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여왕 5월의 어느 저녁, 한국 서울에 있는 한 가정에서는 바야흐로 달콤한 음모가 진행중이었다. 얇은 커튼을 펄럭이며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 들어오는 창문 너머 발코니에는 꽃가게를 경영하는 정민주와 그리고 칠순이 넘은 그녀의 부모님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 있었다. 그들 앞에 놓인 찻잔에서 향긋한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지만, 그것을 즐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심각했고 그런 은밀한 상황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버지 그건 좀 심해요.” 정민주가 불안한 마음에 불만을 드러냈다. “뭐가 심하단 말이냐? 그 놈은 이런 일 당해도 할말이 없는 놈이야. 제 아비가 위독하다는 데도 똥고집 부리며 버티면 그건 자식놈도 아닌거야. 정말 이러다간 네 어머니나 나나 죽기 전에 손주녀석 안아보기도 힘들게 생겼어.” “아무리 그래도 당신이 쓰러졌다는 건 좀 심해요. 좀더 나은 방법을 생각해봐요” 나이에 비해 건강해 보이는 노부부는 의견이 맞지 않았다. “엄마, 엄마도 오빠가 말로 해서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거 잘 아시잖아요. 오빠 성질 아시면서… 지금까지 몇번을 아버지나 엄마, 그리고 저까지 잔소리도 해봤고 야단도치고 마지막에는 애원까지 했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구요. 오빠가 말하는 쭉쭉빵빵에 머리좋고 거기다 성격까지 좋은 그런 완벽한 여자가 어디 있어요? 괜히 결혼하기는 싫고 이여자 저여자 만나고 싶으니까 둘러대는 핑계지. 아버지 말씀대로 하지 않으면 올해도 그냥 넘기기 쉽다구요. 그러면 엄마도 손주 보기는 틀렸고 저도 새언니 보는거 포기해야한다구요.”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가 쓰러졌다는건 좀 심하지 않니? 그리고 갑자기 어디서 여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겠어?” “임자, 그건 당신이 몰라서 하는 말이야. 태제 그놈 주위에 널린 게 여자야.” 아버지의 화난 어투에 민주은 할말이 없었다. 그 말이 사실임을 그녀가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맞아요. 그 희진인가 뭔가 하는 아가씨와 제일 오래 사귀었잖아요. 아주 예쁘고 똑똑한 아가씨라고 기억하는데,그런 참한 아가씨가 있는데도 결혼은 안하고 여전히 바람돌이 행세만 하고 다니니 정말 걱정이예요.” “그것 봐요. 엄마도 인정하잖아요. 그러니까 이번에 그 바람둥이 오빠를 정신차리게 하자고요. 아버지가 쓰러지셨다고 하고 죽기 전에 며느리 봐야겠으니 결혼하라고 하면 오빠가 어떻게 하겠어요? 지금까지 사귄 여자 중에서 제일 오래 사귄 여자와 결혼하지 않겠어요?” “민주 말이 맞다. 이 늙은 부모가 천년 만년 사는것도 아니고 제 녀석 장가들 때까지 기다려줄 줄 아나? 그 녀석은 이번에 정신 좀 번쩍 나야 돼” “좋아요, 당신이 심장병으로 쓰러졌다고 합시다. 그럼 병원에 입원을 해야 할 텐데 그건 어떻게 할 참이예요.” “아이구, 당신도 참 답답하군. 박가가 심장 전문의 아닌가? 박가 병원에서 검사나 받고 몇 일 쉬면서 누워 있으면 돼” 그러자 늙은 노부인은 남편의 말에 반대의견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건 걱정 말아. 그리고 이번 기회에 당신도 나하고 같이 검사 좀 받읍시다” “아니, 됐어요. 난 병원이라면 냄새도 맡기 싫어요” 민주는 정답게 얘기를 나누시는 부모님을 바라보았다. “그럼 내일 오빠한테 전화할께요. 참 그런데 민희한테도 비밀로해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 태제녀석 버릇 고쳐놓는다고 말해주고 한번 다녀가라고 해라”
