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살 총각얘기

사과2009.04.25
조회494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참 많은 분들이 접속해 계시네요.

항상 글을 읽기만 하다가 몇자 적게 되었습니다. 저는 올해

29살된 닭띠 총각입니다.

 

물론 실제나이보다 액면가가 더 나가는 탓에 마트에 가면

귀저기가 기획상품으로 싸게 나왔으니깐 이번 기회에 한번

구입해 보시라는 얘기를 듣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요즘 먹고 살기가 참 힘들어서 그런지 동반자살에 관한

기사가 많이 실리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참으로 아픕니다.

흠.. 그래서 혹시나 지금도 수십번 삶의 무게로 인해 자살을

생각하고 계신 분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제가 살아온 얘기를

몇 자 적어보고자 합니다.

 

저는 9살에 부모님께서 이혼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선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나서 어머니를 버리고, 재혼을 하시고, 어머니

께서는 저를 버리지 않으시고, 홀로 키우셨답니다. 여자혼자

가장노릇하기가 힘들다는 것은 굳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너무

잘 아실거라 생각이 되네요.

 

어머니께서는 몸이 약하셔서 힘든 일을 잘 못하셨고, 그래서

우리집은 제가 어릴 적 하루 한 끼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정도로

생활이 많이 어려웠습니다.

 

때로는 천원 한장 조차 없어서 동네 수퍼마켓 아저씨에게 외상

으로 물건을 구매하기도 해야 했으며, 밀린 상하수도 요금을 내지

못해 단수가 될뻔한 적도 있었답니다.

 

그렇게 어렵다보니 저도 밥을 굶고 학교에 다니기가 일쑤였으나

다행스럽게도 중학교 2학년 때부터는 결식학생 급식을 받을 수가

있게 되어서 152cm밖에 되지 않았던 키를 고3이 끝나갈 무렵에는

179cm까지 만들 수가 있었답니다. 그래도 참 배가 많이 고팠어요.

친구들은 용돈이란 것을 받아서 군것질도 곧잘 하곤 했는데 저는

용돈이란 게 없는데다 결식학생 급식은 방학 중엔 하루 한 끼 밖에

나오지 않기에 방학이 싫었던 적도 있었답니다.

 

어느 때는 배가 너무 고파서 물로 배를 채우기도 하고, 누가 중국

음식 배달시켜 먹고, 남긴 반찬이 너무도 아까워서 주워먹었다가

식중독에 걸린 적도 있었답니다.

 

먹는 문제만으로도 벅찼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부터는

등록금마저도 저를 힘들게 하였습니다. 당시 고등학교 등록금이

25만 2천원이었는데 2분기를 연속으로 체납하는 바람에 학교에서

날아든 독촉장을 받아들고, 가로등 불빛에 앉아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독촉장에는 이렇게 쓰여있었습니다. **월 **일까지 등록금을 납부

하지 않을 때는 학칙 **항 **조에 의거 자퇴처리됩니다. 라고...

어머니께 차마 말씀을 드리지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했던 기억이

엊그제의 일만 같은데 벌써 12년이란 세월이 지났네요. 때마침 저희

담임선생님께서 밀린 등록금을 대신 납부해주시고, 장학생 추천을

해주지 않으셨다면 지금의 저는 존재하지 않았을거란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비록 문제집을 살 형편이 되지 않아 옆자리에 앉은 S대를 목표로하는

너무나 집이 잘사는 친구가 풀고서 내놓은 문제집을 빌어보며, 그리고

학원이라고는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고는 싶었지만 대부분의 대학이 사립이었으므로

등록금이 너무나도 비쌌기에 저는 지방에 있는 대학을 진학하게 되었

습니다.

 

20살 풋내기.. 친구들은 대학생활의 낭만에 젖어들며 소개팅과 엠티,

그리고 여러가지 좋은 추억거리를 만들고 있을 때 저는 학기 중에는

열심히 공부를 해서 장학금을 타야했고, 방학 중에는 다시 고용안정

센터에 나가 일자리를 찾아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습니다. 이제는

성인이 되었고, 그와 동시에 한 집안의 어엿한 가장이 되어 살림살이

를 직접 꾸려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자동차 썬루프 생산, 전자석 생산, 어묵생산, 실험실 조교, 소독알바,

공사장 막노동, 식당 식기세척, 등등 써빙만 제외하고는 해보지 않은

일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대학에 다니면서 700원하던 버스비가 아까워서 왕복 2시간 30분이

되는 거리를 땀을 뻘뻘 흘리면서 걸어다니고, 밥값이 아까워 500원

짜리 에이스 하나로 한끼 식사를 때우면서 힘겹게 살아야만 했지만

그래도, 한집안의 가장이었기에, 그리고 아버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

야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으로 참고 견디고 이겨내었습니다.

 

그렇게 어렵사리 대학교를 마치고, 약 2년 남짓 군생활을 하였습니다.

