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1998년 미국 텍사스의 달라스에서 난생 처음으로 인생의 좌절을 맛보고 있을 때, 저에게 있어서 아버님과 같은 제 지도 교수님으로부터 받은 편지 입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풀리지 않아서 인생을 포기하고, 차라리 자살하고 싶을 만큼 답답했던 저의 26살 어려웠던 그 시절, 머나먼 달라스의 한 모텔방에서, 아래의 편지를 읽으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너의 편지를 읽고 반가움과 슬픔이 교차하여 어떻게 답장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 심정이 매우 착잡한 듯 하구나. 경제상황이 어렵고 특히 젊은이들에게 많은 고통을 주고 있으니 가슴 아픈 일이다. 모두가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니 어느 누구를 탓할 수도 없지 않느냐?
미국까지 가서 취업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마음대로 잘 정리되지 않아서 고통이 심할 것이다. 그러나 너에게 주어진 시련이라고 생각해라. 사회진출을 위한 준비기간을 더 많이 갖는다고 생각하고, 매사에 충실하기 바란다. 현실에 충실하다 보면 너에게도 좋은 기회가 올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지금 너에게 주어진 시련이 앞으로 너의 생활에 좋은 바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라. 그리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주기 바란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오늘의 어려운 시련을 추억 삼아 이야기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너만큼의 시련은 아니지만 나에게도 시련이 있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에 너와 마찬가지로 취업이 안되어 한 때 좌절했던 경험이 있었다. 나는 그 시절에 전공공부를 열심히 했고 지금 내가 교수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의 공부가 좋은 바탕이 되었음을 생각하면서 감사하고 있다. 그 시절 다른 학생들과 같이 빨리 취업이 되었다면 직장생활에 만족했을 것이고 평범한 사람으로 성장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의 시련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지금도 그 때의 시련을 생각하곤 하지만, 그러한 시련을 경험하지 않은 어느 누가 어렵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니?
시련을 슬기롭게 이겨나가는 자만이 성공할 수 있음을 명심하기 바란다. 네가 경험하고 있는 지금의 고통만큼은 아니지만 한 떼 어려운 시련을 경험한 나로서 너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네가 지금의 시련을 축복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너만큼 능력 있는 사람이 좌절하고 고통스러워 한다면 너만 못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은 얼마나 심하겠니? 너무 실망하지 말기를 바란다.
경제환경이 호전되고 있다고 하니 머지 않아 너에게도 좋은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지금의 시련이 너에게 어학은 물론 시련을 이겨나갈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기 바란다. 인생을 흔히 마라톤에 비유하지 않더냐! 마라톤은 철저한 준비 없이 완주할 수 없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남보다 일찍 출발한다고 종점에 일찍 도착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네가 마라톤의 출발점에서 완주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서두르지 말고 차분히 준비하면 너에게도 좋은 기회가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K 군, 힘들고 어렵겠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여유를 갖기 바란다. 아무쪼록 건강하고 좋은 경험을 쌓기 바란다. 귀국할 때는 어엿한 청년이 되기를 바란다. 취업으로 너무 속상해 하거나 고민하지 말고 주어진 일에 충실하기를 바란다.
