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제암리에서 일제에게 학살당한 주민중 대다수가 천도교인이었고 나머지는 기독교인 몇 명과 기타종교, 무신론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일본헌병은 단지 '대량 학살장소을 자행하기 위해 기독교의 예배당을 선택'한 것일 뿐인데, 기독교는 재빨리 자신들의 성지로 만들어 놓았다.
이 사건에 대한 또 다른 사료로써, 1998년 11월 4일 일본의 참의원 방한단으로 국내에 온 하시모토의원은 학살 관련 외교문서 복사본을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일본 공산당 하시모토 아치(4선)의원은 독립기념관을 찾아와 박유철 관장에게 전해준 문서에는 당시 조선총독이던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1919년 4월 22일 오후 1시 50분 일본의 총리대신 앞으로 보낸 것으로, 펜으로 쓴 육필이 5장, 사건전모를 요약 정리한 내용 1장 등으로 모두 6장이었다.
이 문건에 따르면 수원군 발안장에 파견된 보병중위 12명은 4월 15일 부근 주재순사를 동행, 제암리 기독교회당에 천도교인과 기독교인 약 25명을 집합시켜 전부를 사살하고 불을 질렀다. 문건의 내용은 이 사건이 군대와 경찰의 위신에 관련되고 외국인들이 비난할 소지가 있으니 철저하게 은폐하겠다는 내용으로 끝난다. 문서를 건네준 하시모토 의원은 을사보호조약 체결에 항의해서 자결한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선생에게 헌화했다고 한다.
일본측의 외교문서에서도 천도교인과 기독교인들을 교회로 몰아넣어 학살을 자행했다고 언급되어있다. 그런데 어느순간에 학살당한 사람들이 전부 기독교인으로 둔갑되어 버렸다! 일제에 의해 사망한 천도교인들을 기독교인들이 또 한번 죽인셈이다. 이 얼마나 파렴치한 행각인가! 만약 기독교의 독립운동이 활발했고, 항일운동에 대한 풍부한 역사적 증거가 있었다면 이러한 역사왜곡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의 항일역사가 너무도 빈약해서 이렇게까지 할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뉴스엔조이에서도 이 문제를 언급한바 있는데, 관련기사를 한 번 보도록 하자.
"한 예를 소개하겠다. 1971년에 명예 박사학위를 두개나 가지고 해방후 KNCC 회장까지 지낸 교계의 어떤 거물급 목사님이 《말씀 따라 한 평생》이라는 430여페이지에 이르는 자신의 자서전을 펴냈다. 이 목사님은 그의 자서전에 자신의 명예 박사학위 축하예배 순서지까지 전재하여 10여 페이지에 걸쳐서 서술하면서도,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시기인 1930년대 중반부터 1945년에 이르는 10년간의 시기는 단 두페이지 반으로 줄여서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렇게 10여년을 지내는 동안 시대는 더욱 각박해졌고 종교탄압은 날로 극심해만 갔다. 이윽고 [대동아전쟁]이 발발하였다. 점점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자 일제의 발악은 더욱 심해졌다. 전쟁마당에 강제로 이 나라의 청장년들을 징병 혹은 징용이란 이름 아래 사지(死地)로 끌려 들어 갔고 심지어는 교회당의 종까지도 무기 제조를 위해 헌납을 강요당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종교인들은 이들의 건국신(建國神)인 [아마데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를 모시는 신사참배와 가정마다 [가미다나]라는 천조대신의 위패를 모시라는 것이다. 따라서 성수주일(聖守主日)을 방해하기 위하여 주일이면 보국대에 동원을 지시하고 찬송가도 압수하여 황국신민의 사상고취에 영향을 끼칠만한 가사는 모조리 검은 잉크로 지워서 되돌려주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압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판국에서도 나는 용기를 잃지 않고 계속 교회발전을 위해 목숨을 내걸고 노력해왔다.---
이런 기록을 대할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는가? 여기에 기록한 것들은 모두 일반적인 일제의 탄압 실상에 대한 것뿐이고, 자서전인데도 여기서 자신에 관한 언급은 맨 마지막 단 한 구절 뿐이다. 그리고 그것도 그가 성직자임에도 불구하고 사실과는 거리가 먼 거짓된 기록을 하고 있다. 이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이 목사님은 일제의 가혹한 핍박 중에도 교회를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한 신앙의 용사처럼 보인다.......(중략)......
