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완은 어제 과음을 한 탓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고, 거기에 속까지 쓰려서 도저히 일어날수가 없었다.
간신히 손을 뻗어 침대 옆 탁상에 있는 시계를 집어들었다.
12시 15분
오늘은 안돼. 도저히 못 일어나겠군. 그냥 오후 늦게까지 누워서 시체놀이나 하다가 아픈 속을 시원하게 풀 해장국이나 시켜먹고 일을 해야겠다. 그럼 잠 좀 더 자야지. 근데 어젯밤에 아주 기분나쁜 꿈을 꾼 것 같은데 무슨 꿈이 였지? 맞다. 그 바람둥이 정태제가 등장한 꿈이었지. 정말 재수없는 개꿈이군. 그냥 일어날까? 아니야. 그래도 더 자야 해.
설마 그 인간이 나오는 꿈을 또 꾸겠어.
막 잠이 들려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수완은 못들은 척 이불을 뒤집어썼다.
올 사람도 없는데 도대체 누가 왔을까? 에라, 모르겠다. 몸도 무거운데….
대답을 안하면 집에 없으려니 하고 그냥 가겠지.
한참을 울리던 초인종이 잠시 끊겼다가 이어서 현관문을 쾅쾅 때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베개로 귀를 막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던 수완은 아랫집에서 올까봐 그만 벌떡 일어났다.
“누구세요”
현관문을 열며 물어보는 목소리에서는 짜증이 묻어 나왔다.
“야, 최수완! 너 지금까지 잔거냐?”
이완오빠였다. 수완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시간에 이완이 그녀의 집을 방문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엄마의 전화를 생각해냈다. 엄마는 정말로 오빠를 보낸것이다.
“오빠가 왠일이야?’
그러자 이완은 거실로 들어서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한번 들러본거야. 근데 어제 뭘 했기에 아직까지 자는거야?”
“작게 말해, 머리 울리니까. 커피마실래?”
“술 마셨냐?”
“응”
커피를 내리기 위해 주방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뭘?”
이완은 어제 생각한 계약결혼에 대해 말하기 위해 수완이 들어간 주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수완은 헐렁한 흰색 티셔츠에 베이지색의 짧은 반바지를 입고, 맨발로 식탁의자에 앉아 내려지는 커피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 볼거냐? 나도 한번 봤는데 괜찮은 사람같더라.”
“선 안봐. 절대. 오빠가 엄마, 아빠한테 잘 좀 말해줘. 요즘 같은 세상에 동생이 먼저 결혼하면 어때? 있으면 먼저 하는거지. 그리고 동생 때문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하고 선 봐서 결혼하고 싶지도 않아. 그런 일은 죽어도 싫어”
“나도 말 안해본거 아니야. 니 새언니하고 나하고 얼마나 말씀드렸는데.. 그런대도 마음 바꾸실 생각이 없으시더라”
수완은 이완의 말을 들으며 내려진 커피를 잔에 따라 식탁에 놓았다. 정말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런때 남자친구라도 있다면 이렇게 답답하지는 않을덴데… 지금까지 뭐했니? 최수완! 남자친구 하나없이… 정말 한심하다. 에휴
“저기… 수완아,”
“왜? 선 보라는 말이라면 하지마. 그러면 나 미쳐버릴것 같으니까”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는데…”
“무슨?”
“저기, 너 혹시 정태제 기억하냐? 어제 태제하고 술 한잔 했거든. 태제도 너처럼 결혼문제 때문에 고민이 이만 저만이 아니더라. 지금도 아버지가 쓰러지셨는데 그 녀석이 결혼하기 전까지는 치료도 안 받겠다고 하신데…”
“그런데? 왜 그사람 문제를 나한테 말하는거야? 나도 지금 내 코가 석자야. 이런 내가 지금 다른사람 문제에 신경쓰게 생겼어? 그건 그렇고 좋은 생각이 뭐야?”
“저기, 너 태제하고 결혼해라.”
“뭐, 오빠 미쳤어. 내가 왜 그런 바람둥이하고 결혼을 해. 정말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아니. 누가 진짜로 결혼하래. 너하고 태제하고 같은 결혼문제로 고민이니까. 둘이서 계약결혼을 하면 두사람 다 문제가 해결되잖아. 너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하고 선 안 봐도 되고 태제도 결혼 때문에 자유로운 생활 포기하지 않아도 되고.. 괜찮은 생각아니야?”
수완은 오빠의 말을 들으며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오빠 말처럼 괜찮은 생각 같았다. 하지만 그 상대가 문제였다. 정태제. 그가 누구인가? 6년전 그녀가 10년간의 사랑을 고백했을 때 그녀를 한 순간에 비참한 기분이 들도록 만든 인간이 아닌가. 아직까지 그때 그가 한말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런 사람하고 계약 결혼. 많이 망설여지는 제안이였다.