1996년, 5월, 5년간 사귀었던 그녀가 절교를 선언했습니다. 저보다 훨씬 더 좋은 남자를 만나서 잘 살 것이라는 말을 남긴 채……
저를 버리고 떠난, 그녀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복수를 하는 방법을 생각한 결과는 좋은 데 취직하고 그녀보다 더 예쁘고 착한 여자를 만나서 행복하게 잘 사는 방법뿐이었죠. ㅡ.ㅜ
그 후로 1년 반 동안 저는 정신 없이 공부를 하였고, 그 결과 1999년 10월에 우리나라 최고의 연구기관인 K 연구소와 국내 굴지의 K은행, C은행, P제철 등에서 주관한 공모전에서 연속으로 모두 입상함으로써, 수천만원에 달하는 상금과 함께 이들 모두로부터 대학원 졸업 후 채용보장을 약속 받았습니다. ^O^
우리나라 최고의 연구소 연구원으로의 취업보장과 이런 저를 우러러 보는 학교내의 여러 선후배, 그리고 동료들. 저의 미래는 확실히 보장이 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매일 저녁 학교 선후배들이 취업 때문에 걱정할 때, 나는 ‘어디를 골라서 갈까’ 하는 행복한 고민을 하다가 잠이 들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의 이러한 장밋빛 꿈은 12월 우리나라가 IMF사태를 맞게 되면서 와장창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철떡같이 믿었던 연구소에서는 채용 취소를 통보해왔고, 서로 앞다투어 저를 스카우트 하려 했던 여러 금융기관들이 줄줄이 망한 것입니다. ㅡ.ㅡ
졸지에 실업자 신세로 대학원을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대기업은 말할 것도 없이, 중소기업들도 그들의 취업 문을 꽁꽁 닫아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절망으로 가득 찬 백수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백수생활을 시작한지 6개월 정도가 흘렀을까요, 저녁에 집에 들어와서 방에 걸려있는 거울을 통해서 실업자 신세로 사회에 내동댕이 쳐진 저의 초라한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죠. 불과 6개월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예전의 자신감 넘치고 당당하던 저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잘나가던 저를 졸지에 이렇게 실업자 신세로 만든 우리 대한민국에 대한 증오와, 2년 전 저를 버리고 떠난 그녀가 지금의 초라한 내 모습을 보고 뒤에서 웃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계속해서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날 이제껏 못난 아들 하나만 보고 살아오신 부모님 생각이 나서 도저히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당장 이 나라를 떠나고 싶은 생각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뜬눈으로 밤을 새워서 눈이 벌개진 저는 부모님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저, 미국에 가고 싶어요, 이 나라가 너무 싫습니다.” 부모님은 이런 저를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젊을 때 해보고 싶은 거 다 해보라고 격려의 말씀을 해 주신 후, 작년에 받은 상금이 들어있는 통장을 건네 주셨습니다.
미국에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미국인하고 국제결혼을 해서 미국 ARKANSAS주에 살고 있다는 우리집 위층 할머님의 따님(이하 아주머니로 호칭)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그곳에 전화를 걸어서 무작정 며칠만 신세를 지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이후에는 제가 스스로 알아서 책임지겠다는 조건으로 미국 ARKANSAS행 비행기표를 들고 우리 대한민국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 마음과 함께, 이 나라를 등지고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다시는 이 나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가지고 말이죠. @_@
2. 썬더버드냐, 크라운 빅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미국에 도착하자 마자, 그 나라 운전면허증이 아니면, 차를 사더라도 보험에는 들 수 없다고 해서 시험을 봐서 미국 ARKANSAS주의 운전면허를 취득 했습니다.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한 후,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그 다음날 바로 차를 사기 위해서 중고차 경매시장으로 향했습니다.
경매시장에서 저의 눈길을 잡는 차 두 대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정통 스포츠카인 썬더버드와, 미국 ARKANSAS 주 경찰에서 쓰다가 다소 낡아서 처분을 하려고 하는 8기통의 대형 세단인 크라운 빅토리아 라는 차종이었는데, 한참 고민을 하다가 최종적으로 크라운 빅토리아로 결정을 했습니다. (이 결정이 10일 후 저의 목숨을 구해준 결정이 될 것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_@)
가뜩이나 미국의 기름값도 싼데, 이럴때 기름 풍풍 쓰지 언제 써보느냐는 심정으로 결정을 했는데, 멋있는 걸로 따지자면 썬더버드가 훨씬 더 멋이 있었지만, 웬지 초대형 세단의 차를 타고 싶었습니다.
차를 사고 바로 미국 서부일주를 해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짐을 바리바리 싸서 나의 애마인 크라운 빅토리아에 모두 실은 후, 아주머니와 작별을 하고 40번 도로를 타고 무작정 서쪽으로 향했습니다.