그건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새벽부터 엄마에게서 걸려온 전화는 대화가 아니라 그건 일방적인 통보였다. “이미 사돈하고는 얘기가 끝났다. 넌 한번 집에 내려와서 박 서방만 만나면 돼” “엄마, 사돈은 뭐고, 또 박 서방은 뭐예요? 언제부터 나한테 박 서방이 있었는데…그리고 30년이나 지난 어른들 약속을 왜 내가 책임을 져야하며, 얼굴도 모르고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하고 왜 결혼을해? 그리고 난 결혼할 맘 없어요. 그러니까 이일은 없었던일도 해요” “네 나이가 지금 30이야! 다 큰 기집애가 시집도 안가고 서울에서 혼자 사는게 자랑인 줄 알아? 게다가 지금 은환이 기집애는 너 때문에 결혼 못한다고 매일 울고불고 난리났어. 큰아버님이 너 먼저 하기 전에는 절대로 안 된다고 엄포를 놓으셨어” “그런 말도 안되는 말이 어딨어요? 임자 있는 사람이 먼저 가는거지 요즘 같은 시대에 차례 따져가며 결혼하는게 말이돼요. 그리고 동생 시집 보내려고 내가 얼굴도 모르는 사람하고 결혼해야 하냐구요” “그렇다고 아주 모르는 사람도 아니잖니? 너희 아버지와 절친한 친구분의 아들이구. 그리고 그 청년 똑똑하고 인물도 아주 잘 생겼다고 하더라. 그러지 말고 맘에 드는지 한번 보기만해” “그렇게 잘 생겼으면 엄마가 선 봐요. 난 싫으니까. 그리고 어떻게 그 말을 믿어요? 내려가서 선 보면 그 길로 예식장 행일텐데… 그 뻔한 일을 내가 왜 당해. 절대로 싫어요!” “너 정말 이럴래? 그럼 네 동생은 어떻게 할래. 은환이도 너처럼 노처녀 만들래? 어떻게 넌 니 생각만해? 얼마나 못났으면 그 나이 먹도록 사귀는 남자가 하나도 없니? 대학 나와서 유학까지 다녀오고 직장 다니면서 눈먼 놈 하나 못 잡아? 시집 잘 가라고 서울까지 보냈더니 연애 한번 못하고 대체 뭐가 문제야?” “몰라요! 아무튼 절대로 싫어요.” “나도 몰라! 이 나쁜 기집애야! 아무튼 이번에 안 내려오면 이완이한테 너 머리채 잡아서 끌고오라고 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엄마! 여보세요?” 수완은 일방적으로 끊어진 전화기를 노려보며 비명을 질렀다.
하루종일 엄마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런, 또 장면을 놓쳤다. 수완은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깨물며 리모컨을 찾아 쥐었다. 얼마나 장면이 지났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이걸로 벌써 몇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수완은 되감기 버튼을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하다가는 마감때까지 일을 마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아무래도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수완은 계속 일하려던 마음을 바꿔서 아예 화면을 꺼버렸다. 그러고는 앉은뱅이 책상에서 자그마한 몸을 일으키며 쭉 기지개를 폈다. 오늘 일하기는 틀렸다. 이렇게 심란해서는 아무일도 되지 않는다. 이럴 때는 현경이라도 서울에 있으면 좋은 충고를 해줄 텐데… 수완은 지금 결혼해서 지방으로 내려간 단짝 친구가 너무도 그리웠다. 젠장, 그래 나가자. 이렇게 집에서 청승 떤다고 복잡한 머리에서 좋은 생각이 떠오르겠어!