“괜찮은 방법이긴 한데… 그사람도 찬성할까?”
“태제는 벌써 찬성했어. 너만 괜찮다고 하면 돼. 어때?”
“그사람이 좋다고 했다구?”
“그래”
“훗, 그인간도 상당히 급한 모양이군. 근데 그인간은 사귀는 여자도 많으면서 결혼할 상대하나 못 구했나봐 나한테까지 얘기하는거 보면 말야. 하긴 뭐 계약결혼이지만 모르는 사람보다는 안면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 좋겠지?”
“좋아. 그러면 태제한테 연락해야겠다.”
“지금?”
“어. 이런 문제일수록 빨리 해결하는게 마음 편하고 좋아. 언제까지 신경쓸수는 없잖아.”
“급하긴 엄청 급한가보군. 하지만 난 그사람하고 단둘이 만나는거 사절이야. 오빠가 동석해야만 그사람 만날거야. 그리고 약속시간도 오빠가 정해서 나한테 알려줘. 알았지?”
“너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이냐? 그냥 태제가 전화하면 약속시간하고 장소만 정하고 만나서 계약기간동안 서로 지켜야할 사항이나 말하고 헤어지면 되잖아.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너 태제녀석 잘 따랐잖아. 그리고 너 태제하고 많이 친했으면서 호칭이 왜 그러냐? 전에는 오빠라고 잘 불렀잖아?”
“얼굴 못본지 벌써 6년이야. 갑자기 오빠라고 자연스럽게 나올것 같아.”
“ 그런가”
“그래. 그러니까 이제 할 말 다했으면 그만 가. 나도 일해야 돼. 오빠처럼 돈 잘 버는 변호사나리는 모르겠지만 난 열심히 일해야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다말야.”
“알았다. 간다. 가. 만약 내가 일이 바빠서 못가면 연락하겠지만 둘이 만나더라도 그 성질 죽이고 잘해.”
“알았어. 그만 잔소리하고 가라 응?”
“일하더라도 밥이나 먹고 일하고 요즘 낮에도 위험하니까 문단속 잘하고 있어 알았지?”
“알았으니까 걱정은 그만하고 가. 내가 세살 먹은 어린애줄 알아?”
“그래. 그럼 진짜로 간다”
이완은 현관으로 나가면서 자신보다 휠씬 키가 작은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어제,오늘 어머니의 전화로 고민을 많이 했는지 얼굴이 엉망이었다. 이완은 태제를 믿고 있지만 수완이 걱정되었다. 수완은 자신의 감정을 숨긴다고 했겠지만 태제의 대한 동생의 마음을 어느정도 눈치 채고 있던 이완이였다. 하지만 6년전 자신의 군대에 있을 당시 두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갑자기 수완이 태제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아우, 된장…”
수완는 오빠가 다녀간 후 라면으로 배를 채우고 어제 하다만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도는 전혀 나아가지 않았으며 자꾸 오빠가 한 제안을 괜히 받아들였다는 후회가 드는 것이 정말 미칠것만 같았다.
당장에 오빠에게 전화를 할까 말까 하면서 전화기만 들었다 놓았다 한 것이 벌써 30분이 흘렸다. 안되겠다. 생각하고 전화기를 들려고 했는데 그때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잠깐 깜짝 놀라 멍하니 전화기만 바라보다가 계속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놀라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받은 전화에서는 떨리는 가느다란 목소리가 나왔다.
“여보세요. 최수완씨 댁이죠? 혹시 계신가요?”
“제가 최수완인데.. 누구시죠?”
웬 남자 목소리였다. 경지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에게 전화할 남자는 아버지와 오빠 그리고 일관계로 만나는 사람들이라서 자신이 직접 전화를 받는걸 아는지라 이렇게 정중하게 자신을 찾지는 않았다. 그리고 몇 명 안되는 친구놈들은 이렇게 정중하게 전화할 놈들이 절대 아니었다.
“최수완, 나 정태제다. 기억하지?”
정태제?
수완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싶은걸 간신히 참고 있었다.
“네?”
“정태제라고. 이완이한테 얘기 못들었나보지?”
듣기야 들었지만 정태제가 나한테 직접 전화할 줄은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미치겠군.
“여보세요? 최수완 듣고 있는거야?”
아니 잠깐 이인간은 언제 봤다고 계속 반말이야. 기분 나쁘게. 예전이나 지금이나 재수없는건 똑같군. 인간아! 나이를 먹었으면 철 좀 들어라. 흥
“네! 듣고 있어요. 근데 왠일이세요?”
“정말 이완이가 말 안했구나. 오늘 저녁에 좀 봤으면 하는데… 그 결혼얘기도 있고해서 말야. 저녁에 시간 괞찮지?"