각 주별로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는 지면 관계상 주요 사건에 대해서만 1줄로 요약을 하였습니다. 대신에 여행의 마지막 날, 가장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 ARKANSAS주의 사건에 대해만 그 아래에 설명을 하였습니다.
해당 주 주요 사건
OKLAHOMA 오클라호마, 그 끝없는 평야
TEXAS (달라스) 달라스 외곽순환도로 위에서 트럭 운전수와 혈투를 벌이다
NEW MEXICO 끝없는 돌산, 맛없는 햄버거의 추억
AROZONA 떨어지고 싶은 유혹, 그랜드캐년
CALIFORNIA 라스베가스의 전당포가 날 부른다
UTAH 도를 아십니까? - 몰몬교의 고향
COLORADO 여기가 천당인가요? - It’s Really beautiful
KANSAS KANSAS City에서 빠져 나오기 위한 3시간의 혈투
MISSOURI 50달러 아끼려다 500달러 날리다.
ARKANSAS Turning Point: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교통사고
3. Turning Point: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교통사고
여행을 시작한지 거의 10일이 다 되어가는 날이었습니다. 혼자서 쉬지 않고 운전을 계속해서 그런지, 눈이 가물가물 거리더니 어느새 저는 잠이 들어 버렸습니다. 시속 150km의 속도에서 말입니다. @_@
끼이이이익…하는 소리에 놀라 눈을 떠보니 이미 차는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한 바퀴를 굴러 두바퀴,,,저는 다시 정신을 잃었습니다. 아이고, 머나먼 이국 땅에서 이제 진짜 죽는구나.. T.T
어느덧 10m 언덕 아래로 제 차는 굴러 떨어져 있었고, 불행 중 다행으로 차는 폭파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느새 지나가던 미국인들이 차를 세워서 언덕으로 내려와 주위를 삥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제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무엇을 했는지 아십니까? 온몸을 재빠르게 더듬으면서 얼굴에 상처는 나지 않았는지.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간 것은 아닌지를 확인을 하고는 차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왔습니다. 정말로 신기하게도 다친 곳이 없었습니다. 언덕을 내려와서 저를 둘러싼 미국인들이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O^ ^O^ ^O^ ^O^ ^O^
He’s alive, He’s alive! (이 사람이 살아 있어요!) @_@ 잉?
제가 멀쩡한 것을 확인한 그들은 방금 견인차를 불렀으니, 1시간이면 도착할 거라고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미국인들은 모두 제각기 갈길로 떠났고, 저 혼자 언덕길 아래에 남아서 땅바닥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그 언덕에서 저는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고 삶 자체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삶을 버리고 자살을 생각했던, 제 자신이 미련해 보였습니다. 이 세상에 제 목숨이 있는 한 열심히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시간 뒤, 견인차가 왔고 차를 빼낸 후, 저는 바로 한국으로 돌아 왔습니다.
4. Epilogue: 미국여행, 3년 후 ? 2002년 10월
그 후로 저는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미국에서 돌아온 후 다소 경기가 호전이 되어서 그런지 바로 모 컨설팅 회사에 입사를 하게 되었고, 다시 1년 후 2000년 몰아 닥친 벤처열풍을 타고 저도 벤처회사의 창업멤버가 되어서 눈코 뜰 새 없는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제 마음 한구석에는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항상 남아 있었습니다.
바쁜 와중에도 저는 글을 열심히 썼습니다. 앞의 W 교수님의 편지에서 처럼 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이 조금이라도 있을 때, 놓지지 않고 평소에 하고 싶었던 책을 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도 했고, 칼럼니스트로써 현재도 열심히 경제칼럼을 여러 곳에 게제하고 있습니다.
