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적절한 남자(12)

리드미온2004.04.24
조회9,361

"어때요? 약속 취소하고 저랑 같이 드라이브 가는 거?"

 

진우는 차를 출발시키면서 다시 물었다.

 

"난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요. 아까도 말했듯이 할 얘기 있으면 이따가 집에서 해요."

 

민석과 현아, 그들이 진우보다 나에게 중요한 사람들이다. 도대체 그 둘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언니로서 봐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영 기분이 안나요. 아침에 말했지만 정장 차려 입고 영어하는 거 보고 반했다니까요."

 

이 남자 도대체 뭘 보고 나한테 반했다는 걸까?

 

"당신 여자친구한테 뺨 맞은 거 아직도 기분 나쁜 상태니까 쓸데 없이 찝적거리지 마세요. 짜증나요."

 

나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어떻게 내가 진우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알았어요. 고집도 되게 세네요. 어디로 갈 거에요?"

 

나는 그제서야 진우와 얘기하느라고 민석에게 위치를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만요."

 

나는 민석에게 전화를 걸어 위치를 물어봤다. 일단 연신내역으로 오라고 했다.

 

"남자친구 있었나봐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민석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진우가 물었다.

 

"동창이에요."

 

나는 지금의 상황을 굳이 진우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아 간단하게 대답했다.

 

"나의 이 작업을 물리치고 갈만한 동창이라면....대단한 사이네요."

 

아무 것도 모르는 진우는 괜히 트집이었다.

 

"저 이왕 데려다 주신다고 했으니 연신내역에 내려주세요."

 

"알았습니다. 동거녀님!"

 

"제발....."

 

저 동거녀란 소리는 좀 안했으면 좋겠다. 진우의 동거녀란 표현은 형식적이고 부담스런 동거를 자꾸만 떠오르게 해서 답답하기만 했다.

 

"저, 여자랑 동거 처음 해봐요."

 

내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진우는 계속 떠들어댔다.

 

"누군 두번째인가요?"

 

"모르죠."

 

"현수란 사람 연락 없어요? 연락처도 모르고요?"

 

"사고친 사람이 먼저 연락할리가 없죠."

 

언제까지 이 억울한 동거를 계속해야 한단 말인가...

 

연신내에 도착해서 민석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계속 통화하며 겨우 민석과 현아의 집을 찾아갔다.

다세대 주택에 한 칸을 전세로 빌렸다는 그 집은 억지로 방을 두 개 만드느라 그랬는지 주방만 있고 거실이 없는 형태였다.

내 원룸보다는 넓었지만 가구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서인지 초라하게만 보였다.

그러나 나를 맞이한 민석과 현아의 미소가 나를 안심하게 만들었다.

 

"언니? 배고프지?"

 

그렇게 물으며 주방에서 이것저것 준비를 하는 현아의 모습은 영낙 없는 주부의 모습이었다.

 

"네가 뭘 만들 줄 알아?"

 

"임신해서 그런지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게 많아서 만들어 보는 중이야. 아직 입덧은 안하는데 먹고 싶은 게 많다...비빔국수 먹고 싶어서..."

 

현아는 말대로 비빔국수를 준비하는지 싱크대 위엔 국수가 널려 있었고 큰 냄비에선 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는 소리가 났다. 민석은 요리를 하는 현아가 사랑스러운지 계속 쳐다 보며 싱글거리고 있었다.

 

"야, 임신도 했는데 네가 좀 해주지..."

 

나는 민석이 웬지 현아를 고생시킨다는 생각에 원망스러워 한마디 했다.

 

"아냐. 언니, 내가 먹고 싶어서 하는 거야."

 

현아는 벌써 민석의 편을 들고 있는 것 같았다.

가족이라면 오히려 나와 현아가 더 가까와야 할 것 같은데 이미 민석과 현아가 한 가족이 되어 내가 끼어든 느낌이었다.

 

현아는 어설픈 것 같은데도 비빔국수를 그럴 듯하게 만들어서 내왔다.

 

"언니, 엄마가 해주는 비빔국수 그거 끝내주는데..."