"네 괜찮아요. 근데 우리 둘이 만나는건가요?”
“응. 이완이 녀석은 요새 많이 바쁜 것 같더라. 그럼, 7시에 대방동에서 보자. 내가 다시 전화할께.”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수완은 멍한 정신으로 주방으로 갔다. 차라도 마셔야 정신이 좀 날것 같았다. 내가 지금 무슨일을 저질렀지. 정말 미쳤겠군. 내가 뭐에 홀린게 아닐까? 그 박서방이란 인간 때문에 더 끔찍한 인간을 만나게 생겼으니. 이건 정말 제 발로 호랑이굴로 들어간거나 다름이 없었다.
최수완, 축하한다. 너 진짜 엄청난 사고쳤구나!
태제는 입안에 가득한 불루마운틴 향기를 음미하며 푹신한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앉아 있었다. 오후에 전화기를 통해 들려온 수완의 목소리를 생각하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수완뿐만이 아니었다. 당장에 결혼하겠다는 자신의 말에 부모님과 동생들의 반응은 또 어땠었나? 언제나 누나처럼 잔소리를 하던 여동생이 할 말을 잊고 버벅거리는 건 33년을 살면서 처음으로 본 광경이었다. 병원에 계신 어머니는 울음을 터뜨리시며 곧 아버지가 치료를 받으신다고 했다며 어서 수완과 같이 오라고 성화였다.
수완이도 나랑 똑같겠지. 아니야, 어쩌면 그 박서방인지 하는 녀석이 더 났다고 하실지도.흥.
저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그 박서방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겠어. 이 정태제보다 더 나을 리는 절대 없지. 예전에 수완은 내가 좋다고 고백까지 했는데. 얼굴도 모르는 인간보다는 예전이지만 좋다고 고백한 내가 더 좋지 않겠어. 그래도 정 안되면 직접 찾아뵙고 설득하지 뭐.
“뭐가 좋아서 그렇게 히죽거려요? 보는 사람 기분 나쁘게”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수완이 와 있었다.
“어? 왔어? 앉아. 계속 그렇게 서있을거야?”
수완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헐렁한 점퍼에 바지는 발목에 고무줄이 대어져 있는 그냥 평범한 츄리닝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남자 신발처럼 우악스럽게 보이는 빨간 운동화가 비죽 나와 있었다. 설마 발이 저렇게 큰 건 아니겠지? 발 큰 여자는 매력이 없는데. 아무리 봐도 저 운동화는 260, 아니 270은 되어 보이는군.
태제는 피식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들었다. 푹 눌러쓴 야구 모자 아래로 조그만 입술을 연신 깨물며 있는 수완이 보였다.
“ 그 야구 모자는 벗는게 좋겠어. 그래도 결혼얘기를 하는데 서로 얼굴은 보고 이야기해야지.”
수완은 잠시 머뭇거리면서 모자를 벗었다. 조그만 흰 얼굴은 퉁퉁 부어 있으며 두 눈은 퀭한 것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을 보며 웃음을 터뜨리는 태제를 보자 수완은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과 달리 깔끔하고 단정한 태제를 보자 자신이 초라해 보여 그냥 집으로 가고 싶은 생각뿐이였는데 자신을 보며 웃자 정말 비참한 기분만 들었다.
수완이 그냥 집에 갈까? 하며 생각하고 있을 때 주문을 받으러 웨이트리스가 오는 바람에 어쩔수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 커피요. 진하게 주세요”
그러자 태제는 더 크게 웃기 시작했다.
“ 왜 자꾸 웃는거죠. 기분 나쁘니까 그만 좀 웃어요.”
“최수완. 너 오늘 세수는 하고 나온거냐? 어째 잠이 덜 깬것같다. 그래서 진한 커피가 필요한거 아니야?”
수완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어? 이런 완전히 머리에서 스팀이 올라올 기세네? 안 되겠다. 더 이상 놀렸다가는 내명에 못 죽을것 같군. 수완이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무언가 말하려 하자, 태제는 재빨리 화제를 돌려버렸다.
“ 그래, 너희 집에서는 뭐라고 하셔? 부모님한테 말씀을 드렸지?”
그러자 수완의 얼굴은 더욱 주름을 만들며 굳어졌다.
“ 미안해요. 제가 생각을 잘못한 것 같아요.”
“ 뭐, 생각을 잘못했다니?”
태제는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이완오빠한테 그 얘기를 들었을때는 정말 좋은 해결책으로 같았어요. 그래서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승낙하고 말았는데 부모님을 속이는 것도 그렇고, 계약 결혼을 하는것도 좀….”
좀…..뭐?
하지만 수완은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태제가 무척이나 난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어서 더욱 말하기가 어려웠다.
