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아버지는...유리기술자입니다.

kuk2009.04.17
조회528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에 사는 21살 톡녀입니당.

'아버지 직업을 무시한 나쁜남자'라는 톡을 보고 괜시리

저도 아빠생각이 나서 몇글자 적어보려고 해요...

글이 길어질수 있으니 지루하신 분들은 패스해주셔도 되요^^

악플러분들은 뒤로가기를 누르셔도 괜찮습니다.

 

 

 

저희집은 아빠, 엄마, 저, 여동생 이렇게 네식구 입니다.

제목처럼 저희 아빠는 유리기술자세요.

유리기술자가 뭐지? 라고 하시는 분들 계시죠?

사실 아빠직업을 뭘로 정의하면 좋을지 몰라서...일단 생각나는대로 적었는데요.

말그대로 유리창 같은거 깨지면 갈아주고, 테이블 유리같은거 맞추고

뭐 대충 이런직업입니다. 유리세공사가 아니에요^^;

제가 초등학생때까지만해도 아빠는 유리가게를 했었어요.

제 동생이름을 따서 '서정유리'

가게랑 집이랑 붙어있는, 비록 단칸방에 다락방 하나 딸려있는

열평남짓한 가게였지만 아마 그때가 아빠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 아니었나 생각이듭니다.

저-기 전라도 촌에서 20대에 상경해 배운거라곤 유리기술밖에 없는 청년이

예쁜 부인도 만나고, 비록 월세지만 떳떳한 자기기술을 내건 가게도 내고...

거기다 올망졸망 늦으막에 얻은 딸래미둘까지 보고...

어렸을적 아빠의 모습은 크고, 까맣고, 단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아...갑자기 눈물이 나려고 하네요;;ㅎㅎ...

제가 학교에 늦으면 늘 오토바이로 태워다주고,

준비물을 까먹고 안가져와서 공중전화로 가게에 있는 아빠한테 전화하면

어김없이 학교 후문으로 달려와주곤하셨죠.

동생이랑 저랑 늦은밤에 배가 고파서 '아빠...'하고 슬쩍 운을 떼면

빙그레 웃으면서 '치킨 빨리 시켜~' 하시던 분이셨습니다...

언제나 만능이던 아빠. 손재주도 좋아서 장난감도 많이 만들어주고

시골할머니댁에 가면 으레 서울에서는 못보던 풀, 물고기, 나무, 곤충들을

하나씩 가르쳐주시던 상냥한 분이었습니다.

 

당신이 못배운 음악, 딸한테라도 많이 가르치시고 싶어서

제가 배워보고 싶었던 악기는 어떻게서든지 학원을 보내주셨고,

늦게나마 섹소폰, 오카리나, 팬플룻같은 관악기를 하나씩 독학하시기 시작하셨죠.

멋져보였습니다. 제겐 언제나 큰 나무같은 아빠였으니까요.

 

 

그러다....네....맞아요.

여느집에서나 어려움을 겪게한..IMF....결국 저희집도 피할수가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때 찾아온 IMF는 저희집에 많은 변화를 일게했습니다.

태어나서부터 살았던 그 가겟집을 내놓고 건넛동네로 이사를 갔습니다.

아빠는 예전 거래처사람에게서 소일거리를 받아 얼마간은 꾸준히 일이 있었지만

결국 그 일거리조차 끊기고말았죠.

얼마동안은 여기저기 일거리를 알아보러 다니셨지만, 무용지물이었나 봅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베개가 아닌 두루마리 휴지를 베고 자고있는 아빠의 모습을...

그때 가장 많이 봤거든요...

그나마 그때는 어릴적이라 아빠가 집에 있는게 싫다는 느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빠가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해간다는건 어렴풋이 느꼈어요..

물을 사오라는 아빠의 심부름에 슈퍼에서 1.2L짜리 생수통을 사왔는데

시원하지 않다며 제 앞에서 그걸 집어던지던 아빠의 모습...

미용실에 엄마를 따라갔다가 원장님이 저한테 서비스로 해준

브릿지를 보고 엄마에게 미친듯이 화를 내던 아빠의 모습................싫었습니다. 

언제나 살갑고 상냥하던 아빠는 어느순간 제게 '무서운 거친' 사람으로 변해있었죠.

 

그렇게...시간이 흘러흘러 제가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아빠는 여전히 무직이었고...엄마혼자 회사를 다니며 힘겹게 네식구 벌이를 하셨죠.

저희엄마 성격이 남한테 싫은소리 못하고 큰소리 못내는 성격인지라

아빠가 그렇게 무기력하게 집에 있는것도 그저 맘에 담아만두고 계셨어요.

그러다가 여러차례 싸우기도 하시고...엄마도 우시고..아빠도 우시고...

한창 사춘기였던 저는 정말 집에 들어가는게 고역이었습니다.

아빠얼굴보는게 숨이막힐정도였으니까요...사실...지금도 그렇구요..

 

아빠는 그 이후로 계속 무직상태로 계십니다.

엄마가 이것저것 일거리를 알아봐주셔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지,

아님 정말 손을 놔버리신건지, 하실 생각도 안하고계세요...

교회에서 아르바이트처럼 경비를 하고계시긴 한데 월수입 5~60정도 밖에 안됩니다.

엄마 월급이랑 합쳐도 네식구 먹고 살기엔 정말 빠듯하죠.....하아...

아빠는 요즘 자주 교회에 있는 기도실에서 주무시는데, 사실 가족들도 그게 편해요.

아빠랑 마주쳐봤자 숨만 막히고, 답답하기만 하고...네, 저 참 나쁜 딸이죠...

어떻게 극복해야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저라도 먼저 나서서 말을 하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쉽지 않네요...예전에 한창 갈등이 심할때 제가 부부상담소를 권해봤지만

아빠 성격상 단번에 거절하시더군요.......하...정말.......답답해 미쳐버릴것 같습니다.

친조부모님은 두분다 돌아가셨고 외조부모님한테 말씀을 드려봤지만

선뜻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려고 하시진 않더라구요....

 

이야기를 어떻게 끝내야할지 모르겠네요....

아빠를 미워하고 그런건 절대 아니에요.

한분밖에 안계신 아빠고...저를 너무 사랑하신다는것도 느끼고 있어요.

동생을 볼때마다 기분좋게 웃으시고 (동생을 더 예뻐라하시거든요)

당신 식비도 없으시면서 딸한테 용돈은 꼭 주시려고 하시는 분이시라는거...

예전에 그 크고 단단하던 아빠의 모습은...어느새 나만큼 작아지고

주름과 흰머리가 눈에 띄게 보이는 힘 없는 사람이 되어있네요....

계실때 잘 해드려야 하는데...정말 잘 알고 있는데..

왜 이렇게 맘과 행동은 따로따로 되는지...ㅠㅠ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마음....글로나마 써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땅의 아버지들, 그리고 맏딸분들...힘내세요

 

"아빠...어릴 적, 숲의 커다란 나무처럼 크고 단단한 아빠가 아닌,

작고 왜소해진...그런 아빠라도 사랑해요. "

죄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