그의 자서전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이러한 부일협력에 대한 참회의 문구는 한 마디도 없다. 이것은 해방 후 기독교계가 일제의 잔재청산에 실패하였으며, 해방된지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이의 극복은커녕 반성하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이야기해 주고 있다."
뉴스엔조이의 기사는 참으로 많은 것은 우리에게 시사해준다. 친일행위에 사죄하지 않고, 자신의 행위를 은글슬쩍 미화하는 자서전을 쓴 거물급목사..... 이 얼마나 파렴치한 일인가!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종교지도자가 어찌 무신론자들보다도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지!
이제 대한민국은 민주사회로 발전했다. 부끄러운 친일행위를 감추고 오히려 항일운동을 했다는 큰소리치는 기독교의 모습으로 볼 때, 수십년후 그들은 역사를 조작해서 기독교가 민주화 운동을 했다고 주장할 가능성이 아주높다. 군사정권에 머리를 숙였던 역사는 슬쩍 감춰버리고, 목회직을 박탈당한 도시산업선교회목사들같은 분을 전면에 내세워 "한국 기독교는 민주화운동의 선봉장이었다!"라고 주장할 가능성이 아주 확실하다. 따라서 안티기독교 형제 여러분께서는 개신교의 행태를 두 눈 부릅뜨고 지켜 보아야 할 것이다.
끝으로 두산세계대백과를 검색해 보니 재미있는 자료가 눈에 띄었다. 놀랍게도 한국의 '반기독교운동'의 선구자들은 사회주의자들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친일과 제국주의의 앞잡이가된 기독교의 행각에 이를갈며 반기독교운동을 전개 해나갔다고 한다. 강도 높은 반기독교강연이 활발히 열렸으나 일본경찰과 기독교의 탄압으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일본 경찰이 왜 반기독교 운동을 탄압했을까? 답은 뻔하지 않겠는가!)
반기독교 선구자 선배님들의 활동내용을 여기 옮겨본다.
"반기독교운동(反基督敎運動)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개요:1920년대 사회주의 운동세력의 주도하에 진행된 기독교 배척운동. 언제 : 1920년대 누가 : 사회주의 운동세력 무엇을 : 기독교배척운동 어떻게 : 종교의 존재의의를 부정하고 반기독교의 입장을 표명
기독교계는 3 ·1운동의 준비와 전국적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지만, 일제의 기만적인 문화통치 하에서 타협적 성격을 드러냄으로써 반기독교운동을 자초하였다. 본래 미국인 선교사는 일제로부터 선교활동을 보장받는 대가로 교회의 비정치화를 강화시킴으로써, 한국 기독교인의 정치참여와 민족운동을 방해하였다. 더욱이 백인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일부 선교사의 모욕적인 인종차별이 한국인의 민족감정을 폭발시켰다. 한편 YMCA를 비롯한 기독교사회운동 진영도 3 ·1운동 이후 온건노선인 실력양성운동을 벌임으로써, 민족해방운동선상에서 일정한 한계를 나타냈다. 이 같은 기독교계 내부의 문제점이 반기독교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1920년대 초반 해외로부터 유입된 사회주의사상의 영향으로 종교, 특히 기독교의 특성에 대한 인식이 심화된 데 있다. 이 당시 사회주의자의 기독교 비판논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기독교는 자본주의의 이익 관철 및 제국주의의 식민지 침탈을 위한 유용한 도구로서 기능한다. 둘째, 현실에 대한 긍정과 복종을 강요하여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말살시킨다. 셋째, 과학사상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미신과 허위를 선전하는 시대착오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논지하에1923년 3월 전조선청년당대회, 1924년 1월 경성신흥청년동맹회 등 사회주의계 청년운동으로부터 반기독교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종교의 존재의의를 부정하고 반기독교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반기독교운동은 1925년 10월 한양청년동맹이 개최한 반기독교대강연회이었다. 