 

현아는 한 젓가락 집어 먹더니 그런 말을 했다.

 

"맞아. 나도 요즘 엄마 비빔국수 먹고 싶더라. 엄마 김치에 엄마가 삶은 국수에 엄마가 넣어주는 참기름..."

 

엄마들은 이렇게 요리로 그리움을 만들어주는 걸까...엄마의 요리는 아마 평생 못잊을 그리움이 될 것 같았다.

 

"집 나와서 민석 오빠랑 있어서 다 좋은데 엄마 김치가 먹고 싶어서..."

 

"그러니까 네가 바보지...뭐하러 이 고생을 하니?"

 

"그렇게 보여? 난 좋은데..."

 

현아는 민석을 쳐다 보며 말했다.

 

"어이, 처형! 걱정말라고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란 말도 있잖아. 나중에 빌딩 짓고 잘 살테니 걱정말라고..."

 

민석은 정말 자신감이 넘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게 사랑일까? 초라한 현실에서도 화려한 미래를 꿈꾸며 노력하게 만드는....

둘의 모습을 보니 혼자 독립한 나보다 훨씬 행복해보였다.

 

"너, 울엄마한테도 현아 어딨는지 모른다고 했다면서?"

 

"아직은 내가 나서는 것보다 현아가 직접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하긴..."

 

나는 엄마에게 민석이가 현아가 어딨는지 모른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민석이가 무책임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엄마와 현아 사이에 끼어들지 않기로 했다는 것은 나름대로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현아야, 너 다음 주 월요일에 점심 때 올래? 엄마랑 월요일이랑 목요일마다 점심 먹기로 했어."

 

"엄마가 웬일이래? 외출도 안하시는 분이?"

 

"피아노 배우신데..."

 

"피아노?"

 

"엄마 꿈은 피아니스트였댄다..."

 

나는 임신 때문에 피아노를 그만 두고 아빠와 결혼했다는 얘기를 하려다가 웬지 지금 상황에서 그런 말은 좋은 것 같지 않아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내가 집으로 돌아온다고 하자 둘이 나를 배웅하러 나왔다. 내가 그럴 필요 없다고 했으나 둘이 산책하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그나저나 그 동거남은 어때?"

 

민석이 물었다.

 

"동거남은 무슨 동거남..."

 

현아는 민석에게 들었는지 놀라는 눈치가 아니었다.

 

"언니는 다 좋은데 남자들한테 너무 차갑게 하는 면이 있는 것 같아. 그것만 아니면 열번도 더 연애했을 거야."

 

"내가?"

 

현아가 나에게 충고를 하고 있는 건가?

 

"맞아. 너 제법 과에서 인기 많았어. 근데 사귀기엔 차갑다고들 하더라..."

 

"서민석! 진작 말해주지..."

 

나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차갑다고? 그러면 따뜻하다는 건 뭘까....

혼자 그런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 마자 레종과 진우가 동시에 내 앞에 나타났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기다렸는데..."

 

레종은 웬일인지 야옹거리며 내 발목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레종...밥 먹었어?"

 

나는 진우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레종에게 말을 걸었다. 야옹거리거나 아무 말도 없을 텐데도 그게 편했다.

 

"저, 맥주 한 잔 하실래요?"

 

진우의 말을 들으며 식탁을 보니 간단한 안주 거리가 차려져 있는 듯 했다.

 

"피곤해요. 잘래요."

 

"맥주 한잔 드시고 주무세요. 피곤이 쫙 풀릴 거에요. 민아씨 돌아오면 뭐가 좋을까 얼마나 고민했다고요."

 

감동적이기 보단 부담스럽다.

원수였던 박진우란 남자는 왜 이렇게 갑자기 친절해진 걸까...

 

"저한테 신경쓰지 마세요. 부담스러워요."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정말 왜 이렇게 차갑게 그래요? 그냥 편안하게 맥주 한 잔하자는 건데..."

 

차갑다...? 지금 진우가 나한테 차갑다고 했다.

이럴 때 그냥 못이기는 척 맥주 한잔 마시면 따뜻한 걸까?

