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세자빈으로 입궁한 왕비 6명, ‘우회상장’으로 왕비 된 경우 18명 ● 왕세자빈 위한 공식 교육 전무…동성연애와 푸닥거리로 무료함 달래 ● 왕비가 관리하는 살림은 왕도 손 못 대 ● 내외법 강조한 세종 이후 왕과 왕비 별거 생활 ● 성종 비 윤씨, “눈 도려내리라” “손목 자르리라” 하며 왕과 싸워 ● 정치교육 못 받은 왕비·왕대비의 섭정, 왕권 약화로 이어져
왕비와 후궁의 살벌한 관계
* 태종 치세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궁인 무작의 어머니가 병이 났으나 약을 쓸 재력이 없어 귀신에게 빌 뿐이라는 말을 전해 들은 태종이 무작을 불쌍히 여기고 궁중에 있던 옷감 10여 필을 내줬는데, 중궁이 궁중의 물건이라며 도로 빼앗은 것. 이는 왕비가 궁궐의 안주인으로서 경제권을 쥐고 있었으며 왕이라 해도 왕실 살림에 함부로 손댈 수 없었던 사정을 보여준다.
* 왕비는 형벌로 궁인을 다스리기도 했는데, “연산비가 ‘만일 본궁의 노자들 가운데 횡포한 자가 있다는 소리가 들리면 반드시 먼저 매를 쳐서 죽이리라’ 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 왕비가 궁궐 안살림의 전권을 쥐었다고는 하나 권세가의 딸이나 왕의 사랑을 받는 후궁들은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후궁들은 비록 아무런 권한이 없었지만 왕의 사랑을 믿고, 혹은 정부의 관리들과 결탁해 왕비를 모함하거나 업신여기기 일쑤였다. 선조의 후궁인 인빈이 임진왜란 때 평양에 머물던 중 자신이 먹고 난 상을 대신들에게 물리자 정철이 “정철이 비록 못났으나, 어찌 김숙의의 퇴선을 먹겠느냐?” 하고 화를 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본래 자신이 먹고 난 상을 신하에게 물리는 건 왕과 왕비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인빈 김씨가 이같이 행동한 것은 스스로 왕비에 버금가는 위치에 있음을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 인조 때엔 왕의 총애를 받은 소용 조씨가 왕비 장렬왕후를 별궁으로 몰아내고 자신이 왕궁에서 왕비 노릇을 하기도 했다. 숙종 때에는 인현왕후가 폐해졌다가 다시 왕비가 된 후, “갑술에 내가 다시 왕비가 되었으나 조정의 의논이 세자의 어머니라 하여 희빈을 다른 빈들과 다르게 대하고, 궁중인들이 모두 희빈을 더 중하게 여겼으며, 옛 법규에는 빈에 속한 시비가 대내 근처에는 감히 드나들지 못하는데 희빈 소속 시녀들이 항상 왕래하고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는 일까지 있으나 침전의 시녀들이 감히 금하지 못하니 한심해도 어찌하겠는가” 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다. ‘인현왕후전’은 장희빈이 왕비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궁궐에서 계속 왕비를 업신여기며 안주인 행세를 했다고 알리고 있다.
* 조선시대에 폐비가 8명이나 되며, 왕의 후궁으로서 왕비로 된 예가 7명이다. 왕비가 궁궐 내 살벌한 암투와 음모 사이에서 얼마나 힘들게 생활했는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소원한 부부생활
경복궁 배치도를 보면 대전인 강녕전 뒤에 왕비의 내전인 교태전이 있다. 왕과 왕비가 각기 다른 공간에서 생활한 것. 창덕궁도 마찬가지여서 대전인 희정당 뒤에 내전인 대조전이 있다.
그러나 조선 초까지만 해도 왕과 왕비는 한집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태조가 왕세자를 정하기 위해 대신들과 의논하던 중 신의왕후의 자손 쪽으로 이야기가 흐르자 신덕왕후 강씨가 침실에서 듣고 울음소리를 내어 대신들이 강씨의 아들 방석으로 왕세자를 정했다는 기록이 그러한 추측을 낳는다.
