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준씨의 뜨거운 눈빛을 받는 중에 윤섭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괜히 눈치가 보이는 것 같아 나중에 전화를 하겠노라고 얼른 끊었다.
“윤섭이 형인가요?”
“예.”
“솔직하시군요. 저랑 같이 있다고는 말 안 하셨죠?”
“안했는데요.”
“왜요?”
“왠지. 음, 잘 모르겠어요.”
“좋지 않네요.”
“뭐가요?”
“사람이 양다리를 걸쳤을 때 한편에게는 솔직하고 다른 한편에게는 솔직하지 못하다. 어떤 사람을 더 마음에 두고 있을까요?”
“솔직한 사람이요?”
“아니요. 그 반대입니다. 왜 유부남들이 바람피우면 와이프한테는 말 못해도 바람피우는 상대에게는 유부남임을 밝히는 것과 같아요.”
“이상한 논리이군요.”
“부정하시는 건가요? 그건 윤섭형이 아니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저에게 더 호감이 있다는 뜻 같군요. 기분 좋습니다.”
참 제멋대로인 사람 같았다. 이상한 논리로 사람을 자기 편하게 해석하니 말이다. 우리는 근처 패밀리 레스토랑을 가기 위해 조금 걷기로 했다. 용준씨는 바람둥이 구석이 있긴 해도 시린 겨울 늑대 목도리로는 멋진 남자였다. 만약 춥지요, 하며 어깨 동무를 해왔다면 마이너스 점수를 주었을 텐데 이 남자는 바람을 막아주겠다고 앞 서 걷고 있었다.
“윤섭형이 만나자고 하던가요?”
“예?”
“아까 전화 왔잖아요. 내일 만나자고 하지 않았냐고요.”
“아니요. 말을 길게 못했어요.”
“아마 만나자고 할 겁니다. 그럼 만나세요. 제 눈치 보지 마시고.”
용준씨는 몸을 틀어 바로 내 앞에 가깝게 섰다.
“형과 정한 것이 있어요, 짝수 날은 저, 그리고 홀수 날은 윤섭형을 만나면 되요. 저는 두렵지 않아요. 이길 자신이 있으니까.”
“지금 뭐라고 하셨죠?”
“자신 있다고요.”
“그게 아니라 짝수 날, 홀수 날이요? 홀수 날은 윤섭씨를 만나라고요?”
“예.”
“싫어요!”
난 화가 나 갑작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이건 말도 안 되잖아요. 짝수 날 윤섭씨를 만나서는 안 된다는 건가요?”
“안 될 것은 없지만 아마 형이 만나주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정한 룰이거든요. 페어플레이를 약속했으니까. 매일 약속을 잡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건 너무 소비적이잖아요.”
“정말 웃긴 사람들이군요! 전 홀수 날이든 짝수 날이든 윤섭씨를 만날 수 있구요, 용준씨도 만날 수 있어요.”
“물론 문희씨 자유죠. 하지만 문희씨도 저희 룰에 따라주셨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저 이십육 년 동안 연애다운 연애 못해봤어요. 대학 때 커피 마시고 영화 보는 남자들 몇 명은 있었지만 연예를 한 건 아니었어요. 이제 저는 연애를 제대로 해 볼 생각이에요. 그동안 남자를 만나지 못했던 이유가 없어지는 바람에 아주 자유로워졌다고요. 전 남자들을 선택할 권리가 있어요. 그런데 두 사람은 저에게 단 두 명에서 한 명을 고르라고 하는군요. 제 남자는 제가 선택할 거예요. 둘 중의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남자들 중에서 고를 거라고요.”
“그래요. 문희씨는 선택권이 있죠. 남자를 줄 세워 놓고 골라도 될 만큼 매력적이에요. 그 부분은 인정합니다. 저 말은 그거예요. 절 선택하시라고. 그러시면 안 되는 건가요? 주저 없이 절 선택하면?”
용준씨의 말에는 두 손 두발을 다 들어버렸다. 화를 내는 여자 앞에서도 태연히 내게 오라고 손짓을 할 수 있는 여유. 그 여유로움에 난 오히려 무서워졌다.
***
용준씨와의 데이트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윤섭씨에게 전화가 왔다.
‘도대체 쉴 틈들을 안주는 군.’
“여보세요.”
- 저 윤섭입니다. 통화 가능하세요?
“예.”
- 아까는 바쁘신 것 같던데.
“그럴 일이 있었어요.”
