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과 광해군이 닮은 점이 많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오늘, 노무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을 보고 그 말로 마저 닮아있어 대단히 놀라웠다. 물론, 지금부터 내가 쓰고자 하는 것이 견강부회식으로 말을 끼워맞춘 것일 수도 있으나 그래도 두 사람이 닮았다는 생각은 지워버릴 수가 없다.
1. 순탄치 않은 집권과정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2년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까지 그다지 눈에 띄는 정치인은 아니었다. 국회의원 2번 역임하고 해양수산부 장관을 한 번 했던 수 많은 정치인 중 한명일 뿐이었다. 그러던 그가 민주당 국민경선을 통해 대통령후보로 확정된 것은 가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대통령후보로 확정된 이후의 행보는 결코 순탄치 않았다. 보수진영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이회창 당시 후보에게 여론조사에서 뒤쳐지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2002년 치뤄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대패를 하였고 노무현 대통령의 리더십은 크게 의심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내놓은 방책은 정몽준 후보와의 연합이었다. 월드컵의 여파로 국민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았던 정몽준 의원과 연합하여 단일화를 이루어내었고 지지율을 크게 끌어 올렸다. 그러나 정몽준 의원과의 알력이 생겼고 정몽준 의원은 대통령 선거가 치뤄지기 하루전에 단일화 무효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에 가뜩이나 오리무중 상태였던 16대 대선은 더 미궁으로 빠졌고 개표결과 겨우 60만표의 차이로 노무현 후보가 승리, 대통령에 당선된다.
광해군의 부왕인 선조는 조선에서 최초로 방계 계승을 한 임금이다. 그래서 정통성 문제에 늘 휩쓸리게 되었고 자신의 후계만큼은 정실 부인의 소생으로 뒤를 잇게 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정비인 의인왕후는 자식을 낳지 못하였고 후궁들 사이에서 13명의 아들을 두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급작스레 임진왜란이 발발하였고 왕실의 기강을 세운다는 명분하에서 발발한지 한달이 되지 않아 광해군을 세자로 옹립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분조를 이끌며 병사들을 독려하였고 전란을 승리로 이끌었다. 왕자들 사이에서 가장 총명하였던 광해군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1606년, 선조의 계비였던 인목왕후는 선조의 유일한 대군인 영창대군을 생산하였고 광해군의 입지는 크게 흔들린다. 선조는 정실부인의 소생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에 조정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파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파로 나뉘어졌고 점차 영창대군파가 힘을 얻기 시작하였다. 사세가 광해군에게 불리해져만 갔는데 1608년 선조가 갑작스레 붕어함으로써 광해군은 마침내 등극할 수 있었다
2. 지지기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지기반은 민주당 중에서도 신진세력에 속한다. 이광재, 안희정, 유시민 같은 젊은 층의 정치인들이 그를 지지하였고 비교적 민주당의 핵심 권력을 지녔던 한화갑 등은 그를 지지하긴 하였으나 지지기반이라고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듯 소장파로 이루어진 그의 친위군은 그러나 기반을 확실히 닦지 못하였고 결국 열린우리당이라는 신당으로 독립되어 나갔다.
광해군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북인중에서도 대북파들이었다. 이산해를 영수로 했던 대북파들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소북파에 밀려 선조 말기에는 힘을 쓰지 못하였으나 광해군이 집권한 이후 집권하여 권력을 형성해 내갔다. 선조 시대에 당파는 크게 서인과 동인으로 구분되었고 동인은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어졌다. 대북파는 그 북인 가운데서도 한 파에 불과하였으므로 이들이 얼마나 소수의 세력이었는지 알 수 있다.
3. 개혁정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선에서 행정수도 건설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집권한 뒤에는 연기군 일대를 행정수도로 지정하여 '세종시'를 새롭게 만들었지만 이는 곧 보수주의 세력에 막히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헌법재판소에서 여론수렴없는 행정수도 이전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았고 행정수도는 지금도 건설중이지만 그가 내놓았던 구상에 비해 그 규모면에서 크게 축소되었다. 그는 또 투기를 억제하고자 종합부동산세를 신설하여 투기열풍을 어느 정도 잠재웠으나 여전히 보수세력으로부터 비난의 소리를 들어야 했다.