왕 부부가 별거하기 시작한 것은 세종이 내외법을 시행한 이후인 듯하다. 세종 치세에 대전과 내전의 종속 인원을 열거한 기록을 보면, 왕과 왕비의 의식주를 담당하는 기관이 따로 있었다. 왕비가 왕의 의식주를 챙기는 일은 기록에 남을 정도로 극히 드물었다. 이를테면 “인종이 병이 나 음식을 들지 못하자 중전이 안으로부터 음식을 만들어 왕에게 권했다”거나 영종의 임종시에 “왕세손(정조)이 내전(정순)에서 보내온 속미음을 들여보내라 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왕비가 왕에게 음식을 올리는 것은 일상적이지 않았다.
태종이 궁인 무작에게 준 옷감 10여 필을 원경왕후가 도로 빼앗았다는 기록을 보면 조선 초만 해도 왕과 왕비가 대등한 관계를 이뤘던 것 같다. 그러나 성종 비 윤씨가 투기죄로 사사(賜死)되면서 왕비는 왕에게 대항할 수 없게 됐다. 성종 치세에 정희(세조 비)가 언급한 바에 따르면 왕비 윤씨가 왕에게 “그 족적을 없애리라” “눈을 도려내리라” “손목을 절단하리라” 같은 말을 하며 싸웠다고 한다. 정희는 “우리가 비록 이름은 국모이나 본래 평인이다. 온 나라가 존경하는 것은 주상인데 오히려 경멸하여…” 하며 윤씨를 사형에 처했다. 그 후 조선의 왕비는 시일이 지날수록 그 위치가 하락해 남편을 대등한 처지에서 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고종비 명성황후는 오랫동안 무시되어온 왕비의 권위를 왕과 동등하게 끌어올렸다. 김옥균이 갑신정변 직전에 고종과 청불전쟁에 대해 논의할 때, 명성이 침실에서 나와 함께 논의했으며 외국인들이 고종을 알현하는 자리에 장지문 하나를 사이에 두거나 병풍을 치고 혹은 가마 안에 앉아 동참했다. 명성이 죽은 후 고종은 항상 눈물을 흘리며 왕비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조선 왕후의 일생
세자빈에서 대비까지…조선 왕후의 일생
변원림 재독(在獨) 역사학자
● 왕세자빈으로 입궁한 왕비 6명, ‘우회상장’으로 왕비 된 경우 18명
● 왕세자빈 위한 공식 교육 전무…동성연애와 푸닥거리로 무료함 달래
● 왕비가 관리하는 살림은 왕도 손 못 대
● 내외법 강조한 세종 이후 왕과 왕비 별거 생활
● 성종 비 윤씨, “눈 도려내리라” “손목 자르리라” 하며 왕과 싸워
● 정치교육 못 받은 왕비·왕대비의 섭정, 왕권 약화로 이어져
왕비와 후궁의 살벌한 관계
* 태종 치세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궁인 무작의 어머니가 병이 났으나 약을 쓸 재력이 없어 귀신에게 빌 뿐이라는 말을 전해 들은 태종이 무작을 불쌍히 여기고 궁중에 있던 옷감 10여 필을 내줬는데, 중궁이 궁중의 물건이라며 도로 빼앗은 것. 이는 왕비가 궁궐의 안주인으로서 경제권을 쥐고 있었으며 왕이라 해도 왕실 살림에 함부로 손댈 수 없었던 사정을 보여준다.