2000년 겨울, 사람들의 이름만 입력하면 그 사람의 주소와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는 사이트를 우연히 알게 된 저는, 그 사이트에 접속을 해서 이리저리 돌아 다니는데, 갑자기 마음속의 그녀가 생각이 났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입력하자, 그녀의 이메일 주소를 알려 주더군요. 순간 저는 매우 놀랐습니다. 상세 학력과 생년월일 정보를 보니 그녀가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 날부터 저는 1달 동안 잠을 자지 못하고 밤새도록 고민을 했습니다. 많은 고민 끝에, 그녀에게 저는 안부메일을 하나 보냈습니다. 그녀가 당연히 결혼을 했을 거라고 생각한 저는 그녀한테 남편과 이이들이랑 행복하게 잘 살라는 메일을 보냈습니다. 답장은 기대도 하지 않고 말이죠. ㅡ.ㅜ
어.. 그런데 1주일 후, 그녀에게서 답장이 왔습니다. @_@
5년 만에 제가 연락을 해서 매우 놀랐다는 내용과 저도 행복하게 잘 살라는 내용이었죠, 그리고 그 밑에 추신 한 구절이 있었습니다.
“나, 그런데 아직 결혼 안 했어..웬 남편과 애들? ^^”
그 후 2년에 걸친 저의 끈질긴 구애 끝에, 73년 소띠 동갑인 저랑 그녀는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1992년 이니, 정확하게 10년 만에 결혼을 한 거네요. ( 이글을 쓰는 시기는 결혼 후 3년 이 지난 시점 입니다. ^^, 현재는 원없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와이프는 제 옆에서 지금 곤히 잠들어 있네요. )
(PS)
결혼 후 6개월 뒤, 상기에서 제가 사고가 났었던 미국 텍사스 지역을 모 신문사의 도움으로 와이프랑 같이 여행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아래는 와이프와 같이 미국에 자동차 여행을 했었던 일을 일자별로 정리를 한 것입니다.
나의 인생의 전환점이 된, 미국 서부 자동차 여행기
아래는 1998년 미국 텍사스의 달라스에서 난생 처음으로 인생의 좌절을 맛보고 있을 때, 저에게 있어서 아버님과 같은 제 지도 교수님으로부터 받은 편지 입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풀리지 않아서 인생을 포기하고, 차라리 자살하고 싶을 만큼 답답했던 저의 26살 어려웠던 그 시절, 머나먼 달라스의 한 모텔방에서, 아래의 편지를 읽으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0.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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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군 에게
보내준 편지 잘 받았다.
너의 편지를 읽고 반가움과 슬픔이 교차하여 어떻게 답장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 심정이 매우 착잡한 듯 하구나. 경제상황이 어렵고 특히 젊은이들에게 많은 고통을 주고 있으니 가슴 아픈 일이다. 모두가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니 어느 누구를 탓할 수도 없지 않느냐?
미국까지 가서 취업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마음대로 잘 정리되지 않아서 고통이 심할 것이다. 그러나 너에게 주어진 시련이라고 생각해라. 사회진출을 위한 준비기간을 더 많이 갖는다고 생각하고, 매사에 충실하기 바란다. 현실에 충실하다 보면 너에게도 좋은 기회가 올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지금 너에게 주어진 시련이 앞으로 너의 생활에 좋은 바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라. 그리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주기 바란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오늘의 어려운 시련을 추억 삼아 이야기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너만큼의 시련은 아니지만 나에게도 시련이 있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에 너와 마찬가지로 취업이 안되어 한 때 좌절했던 경험이 있었다. 나는 그 시절에 전공공부를 열심히 했고 지금 내가 교수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의 공부가 좋은 바탕이 되었음을 생각하면서 감사하고 있다. 그 시절 다른 학생들과 같이 빨리 취업이 되었다면 직장생활에 만족했을 것이고 평범한 사람으로 성장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의 시련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지금도 그 때의 시련을 생각하곤 하지만, 그러한 시련을 경험하지 않은 어느 누가 어렵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니?
