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적절한 남자(17)

리드미온2004.05.11
조회13,207

나는 정훈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무 말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정훈과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훈의 입술이 내 입술에 겹쳐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어서였다.

 

부드러웠다.

내 인생의 첫키스의 주인공은 정훈이었다.

그 때의 첫키스의 느낌은 눈으로만 바라보던 정훈의 입술이 상상과 달리 너무 부드럽다는 것이었다.

살면서 타인의 입술을 이렇게 부드럽게 느낄 수 있는 경험이 몇 번이나 될까...

며칠 전 진우에게 억지로 안기는 꼴이 되었을 때 그의 손길은 나를 소름끼치게 만들었었는데....

 

"지금도 부드러워?"

 

정훈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정훈과의 첫키스 때 솔직하게 말했었다. 부드럽다고...그 때 정훈은 살짝 미소를 지웠다. 그리고는

 

'우리 또 할까?'

 

그렇게 장난스럽게 물었었다.

 

3년의 헤어짐이 억울할 정도로 정훈의 입술은 예전 그대로의 느낌이었다.

정훈은 이번에는 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등을 다독거리며 말했다.

 

"네 품이 그립더라....혼자라고 생각하면 언제나..."

 

나도 그랬다. 정훈과 헤어지고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것이 얼마나 구체적인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사람의 목소리가 그립고 그 사람의 입술이 그립고 그 사람의 촉감이 그립고....그 사람이 평소에 머리를 쓸어올리던 작은 손짓마저도 그리웠다.

 

"집에 데려다 줄게..."

 

정훈은 몸을 돌려 핸들을 잡으며 말했다.

 

그 순간, 현수와 한 약속이 생각났다. 집은 친구나 가족에게 비밀로 하기로 하자는....

나는 집앞까지 온다는 정훈을 말리며 대로변에서 내려달라고 했다.

정훈은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남자를 들어오게 못하는 것인 줄 알고 그냥 대로변에서 내려주었다.

앞으로 정훈을 계속 만나게 된다면 현수와의 동거도 문제가 되지 않을까 잠시 고민이 되기도 했다.

 

집에 돌아오니 12시가 넘은 시간인데 현수는 컴퓨터 앞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보고 있었다.

 

"어...늦었네요?"

 

현수가 날 보며 물었다. 이럴 때 낯설긴 해도 불꺼진 집에 혼자 돌아오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네."

 

"얼굴이 데이트한 얼굴이네요. 볼도 발그레하고...거기다....입술.....크크...."

 

나는 화들짝 놀라 거울을 봤다.

현수의 말대로 정훈과 키스하느라고 립스틱이 지워진 모양이었다.

 

"뭘 그렇게 창피해 해요? 어린 애도 아니고...남자친구 없다더니..그래서 나랑 선본 거 아니었어요?"

 

"남자친구 아니에요..."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정훈과의 데이트가 즐겁긴 했지만 아직 옛애인을 3년만에 처음 만난 것에 불과했다. 다시 사귀게 될지 확실하게 마음 결정을 하지는 못했다.

 

"오늘...낮에 진우 녀석 잠시 만났는데...민아씨 얘기하던데...저한테..맘잡고 민아씨 사귀어 보겠다던데요..? 어때요..?"

 

진우란 말에 짜증이 났다. 그 사람의 이름을 다시 듣는 것만으로도 장미빛 데이트의 시간이 잿빛 지옥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싫어요..."

 

"하긴...나도 그럴거라고 말해줬죠. 근데...누구에요...??? 며칠 안됐지만 요 근래에 그렇게 기분 좋은 얼굴은 처음인데... 서로 알아둬야 편하지 않을까요? 전에 민아씨가 말한 것처럼 집을 안 알려준다고 하더라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사전정보는 있어야지요...그래야 진우의 여자친구한테 뺨맞거나 하는 일도 없을 거 아니에요?"

 

현수의 말이 맞을 수도 있었다. 더구나 단순 동거인 현수에게 내 남자에 대해서 다 말할 필요는 없지만 굳이 숨길 필요도 없지 않은가...

 

"3년 전에 헤어졌던 남자가 돌아왔어요."

 

"소설같은 데요."

 

"네..그래요. 저도 꿈을 꾸는 것 같아요. 사랑이 한번 끝나면 얼마나 지독한지 알려줬던 사람이었는데..."

 

"그 얘길 들으니 그런 얘기가 생각나요. 옛날 첫사랑이 돈가방을 들고 다시 찾아온다면 당신은 떠날 것인가? 저도 한 때 그 질문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떠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인가?"

 

그럼 정훈은 내게 돈가방을 들고 나타난 첫사랑인건가..? 그렇다면 난 그와 함께 떠나면 되는 것일까?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서 망설여지는 이유는 뭘까...만약 내가 정훈과 떠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뭘까...

 

"재밌는 질문이네요. 현수씨는 어쩔 거에요? 첫사랑이 돈가방을 싸들고 나타난다면....?"

 

"전..떠나지 않아요..."

 

현수의 단호한 대답에 왜인지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왜요???"

 

"레종때문에요.."

 

"하하하하하..."

 

난 큰소리로 웃고 말았다. 현수의 농담스런 질문이 반쯤은 진실인 것 같기도 했다.

 

"근데 레종이 요즘 이상해요..."

 

그러고 보니 현수가 온 이후로는 내가 레종을 보살피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월세 내든 대신 레종을 돌보기로 했었고 나는 다시 현수에게 월세를 받기로 하면서 한동안 레종에게 무관심했었다.

 

"이런...늘 똑같은 것 같았는데..."

 

"낼은 병원에라도 가봐야겠어요."

 

"네..."

 

현수의 레종을 걱정하는 눈빛을 보며 레종 때문에 돈가방을 든 첫사랑과 떠나지 않는다는 말이 100%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나는 3년만에 돌아온 정훈과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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