제기랄, 절대로 결혼만은 못해. 절대로 안 돼! 칵테일 바에 앉아 앞에 놓인 붉은 칵테일잔을 바라보며 정태제는 마음속으로 울부짖었다. 여동생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 통에 요즘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뿐이면 말을 안한다. 인천에 사는 막내 민희는 며칠째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며불며 아버지 잘못되면 오빠탓 라고 협박을 하고 있었다. 빨리 대답을 못하면 당장이라도 지금사는 아파트로 쳐들어와 지나가는 아무 여자나 붙잡고 결혼시킬 태세였다. 오늘도 미친 듯이 울려대는 전화를 꺼두고 멍하니 사무실에 있다가 답답한 마음에 밖으로 뛰쳐나온 것이다. 결혼이라니! 이 정태제가 미치지 않고서는 결혼은 있을 수도 없다. ‘이 불효 막심한 놈. 어디서 말도 안 되는 똥고집을 피우는 거야? 하나 밖에 없는 아들로 태어났으면 하루 빨리 결혼을 해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늙은 부모에게 손주 안겨줄 생각을 해야지. 내가 아들이 하나 더 있으면 너한테 이런 말도 안해. 이 고약한 놈아’ 지난 달에 부모님께 갔을 때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이다. 하지만 그 고집은 부전자전인가보다. 세상에, 쓰러진 분이 치료을 받지 않겠다는게 말이 되는가? 그것도 멀쩡한 나를 걸고 넘어지시면서! 아버지의 치료와 나의 결혼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태제는 부아가 치밀어 바라보던 잔을 쥐고 단숨에 비웠다. 독한 액체가 화끈거리며 식도를 타고 가슴으로 내려갔다. 절대로 나의 귀중한 자유를 아무 여자에게 넘길 순 없다. 그럼, 절대로 안될 일이지. 그는 빈잔을 두 손으로 쥐고 비장하게 울부짖느라, 친구 이완이 도착한 사실도 알지 못했다. “미안, 오랜만이다. 내가 좀 늦었지?” 이완은 바텐더에게 태제와 같은 칵테일을 시켜며 자리에 앉았다. “아니, 나도 방금 왔다. 근데 너 얼굴 좋아졌다. 제수씨가 잘해주나보군. 역시 신혼이야” “자식, 좋아지긴 무슨… 요즘 우리 집안이 좀 시끄러워서 신혼의 단꿈은 커녕 제대로 숨도 못 쉰다. 임마!” “왜? 집에 무슨일 있어?” “응, 그렇게 심각한 일은 아니고, 막내 때문이지 뭐” “막내? 그럼 은완이? 은완이가 왜? 그 녀석 똑똑하고 야무지잖아? “그렇지! 근데 그렇게 야무진 녀석도 결혼문제에서는 다른 여자들하고 똑같더라.” “결혼? 은완이가 벌써 결혼할 때가 됐나? 그럼 수완이도 결혼 했겠군” 여기도 나처럼 결혼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이 있군. 가만 이완이 부모님은 자식한테 결혼을 강요할 분이 절대 아닌데... 이쪽은 또 무슨 문제지. “아니, 수완이는 아직 결혼 생각이 없나봐, 어른들은 수완이가 아직 결혼을 안했는데 은완이 먼저 보내기 뭐해서 아직 은완이 상견례도 못하고 있어. 은완이는 그게 불만이구.” “요즘 같은 시대에 임자 있는 사람이 먼저 가는거지. 꼭 태어난 순서대로 결혼하란 법도 없잖아. 또 수완이 결혼하기 기다리다가는 은완이 노처녀될걸” “야, 임마 수완이가 어때서? 똑똑하지! 착하지! 그만하면 일등 신부감이다. 어디 가서 수완이 같은 참한 여자 구해봐라 있나?” “됐다. 임마, 누가 오빠 아니랄까봐 동생 자랑은…” “근데 넌 무슨 일이냐? 아까 보니까 인상을 엄청 험악하게 쓰고 있던데” 태제는 자신의 지금 상황을 설명하자니 한숨이 먼저 나왔다. 어떻게 설명하랴. 아버지라는 사람은 쓰러졌으면서도 아들이 결혼하지 않으면 치료도 안받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두 여동생은 아버지가 잘못되면 다 못된 오빠 때문이라며 매일을 밤낮 가리지 않고 울며 전화를 하고 있었다. 더 이상은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무슨 일이야? 