두 남자의 관심을 동시에 받는다는 기쁨도 잠시 하루 종일 번갈아 가며 데이트를 하고 전화를 하다보니 내 시간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거만한 생각이 드는 걸까? 혼자였을 때가 좋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가 생각했던 달콤한 연애와는 너무나 달랐기에. 어서 빨리 한 남자를 택해 그에게 머무르고 싶어졌다. 하지만 성급하게 결정할 일은 아니었다.
- 용준이를 만났나요?
“예. 만났어요. 오늘은 짝수 날이잖아요.”
- 얘기를 들으셨군요.
“들었어요. 듣고는 아주 불쾌해 졌어요.”
- 그런 뜻으로 정한 것은 아닙니다. 불쾌하셨다면 용준이와 얘기해서 조정을 하도록 하지요.
“그 말씀 하러 전화하셨나요?”
내가 생각해도 너무 뻣뻣하게 굴고 있었다. 하지만 뭐 될 때까지 튕겨볼 생각이었다. 이런 성격도 받아줄 수 있는 남자라면 편하게 만날 수 있겠지, 라는 계산에. 나는 윤섭씨를 시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 저 내일 시간 괜찮으세요? 뵙고 싶은데.
“아니요. 만나고 싶지 않은데요. 내일은 피곤할 것 같아요. 오늘도 너무 피곤했거든요.”
- 용준이를 택하신 겁니까?
“아니요. 아니요. 그런 것 아니에요. 넘겨짚지 말아주세요.”
- 저는 문희씨가 용준이를 만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왜요?”
- 용준이 문희씨 생각만큼 좋은 녀석이 아니에요.
“지금 험담하시는 건가요? 듣기 좋지 않네요.”
- 저는 문희씨가 상처를 입으실까 걱정이 됩니다.
“상처를 입어도 제가 입는 거니 상관 말아 주시겠어요? 그리고 제 생각까지 읽으신 모양이죠? 제가 용준씨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시네요? 그럼 제가 윤섭씨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아시겠어요?”
- 오늘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그럼 다음에 통화를 하도록 하죠.
결국 내 신경질에 지친 걸까. 윤섭씨는 전화를 먼저 끊었다.
‘어머나! 남자가 너무 쩨쩨스럽다. 여자 투정 하나도 못 받아준다는 거야? 그리고 용준씨는 실컷 만나라고 하던데 왜 못 만나게 하는 거야? 자신이 없나부지 ? 아무튼 실망이다. 뒤에서 험담이나 하는 사람이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마음은 점점 복잡해져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 영화를 보는 기분이 되었다. 눈으로 보면 다 이해될 것 같으면서도 말을 알아들을 수 없으니 주인공의 심리 상태를 알 수 없는 것 같은 상황 말이다. 내 마음을, 내 자신의 바람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못했다. 하지만 정말 마음의 결정을 빨리 내려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채련아!”
- 니가 웬일이니? 난 네가 날 두 번 다시는 안 볼 줄 알았는데.
고민 끝에 남자 문제 박사인 채련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역시 채련의 말끝은 날카로웠다.
“잘 지내지?”
- 나야 잘 지내지. 그런데 네 목소리는 잘 지내지 못하는 것 같다.
예리한 기집애.
“맞아. 고민이 좀 생겼어.”
- 남자문제? 음. 용준씨랑 윤섭씨랑 누굴 택할지 고민이 되는 거겠군.
“어떻게 알았니?”
- 척하면 척이지 뭐.
“너 윤섭씨 형이랑 사귀니? 윤섭씨 얘기로는 그런 것 같던데.”
- 아니. 하지만 조만간 그렇게 되겠지. 사실 나도 고민이 생기니 네 생각이 나더라. 그래서 광화문에 갔었던 건데.
“그랬구나.”
채련이가 고민상담을 위해 오기 싫어하는 광화문까지 왔던 것을 왜 난 자랑을 하러 온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나의 오해로 그날은 좋지 않게 헤어져 버리게 되었고. 어쩌면 채련보다 더 남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일지 모르겠다. 내가 나빴어, 정말.
- 얘, 미안한 척 하지 마라. 너한테 안 어울려. 난 서로 미안하단 말 입에 발린 것 같아 싫더라, 얘.
“나 하나도 안 미안해! 그날은 니가 잘난 척을 하도 하니까 그렇게 된 거지, 뭐.”
- 그래. 그게 너한테 어울린다.
우리는 서로 이야기 나누는 방법을 알아가고 있었다. 모두들 같은 방식으로, 착한 척하며 얘길 나눌 필요는 없는 거다. 각자에 맞는 이야기법이 있듯이 친한 사이라면 미안하다는 말은 가끔 생략하는 것은 친밀감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채련아, 나 어떻게 하지?”