이것은 기독교계가 준비한 제2회 전조선주일학교대회에 대한 조직적인 저항의 방편으로 기획되었다. 박헌영(朴憲永)의 ‘과학과 종교’, 김장현의 ‘지배계급과 기독교’, 허정숙(許貞淑)의 ‘현하(現下) 조선과 기독교의 해독(害毒)’ 등 강도높은 반기독교 강연이 준비되었다. 그러나 이 강연회는 끝내 일본경찰의 탄압과 기독교측의 방해로 무산되었고, 이를 두고 사회주의자는 일제와 기독교가 유착되어 있는 증거라고 대대적인 선전활동을 벌임으로써, 기독교계와 사회주의계와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한편, 기독교계 일부에서는 반기독교운동과 관련하여 자기비판의 움직임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YMCA의 진보적 이론가는 사회주의계의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하여 기독교계가 현실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신흥우(申興雨) ·이대위 ·조병옥(趙炳玉) 등은 종래 기독교계가 복음만을 강조해온 것을 비판하고, 경제 ·사회분야의 여러 문제점을 신학과 관련지어 분석하였다. 특히 이대위는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연원 및 근본사상을 비교 분석하여 양자의 접목을 시도함으로써, ‘기독교 사회주의’라 불리는 독특한 사상체계를 실험하였다. 요컨대, 반기독교운동은 사회주의 이론으로 무장한 청년단체가 기독교의 본질적 부분에 대한 비판을 감행함으로써, 기독교계와 사회주의 진영의 갈등을 증폭시킨 사건이었다."
한국교회인들이 성지라고말하는 제암리진실
제암리에서 일제에게 학살당한 주민중 대다수가 천도교인이었고 나머지는 기독교인 몇 명과 기타종교, 무신론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일본헌병은 단지 '대량 학살장소을 자행하기 위해 기독교의 예배당을 선택'한 것일 뿐인데, 기독교는 재빨리 자신들의 성지로 만들어 놓았다.
이 사건에 대한 또 다른 사료로써, 1998년 11월 4일 일본의 참의원 방한단으로 국내에 온 하시모토의원은 학살 관련 외교문서 복사본을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다. 일본 공산당 하시모토 아치(4선)의원은 독립기념관을 찾아와 박유철 관장에게 전해준 문서에는 당시 조선총독이던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1919년 4월 22일 오후 1시 50분 일본의 총리대신 앞으로 보낸 것으로, 펜으로 쓴 육필이 5장, 사건전모를 요약 정리한 내용 1장 등으로 모두 6장이었다.
이 문건에 따르면 수원군 발안장에 파견된 보병중위 12명은 4월 15일 부근 주재순사를 동행, 제암리 기독교회당에 천도교인과 기독교인 약 25명을 집합시켜 전부를 사살하고 불을 질렀다. 문건의 내용은 이 사건이 군대와 경찰의 위신에 관련되고 외국인들이 비난할 소지가 있으니 철저하게 은폐하겠다는 내용으로 끝난다. 문서를 건네준 하시모토 의원은 을사보호조약 체결에 항의해서 자결한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선생에게 헌화했다고 한다.
일본측의 외교문서에서도 천도교인과 기독교인들을 교회로 몰아넣어 학살을 자행했다고 언급되어있다. 그런데 어느순간에 학살당한 사람들이 전부 기독교인으로 둔갑되어 버렸다! 일제에 의해 사망한 천도교인들을 기독교인들이 또 한번 죽인셈이다. 이 얼마나 파렴치한 행각인가! 만약 기독교의 독립운동이 활발했고, 항일운동에 대한 풍부한 역사적 증거가 있었다면 이러한 역사왜곡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의 항일역사가 너무도 빈약해서 이렇게까지 할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뉴스엔조이에서도 이 문제를 언급한바 있는데, 관련기사를 한 번 보도록 하자.