너 심각해 보인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그런데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치료을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계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버지를 택하자니 자유가 울고 자유를 택하자니 아버지가 울고. 정말 답답하다.” “임마, 뭐가 그렇게 어렵냐? 그냥 결혼해. 정태제 주위에 차고 넘치는게 여자 아니였냐? 그중에서 제일 괜찮은 여자 골라서 결혼하면 되겠네. 간단하잖아. 아니면 희진이하고 다시 시작하던가. 희진이 아직 너 맘에 두고 있더라” “아니, 됐다. 난 한번 헤어진 여자하고는 다시 얽히지고 싶지 않아” “그래, 그럼 술이나 마시자.” “그래” 태제는 한참동안 술만 마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일을 해결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지금까지 사귄 여자들의 목록을 뒤져봐도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결혼하고 싶은 여자는 생각나지 않는것이다.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이완이 이 말을 하기 전까지 태제는 여전히 여자들의 목록를 뒤지고 있었다. “야, 정태제! 너하고 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다.” 태제가 가물가물한 눈을 겨우 뜨고 이완을 쳐다보았다. “뭐?” “넌 지금 빨리 결혼해야 하는데 아직은 자유를 포기할 생각이 없고, 난 조용히 신혼을 즐기고 싶은데 동생 결혼문제 때문에 조용히 지낼수가 없어. 그런데 이 두 문제를 해결할 좋은 방법이 있어. 궁금하지?”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봐. 무슨 방법인데?” “넌 자유를 포기하지 않고 결혼할 여자가 필요하고, 난 은완이를 결혼시켜야돼 그런데 은완이가 결혼하려면 수완이가 먼저 결혼을 해야하지. 그러니까 너하고 수완이가 계약 결혼을 하는 거야.” “계약 결혼?” “그래, 너도 분명히 말했다시피 넌 아직 결혼생각이 없다고 했지? 우리 수완이도 아직은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했어. 그런 면에서 너희 둘은 이 난세에 같은 생각을 가진 동지잖아. 그러니까 너랑 수완이랑 결혼을 하되 가짜 결혼을 하는 거지. 쉽게 말해서 가족들에게만 결혼한 척 하는거야. 그리고 대충 같이 사는 것처럼 믿도록 하고, 그러다가 서로 이상형을 만났을때는 깨끗이 헤어져서 사랑하는 사람하고 진짜 결혼을 하는 거지. 어때? 내 생각이” 순간 태제의 흐릿한 눈이 반짝였다. “좋아! 까짓 거 죽기 아니면 살기다. 그러면 아버지는 치료을 받으실거고, 동생들은 이제 나한테 전화해서 협박하지도 않을거고, 나는 자유를 맘껏 즐겨도 된다 이거지. 야! 최이완! 너 머리 좋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우리 속담에 이런 명언이 있잖아. 자, 그런 의미에서 건배! 너와 수완이의 계약 결혼을 위해!” “야! 근데 수완이가 찬성할까? 우리끼리 먼저 김칫국부터 마시는게 아닐까? 수완이가 반대하면 이 계획은 아무 소용도 없는거잖아” “걱정마. 그 녀석은 찬성하게 돼있어. 이번 주에 선 보러 내려와야 되거든. 벌써부터 부모님은 선 볼 남자한테 박 서방이라고 부르고 계셔서 수완이도 엄청 겁먹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녀석도 모르는 남자하고 결혼하는 것보다 너하고 계약 결혼하는걸 택할거야. 그건 걱정하지말고 나한테 맡겨.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좋아! 너만 믿는다,” 그들은 잔을 들어 쭉 들어켰다. 이제 살았다!