시련을 슬기롭게 이겨나가는 자만이 성공할 수 있음을 명심하기 바란다. 네가 경험하고 있는 지금의 고통만큼은 아니지만 한 떼 어려운 시련을 경험한 나로서 너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네가 지금의 시련을 축복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너만큼 능력 있는 사람이 좌절하고 고통스러워 한다면 너만 못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은 얼마나 심하겠니? 너무 실망하지 말기를 바란다.
경제환경이 호전되고 있다고 하니 머지 않아 너에게도 좋은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지금의 시련이 너에게 어학은 물론 시련을 이겨나갈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기 바란다. 인생을 흔히 마라톤에 비유하지 않더냐! 마라톤은 철저한 준비 없이 완주할 수 없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남보다 일찍 출발한다고 종점에 일찍 도착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네가 마라톤의 출발점에서 완주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서두르지 말고 차분히 준비하면 너에게도 좋은 기회가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K 군, 힘들고 어렵겠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여유를 갖기 바란다. 아무쪼록 건강하고 좋은 경험을 쌓기 바란다. 귀국할 때는 어엿한 청년이 되기를 바란다. 취업으로 너무 속상해 하거나 고민하지 말고 주어진 일에 충실하기를 바란다.
다음에 또 연락하자.
1999년 3월 6일, 너의 인생의 선배 W 교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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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녀의 결별 선언
1996년, 5월, 5년간 사귀었던 그녀가 절교를 선언했습니다. 저보다 훨씬 더 좋은 남자를 만나서 잘 살 것이라는 말을 남긴 채……
저를 버리고 떠난, 그녀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복수를 하는 방법을 생각한 결과는 좋은 데 취직하고 그녀보다 더 예쁘고 착한 여자를 만나서 행복하게 잘 사는 방법뿐이었죠. ㅡ.ㅜ
그 후로 1년 반 동안 저는 정신 없이 공부를 하였고, 그 결과 1999년 10월에 우리나라 최고의 연구기관인 K 연구소와 국내 굴지의 K은행, C은행, P제철 등에서 주관한 공모전에서 연속으로 모두 입상함으로써, 수천만원에 달하는 상금과 함께 이들 모두로부터 대학원 졸업 후 채용보장을 약속 받았습니다. ^O^
우리나라 최고의 연구소 연구원으로의 취업보장과 이런 저를 우러러 보는 학교내의 여러 선후배, 그리고 동료들. 저의 미래는 확실히 보장이 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매일 저녁 학교 선후배들이 취업 때문에 걱정할 때, 나는 ‘어디를 골라서 갈까’ 하는 행복한 고민을 하다가 잠이 들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의 이러한 장밋빛 꿈은 12월 우리나라가 IMF사태를 맞게 되면서 와장창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철떡같이 믿었던 연구소에서는 채용 취소를 통보해왔고, 서로 앞다투어 저를 스카우트 하려 했던 여러 금융기관들이 줄줄이 망한 것입니다. ㅡ.ㅡ
졸지에 실업자 신세로 대학원을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대기업은 말할 것도 없이, 중소기업들도 그들의 취업 문을 꽁꽁 닫아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절망으로 가득 찬 백수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백수생활을 시작한지 6개월 정도가 흘렀을까요, 저녁에 집에 들어와서 방에 걸려있는 거울을 통해서 실업자 신세로 사회에 내동댕이 쳐진 저의 초라한 모습을 바라보게 되었죠. 불과 6개월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예전의 자신감 넘치고 당당하던 저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잘나가던 저를 졸지에 이렇게 실업자 신세로 만든 우리 대한민국에 대한 증오와, 2년 전 저를 버리고 떠난 그녀가 지금의 초라한 내 모습을 보고 뒤에서 웃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계속해서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날 이제껏 못난 아들 하나만 보고 살아오신 부모님 생각이 나서 도저히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당장 이 나라를 떠나고 싶은 생각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뜬눈으로 밤을 새워서 눈이 벌개진 저는 부모님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저, 미국에 가고 싶어요, 이 나라가 너무 싫습니다.” 부모님은 이런 저를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젊을 때 해보고 싶은 거 다 해보라고 격려의 말씀을 해 주신 후, 작년에 받은 상금이 들어있는 통장을 건네 주셨습니다.