"한 예를 소개하겠다. 1971년에 명예 박사학위를 두개나 가지고 해방후 KNCC 회장까지 지낸 교계의 어떤 거물급 목사님이 《말씀 따라 한 평생》이라는 430여페이지에 이르는 자신의 자서전을 펴냈다. 이 목사님은 그의 자서전에 자신의 명예 박사학위 축하예배 순서지까지 전재하여 10여 페이지에 걸쳐서 서술하면서도,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시기인 1930년대 중반부터 1945년에 이르는 10년간의 시기는 단 두페이지 반으로 줄여서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렇게 10여년을 지내는 동안 시대는 더욱 각박해졌고 종교탄압은 날로 극심해만 갔다. 이윽고 [대동아전쟁]이 발발하였다. 점점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자 일제의 발악은 더욱 심해졌다. 전쟁마당에 강제로 이 나라의 청장년들을 징병 혹은 징용이란 이름 아래 사지(死地)로 끌려 들어 갔고 심지어는 교회당의 종까지도 무기 제조를 위해 헌납을 강요당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종교인들은 이들의 건국신(建國神)인 [아마데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를 모시는 신사참배와 가정마다 [가미다나]라는 천조대신의 위패를 모시라는 것이다. 따라서 성수주일(聖守主日)을 방해하기 위하여 주일이면 보국대에 동원을 지시하고 찬송가도 압수하여 황국신민의 사상고취에 영향을 끼칠만한 가사는 모조리 검은 잉크로 지워서 되돌려주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탄압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판국에서도 나는 용기를 잃지 않고 계속 교회발전을 위해 목숨을 내걸고 노력해왔다.---
이런 기록을 대할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는가? 여기에 기록한 것들은 모두 일반적인 일제의 탄압 실상에 대한 것뿐이고, 자서전인데도 여기서 자신에 관한 언급은 맨 마지막 단 한 구절 뿐이다. 그리고 그것도 그가 성직자임에도 불구하고 사실과는 거리가 먼 거짓된 기록을 하고 있다. 이 기록을 그대로 믿는다면 이 목사님은 일제의 가혹한 핍박 중에도 교회를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한 신앙의 용사처럼 보인다.......(중략)......
그의 자서전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이러한 부일협력에 대한 참회의 문구는 한 마디도 없다. 이것은 해방 후 기독교계가 일제의 잔재청산에 실패하였으며, 해방된지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이의 극복은커녕 반성하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이야기해 주고 있다."
[뉴스엔조이 2002-05-06 조선교회가 섬긴 3위 '하느님, 돈, 일본' 김승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실장)]
뉴스엔조이의 기사는 참으로 많은 것은 우리에게 시사해준다.
친일행위에 사죄하지 않고, 자신의 행위를 은글슬쩍 미화하는 자서전을 쓴 거물급목사.....
이 얼마나 파렴치한 일인가!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종교지도자가 어찌 무신론자들보다도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지!
이제 대한민국은 민주사회로 발전했다.
부끄러운 친일행위를 감추고 오히려 항일운동을 했다는 큰소리치는 기독교의 모습으로 볼 때, 수십년후 그들은 역사를 조작해서 기독교가 민주화 운동을 했다고 주장할 가능성이 아주높다. 군사정권에 머리를 숙였던 역사는 슬쩍 감춰버리고, 목회직을 박탈당한 도시산업선교회목사들같은 분을 전면에 내세워 "한국 기독교는 민주화운동의 선봉장이었다!"라고 주장할 가능성이 아주 확실하다. 따라서 안티기독교 형제 여러분께서는 개신교의 행태를 두 눈 부릅뜨고 지켜 보아야 할 것이다.