- 뭘 어떻게 해? 둘 다 만나면 되지.
“그건 양다리와 다를 것이 없잖아. 어차피 누군가를 택해야 하는데 그건 나중에 선택받은 사람이나 버림받은 사람이나 둘 다에게 너무 미안하잖아.”
- 그렇다고 만나보지도 않고 택할 수는 없는 거잖아.
“만약 이렇게 계속 만나다 어느 한 쪽이 먼저 따져 물으면 어떻게 해? 양다리라 비난 받는 건 싫단 말이야.”
- 따져 물으면 그냥 미안해요, 하면 되지. 싫으면 지들이 알아서 가겠지.
‘그렇게 간단한 걸까?’
“그건 너무 성의 없잖아.”
- 간단히 생각해. 어차피 만나지 않고는 누굴 택할 수는 없는 거잖아. 이런 문제는 아예 공개하는 편이 좋아. 그렇다고 너무 끄는 것도 좋지 않지. 각자 3번씩 만나봐. 미리 말을 하고 말이야. 그럼 두 사람도 이해해줄 테지.
“각자 3번씩?”
- 좋은 방법 아니야?
듣고 보니 좋은 방법 같았다. 한 남자를 세 번 만난다. 그 정도는 두 남자도 이해해줄 것이다. 그동안 나는 마음을 결정을 내리면 되고.
“좋은데! 정말 좋은 방법 같아. 그 전에 아무도 사귀지 않으면 양다리는 아니니까. 채련아, 고마워!”
- 고마우면 이 언니도 신경 좀 써줘라. 윤태씨 생각보다 만만치 않단 말이야.
우리는 그 후 좋은 패션 정보 사이트, 깜짝 놀랄만한 맛사지 방법, 각자에게 어울리는 옷 스타일등의 이야기를 나누다 전화를 끊었다. 어제의 적이 든든한 한 편이 되어 다시 만난 셈이었다.
잠들기 직전 채련이 말해준 맛사지를 했다. 얼굴이 따끔거리는 것이 정말 피부가 좋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각자 3번을 만난단 말이지. 3번이라. 정말 좋은 방법 같아. 내일 당장 두 남자에게 통보를 해 주어야지.’
말랑말랑 러브송 < 14 >
- 말랑송 처음편 보러가기-
14
용준씨의 뜨거운 눈빛을 받는 중에 윤섭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괜히 눈치가 보이는 것 같아 나중에 전화를 하겠노라고 얼른 끊었다.
“윤섭이 형인가요?”
“예.”
“솔직하시군요. 저랑 같이 있다고는 말 안 하셨죠?”
“안했는데요.”
“왜요?”
“왠지. 음, 잘 모르겠어요.”
“좋지 않네요.”
“뭐가요?”
“사람이 양다리를 걸쳤을 때 한편에게는 솔직하고 다른 한편에게는 솔직하지 못하다. 어떤 사람을 더 마음에 두고 있을까요?”
“솔직한 사람이요?”
“아니요. 그 반대입니다. 왜 유부남들이 바람피우면 와이프한테는 말 못해도 바람피우는 상대에게는 유부남임을 밝히는 것과 같아요.”
“이상한 논리이군요.”
“부정하시는 건가요? 그건 윤섭형이 아니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저에게 더 호감이 있다는 뜻 같군요. 기분 좋습니다.”
참 제멋대로인 사람 같았다. 이상한 논리로 사람을 자기 편하게 해석하니 말이다. 우리는 근처 패밀리 레스토랑을 가기 위해 조금 걷기로 했다. 용준씨는 바람둥이 구석이 있긴 해도 시린 겨울 늑대 목도리로는 멋진 남자였다. 만약 춥지요, 하며 어깨 동무를 해왔다면 마이너스 점수를 주었을 텐데 이 남자는 바람을 막아주겠다고 앞 서 걷고 있었다.
“윤섭형이 만나자고 하던가요?”
“예?”
“아까 전화 왔잖아요. 내일 만나자고 하지 않았냐고요.”
“아니요. 말을 길게 못했어요.”
“아마 만나자고 할 겁니다. 그럼 만나세요. 제 눈치 보지 마시고.”
용준씨는 몸을 틀어 바로 내 앞에 가깝게 섰다.
“형과 정한 것이 있어요, 짝수 날은 저, 그리고 홀수 날은 윤섭형을 만나면 되요. 저는 두렵지 않아요. 이길 자신이 있으니까.”
“지금 뭐라고 하셨죠?”
“자신 있다고요.”
“그게 아니라 짝수 날, 홀수 날이요? 홀수 날은 윤섭씨를 만나라고요?”