[연재]여우와 너구리의 계약결혼 1
계절의 여왕 5월의 어느 저녁, 한국 서울에 있는 한 가정에서는 바야흐로 달콤한 음모가 진행중이었다. 얇은 커튼을 펄럭이며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 들어오는 창문 너머 발코니에는 꽃가게를 경영하는 정민주와 그리고 칠순이 넘은 그녀의 부모님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 있었다. 그들 앞에 놓인 찻잔에서 향긋한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지만, 그것을 즐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심각했고 그런 은밀한 상황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버지 그건 좀 심해요.”
정민주가 불안한 마음에 불만을 드러냈다.
“뭐가 심하단 말이냐? 그 놈은 이런 일 당해도 할말이 없는 놈이야. 제 아비가 위독하다는 데도 똥고집 부리며 버티면 그건 자식놈도 아닌거야. 정말 이러다간 네 어머니나 나나 죽기 전에 손주녀석 안아보기도 힘들게 생겼어.”
“아무리 그래도 당신이 쓰러졌다는 건 좀 심해요. 좀더 나은 방법을 생각해봐요”
나이에 비해 건강해 보이는 노부부는 의견이 맞지 않았다.
“엄마, 엄마도 오빠가 말로 해서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거 잘 아시잖아요. 오빠 성질 아시면서… 지금까지 몇번을 아버지나 엄마, 그리고 저까지 잔소리도 해봤고 야단도치고 마지막에는 애원까지 했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구요. 오빠가 말하는 쭉쭉빵빵에 머리좋고 거기다 성격까지 좋은 그런 완벽한 여자가 어디 있어요? 괜히 결혼하기는 싫고 이여자 저여자 만나고 싶으니까 둘러대는 핑계지. 아버지 말씀대로 하지 않으면 올해도 그냥 넘기기 쉽다구요. 그러면 엄마도 손주 보기는 틀렸고 저도 새언니 보는거 포기해야한다구요.”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가 쓰러졌다는건 좀 심하지 않니? 그리고 갑자기 어디서 여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겠어?”
“임자, 그건 당신이 몰라서 하는 말이야. 태제 그놈 주위에 널린 게 여자야.”
아버지의 화난 어투에 민주은 할말이 없었다. 그 말이 사실임을 그녀가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맞아요. 그 희진인가 뭔가 하는 아가씨와 제일 오래 사귀었잖아요. 아주 예쁘고 똑똑한 아가씨라고 기억하는데,그런 참한 아가씨가 있는데도 결혼은 안하고 여전히 바람돌이 행세만 하고 다니니 정말 걱정이예요.”
“그것 봐요. 엄마도 인정하잖아요. 그러니까 이번에 그 바람둥이 오빠를 정신차리게 하자고요. 아버지가 쓰러지셨다고 하고 죽기 전에 며느리 봐야겠으니 결혼하라고 하면 오빠가 어떻게 하겠어요? 지금까지 사귄 여자 중에서 제일 오래 사귄 여자와 결혼하지 않겠어요?”
“민주 말이 맞다. 이 늙은 부모가 천년 만년 사는것도 아니고 제 녀석 장가들 때까지 기다려줄 줄 아나? 그 녀석은 이번에 정신 좀 번쩍 나야 돼”
“좋아요, 당신이 심장병으로 쓰러졌다고 합시다. 그럼 병원에 입원을 해야 할 텐데 그건 어떻게 할 참이예요.”
“아이구, 당신도 참 답답하군. 박가가 심장 전문의 아닌가? 박가 병원에서 검사나 받고 몇 일 쉬면서 누워 있으면 돼”
그러자 늙은 노부인은 남편의 말에 반대의견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건 걱정 말아. 그리고 이번 기회에 당신도 나하고 같이 검사 좀 받읍시다”
“아니, 됐어요. 난 병원이라면 냄새도 맡기 싫어요”
민주는 정답게 얘기를 나누시는 부모님을 바라보았다.