끝으로
두산세계대백과를 검색해 보니 재미있는 자료가 눈에 띄었다. 놀랍게도 한국의 '반기독교운동'의 선구자들은 사회주의자들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친일과 제국주의의 앞잡이가된 기독교의 행각에 이를갈며 반기독교운동을 전개 해나갔다고 한다. 강도 높은 반기독교강연이 활발히 열렸으나 일본경찰과 기독교의 탄압으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일본 경찰이 왜 반기독교 운동을 탄압했을까? 답은 뻔하지 않겠는가!)
반기독교 선구자 선배님들의 활동내용을 여기 옮겨본다.
"반기독교운동(反基督敎運動)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개요:1920년대 사회주의 운동세력의 주도하에 진행된 기독교 배척운동.
언제 : 1920년대
누가 : 사회주의 운동세력
무엇을 : 기독교배척운동
어떻게 : 종교의 존재의의를 부정하고 반기독교의 입장을 표명
기독교계는 3 ·1운동의 준비와 전국적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지만, 일제의 기만적인 문화통치 하에서 타협적 성격을 드러냄으로써 반기독교운동을 자초하였다. 본래 미국인 선교사는 일제로부터 선교활동을 보장받는 대가로 교회의 비정치화를 강화시킴으로써, 한국 기독교인의 정치참여와 민족운동을 방해하였다. 더욱이 백인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일부 선교사의 모욕적인 인종차별이 한국인의 민족감정을 폭발시켰다. 한편 YMCA를 비롯한 기독교사회운동 진영도 3 ·1운동 이후 온건노선인 실력양성운동을 벌임으로써, 민족해방운동선상에서 일정한 한계를 나타냈다. 이 같은 기독교계 내부의 문제점이 반기독교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1920년대 초반 해외로부터 유입된 사회주의사상의 영향으로 종교, 특히 기독교의 특성에 대한 인식이 심화된 데 있다. 이 당시 사회주의자의 기독교 비판논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기독교는 자본주의의 이익 관철 및 제국주의의 식민지 침탈을 위한 유용한 도구로서 기능한다. 둘째, 현실에 대한 긍정과 복종을 강요하여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을 말살시킨다. 셋째, 과학사상의 눈부신 발전에도 불구하고 미신과 허위를 선전하는 시대착오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논지하에1923년 3월 전조선청년당대회, 1924년 1월 경성신흥청년동맹회 등 사회주의계 청년운동으로부터 반기독교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종교의 존재의의를 부정하고 반기독교의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반기독교운동은 1925년 10월 한양청년동맹이 개최한 반기독교대강연회이었다. 이것은 기독교계가 준비한 제2회 전조선주일학교대회에 대한 조직적인 저항의 방편으로 기획되었다. 박헌영(朴憲永)의 ‘과학과 종교’, 김장현의 ‘지배계급과 기독교’, 허정숙(許貞淑)의 ‘현하(現下) 조선과 기독교의 해독(害毒)’ 등 강도높은 반기독교 강연이 준비되었다. 그러나 이 강연회는 끝내 일본경찰의 탄압과 기독교측의 방해로 무산되었고, 이를 두고 사회주의자는 일제와 기독교가 유착되어 있는 증거라고 대대적인 선전활동을 벌임으로써, 기독교계와 사회주의계와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한편, 기독교계 일부에서는 반기독교운동과 관련하여 자기비판의 움직임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YMCA의 진보적 이론가는 사회주의계의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하여 기독교계가 현실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신흥우(申興雨) ·이대위 ·조병옥(趙炳玉) 등은 종래 기독교계가 복음만을 강조해온 것을 비판하고, 경제 ·사회분야의 여러 문제점을 신학과 관련지어 분석하였다. 특히 이대위는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연원 및 근본사상을 비교 분석하여 양자의 접목을 시도함으로써, ‘기독교 사회주의’라 불리는 독특한 사상체계를 실험하였다. 요컨대, 반기독교운동은 사회주의 이론으로 무장한 청년단체가 기독교의 본질적 부분에 대한 비판을 감행함으로써, 기독교계와 사회주의 진영의 갈등을 증폭시킨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