“예.”
“싫어요!”
난 화가 나 갑작스럽게 소리를 질렀다.
“이건 말도 안 되잖아요. 짝수 날 윤섭씨를 만나서는 안 된다는 건가요?”
“안 될 것은 없지만 아마 형이 만나주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정한 룰이거든요. 페어플레이를 약속했으니까. 매일 약속을 잡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는 건 너무 소비적이잖아요.”
“정말 웃긴 사람들이군요! 전 홀수 날이든 짝수 날이든 윤섭씨를 만날 수 있구요, 용준씨도 만날 수 있어요.”
“물론 문희씨 자유죠. 하지만 문희씨도 저희 룰에 따라주셨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저 이십육 년 동안 연애다운 연애 못해봤어요. 대학 때 커피 마시고 영화 보는 남자들 몇 명은 있었지만 연예를 한 건 아니었어요. 이제 저는 연애를 제대로 해 볼 생각이에요. 그동안 남자를 만나지 못했던 이유가 없어지는 바람에 아주 자유로워졌다고요. 전 남자들을 선택할 권리가 있어요. 그런데 두 사람은 저에게 단 두 명에서 한 명을 고르라고 하는군요. 제 남자는 제가 선택할 거예요. 둘 중의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남자들 중에서 고를 거라고요.”
“그래요. 문희씨는 선택권이 있죠. 남자를 줄 세워 놓고 골라도 될 만큼 매력적이에요. 그 부분은 인정합니다. 저 말은 그거예요. 절 선택하시라고. 그러시면 안 되는 건가요? 주저 없이 절 선택하면?”
용준씨의 말에는 두 손 두발을 다 들어버렸다. 화를 내는 여자 앞에서도 태연히 내게 오라고 손짓을 할 수 있는 여유. 그 여유로움에 난 오히려 무서워졌다.
***
용준씨와의 데이트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윤섭씨에게 전화가 왔다.
‘도대체 쉴 틈들을 안주는 군.’
“여보세요.”
- 저 윤섭입니다. 통화 가능하세요?
“예.”
- 아까는 바쁘신 것 같던데.
“그럴 일이 있었어요.”
두 남자의 관심을 동시에 받는다는 기쁨도 잠시 하루 종일 번갈아 가며 데이트를 하고 전화를 하다보니 내 시간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거만한 생각이 드는 걸까? 혼자였을 때가 좋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가 생각했던 달콤한 연애와는 너무나 달랐기에. 어서 빨리 한 남자를 택해 그에게 머무르고 싶어졌다. 하지만 성급하게 결정할 일은 아니었다.
- 용준이를 만났나요?
“예. 만났어요. 오늘은 짝수 날이잖아요.”
- 얘기를 들으셨군요.
“들었어요. 듣고는 아주 불쾌해 졌어요.”
- 그런 뜻으로 정한 것은 아닙니다. 불쾌하셨다면 용준이와 얘기해서 조정을 하도록 하지요.
“그 말씀 하러 전화하셨나요?”
내가 생각해도 너무 뻣뻣하게 굴고 있었다. 하지만 뭐 될 때까지 튕겨볼 생각이었다. 이런 성격도 받아줄 수 있는 남자라면 편하게 만날 수 있겠지, 라는 계산에. 나는 윤섭씨를 시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 저 내일 시간 괜찮으세요? 뵙고 싶은데.
“아니요. 만나고 싶지 않은데요. 내일은 피곤할 것 같아요. 오늘도 너무 피곤했거든요.”
- 용준이를 택하신 겁니까?
“아니요. 아니요. 그런 것 아니에요. 넘겨짚지 말아주세요.”
- 저는 문희씨가 용준이를 만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왜요?”
- 용준이 문희씨 생각만큼 좋은 녀석이 아니에요.
“지금 험담하시는 건가요? 듣기 좋지 않네요.”
- 저는 문희씨가 상처를 입으실까 걱정이 됩니다.
“상처를 입어도 제가 입는 거니 상관 말아 주시겠어요? 그리고 제 생각까지 읽으신 모양이죠? 제가 용준씨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시네요? 그럼 제가 윤섭씨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아시겠어요?”
- 오늘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그럼 다음에 통화를 하도록 하죠.
결국 내 신경질에 지친 걸까. 윤섭씨는 전화를 먼저 끊었다.