“그럼 내일 오빠한테 전화할께요. 참 그런데 민희한테도 비밀로해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 태제녀석 버릇 고쳐놓는다고 말해주고 한번 다녀가라고 해라”
그건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새벽부터 엄마에게서 걸려온 전화는 대화가 아니라 그건 일방적인 통보였다.
“이미 사돈하고는 얘기가 끝났다. 넌 한번 집에 내려와서 박 서방만 만나면 돼”
“엄마, 사돈은 뭐고, 또 박 서방은 뭐예요? 언제부터 나한테 박 서방이 있었는데…그리고 30년이나 지난 어른들 약속을 왜 내가 책임을 져야하며, 얼굴도 모르고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하고 왜 결혼을해? 그리고 난 결혼할 맘 없어요. 그러니까 이일은 없었던일도 해요”
“네 나이가 지금 30이야! 다 큰 기집애가 시집도 안가고 서울에서 혼자 사는게 자랑인 줄 알아? 게다가 지금 은환이 기집애는 너 때문에 결혼 못한다고 매일 울고불고 난리났어. 큰아버님이 너 먼저 하기 전에는 절대로 안 된다고 엄포를 놓으셨어”
“그런 말도 안되는 말이 어딨어요? 임자 있는 사람이 먼저 가는거지 요즘 같은 시대에 차례 따져가며 결혼하는게 말이돼요. 그리고 동생 시집 보내려고 내가 얼굴도 모르는 사람하고 결혼해야 하냐구요”
“그렇다고 아주 모르는 사람도 아니잖니? 너희 아버지와 절친한 친구분의 아들이구. 그리고 그 청년 똑똑하고 인물도 아주 잘 생겼다고 하더라. 그러지 말고 맘에 드는지 한번 보기만해”
“그렇게 잘 생겼으면 엄마가 선 봐요. 난 싫으니까. 그리고 어떻게 그 말을 믿어요? 내려가서 선 보면 그 길로 예식장 행일텐데… 그 뻔한 일을 내가 왜 당해. 절대로 싫어요!”
“너 정말 이럴래? 그럼 네 동생은 어떻게 할래. 은환이도 너처럼 노처녀 만들래? 어떻게 넌 니 생각만해? 얼마나 못났으면 그 나이 먹도록 사귀는 남자가 하나도 없니? 대학 나와서 유학까지 다녀오고 직장 다니면서 눈먼 놈 하나 못 잡아? 시집 잘 가라고 서울까지 보냈더니 연애 한번 못하고 대체 뭐가 문제야?”
“몰라요! 아무튼 절대로 싫어요.”
“나도 몰라! 이 나쁜 기집애야! 아무튼 이번에 안 내려오면 이완이한테 너 머리채 잡아서 끌고오라고 할 테니까 그렇게 알아?”
“엄마! 여보세요?”
수완은 일방적으로 끊어진 전화기를 노려보며 비명을 질렀다.
하루종일 엄마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런, 또 장면을 놓쳤다. 수완은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깨물며 리모컨을 찾아 쥐었다. 얼마나 장면이 지났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이걸로 벌써 몇 번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수완은 되감기 버튼을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하다가는 마감때까지 일을 마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아무래도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수완은 계속 일하려던 마음을 바꿔서 아예 화면을 꺼버렸다. 그러고는 앉은뱅이 책상에서 자그마한 몸을 일으키며 쭉 기지개를 폈다. 오늘 일하기는 틀렸다. 이렇게 심란해서는 아무일도 되지 않는다. 이럴 때는 현경이라도 서울에 있으면 좋은 충고를 해줄 텐데… 수완은 지금 결혼해서 지방으로 내려간 단짝 친구가 너무도 그리웠다.
젠장, 그래 나가자. 이렇게 집에서 청승 떤다고 복잡한 머리에서 좋은 생각이 떠오르겠어!
제기랄, 절대로 결혼만은 못해. 절대로 안 돼!
칵테일 바에 앉아 앞에 놓인 붉은 칵테일잔을 바라보며 정태제는 마음속으로 울부짖었다.