농담은 아닌거 같은데? 이거 큰일이군.
실실 웃음을 흘리던 태제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넌 없던 일로 하자 이말이냐?”
그는 수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정말 미안해요. 그땐 저도 정말로 그방법이 좋게 생각됐어요. 하지만 부모님을 속여가며 그런 연극을 하고 싶진 않아요. 미안해요. 선배.”
똘망똘망한 까만 눈에는 피곤한 기색이 남아 있었지만 수완의 결심은 확고부동한 것 같았다. 태제는 한숨밖에 안 나왔다. 이거 정말 큰일이군. 집에 전화해서 미래의 며느리가 결혼을 취소했다고 하면 왈가닥 여동생들은 둘째치고 병원에 계신 노인네 또 쓰러지실 텐데….
가슴속에서 배신감이 치솟았다. 오후에 이완한테서 전화를 받고 의외의 방식으로 골치 아픈 문제가 해결된 기쁨에 방정맞게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곧 결혼한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이제는 부모님과 여동생들에게 뭐라고 변명을 해야할지 난감했다. 이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하자 앞에 있는 쬐끄만 여자에게 느끼는 배신감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 태제의 얼굴이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험악해진 모양이었다. 그를 쳐다보던 수완이 슬슬 눈치를 살피며 모기소리만한 소리로 종알거렸다.
“ 미안해요. 선배가 그런 제안을 진심으로 생각했다곤…….”
“됐다. 괜찮으니까. 신경쓰지마.”
태제는 우물쭈물 입을 여는 수완의 말을 중간에서 뚝 잘랐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천하의 정태제가 싫다는 여자에게 매달리며 애원할 수는 없지. 더욱이 예전에 자신이 찬 여자에게… 그리고 지금은 미안하다는 소리는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문제가 이렇게 커진 것은 경솔하게 가족들에게 먼저 떠벌리고 다닌 자신의 잘못이었다.
“일은 이렇게 됐지만, 다시 만나서 반가웠다. 최수완. 그럼 이만 일어서야겠는걸. 회사를 오래 비울 수가 없거든.”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가, 가시게요?”
수완은 고개를 들어 태제를 올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음에 서로 골치 아픈 문제가 해결되면 만나서 술이나 한 잔하자. 예전엔 자주 마셨잖아.”
그는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수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태제는 단호하게 돌안섰다. 결국 원점이다. 이제부터는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봐야 했다. 아, 정말 난리났군. 집에는 어떻게 결혼하지 않는다는 말을 어떻게 꺼내지.
카페를 나서는 그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사실 수완은 엄마의 경고를 만만하게 들었던 건 절대 아니었다. 단지 정태제를 오랜만에 만났고, 쓸데없는 결약 결혼 같은 해프닝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엄마가 말했던 박서방을 깜박 잊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토요일, 잠결에 현관문을 열었을 때 이완오빠와 엄숙한 표정의 아버지를 보자 수완은 새삼 엄마의 말이 생각나서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아버지………”
“수완, 너 빨리 준비하고 나오너라.”
아버지가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수완의 손을 잡아 끌며 말하셨다.
“네? 왜요? 어디 가시려구요?”
“내가 박서방하고 약속을 해놨다. 오늘 너 데리고 나간다고 했으니 얼른 준비하거라.”
박, 박서방? 무슨 박서방?
“아빠!”
“시끄럽다. 내가 너 머리라도 잡아 끌고 가야겠냐? 그 꼴로 가고 싶지 않거든 어서 준비하고 나오래두.”
아버지는 인상을 쓰시며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정말 조금이라도 늦장을 부렸다가는 목덜미가 잡혀서 끌려나갈 것 같았다.
그녀는 이완을 끌고 방으로 들어가며 문을 꽝 닫았다.
“오빠! 제발 오빠가 아버지 좀 말려줘. 어떻게 갑자기 오셔서 이럴 수 있어.”
“나한테 뭐라고 하지마. 나도 할만큼 했으니까. 그러게 태제하고 결혼하면 이런 일도 없잖아. 왜 팅겨서 일을 이지경까지 만들어. 지금 네가 팅길때야.”
“오빠? 오빠는 어떻게 동생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몰라. 나도 이제는 두손 두발 다 들었으니까 너가 알아서 해. 니가 다 해결할 수 있으니까 태제를 거절한거 아니야.”
“정말 미치겠네. 아후 짜증나”
“짜증은 그만 내고 빨리 준비나 해 아버지 지금도 밖에서 시간재고 계실걸.”
이완은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며 돌아서서 말했다.
정말 이러다 나 그 박서방하고 결혼하는거 아닐까. 안돼. 수완은 질끈 눈을 감았다. 한마디로 그저 눈앞이 캄캄해졌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다.