미국에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미국인하고 국제결혼을 해서 미국 ARKANSAS주에 살고 있다는 우리집 위층 할머님의 따님(이하 아주머니로 호칭)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그곳에 전화를 걸어서 무작정 며칠만 신세를 지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이후에는 제가 스스로 알아서 책임지겠다는 조건으로 미국 ARKANSAS행 비행기표를 들고 우리 대한민국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 마음과 함께, 이 나라를 등지고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다시는 이 나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가지고 말이죠. @_@
2. 썬더버드냐, 크라운 빅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미국에 도착하자 마자, 그 나라 운전면허증이 아니면, 차를 사더라도 보험에는 들 수 없다고 해서 시험을 봐서 미국 ARKANSAS주의 운전면허를 취득 했습니다.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한 후,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그 다음날 바로 차를 사기 위해서 중고차 경매시장으로 향했습니다.
경매시장에서 저의 눈길을 잡는 차 두 대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정통 스포츠카인 썬더버드와, 미국 ARKANSAS 주 경찰에서 쓰다가 다소 낡아서 처분을 하려고 하는 8기통의 대형 세단인 크라운 빅토리아 라는 차종이었는데, 한참 고민을 하다가 최종적으로 크라운 빅토리아로 결정을 했습니다. (이 결정이 10일 후 저의 목숨을 구해준 결정이 될 것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_@)
가뜩이나 미국의 기름값도 싼데, 이럴때 기름 풍풍 쓰지 언제 써보느냐는 심정으로 결정을 했는데, 멋있는 걸로 따지자면 썬더버드가 훨씬 더 멋이 있었지만, 웬지 초대형 세단의 차를 타고 싶었습니다.
차를 사고 바로 미국 서부일주를 해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짐을 바리바리 싸서 나의 애마인 크라운 빅토리아에 모두 실은 후, 아주머니와 작별을 하고 40번 도로를 타고 무작정 서쪽으로 향했습니다.
각 주별로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는 지면 관계상 주요 사건에 대해서만 1줄로 요약을 하였습니다. 대신에 여행의 마지막 날, 가장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 ARKANSAS주의 사건에 대해만 그 아래에 설명을 하였습니다.
해당 주 주요 사건
OKLAHOMA 오클라호마, 그 끝없는 평야
TEXAS (달라스) 달라스 외곽순환도로 위에서 트럭 운전수와 혈투를 벌이다
NEW MEXICO 끝없는 돌산, 맛없는 햄버거의 추억
AROZONA 떨어지고 싶은 유혹, 그랜드캐년
CALIFORNIA 라스베가스의 전당포가 날 부른다
UTAH 도를 아십니까? - 몰몬교의 고향
COLORADO 여기가 천당인가요? - It’s Really beautiful
KANSAS KANSAS City에서 빠져 나오기 위한 3시간의 혈투
MISSOURI 50달러 아끼려다 500달러 날리다.
ARKANSAS Turning Point: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교통사고
3. Turning Point: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교통사고
여행을 시작한지 거의 10일이 다 되어가는 날이었습니다. 혼자서 쉬지 않고 운전을 계속해서 그런지, 눈이 가물가물 거리더니 어느새 저는 잠이 들어 버렸습니다. 시속 150km의 속도에서 말입니다. @_@
끼이이이익…하는 소리에 놀라 눈을 떠보니 이미 차는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한 바퀴를 굴러 두바퀴,,,저는 다시 정신을 잃었습니다. 아이고, 머나먼 이국 땅에서 이제 진짜 죽는구나.. T.T
어느덧 10m 언덕 아래로 제 차는 굴러 떨어져 있었고, 불행 중 다행으로 차는 폭파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느새 지나가던 미국인들이 차를 세워서 언덕으로 내려와 주위를 삥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제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무엇을 했는지 아십니까? 온몸을 재빠르게 더듬으면서 얼굴에 상처는 나지 않았는지.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간 것은 아닌지를 확인을 하고는 차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왔습니다. 정말로 신기하게도 다친 곳이 없었습니다. 언덕을 내려와서 저를 둘러싼 미국인들이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O^ ^O^ ^O^ ^O^ ^O^
He’s alive, He’s alive! (이 사람이 살아 있어요!) @_@ 잉?