여동생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 통에 요즘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뿐이면 말을 안한다. 인천에 사는 막내 민희는 며칠째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며불며 아버지 잘못되면 오빠탓 라고 협박을 하고 있었다. 빨리 대답을 못하면 당장이라도 지금사는 아파트로 쳐들어와 지나가는 아무 여자나 붙잡고 결혼시킬 태세였다. 오늘도 미친 듯이 울려대는 전화를 꺼두고 멍하니 사무실에 있다가 답답한 마음에 밖으로 뛰쳐나온 것이다.
결혼이라니! 이 정태제가 미치지 않고서는 결혼은 있을 수도 없다.
‘이 불효 막심한 놈. 어디서 말도 안 되는 똥고집을 피우는 거야? 하나 밖에 없는 아들로 태어났으면 하루 빨리 결혼을 해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늙은 부모에게 손주 안겨줄 생각을 해야지. 내가 아들이 하나 더 있으면 너한테 이런 말도 안해. 이 고약한 놈아’
지난 달에 부모님께 갔을 때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이다. 하지만 그 고집은 부전자전인가보다. 세상에, 쓰러진 분이 치료을 받지 않겠다는게 말이 되는가? 그것도 멀쩡한 나를 걸고 넘어지시면서! 아버지의 치료와 나의 결혼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태제는 부아가 치밀어 바라보던 잔을 쥐고 단숨에 비웠다. 독한 액체가 화끈거리며 식도를 타고 가슴으로 내려갔다.
절대로 나의 귀중한 자유를 아무 여자에게 넘길 순 없다. 그럼, 절대로 안될 일이지.
그는 빈잔을 두 손으로 쥐고 비장하게 울부짖느라, 친구 이완이 도착한 사실도 알지 못했다.
“미안, 오랜만이다. 내가 좀 늦었지?”
이완은 바텐더에게 태제와 같은 칵테일을 시켜며 자리에 앉았다.
“아니, 나도 방금 왔다. 근데 너 얼굴 좋아졌다. 제수씨가 잘해주나보군. 역시 신혼이야”
“자식, 좋아지긴 무슨… 요즘 우리 집안이 좀 시끄러워서 신혼의 단꿈은 커녕 제대로 숨도 못 쉰다. 임마!”
“왜? 집에 무슨일 있어?”
“응, 그렇게 심각한 일은 아니고, 막내 때문이지 뭐”
“막내? 그럼 은완이? 은완이가 왜? 그 녀석 똑똑하고 야무지잖아?
“그렇지! 근데 그렇게 야무진 녀석도 결혼문제에서는 다른 여자들하고 똑같더라.”
“결혼? 은완이가 벌써 결혼할 때가 됐나? 그럼 수완이도 결혼 했겠군”
여기도 나처럼 결혼문제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이 있군. 가만 이완이 부모님은 자식한테 결혼을 강요할 분이 절대 아닌데... 이쪽은 또 무슨 문제지.
“아니, 수완이는 아직 결혼 생각이 없나봐, 어른들은 수완이가 아직 결혼을 안했는데 은완이 먼저 보내기 뭐해서 아직 은완이 상견례도 못하고 있어. 은완이는 그게 불만이구.”
“요즘 같은 시대에 임자 있는 사람이 먼저 가는거지. 꼭 태어난 순서대로 결혼하란 법도 없잖아. 또 수완이 결혼하기 기다리다가는 은완이 노처녀될걸”
“야, 임마 수완이가 어때서? 똑똑하지! 착하지! 그만하면 일등 신부감이다. 어디 가서 수완이 같은 참한 여자 구해봐라 있나?”
“됐다. 임마, 누가 오빠 아니랄까봐 동생 자랑은…”
“근데 넌 무슨 일이냐? 아까 보니까 인상을 엄청 험악하게 쓰고 있던데”
태제는 자신의 지금 상황을 설명하자니 한숨이 먼저 나왔다. 어떻게 설명하랴.