[연재]여우와 너구리의 계약결혼2
“아이구, 머리야…”
수완은 어제 과음을 한 탓에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고, 거기에 속까지 쓰려서 도저히 일어날수가 없었다.
간신히 손을 뻗어 침대 옆 탁상에 있는 시계를 집어들었다.
12시 15분
오늘은 안돼. 도저히 못 일어나겠군. 그냥 오후 늦게까지 누워서 시체놀이나 하다가 아픈 속을 시원하게 풀 해장국이나 시켜먹고 일을 해야겠다. 그럼 잠 좀 더 자야지. 근데 어젯밤에 아주 기분나쁜 꿈을 꾼 것 같은데 무슨 꿈이 였지? 맞다. 그 바람둥이 정태제가 등장한 꿈이었지. 정말 재수없는 개꿈이군. 그냥 일어날까? 아니야. 그래도 더 자야 해.
설마 그 인간이 나오는 꿈을 또 꾸겠어.
막 잠이 들려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수완은 못들은 척 이불을 뒤집어썼다.
올 사람도 없는데 도대체 누가 왔을까? 에라, 모르겠다. 몸도 무거운데….
대답을 안하면 집에 없으려니 하고 그냥 가겠지.
한참을 울리던 초인종이 잠시 끊겼다가 이어서 현관문을 쾅쾅 때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베개로 귀를 막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던 수완은 아랫집에서 올까봐 그만 벌떡 일어났다.
“누구세요”
현관문을 열며 물어보는 목소리에서는 짜증이 묻어 나왔다.
“야, 최수완! 너 지금까지 잔거냐?”
이완오빠였다. 수완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시간에 이완이 그녀의 집을 방문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엄마의 전화를 생각해냈다. 엄마는 정말로 오빠를 보낸것이다.
“오빠가 왠일이야?’
그러자 이완은 거실로 들어서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한번 들러본거야. 근데 어제 뭘 했기에 아직까지 자는거야?”
“작게 말해, 머리 울리니까. 커피마실래?”
“술 마셨냐?”
“응”
커피를 내리기 위해 주방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뭘?”
이완은 어제 생각한 계약결혼에 대해 말하기 위해 수완이 들어간 주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수완은 헐렁한 흰색 티셔츠에 베이지색의 짧은 반바지를 입고, 맨발로 식탁의자에 앉아 내려지는 커피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 볼거냐? 나도 한번 봤는데 괜찮은 사람같더라.”
“선 안봐. 절대. 오빠가 엄마, 아빠한테 잘 좀 말해줘. 요즘 같은 세상에 동생이 먼저 결혼하면 어때? 있으면 먼저 하는거지. 그리고 동생 때문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하고 선 봐서 결혼하고 싶지도 않아. 그런 일은 죽어도 싫어”
“나도 말 안해본거 아니야. 니 새언니하고 나하고 얼마나 말씀드렸는데.. 그런대도 마음 바꾸실 생각이 없으시더라”
수완은 이완의 말을 들으며 내려진 커피를 잔에 따라 식탁에 놓았다. 정말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런때 남자친구라도 있다면 이렇게 답답하지는 않을덴데… 지금까지 뭐했니? 최수완! 남자친구 하나없이… 정말 한심하다. 에휴
“저기… 수완아,”
“왜? 선 보라는 말이라면 하지마. 그러면 나 미쳐버릴것 같으니까”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는데…”
“무슨?”
“저기, 너 혹시 정태제 기억하냐? 어제 태제하고 술 한잔 했거든. 태제도 너처럼 결혼문제 때문에 고민이 이만 저만이 아니더라. 지금도 아버지가 쓰러지셨는데 그 녀석이 결혼하기 전까지는 치료도 안 받겠다고 하신데…”
“그런데? 왜 그사람 문제를 나한테 말하는거야? 나도 지금 내 코가 석자야. 이런 내가 지금 다른사람 문제에 신경쓰게 생겼어? 그건 그렇고 좋은 생각이 뭐야?”
“저기, 너 태제하고 결혼해라.”
“뭐, 오빠 미쳤어. 내가 왜 그런 바람둥이하고 결혼을 해. 정말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아니. 누가 진짜로 결혼하래. 너하고 태제하고 같은 결혼문제로 고민이니까. 둘이서 계약결혼을 하면 두사람 다 문제가 해결되잖아. 너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하고 선 안 봐도 되고 태제도 결혼 때문에 자유로운 생활 포기하지 않아도 되고.. 괜찮은 생각아니야?”
수완은 오빠의 말을 들으며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오빠 말처럼 괜찮은 생각 같았다. 하지만 그 상대가 문제였다. 정태제. 그가 누구인가? 6년전 그녀가 10년간의 사랑을 고백했을 때 그녀를 한 순간에 비참한 기분이 들도록 만든 인간이 아닌가. 아직까지 그때 그가 한말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런 사람하고 계약 결혼. 많이 망설여지는 제안이였다.