 

"알았어요."

 

나는 식탁에 앉았고 진우는 냉장고에서 맥주 캔들 두 개 꺼내왔다.

 

"난 말이죠. 좀 독립적인 여자가 좋아요. 근데 대부분의 여자들은 조금만 사귀다 보면 자꾸 구속하려고 해요. 내 일거수일투족을 알려고 하고...거기다 섹스를 하게 되면 더 심해지죠...지금 여자 친구도 그래요. 처음엔 상당히 쿨해 보였는데...지난 주말에 같이 잤죠. 그랬더니 이번 주 내내 하루에 전화를 다섯 통도 넘게 해요."

 

진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가 울렸다. 진우는 핸드폰을 보더니 전화기를 꺼버렸다.

 

"그러지 마세요. 또 집에 찾아올라..."

 

"아...그건 제가 사과할게요. 정말 죄송했어요."

 

진우는 이제서야 제대로 사과를 하고 있었다.

 

"진우씨도 결혼 생각은 있을 거 아니에요? 좀 진지하게 만나봐요."

 

"결혼이라...사랑이란 말보다도 더 낯설게 느껴지는데요."

 

맥주 한 캔을 마셨을 뿐인데 그 동안의 피곤한 일 때문인지 온 몸이 나른해졌다.

 

"결혼이 희망이 아니라 젊음의 걸림돌 아닐까 싶어요. 아마 결혼하기 전까지 결혼을 숙제처럼 끌어안고 있어야 할 거에요. 왜 결혼 안 하냐는 질문을 5년째쯤 듣고 있으려니까 그 말 듣기 싫어서 결혼하고 싶기도 해요."

 

내가 지금 진우란 남자와 대화라는 것을 하고 있는 걸까? 그 동안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했었는데...

 

"피곤한가 봐요. 얼굴이 말이 아니네요."

 

진우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 보다 그렇게 말했다. 대화 도중에 쉬고 싶다는 말을 하기가 어려워 참고 있었는데 먼저 말해주니 고마웠다.

 

"네. 먼저 잘게요."

 

나는 식탁에서 일어서서 내 침대로 가려고 하다가 약간 어지러워 멈칫했다.

 

"괜찮아요?"

 

진우가 놀라서 물었다.

 

"네."

 

그 순간이었다. 진우는 내 어깨를 끌어당겨 나를 안으려했다.

 

"뭐에요?"

 

나는 놀라 몸을 빼며 물었다.

 

"아 참...그냥 있어봐요."

 

진우는 다시 나를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정말 싫었다. 아무런 사전 동의도 없이 아니 사전 교감도 없이 갑작스런 포옹이라니...

남자들 사이에선 이런 행동이 멋있다는 교과서라도 있는 게 아닐까...?

 

"싫다고 말했잖아요!"

 

나는 다시 몸을 빼려는데 진우는 나를 끌어당겨 식탁 옆에 놓인 자신의 라꾸라꾸 침대에 눕혔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진우가 나한테 원하는 게 결국 이런 거였던 걸까...

 

"남녀가 한 집에서 어떻게 그냥 지내요?"

 

진우는 그렇게 말하며 내 입술을 덮쳐 버렸다.

아니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나 지금 강간이라도 당하는 게 아닐까...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핸드폰을 찾아 112라도 눌러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벨소리가 들렸다.

 

"누가 왔나봐요."

 

나는 진우 아래 깔린 몸을 어떻게든 일으키려 하며 말했다.

 

"그냥 둬요. 올 사람도 없잖아요."

 

차라리 나는 전에 내 뺨을 때렸던 여자가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랬다면 어떻게든 이 상황은 끝나지 않을까.

나는 그 벨소리가 이 상황에서 날 구원해줄 사람의 신호라 생각하며

 

"살려주세요~"

 

라고 외쳐보았다.

 

벨소리가 두어번 울린 후 잠잠해졌다. 그런데.....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진우가 문쪽을 쳐다 보았다. 그러는 바람에 나는 간신히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나는 누가 비밀번호를 알고 문을 열었을까 싶어 문쪽을 쳐다 보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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