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전남대학교 5.18 연구소 (http://altair.chonnam.ac.kr/~cnu518/)큰 사진은 옆의 사진확대를 눌러서 보시면 됩니다. 사진이 잘 안보이시는 분들은 도구 - 인터넷옵션 - 고급 - UTF-8 체크되어있는 것을 해제하신 다음 다시 시도해 보세요... ■ 민족민주화성회 1980년 5월 15일, '민족민주화성회' 집회를 위해 교수와 학생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질서정연하게 가두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확대> 1980년 5월 15일. 민족민주화성회 집회를 위해 학생들이 도청 분수대로 모여들고 있다. <사진확대> 1980년 5월 16일, 도청 분수대의 민족민주화성회 집회 <사진확대> 1980년 5월 16일, 도청 분수대 주변의 횃불시위 <사진확대> 1980년 5월 16일, 민족민주화성회 횃불가두시위 모습. 경찰은 학생들의 평화시위를 보장하고 교통정리를 해주는 등 협조를 해 주었다. <사진확대> ■ 학 살 1980년 5월 18일 오후, 카톨릭센터 부근에서 7공수 병력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무력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확대> 1980년 5월 18일 오후, 금남로에서 7공수부대원들이 진입봉을 들고 무력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확대> 1980년 5월 18일 오후, 금남로에서 시위진압 대기중인 7공수병력 <사진확대> 1980년 5월 18일, 금남로의 카톨릭센타 부근에서 7공수부대원들이 한 시민을 집단구타하고 있다. <사진확대> 1980년 5월 18일, 공수부대원이 시위진압을 나온 경찰들 사이로 한 시민을 연행하고 있다. <사진확대> 공수부대원이 한 청년을 진압봉으로 내리치려 하고 있다. <사진확대> 연행되고 있는 남자가 이미 많은 피를 흘린 것으로 보이나 여자 옆의 위생병은 지켜 보고만 있다. <사진확대> 한 중년남자가 공수부대원에게 연행당한 뒤 애걸을 하고 있다. <사진확대> 공수부대원 5명이 집단 구타를 자행하고 있다. <사진확대> 팬티만 입은 채 연행되고 있는 시민들 <사진확대> 부상자를 병원으로 후송하는 시민들 <사진확대> 1980년 5월 20일, 금남로 카톨릭센타 부근에서 공수부대가 시위군중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사진확대> 공수부대의 무차별 진압행위에 분노한 광주시민들은 거리로 나왔고, 공수부대에게 붙잡히면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사진확대> 1980년 5월 20일, 관광호텔 앞, 버스 주변에는 최루가스가 자욱하고... <사진확대>■ 봉 기 1980년 5월 20일, 공수부대와 시위군중이 각각 관광호텔과 카톨릭센타 앞에서 대치하고 있다. <사진확대> 1980년 5월 20일, 오후 금남로에 모여든 차량들의 시위 <사진확대> 1980년 5월 20일 밤, 광주시 일원에서 발생한 공수부대 만행을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던 언론기관은 시민들의 분노에 의해 불에 타고 만다. <사진확대> 1980년 5월 20일 밤, 광주역 부근에서 사망한 시신들 <사진확대> 5월 21일 오전 카톨릭센타 부근. 공수부대의 만행에 분노한 시민들과 공수부대간에는 긴박감이 감돌고 있다. <사진확대> 1980년 5월 21일 12시경 공수부대와 시민들간에 도청앞에서 대치하고 있는 모습. 시민들은 잠시후 집단발포가 있을 것이란 상상도 하지 못한채... <사진확대> 1980년 5월 21일, 아세아자동차 공장에 있던 군용짚차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공수부대의 만행을 알리고 있는 시위대 <사진확대> ■ 해 방 광 주 1980년 5월 21일, 트럭에 탄 시위대에게 연도에서 박수를 보내고 있는 시민들 <사진확대> 시위대의 무료급식을 위해 노상에서 밥을 짓고 있는 아주머니들 <사진확대> 광주는 무법천지가 아니었다. 시장에서 물건은 예전과 똑같이 살 수 있었고 부족한 물자는 서로 나누는 공동체, 바로 그것이었다. <사진확대> 계엄군은 광주민중항쟁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위해 광주로 통하는 모든 도로를 봉쇄하였다. 