“괜찮은 방법이긴 한데… 그사람도 찬성할까?”
“태제는 벌써 찬성했어. 너만 괜찮다고 하면 돼. 어때?”
“그사람이 좋다고 했다구?”
“그래”
“훗, 그인간도 상당히 급한 모양이군. 근데 그인간은 사귀는 여자도 많으면서 결혼할 상대하나 못 구했나봐 나한테까지 얘기하는거 보면 말야. 하긴 뭐 계약결혼이지만 모르는 사람보다는 안면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 좋겠지?”
“좋아. 그러면 태제한테 연락해야겠다.”
“지금?”
“어. 이런 문제일수록 빨리 해결하는게 마음 편하고 좋아. 언제까지 신경쓸수는 없잖아.”
“급하긴 엄청 급한가보군. 하지만 난 그사람하고 단둘이 만나는거 사절이야. 오빠가 동석해야만 그사람 만날거야. 그리고 약속시간도 오빠가 정해서 나한테 알려줘. 알았지?”
“너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이냐? 그냥 태제가 전화하면 약속시간하고 장소만 정하고 만나서 계약기간동안 서로 지켜야할 사항이나 말하고 헤어지면 되잖아.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너 태제녀석 잘 따랐잖아. 그리고 너 태제하고 많이 친했으면서 호칭이 왜 그러냐? 전에는 오빠라고 잘 불렀잖아?”
“얼굴 못본지 벌써 6년이야. 갑자기 오빠라고 자연스럽게 나올것 같아.”
“ 그런가”
“그래. 그러니까 이제 할 말 다했으면 그만 가. 나도 일해야 돼. 오빠처럼 돈 잘 버는 변호사나리는 모르겠지만 난 열심히 일해야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다말야.”
“알았다. 간다. 가. 만약 내가 일이 바빠서 못가면 연락하겠지만 둘이 만나더라도 그 성질 죽이고 잘해.”
“알았어. 그만 잔소리하고 가라 응?”
“일하더라도 밥이나 먹고 일하고 요즘 낮에도 위험하니까 문단속 잘하고 있어 알았지?”
“알았으니까 걱정은 그만하고 가. 내가 세살 먹은 어린애줄 알아?”
“그래. 그럼 진짜로 간다”
이완은 현관으로 나가면서 자신보다 휠씬 키가 작은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어제,오늘 어머니의 전화로 고민을 많이 했는지 얼굴이 엉망이었다. 이완은 태제를 믿고 있지만 수완이 걱정되었다. 수완은 자신의 감정을 숨긴다고 했겠지만 태제의 대한 동생의 마음을 어느정도 눈치 채고 있던 이완이였다. 하지만 6년전 자신의 군대에 있을 당시 두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갑자기 수완이 태제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아우, 된장…”
수완는 오빠가 다녀간 후 라면으로 배를 채우고 어제 하다만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도는 전혀 나아가지 않았으며 자꾸 오빠가 한 제안을 괜히 받아들였다는 후회가 드는 것이 정말 미칠것만 같았다.
당장에 오빠에게 전화를 할까 말까 하면서 전화기만 들었다 놓았다 한 것이 벌써 30분이 흘렸다. 안되겠다. 생각하고 전화기를 들려고 했는데 그때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잠깐 깜짝 놀라 멍하니 전화기만 바라보다가 계속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놀라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받은 전화에서는 떨리는 가느다란 목소리가 나왔다.
“여보세요. 최수완씨 댁이죠? 혹시 계신가요?”
“제가 최수완인데.. 누구시죠?”
웬 남자 목소리였다. 경지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에게 전화할 남자는 아버지와 오빠 그리고 일관계로 만나는 사람들이라서 자신이 직접 전화를 받는걸 아는지라 이렇게 정중하게 자신을 찾지는 않았다. 그리고 몇 명 안되는 친구놈들은 이렇게 정중하게 전화할 놈들이 절대 아니었다.
“최수완, 나 정태제다. 기억하지?”
정태제?
수완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싶은걸 간신히 참고 있었다.
“네?”
“정태제라고. 이완이한테 얘기 못들었나보지?”
듣기야 들었지만 정태제가 나한테 직접 전화할 줄은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미치겠군.
“여보세요? 최수완 듣고 있는거야?”
아니 잠깐 이인간은 언제 봤다고 계속 반말이야. 기분 나쁘게. 예전이나 지금이나 재수없는건 똑같군. 인간아! 나이를 먹었으면 철 좀 들어라. 흥
“네! 듣고 있어요. 근데 왠일이세요?”
“정말 이완이가 말 안했구나. 오늘 저녁에 좀 봤으면 하는데… 그 결혼얘기도 있고해서 말야. 저녁에 시간 괞찮지?"