아버지라는 사람은 쓰러졌으면서도 아들이 결혼하지 않으면 치료도 안받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두 여동생은 아버지가 잘못되면 다 못된 오빠 때문이라며 매일을 밤낮 가리지 않고 울며 전화를 하고 있었다. 더 이상은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무슨 일이야? 너 심각해 보인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그런데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치료을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계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버지를 택하자니 자유가 울고 자유를 택하자니 아버지가 울고. 정말 답답하다.”
“임마, 뭐가 그렇게 어렵냐? 그냥 결혼해. 정태제 주위에 차고 넘치는게 여자 아니였냐? 그중에서 제일 괜찮은 여자 골라서 결혼하면 되겠네. 간단하잖아. 아니면 희진이하고 다시 시작하던가. 희진이 아직 너 맘에 두고 있더라”
“아니, 됐다. 난 한번 헤어진 여자하고는 다시 얽히지고 싶지 않아”
“그래, 그럼 술이나 마시자.”
“그래”
태제는 한참동안 술만 마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일을 해결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지금까지 사귄 여자들의 목록을 뒤져봐도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결혼하고 싶은 여자는 생각나지 않는것이다.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이완이 이 말을 하기 전까지 태제는 여전히 여자들의 목록를 뒤지고 있었다.
“야, 정태제! 너하고 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다.”
태제가 가물가물한 눈을 겨우 뜨고 이완을 쳐다보았다.
“뭐?”
“넌 지금 빨리 결혼해야 하는데 아직은 자유를 포기할 생각이 없고, 난 조용히 신혼을 즐기고 싶은데 동생 결혼문제 때문에 조용히 지낼수가 없어. 그런데 이 두 문제를 해결할 좋은 방법이 있어. 궁금하지?”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봐. 무슨 방법인데?”
“넌 자유를 포기하지 않고 결혼할 여자가 필요하고, 난 은완이를 결혼시켜야돼 그런데 은완이가 결혼하려면 수완이가 먼저 결혼을 해야하지. 그러니까 너하고 수완이가 계약 결혼을 하는 거야.”
“계약 결혼?”
“그래, 너도 분명히 말했다시피 넌 아직 결혼생각이 없다고 했지? 우리 수완이도 아직은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했어. 그런 면에서 너희 둘은 이 난세에 같은 생각을 가진 동지잖아. 그러니까 너랑 수완이랑 결혼을 하되 가짜 결혼을 하는 거지. 쉽게 말해서 가족들에게만 결혼한 척 하는거야. 그리고 대충 같이 사는 것처럼 믿도록 하고, 그러다가 서로 이상형을 만났을때는 깨끗이 헤어져서 사랑하는 사람하고 진짜 결혼을 하는 거지. 어때? 내 생각이”
순간 태제의 흐릿한 눈이 반짝였다.
“좋아! 까짓 거 죽기 아니면 살기다. 그러면 아버지는 치료을 받으실거고, 동생들은 이제 나한테 전화해서 협박하지도 않을거고, 나는 자유를 맘껏 즐겨도 된다 이거지. 야! 최이완! 너 머리 좋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우리 속담에 이런 명언이 있잖아. 자, 그런 의미에서 건배! 너와 수완이의 계약 결혼을 위해!”
“야! 근데 수완이가 찬성할까? 우리끼리 먼저 김칫국부터 마시는게 아닐까? 수완이가 반대하면 이 계획은 아무 소용도 없는거잖아”
“걱정마. 그 녀석은 찬성하게 돼있어. 이번 주에 선 보러 내려와야 되거든. 벌써부터 부모님은 선 볼 남자한테 박 서방이라고 부르고 계셔서 수완이도 엄청 겁먹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녀석도 모르는 남자하고 결혼하는 것보다 너하고 계약 결혼하는걸 택할거야. 그건 걱정하지말고 나한테 맡겨.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좋아! 너만 믿는다,”
그들은 잔을 들어 쭉 들어켰다.
이제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