광주-송정리간 도로를 탱크로 봉쇄한 계엄군 <사진확대> 시 외곽지역에 주둔중인 계엄군 동태를 살피고 도청으로 돌아오고 있는 시민군들 <사진확대> 1980년 5월 22일부터 시민군들은 시내치안을 위해 자발적으로 무기를 회수하였다. <사진확대> 도청 안에서 회수된 각종 총기들을 정리하고 있는 시민군들 <사진확대> 회수된 총기들을 점검하고 있는 시민군들 <사진확대>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살상만행으로 숨진 시신들 <사진확대> 도청 안에 있는 5.18 희생자들의 관 <사진확대> 항쟁기간중 사망한 희생자들은 상무관에 안치되었고 시민들은 참담한 심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 보았다. <사진확대> 상무관에 안치된 희생자들의 관 <사진확대> ■ 무 력 진 압 1980년 5월 27일, 광주진압작전에 동원된 전차들. 마치 광주를 초토화시키려는 듯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줄을 이으며 시내로 들어오고 있다. <사진확대> 1980년 5월 27일, 도청을 진압한 후 계엄군들이 철수를 준비하고 있는 모습 <사진확대> 항쟁기간동안 걸려있던 도청 옥상의 태극기와 검은 리본 <사진확대> 도청앞 광장에 진주한 전차의 포신이 시내를 향하고 있다. 누구를 향해 겨누고 있는 포신인지... <사진확대> 도청이 무력진압되고 난 후의 금남로. 광주는 인적마저 끊기고 새도 날지 않는 한순간 죽어있는 도시였다. <사진확대> 19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무력진압에 나선 계엄군이 난사한 YWCA 창문 <사진확대> 1980년 5월 27일, 시 외곽지역에서 붙잡혀 도청으로 끌려온 시민군들이 줄줄이 엮인 채 타고 온 트럭에서 내리고 있다. <사진확대> 1980년 5월 27일, 관광호텔 부근에서 양손이 뒤로 묶여 연행되는 시민군들, 그들의 등에는 탄약보유의 죄명(?)이 적혀 있다. <사진확대> 1980년 5월 27일, 도청이 진압된 후 끌려나오는 시민군들. 계엄군에게 이들이 모두 적군이었다. <사진확대> ■ 항 쟁 이 후 망월동 시립묘지로 운구되어온 희생자들의 관과 그 유가족들 <사진확대> 한 여학교의 교실. 급우의 빈자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사진확대> 급우의 죽음은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한 숭고한 희생이었다. <사진확대>
■___1980년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당시의 사진자료들
출처 : 전남대학교 5.18 연구소 (http://altair.chonnam.ac.kr/~cnu518/)
큰 사진은 옆의 사진확대를 눌러서 보시면 됩니다.
사진이 잘 안보이시는 분들은 도구 - 인터넷옵션 - 고급 - UTF-8 체크되어있는 것을 해제하신 다음 다시 시도해 보세요...
■ 민족민주화성회
1980년 5월 15일, '민족민주화성회' 집회를 위해 교수와 학생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질서정연하게 가두행진을 하고 있다.
<사진확대>
1980년 5월 15일. 민족민주화성회 집회를 위해 학생들이 도청 분수대로 모여들고 있다.
<사진확대>
1980년 5월 16일, 도청 분수대의 민족민주화성회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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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6일, 도청 분수대 주변의 횃불시위
<사진확대>
1980년 5월 16일, 민족민주화성회 횃불가두시위 모습.
경찰은 학생들의 평화시위를 보장하고 교통정리를 해주는 등 협조를 해 주었다.
<사진확대>
■ 학 살
1980년 5월 18일 오후, 카톨릭센터 부근에서 7공수 병력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무력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확대>
1980년 5월 18일 오후, 금남로에서 7공수부대원들이 진입봉을 들고 무력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확대>
1980년 5월 18일 오후, 금남로에서 시위진압 대기중인 7공수병력
<사진확대>
1980년 5월 18일, 금남로의 카톨릭센타 부근에서 7공수부대원들이 한 시민을 집단구타하고 있다.
<사진확대>
1980년 5월 18일, 공수부대원이 시위진압을 나온 경찰들 사이로 한 시민을 연행하고 있다.
<사진확대>
공수부대원이 한 청년을 진압봉으로 내리치려 하고 있다.
<사진확대>
연행되고 있는 남자가 이미 많은 피를 흘린 것으로 보이나 여자 옆의 위생병은 지켜 보고만 있다.