"네 괜찮아요. 근데 우리 둘이 만나는건가요?”
“응. 이완이 녀석은 요새 많이 바쁜 것 같더라. 그럼, 7시에 대방동에서 보자. 내가 다시 전화할께.”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수완은 멍한 정신으로 주방으로 갔다. 차라도 마셔야 정신이 좀 날것 같았다. 내가 지금 무슨일을 저질렀지. 정말 미쳤겠군. 내가 뭐에 홀린게 아닐까? 그 박서방이란 인간 때문에 더 끔찍한 인간을 만나게 생겼으니. 이건 정말 제 발로 호랑이굴로 들어간거나 다름이 없었다.
최수완, 축하한다. 너 진짜 엄청난 사고쳤구나!
태제는 입안에 가득한 불루마운틴 향기를 음미하며 푹신한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앉아 있었다. 오후에 전화기를 통해 들려온 수완의 목소리를 생각하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수완뿐만이 아니었다. 당장에 결혼하겠다는 자신의 말에 부모님과 동생들의 반응은 또 어땠었나? 언제나 누나처럼 잔소리를 하던 여동생이 할 말을 잊고 버벅거리는 건 33년을 살면서 처음으로 본 광경이었다. 병원에 계신 어머니는 울음을 터뜨리시며 곧 아버지가 치료를 받으신다고 했다며 어서 수완과 같이 오라고 성화였다.
수완이도 나랑 똑같겠지. 아니야, 어쩌면 그 박서방인지 하는 녀석이 더 났다고 하실지도.흥.
저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그 박서방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겠어. 이 정태제보다 더 나을 리는 절대 없지. 예전에 수완은 내가 좋다고 고백까지 했는데. 얼굴도 모르는 인간보다는 예전이지만 좋다고 고백한 내가 더 좋지 않겠어. 그래도 정 안되면 직접 찾아뵙고 설득하지 뭐.
“뭐가 좋아서 그렇게 히죽거려요? 보는 사람 기분 나쁘게”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수완이 와 있었다.
“어? 왔어? 앉아. 계속 그렇게 서있을거야?”
수완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헐렁한 점퍼에 바지는 발목에 고무줄이 대어져 있는 그냥 평범한 츄리닝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남자 신발처럼 우악스럽게 보이는 빨간 운동화가 비죽 나와 있었다. 설마 발이 저렇게 큰 건 아니겠지? 발 큰 여자는 매력이 없는데. 아무리 봐도 저 운동화는 260, 아니 270은 되어 보이는군.
태제는 피식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들었다. 푹 눌러쓴 야구 모자 아래로 조그만 입술을 연신 깨물며 있는 수완이 보였다.
“ 그 야구 모자는 벗는게 좋겠어. 그래도 결혼얘기를 하는데 서로 얼굴은 보고 이야기해야지.”
수완은 잠시 머뭇거리면서 모자를 벗었다. 조그만 흰 얼굴은 퉁퉁 부어 있으며 두 눈은 퀭한 것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을 보며 웃음을 터뜨리는 태제를 보자 수완은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과 달리 깔끔하고 단정한 태제를 보자 자신이 초라해 보여 그냥 집으로 가고 싶은 생각뿐이였는데 자신을 보며 웃자 정말 비참한 기분만 들었다.
수완이 그냥 집에 갈까? 하며 생각하고 있을 때 주문을 받으러 웨이트리스가 오는 바람에 어쩔수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 커피요. 진하게 주세요”
그러자 태제는 더 크게 웃기 시작했다.
“ 왜 자꾸 웃는거죠. 기분 나쁘니까 그만 좀 웃어요.”
“최수완. 너 오늘 세수는 하고 나온거냐? 어째 잠이 덜 깬것같다. 그래서 진한 커피가 필요한거 아니야?”
수완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어? 이런 완전히 머리에서 스팀이 올라올 기세네? 안 되겠다. 더 이상 놀렸다가는 내명에 못 죽을것 같군. 수완이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무언가 말하려 하자, 태제는 재빨리 화제를 돌려버렸다.
“ 그래, 너희 집에서는 뭐라고 하셔? 부모님한테 말씀을 드렸지?”
그러자 수완의 얼굴은 더욱 주름을 만들며 굳어졌다.
“ 미안해요. 제가 생각을 잘못한 것 같아요.”
“ 뭐, 생각을 잘못했다니?”
태제는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이완오빠한테 그 얘기를 들었을때는 정말 좋은 해결책으로 같았어요. 그래서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승낙하고 말았는데 부모님을 속이는 것도 그렇고, 계약 결혼을 하는것도 좀….”
좀…..뭐?
하지만 수완은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태제가 무척이나 난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어서 더욱 말하기가 어려웠다.