군생활은 간부로 하다보니 돈도 모을 수가 있고, 이제는 집안 살림이

피겠구나 했는데 제가 24살 무렵에 어머니께서 암에 걸리셨다는 통보

를 받게 되었습니다.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힘겹게 자식을 위해서 수절하신 것도 억울한데

병까지 얻으시고.. 게다가 막대한 수술비와 입원비, 치료비는...아직은

어린 나이에 충격이 너무나도 컸습니다. 다행히도 군생활을 간부로서

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과연 어머니께서 지금까지 계실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그렇게 수술을 무사히 마치시고, 지금까지 어머니는 건강하게 잘지내고

계십니다. 비록 군생활을 통해서 모아놓은 돈은 거의 없었고, 너무나도

아쉬운 때가 간혹가다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람 살리는 일에 들어간

돈이기에 하나도 아깝다는 생각은 지금까지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전역을 했고, 26살 여름이 되었습니다. 대학원에 가고 싶은데 모아놓은

돈이 없습니다. 주변에서는 어머니를 모시려면 빨리 취업을 해야하는데

대학원을 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이지 않냐고 한사코 만류를 하였습

니다.

 

하지만..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식학생으로써 급식을 받을 때 방학중엔

하얀봉투안에 관내 급식소 목록을 적어놓은 표와 식권, 그리고 사용방법

을 설명한 종이가 들어있었습니다. 식권 사용방법 하단에는 여러분이

지금은 어렵더라도 나중에 커서 성인이 되면 지금의 어려움을 잊지말고,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아낌없이 후원해달라고 쓰여있었던 것으로 기억

합니다.

 

그렇게..

어렵게 자랐기에~ 배고픈게 얼마나 눈물 겨운일인줄 알기에 차마 개구리

올챙이적 기억을 외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받은 은혜를 갚아야만 한다는

생각에 공부를 더많이 해서 소외계층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일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원에 진학할 돈이 없었기 때문에 저는 전역 후에 또다시 대학생 때

하던 식기세척 아르바이트를 하였습니다. 전일제로 일을 하면 돈을 많이

벌수 있었지만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공부도 해야하기에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공립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면서 진학의 꿈을 키웠습니다.

 

일반 사립대학교에 있는 대학원은 비용이 너무나도 엄청나서 공립대학교의

대학원에 진학하였습니다. 단 한 곳만 지원서를 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합격하였고, BK21이 무엇인지도 몰랐는데 BK21사업팀에 참여하게 되어,

다른 친구들보다는 좀더 안정적으로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이었기에 마냥 학생으로써의 생활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교수님을 도와 프로젝트에 참여해서 다른 친구들에 비해 조금더 많은 돈을

벌어들였지만 대신에 학업성적은 많이 나빠졌습니다. 일하면서 공부하기에

벅찼기에 토익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습니다. 대학원은 무사히 졸업할 수가

있었지만 입사지원을 하는 곳마다 소나기가 쏟아지는 무수히 떨어졌습니다.

 

40군데 정도 떨어지고

"귀하의 우수한 역량에도 불구하고, 제한된 채용인원으로 인하여 모시지

 못한점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라는 불합격 이메일을 수도없이

받아보았습니다.

 

자포자기 상태가 되었고, 이러다 완전히 사회에서 도태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밀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힘들어도 끝까지 견디며

달려왔는데 이젠 멈출 때가 온 것인가?? 하는 두려움이 저를 지치게 만들

었습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우수하다고는 했으니깐 채용이 되려면

최우수만 뽑는가보다. 이렇게 말이죠.. 참 어처구니 없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래도 마음을 추스르는데는 도움이 되었습니다.

 

결국 어렵사리 취업이 되었고, 지금은 직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21살적에

모 고등학교 과학실 실험보조원으로 일을 할 때 "이놈이 제대로 하는 것은

하나도 없고, 먹는 거 하나만 잘해!"라고 핀잔을 들었던 생각이 나는데 그런

경험들이 오늘의 제가 있게 한 원동력이 된 것 같습니다.

 

제대로 놀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냥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만 생각들만이

제 머리 속에 가득차 있었고, 버림받은 상처와 무책임했던 아버지의 행동들

그리고, 그로 인해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던 어머니의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무책임한 남자가 되어서는 안되겠고, 여자 눈에서 눈물 흘리게 만드는

일은 없어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오다보니 제대로 사랑한다고

고백해본 적도 거의 없었습니다.

 

때로는 20대를 마음이 훈훈해지는 사랑한 번 못하고,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생각이 제맘을 무겁게 만들때도 있지만 그래도, 지금껏 건강하게 살아온 것

에 감사하면서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대학교 입학 때 입을 옷이 없어서 고등학교때 입던 체육복 하의를 입고

갔다가 학교 선배에게 걸려서 망신을 당하고, 겨울에 난방한 번 안하고,

유류비를 절약하려다 보일러가 고장나서, 인근 상가에 양동이를 들고

물동량을 하러 가고, 추위에 바들바들 떨다가 집안에서 동상이 걸려서

담임선생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일들...

 

그당시엔 수도없이 죽고 싶고, 도대체 내 삶은 왜 이모양인가 하면서

힘들어했던 그 시절들을 이제는 좀 여유있게 되돌아볼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고 있습니다.

 

참 많이 힘드시죠??

세상사는게 우리 뜻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노력해서 하나씩하나씩 단계를 밟아올라가는 것도 당시엔

너무나도 힘겹고, 주저앉고 싶지만 나중에는 보약이 된다는 점

기억하시고, 힘내셨으면 합니다.

 

"주저앉지 말고, 주저하지 말라!"

"피할 수도 없었고, 피할 곳도 없었다~"

 

제가 살아오면서 자연스럽게 체득한 좌우명이랍니다.

모두들 힘내시고, 항상 좋은 일들만 가득하시길 바라겠습니다.

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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