팀의 5-0 승리를 주도한 것이다.

이후 레알 마드리드는 디 스테파뇨와 함께 유럽 축구의 역사를 새롭게 창조해나간다. 엑토르 리알, 라이몽 코파, 페렌치 푸스카스등 세계적인 스타들이 줄줄이 마드리드로 모여들었고, 그들은 '유러피언 챔피언스 컵(현 챔피언스 리그)' 대회 5연패를 달성하며 실로 거대한 발자취를 남겼다.

이 위대한 팀의 스타들 중에서도 '별중의 별'은 단연 디 스테파뇨였다. 그는 레알이 대회 5연패를 차지하는 기간 동안 치렀던 5차례의 결승전에서 모두 골을 터뜨리는 진기록을 탄생시킨 것을 비롯, 챔피언스 리그에서만 총 49골을 성공시키는등 스페인 축구 역사에 빛나는 금자탑을 쌓아올렸다. 총 5차례나 '피치치(프리메라 리가 득점왕)'에 등극한 것과 커리어 통산 800골이 넘는 득점 기록 또한 디 스테파뇨가 남긴 위대한 업적들이다.

그렇다면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디 스테파뇨가 월드컵 무대에 출전할 수 없었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가 21세로 한창 물이 올랐던 1946년에는 '세계대전'으로 인해 월드컵 대회가 치러지지 않았고, 50년 대회 때에는 군사 정권의 횡포에 의한 국가의 어려운 사정때문에 아르헨티나측에서 스스로 대회 참가를 거부했다. 54년에는 아르헨티나와 콜롬비아 대표팀 경력이 있는 디 스테파뇨에게 FIFA측에서 스페인 국가대표 자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미비한 규정'의 희생양이 되고 만 것이다. 4년후인 58년에는 스페인이 본선 진출에 실패하는 이변을 겪고 만다. 디 스테파뇨는 스위스와의 예선전에서 2골을 터뜨리는등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스코틀랜드에게 당한 4-2 패배가 치명적이었다.

그리고 1962년, 이 불운한 축구 영웅은 36세의 나이로 월드컵에서 활약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부여받게 된다. 당시 스페인에는 프란시스코 헨토, 루이스 수아레스를 비롯하여 '마법사 군단' 헝가리를 이끌었던 페렌치 푸스카스등의 스타 플레이어들이 즐비했고, '정력가' 디 스테파뇨 또한 젊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재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최후까지 불행했다. 대회 기간 직전에 당한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한 채 단 1경기도 출전하지 못한 것이다. 우승 후보로 손꼽히던 스페인은 브라질에게 패배하며 탈락의 고배를 마셨고, 디 스테파뇨는 동료들과 함께 쓸쓸히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 많은 축구인들은 디 스테파뇨를 펠레와 함께 최고의 선수로 꼽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디 스테파뇨가 아니면 해낼 수 없는' 위대한 것들을 해냈고, 유럽 축구의 살아있는 역사 그 자체와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축구를 대변하는 디에고 마라도나는 이탈리아 TV 프로에 출연해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디에고 마라도나 - "제가 펠레보다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선수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디 스테파뇨가 펠레보다 뛰어났다고는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죠."

"저는 디 스테파뇨를 이야기할 때마다 자부심을 느낍니다."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펠레가 만약 유럽에 진출했다면 아마도 실패했을겁니다. 반면 디 스테파뇨는 유럽과 남미 무대를 가리지 않고 뛰어난 활약을 펼쳤죠."

"마라도나가 펠레보다 못한 선수라고는 말할 수 있어요. 그러나 디 스테파뇨는 확실히 펠레보다 뛰어난 선수였습니다."

40세까지 현역으로 활약했던 디 스테파뇨는 레알 마드리드를 떠나 에스파뇰에서 파란만장했던 선수 생활을 마감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집이나 다름이 없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스타디움(레알 마드리드 홈구장)에 우뚝 서서 마지막 한마디를 남긴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뇨 - "축구의 위대함은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것이 이 자그마한 축구공 안에 담겨있다고 생각해요."

"오.. 나의 오랜 친구여!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축구공은 나에게 영광, 명예, 그리고 부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 소중한 친구 덕분에 지금 나에겐 멋진 가족과 축구를 배우는 아들이 있습니다. 나는 정말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P.R.O.F.I.L.E

성명: 알프레도 디 스테파뇨(Alfredo Di Stefano)
별명: 금빛화살(The Blond Arrow)
국가: 아르헨티나/콜롬비아/스페인
주 소속팀: 레알 마드리드
포지션: 스트라이커


- 사커라인 이형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