‘어머나! 남자가 너무 쩨쩨스럽다. 여자 투정 하나도 못 받아준다는 거야? 그리고 용준씨는 실컷 만나라고 하던데 왜 못 만나게 하는 거야? 자신이 없나부지 ? 아무튼 실망이다. 뒤에서 험담이나 하는 사람이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마음은 점점 복잡해져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 영화를 보는 기분이 되었다. 눈으로 보면 다 이해될 것 같으면서도 말을 알아들을 수 없으니 주인공의 심리 상태를 알 수 없는 것 같은 상황 말이다. 내 마음을, 내 자신의 바람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못했다. 하지만 정말 마음의 결정을 빨리 내려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채련아!”
- 니가 웬일이니? 난 네가 날 두 번 다시는 안 볼 줄 알았는데.
고민 끝에 남자 문제 박사인 채련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역시 채련의 말끝은 날카로웠다.
“잘 지내지?”
- 나야 잘 지내지. 그런데 네 목소리는 잘 지내지 못하는 것 같다.
예리한 기집애.
“맞아. 고민이 좀 생겼어.”
- 남자문제? 음. 용준씨랑 윤섭씨랑 누굴 택할지 고민이 되는 거겠군.
“어떻게 알았니?”
- 척하면 척이지 뭐.
“너 윤섭씨 형이랑 사귀니? 윤섭씨 얘기로는 그런 것 같던데.”
- 아니. 하지만 조만간 그렇게 되겠지. 사실 나도 고민이 생기니 네 생각이 나더라. 그래서 광화문에 갔었던 건데.
“그랬구나.”
채련이가 고민상담을 위해 오기 싫어하는 광화문까지 왔던 것을 왜 난 자랑을 하러 온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나의 오해로 그날은 좋지 않게 헤어져 버리게 되었고. 어쩌면 채련보다 더 남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일지 모르겠다. 내가 나빴어, 정말.
- 얘, 미안한 척 하지 마라. 너한테 안 어울려. 난 서로 미안하단 말 입에 발린 것 같아 싫더라, 얘.
“나 하나도 안 미안해! 그날은 니가 잘난 척을 하도 하니까 그렇게 된 거지, 뭐.”
- 그래. 그게 너한테 어울린다.
우리는 서로 이야기 나누는 방법을 알아가고 있었다. 모두들 같은 방식으로, 착한 척하며 얘길 나눌 필요는 없는 거다. 각자에 맞는 이야기법이 있듯이 친한 사이라면 미안하다는 말은 가끔 생략하는 것은 친밀감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채련아, 나 어떻게 하지?”
- 뭘 어떻게 해? 둘 다 만나면 되지.
“그건 양다리와 다를 것이 없잖아. 어차피 누군가를 택해야 하는데 그건 나중에 선택받은 사람이나 버림받은 사람이나 둘 다에게 너무 미안하잖아.”
- 그렇다고 만나보지도 않고 택할 수는 없는 거잖아.
“만약 이렇게 계속 만나다 어느 한 쪽이 먼저 따져 물으면 어떻게 해? 양다리라 비난 받는 건 싫단 말이야.”
- 따져 물으면 그냥 미안해요, 하면 되지. 싫으면 지들이 알아서 가겠지.
‘그렇게 간단한 걸까?’
“그건 너무 성의 없잖아.”
- 간단히 생각해. 어차피 만나지 않고는 누굴 택할 수는 없는 거잖아. 이런 문제는 아예 공개하는 편이 좋아. 그렇다고 너무 끄는 것도 좋지 않지. 각자 3번씩 만나봐. 미리 말을 하고 말이야. 그럼 두 사람도 이해해줄 테지.
“각자 3번씩?”
- 좋은 방법 아니야?
듣고 보니 좋은 방법 같았다. 한 남자를 세 번 만난다. 그 정도는 두 남자도 이해해줄 것이다. 그동안 나는 마음을 결정을 내리면 되고.
“좋은데! 정말 좋은 방법 같아. 그 전에 아무도 사귀지 않으면 양다리는 아니니까. 채련아, 고마워!”
- 고마우면 이 언니도 신경 좀 써줘라. 윤태씨 생각보다 만만치 않단 말이야.
우리는 그 후 좋은 패션 정보 사이트, 깜짝 놀랄만한 맛사지 방법, 각자에게 어울리는 옷 스타일등의 이야기를 나누다 전화를 끊었다. 어제의 적이 든든한 한 편이 되어 다시 만난 셈이었다.
잠들기 직전 채련이 말해준 맛사지를 했다. 얼굴이 따끔거리는 것이 정말 피부가 좋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각자 3번을 만난단 말이지. 3번이라. 정말 좋은 방법 같아. 내일 당장 두 남자에게 통보를 해 주어야지.’
총 여섯 번의 데이트. 스물여섯의 재미있는 사건이 될 것 같은 예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