<사진확대>
한 중년남자가 공수부대원에게 연행당한 뒤 애걸을 하고 있다.
<사진확대>
공수부대원 5명이 집단 구타를 자행하고 있다.
<사진확대>
팬티만 입은 채 연행되고 있는 시민들
<사진확대>
부상자를 병원으로 후송하는 시민들
<사진확대>
1980년 5월 20일, 금남로 카톨릭센타 부근에서 공수부대가 시위군중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사진확대>
공수부대의 무차별 진압행위에 분노한 광주시민들은 거리로 나왔고, 공수부대에게 붙잡히면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사진확대>
1980년 5월 20일, 관광호텔 앞, 버스 주변에는 최루가스가 자욱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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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 기
1980년 5월 20일, 공수부대와 시위군중이 각각 관광호텔과 카톨릭센타 앞에서 대치하고 있다.
<사진확대>
1980년 5월 20일, 오후 금남로에 모여든 차량들의 시위
<사진확대>
1980년 5월 20일 밤, 광주시 일원에서 발생한 공수부대 만행을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던 언론기관은 시민들의 분노에 의해 불에 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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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0일 밤, 광주역 부근에서 사망한 시신들
<사진확대>
5월 21일 오전 카톨릭센타 부근. 공수부대의 만행에 분노한 시민들과 공수부대간에는 긴박감이 감돌고 있다.
<사진확대>
1980년 5월 21일 12시경 공수부대와 시민들간에 도청앞에서 대치하고 있는 모습. 시민들은 잠시후 집단발포가 있을 것이란 상상도 하지 못한채...
<사진확대>
1980년 5월 21일, 아세아자동차 공장에 있던 군용짚차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공수부대의 만행을 알리고 있는 시위대
<사진확대>
■ 해 방 광 주
1980년 5월 21일, 트럭에 탄 시위대에게 연도에서 박수를 보내고 있는 시민들
<사진확대>
시위대의 무료급식을 위해 노상에서 밥을 짓고 있는 아주머니들
<사진확대>
광주는 무법천지가 아니었다. 시장에서 물건은 예전과 똑같이 살 수 있었고 부족한 물자는 서로 나누는 공동체, 바로 그것이었다.
<사진확대>
계엄군은 광주민중항쟁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위해 광주로 통하는 모든 도로를 봉쇄하였다. 광주-송정리간 도로를 탱크로 봉쇄한 계엄군
<사진확대>
시 외곽지역에 주둔중인 계엄군 동태를 살피고 도청으로 돌아오고 있는 시민군들
<사진확대>
1980년 5월 22일부터 시민군들은 시내치안을 위해 자발적으로 무기를 회수하였다.
<사진확대>
도청 안에서 회수된 각종 총기들을 정리하고 있는 시민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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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수된 총기들을 점검하고 있는 시민군들
<사진확대>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살상만행으로 숨진 시신들
<사진확대>
도청 안에 있는 5.18 희생자들의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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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쟁기간중 사망한 희생자들은 상무관에 안치되었고 시민들은 참담한 심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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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관에 안치된 희생자들의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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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 력 진 압
1980년 5월 27일, 광주진압작전에 동원된 전차들. 마치 광주를 초토화시키려는 듯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줄을 이으며 시내로 들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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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7일, 도청을 진압한 후 계엄군들이 철수를 준비하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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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쟁기간동안 걸려있던 도청 옥상의 태극기와 검은 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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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앞 광장에 진주한 전차의 포신이 시내를 향하고 있다. 누구를 향해 겨누고 있는 포신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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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이 무력진압되고 난 후의 금남로. 광주는 인적마저 끊기고 새도 날지 않는 한순간 죽어있는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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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무력진압에 나선 계엄군이 난사한 YWCA 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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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7일, 시 외곽지역에서 붙잡혀 도청으로 끌려온 시민군들이 줄줄이 엮인 채 타고 온 트럭에서 내리고 있다.
<사진확대>
1980년 5월 27일, 관광호텔 부근에서 양손이 뒤로 묶여 연행되는 시민군들, 그들의 등에는 탄약보유의 죄명(?)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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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27일, 도청이 진압된 후 끌려나오는 시민군들. 계엄군에게 이들이 모두 적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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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 쟁 이 후
망월동 시립묘지로 운구되어온 희생자들의 관과 그 유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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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학교의 교실. 급우의 빈자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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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우의 죽음은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한 숭고한 희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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