* 왕비는 형벌로 궁인을 다스리기도 했는데, “연산비가 ‘만일 본궁의 노자들 가운데 횡포한 자가 있다는 소리가 들리면 반드시 먼저 매를 쳐서 죽이리라’ 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 왕비가 궁궐 안살림의 전권을 쥐었다고는 하나 권세가의 딸이나 왕의 사랑을 받는 후궁들은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후궁들은 비록 아무런 권한이 없었지만 왕의 사랑을 믿고, 혹은 정부의 관리들과 결탁해 왕비를 모함하거나 업신여기기 일쑤였다. 선조의 후궁인 인빈이 임진왜란 때 평양에 머물던 중 자신이 먹고 난 상을 대신들에게 물리자 정철이 “정철이 비록 못났으나, 어찌 김숙의의 퇴선을 먹겠느냐?” 하고 화를 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본래 자신이 먹고 난 상을 신하에게 물리는 건 왕과 왕비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인빈 김씨가 이같이 행동한 것은 스스로 왕비에 버금가는 위치에 있음을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 인조 때엔 왕의 총애를 받은 소용 조씨가 왕비 장렬왕후를 별궁으로 몰아내고 자신이 왕궁에서 왕비 노릇을 하기도 했다. 숙종 때에는 인현왕후가 폐해졌다가 다시 왕비가 된 후, “갑술에 내가 다시 왕비가 되었으나 조정의 의논이 세자의 어머니라 하여 희빈을 다른 빈들과 다르게 대하고, 궁중인들이 모두 희빈을 더 중하게 여겼으며, 옛 법규에는 빈에 속한 시비가 대내 근처에는 감히 드나들지 못하는데 희빈 소속 시녀들이 항상 왕래하고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는 일까지 있으나 침전의 시녀들이 감히 금하지 못하니 한심해도 어찌하겠는가” 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다. ‘인현왕후전’은 장희빈이 왕비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궁궐에서 계속 왕비를 업신여기며 안주인 행세를 했다고 알리고 있다.
* 조선시대에 폐비가 8명이나 되며, 왕의 후궁으로서 왕비로 된 예가 7명이다. 왕비가 궁궐 내 살벌한 암투와 음모 사이에서 얼마나 힘들게 생활했는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소원한 부부생활
경복궁 배치도를 보면 대전인 강녕전 뒤에 왕비의 내전인 교태전이 있다. 왕과 왕비가 각기 다른 공간에서 생활한 것. 창덕궁도 마찬가지여서 대전인 희정당 뒤에 내전인 대조전이 있다.
그러나 조선 초까지만 해도 왕과 왕비는 한집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태조가 왕세자를 정하기 위해 대신들과 의논하던 중 신의왕후의 자손 쪽으로 이야기가 흐르자 신덕왕후 강씨가 침실에서 듣고 울음소리를 내어 대신들이 강씨의 아들 방석으로 왕세자를 정했다는 기록이 그러한 추측을 낳는다.
왕 부부가 별거하기 시작한 것은 세종이 내외법을 시행한 이후인 듯하다. 세종 치세에 대전과 내전의 종속 인원을 열거한 기록을 보면, 왕과 왕비의 의식주를 담당하는 기관이 따로 있었다. 왕비가 왕의 의식주를 챙기는 일은 기록에 남을 정도로 극히 드물었다. 이를테면 “인종이 병이 나 음식을 들지 못하자 중전이 안으로부터 음식을 만들어 왕에게 권했다”거나 영종의 임종시에 “왕세손(정조)이 내전(정순)에서 보내온 속미음을 들여보내라 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왕비가 왕에게 음식을 올리는 것은 일상적이지 않았다.
태종이 궁인 무작에게 준 옷감 10여 필을 원경왕후가 도로 빼앗았다는 기록을 보면 조선 초만 해도 왕과 왕비가 대등한 관계를 이뤘던 것 같다. 그러나 성종 비 윤씨가 투기죄로 사사(賜死)되면서 왕비는 왕에게 대항할 수 없게 됐다. 성종 치세에 정희(세조 비)가 언급한 바에 따르면 왕비 윤씨가 왕에게 “그 족적을 없애리라” “눈을 도려내리라” “손목을 절단하리라” 같은 말을 하며 싸웠다고 한다. 정희는 “우리가 비록 이름은 국모이나 본래 평인이다. 온 나라가 존경하는 것은 주상인데 오히려 경멸하여…” 하며 윤씨를 사형에 처했다. 그 후 조선의 왕비는 시일이 지날수록 그 위치가 하락해 남편을 대등한 처지에서 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고종비 명성황후는 오랫동안 무시되어온 왕비의 권위를 왕과 동등하게 끌어올렸다. 김옥균이 갑신정변 직전에 고종과 청불전쟁에 대해 논의할 때, 명성이 침실에서 나와 함께 논의했으며 외국인들이 고종을 알현하는 자리에 장지문 하나를 사이에 두거나 병풍을 치고 혹은 가마 안에 앉아 동참했다. 명성이 죽은 후 고종은 항상 눈물을 흘리며 왕비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