제가 멀쩡한 것을 확인한 그들은 방금 견인차를 불렀으니, 1시간이면 도착할 거라고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미국인들은 모두 제각기 갈길로 떠났고, 저 혼자 언덕길 아래에 남아서 땅바닥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그 언덕에서 저는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고 삶 자체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삶을 버리고 자살을 생각했던, 제 자신이 미련해 보였습니다. 이 세상에 제 목숨이 있는 한 열심히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시간 뒤, 견인차가 왔고 차를 빼낸 후, 저는 바로 한국으로 돌아 왔습니다.
4. Epilogue: 미국여행, 3년 후 ? 2002년 10월
그 후로 저는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미국에서 돌아온 후 다소 경기가 호전이 되어서 그런지 바로 모 컨설팅 회사에 입사를 하게 되었고, 다시 1년 후 2000년 몰아 닥친 벤처열풍을 타고 저도 벤처회사의 창업멤버가 되어서 눈코 뜰 새 없는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제 마음 한구석에는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항상 남아 있었습니다.
바쁜 와중에도 저는 글을 열심히 썼습니다. 앞의 W 교수님의 편지에서 처럼 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이 조금이라도 있을 때, 놓지지 않고 평소에 하고 싶었던 책을 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도 했고, 칼럼니스트로써 현재도 열심히 경제칼럼을 여러 곳에 게제하고 있습니다.
2000년 겨울, 사람들의 이름만 입력하면 그 사람의 주소와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는 사이트를 우연히 알게 된 저는, 그 사이트에 접속을 해서 이리저리 돌아 다니는데, 갑자기 마음속의 그녀가 생각이 났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입력하자, 그녀의 이메일 주소를 알려 주더군요. 순간 저는 매우 놀랐습니다. 상세 학력과 생년월일 정보를 보니 그녀가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 날부터 저는 1달 동안 잠을 자지 못하고 밤새도록 고민을 했습니다. 많은 고민 끝에, 그녀에게 저는 안부메일을 하나 보냈습니다. 그녀가 당연히 결혼을 했을 거라고 생각한 저는 그녀한테 남편과 이이들이랑 행복하게 잘 살라는 메일을 보냈습니다. 답장은 기대도 하지 않고 말이죠. ㅡ.ㅜ
어.. 그런데 1주일 후, 그녀에게서 답장이 왔습니다. @_@
5년 만에 제가 연락을 해서 매우 놀랐다는 내용과 저도 행복하게 잘 살라는 내용이었죠, 그리고 그 밑에 추신 한 구절이 있었습니다.
“나, 그런데 아직 결혼 안 했어..웬 남편과 애들? ^^”
그 후 2년에 걸친 저의 끈질긴 구애 끝에, 73년 소띠 동갑인 저랑 그녀는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1992년 이니, 정확하게 10년 만에 결혼을 한 거네요. ( 이글을 쓰는 시기는 결혼 후 3년 이 지난 시점 입니다. ^^, 현재는 원없이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와이프는 제 옆에서 지금 곤히 잠들어 있네요. )
(PS)
결혼 후 6개월 뒤, 상기에서 제가 사고가 났었던 미국 텍사스 지역을 모 신문사의 도움으로 와이프랑 같이 여행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아래는 와이프와 같이 미국에 자동차 여행을 했었던 일을 일자별로 정리를 한 것입니다.
모두 행복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