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여우와 너구리의 계약결혼(프롤로그)

김은영2004.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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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공기가 꽤 싸늘해진 가을밤이었다. 

 몇 시가 되었는지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무척 행복했다.  아니 행복하다 못해서 공중에 떠 있는 기분이었다.  컴컴한 밤거리에 서 있는 평범한 가로등이 이렇게 로맨틱하게 느껴진 적도 없었다.  조용한 카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중얼거림이 이토록 경쾌하게 들린 적도 없었다.
 목으로 넘어가는 따뜻하고 쓴 커피가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이런 기분은 난생 처음이었고 기대했던 것보다 휠씬 환상적인 기분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고 눈이 초롱초롱 빛나며, 입에서 나오는 말이 공기 중에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그녀를 이처럼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로 만드는 것. 그 모든 것의 원인은 바로 그녀 앞에 앉아 있는 남자였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  아니 사랑이였다.
“야, 임마. 할 말이 있다던 녀석이 왜 말이 없어. 어려워 말고 말해봐”
그의 말에 수완이 더욱 얼굴을 붉혔다
“저기, 오빠?”
“그래, 말해봐.  무슨 고민있니?  내가 이완이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말해.”
그는 눈썹 한쪽을 슬쩍 들어올리고는 싱긋 웃으며 군대에 있는 친구의 여동생을 쳐다보았다. 그는 수완이 말하기 불편하지 않도록 그다지 우스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익살스러운 이야기를 하며 분위기를 가볍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늘 여유 있고 매력적이며 옆에 있는 사람을 즐겁고 편안하게 해주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는 그녀의 오빠 이완의 죽마고우이며 지금 복학생이고 졸업반이었지만 아저씨 냄새가 풀풀 풍기는 여느 복학생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187cm의 훤칠한 키에 약간 가무잡잡하지만 깨끗한 피부, 고집스러워 보이는 턱선과 서글서글한 광대뼈, 그리고 언제나 맑게 빛나는 눈을 가졌다.  쌍꺼풀진 눈매와 날카로운 콧날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지만, 일단 웃음을 띠면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매력이 넘쳐흐르는 얼굴이었다.  처음 이완과 같이 집에 왔을 때부터 수완의 시선은 좀처럼 그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단둘이 앉아 있는 지금은 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오늘 그녀는 그동안의 짝사랑을 접고 고백을 하기위해 이자리를 마련했다.  이런 날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잘생긴 외모와 쾌활한 성격 덕분에 태제는 늘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적극적으로 마음에 드는 여성에게 접근하기도 하고, 또 반대로 적극적인 여성들에게서 프로포즈 받기도 했다.  대학교내에서 컴퓨터공학과 정태제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간첩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에 관한 화려한 소문은 언제나 무성했으며, 들으려 하지 않아도 주위에서 그에 관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녀의 오빠 이완의 말에 의하면 정태제는 입학 이후로 동기 여학생이나 후배를 비롯해, 여자선배까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여학생들과 사귀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그와 깊은 관계까지 갔다고 말하는 여자들도 많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수완은 그런 소문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다.  비록 그녀가 여러 차례 바뀐 그의 여자 친구들을 보았지만 말이다.  수완은 그가 자신의 진정한 사랑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처럼 오로지 그만을 위해 마음을 연 여자만이 이 시대의 진정한 바람둥이를 길들일 수 있을거라  그녀는 굳게 믿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에게 그녀의 마음을 전하는 날이 왔다.  같은 대학교에 다니며 친구의 동생이라는 이점으로 수완은 그에게 데이트를 청해왔으며 그는 언제나 그런 데이트에 응해주었던 것이다.  만약 태제에게 수완에 대한 조금의 마음도 없다면 그녀의 데이트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최수완,  때로는 여자가 적극적이어야 해. 그래, 최수완. 기회를 주라고. 그와 있는 게 좋긴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렇게 친구의 동생으로 있을 수는 없잖아.
수완은 잔을 마저 비우고, 몇 번 가볍게 헛기침을 하여 목을 풀어주며 마음을 굳게 먹자고 속으로 외치고 있었지만,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저….. 흠 흠, 태제 오빠.”
그가 수완을 쳐다보았다.
“ 왜?”
“저, 그러니까…..”
등에서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최수완, 용기를 내 그리고 말하는거야.
“그러니까…..”
“너 왜 그래? 편하게 생각하고 말해봐.”
“저….저요. 오빠 좋아해요. ….아니 사랑해요”
태제는 잠시 멍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것 봐, 최수완.  태제 오빠 얼굴을 보라고. 저 표정은 내가 한 말이 싫은 표정이 아니야.네 짐작이 맞은 거야.
“저기 수완아. 그런 고백은 남자친구한테 해야지. 나 같은 노땅한테 하면 안되거야. 뭐 연습상대라면 얼마든지 해주겠지만…”
“오빠. 아니예요. 오빠를 사랑한다구요. 오빠 말고 다른사람은 생각도 할 수 없어요. 오빠도 저 좋아하잖아요. 그러니까 저하고 데이트한게 아닌가요?”
“미안하다. 수완아, 난 널 친구 동생이상으로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다.  네가 나한테 그런 감정을 가졌다면 그건 내 잘못이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행동을 했으니까 네가 그렇게 생각한 거겠지? 하지만 난 네 상대가 아니야”
수완은 찬 물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달아올랐던 얼굴에서 조금씩 핏기가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오빠 전 진짜로 오빠를 사랑해요.  흑흑…왜? 제 마음을 몰라주는거죠.  10년이예요.
10년동안 오빠만 봤어요. 흑흑..”
“난 너처럼 어린여자한테는 관심없다. 넌 나한테 맞지않아. 난 성질 못된 여자는 용서가 되도 못생긴 여자는 용서가 안돼. 그런데 넌 용서가 안되는 여자에 속하거든. 키 작지. 몸매도 엉망이지. 그렇다고 얼굴이 예쁜것도 아니고. 그런걸 안다면 외모에 신경을 써야하는데 넌 그것도 아니잖아? 난 그렇게 무신경한 여자한테 관심없다. 더구나 그 여자가 친구의 동생이라면 더 이상 말할것도 없지. 그러니까 나에 대한 마음은 접어라. 내 말이 심했다면 미안하다. 난 확실한게 좋거든. 그래야 너도 마음정리가 쉬울거야. 오늘 네가 한말은 못 들은걸로 할께. 미안하다.”
“그러니까 오빠는 제가 예쁘지 않아서 싫다는 건가요? 그리고 친구의 동생이라서 더욱 싫구요. 알았어요. 더 이상은 저도 오빠에게 매달리고 싶지 않아요. 저 먼저 일어날께요.”
“수완아..”
그의 말이 아직도 머리속에서 윙윙거리며 울렸다. 내가 지금 들은 말이 뭐였지? 그가 뭐라고 했었지? 손끝이 가볍게 떨리기 시작했다.  속이 울렁거리며 욕지기가 치밀어올랐다. 토할 것 같아.
이제는 사랑같은거 하지 않겠어. 아니 이제는 남자라는 동물이 죽이고 싶도록 싫어.
내가 그런 파렴치한 놈 때문에 10년동안 가슴앓이를 했다는게 억울해. 정말 죽고 싶도록 억울해…오늘만 울거야. 오늘만 가슴아파할거야. 그래 오늘만..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후다닥 뛰어가며 10년동안에 짝사랑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6년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