농담은 아닌거 같은데? 이거 큰일이군.
실실 웃음을 흘리던 태제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넌 없던 일로 하자 이말이냐?”
그는 수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정말 미안해요. 그땐 저도 정말로 그방법이 좋게 생각됐어요. 하지만 부모님을 속여가며 그런 연극을 하고 싶진 않아요. 미안해요. 선배.”
똘망똘망한 까만 눈에는 피곤한 기색이 남아 있었지만 수완의 결심은 확고부동한 것 같았다. 태제는 한숨밖에 안 나왔다. 이거 정말 큰일이군. 집에 전화해서 미래의 며느리가 결혼을 취소했다고 하면 왈가닥 여동생들은 둘째치고 병원에 계신 노인네 또 쓰러지실 텐데….
가슴속에서 배신감이 치솟았다. 오후에 이완한테서 전화를 받고 의외의 방식으로 골치 아픈 문제가 해결된 기쁨에 방정맞게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곧 결혼한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이제는 부모님과 여동생들에게 뭐라고 변명을 해야할지 난감했다. 이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하자 앞에 있는 쬐끄만 여자에게 느끼는 배신감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 태제의 얼굴이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험악해진 모양이었다. 그를 쳐다보던 수완이 슬슬 눈치를 살피며 모기소리만한 소리로 종알거렸다.
“ 미안해요. 선배가 그런 제안을 진심으로 생각했다곤…….”
“됐다. 괜찮으니까. 신경쓰지마.”
태제는 우물쭈물 입을 여는 수완의 말을 중간에서 뚝 잘랐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천하의 정태제가 싫다는 여자에게 매달리며 애원할 수는 없지. 더욱이 예전에 자신이 찬 여자에게… 그리고 지금은 미안하다는 소리는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문제가 이렇게 커진 것은 경솔하게 가족들에게 먼저 떠벌리고 다닌 자신의 잘못이었다.
“일은 이렇게 됐지만, 다시 만나서 반가웠다. 최수완. 그럼 이만 일어서야겠는걸. 회사를 오래 비울 수가 없거든.”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가, 가시게요?”
수완은 고개를 들어 태제를 올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음에 서로 골치 아픈 문제가 해결되면 만나서 술이나 한 잔하자. 예전엔 자주 마셨잖아.”
그는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수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태제는 단호하게 돌안섰다. 결국 원점이다. 이제부터는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생각해봐야 했다. 아, 정말 난리났군. 집에는 어떻게 결혼하지 않는다는 말을 어떻게 꺼내지.
카페를 나서는 그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사실 수완은 엄마의 경고를 만만하게 들었던 건 절대 아니었다. 단지 정태제를 오랜만에 만났고, 쓸데없는 결약 결혼 같은 해프닝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엄마가 말했던 박서방을 깜박 잊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토요일, 잠결에 현관문을 열었을 때 이완오빠와 엄숙한 표정의 아버지를 보자 수완은 새삼 엄마의 말이 생각나서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아버지………”
“수완, 너 빨리 준비하고 나오너라.”
아버지가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수완의 손을 잡아 끌며 말하셨다.
“네? 왜요? 어디 가시려구요?”
“내가 박서방하고 약속을 해놨다. 오늘 너 데리고 나간다고 했으니 얼른 준비하거라.”
박, 박서방? 무슨 박서방?
“아빠!”
“시끄럽다. 내가 너 머리라도 잡아 끌고 가야겠냐? 그 꼴로 가고 싶지 않거든 어서 준비하고 나오래두.”
아버지는 인상을 쓰시며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정말 조금이라도 늦장을 부렸다가는 목덜미가 잡혀서 끌려나갈 것 같았다.
그녀는 이완을 끌고 방으로 들어가며 문을 꽝 닫았다.
“오빠! 제발 오빠가 아버지 좀 말려줘. 어떻게 갑자기 오셔서 이럴 수 있어.”
“나한테 뭐라고 하지마. 나도 할만큼 했으니까. 그러게 태제하고 결혼하면 이런 일도 없잖아. 왜 팅겨서 일을 이지경까지 만들어. 지금 네가 팅길때야.”
“오빠? 오빠는 어떻게 동생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몰라. 나도 이제는 두손 두발 다 들었으니까 너가 알아서 해. 니가 다 해결할 수 있으니까 태제를 거절한거 아니야.”
“정말 미치겠네. 아후 짜증나”
“짜증은 그만 내고 빨리 준비나 해 아버지 지금도 밖에서 시간재고 계실걸.”
이완은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며 돌아서서 말했다.
정말 이러다 나 그 박서방하고 결혼하는거 아닐까. 안돼. 수완은 질끈 눈을 감았다. 한마디로 그저 눈앞이 캄캄해졌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