광해군의 대표적인 개혁정책은 '대동법'의 시행이었다. 지역의 토산물을 받치는 공물제도는 백성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으로 다가왔는데 광해군은 경기도에서 대동법을 시행하기에 이른다. 대동법의 시행으로 백성들의 부담을 줄어들었으나 부작용도 나타나기도 하였다. 한편, 광해군도 한때는 천도를 고려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의 파주지역인 교하로 도읍을 옮기려 하였으나 결국은 시행되지 못하였다. 또, 오랑캐로만 치부되던 후금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여 중립외교를 실시함으로써 조선의 안정을 꾀하였다.
4. 축출
2004년 3월, 대한민국은 헌정사상 초유의 탄핵사건이 발생한다. 다수파였던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힘을 모아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시킨 사건인데 당시 큰 이슈가 되었다. 많은 국민들이 평소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으나 막상 그가 탄핵당하자 동정론이 형성되었고 촛불시위 등으로 이어졌다. 이는 그해 있었던 총선에 영향을 끼쳐 비교적 소수정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은 절반을 뛰어넘은 152석의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를 두고 권력이 약했던 대통령이 그 힘을 모으고자 일부러 탄핵사태를 일으켜 동정론을 형성시킨 것이 아니냐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어찌되었건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되어 대통령은 다시 정무에 들어갔다.
광해군에 대해 재야에 있던 서인은 크게 반발하였다. 권력에서 배제된 것이 가장 큰 이유였겠으나 '인목대비 유폐사건'과 '명과 후금 사이의 중립외교'도 이 같은 반발을 한 몫 거들었다. 효를 중시했던 조선 사회에서 사적으로는 양어머니인 인목대비를 유폐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었고 사대의 예로 섬기던 명을 돕는 것이 아니라 오랑캐로만 취급되면 후금과 중립외교를 펼치는 것이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이에 이들은 김자점을 중심으로 하여 쿠테타를 모의하였고 성공하여 능양군 종을 왕위에 옹립하였다.
5. 비참한 말로
역대 전직 대통령과는 달리 노무현 대통령은 고향이 경남 김해의 봉하마을로 내려가 그곳에서 환경운동을 펼쳤다. 이에 세인들은 집권 당시보다 오히려 더 그를 지지하였으나 봉하마을의 사택은 관광명소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후원자였던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이 각종 로비혐의로 구속되고 영부인, 아들은 물론 본인도 피의자의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검찰의 일방적 주장을 통한 대통령 본인이 직접 금품을 수수했다는 확인되지않은 사실에 국민들은 충격에 빠졌고 여론의 집중 포화를 받았다. 집요한 검찰조사와 여론의 집중공격속에 그는 지쳐갔고 마침내 2009년 5월 23일, 봉화산에서 뛰어내림으로써 63세의 생을 마감하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직후,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었는데 인조반정이 일어난 것이 1623년의 일이고 광해군이 사망한 것이 1641년의 일이니 무려 19년간 유배되었다. 한편, 그의 아들인 폐세자 질도 강화도로 유폐되었는데 폐세자빈 박씨와 함께 탈출을 기도하다 발각되었고 인조로부터 자결명령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6. 그들의 후임
보수 세력은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진 좌파세력의 '잃어버린 10년'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강하게 밀어붙였고 그 결과 제17대 대통령으로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많은 국민들은 유명 CEO출신인 그가 경제를 다시 일으켜 줄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집권 2년째인 현재까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이며 민주주의를 역행한다는 거센 비난을 받고 있다. 아직 3년의 시간이 남긴 하였으나 그가 과연 국민들의 성원에 보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광해군의 중립외교정책을 포기하고 전처럼 명을 사대의 예로 섬긴다. 이는 후금의 누르하치를 분노하게 하였고 그들의 군대는 두번이나 조선을 유린한다. 특히, 2차 침공이었던 병자호란 때에는 청 태종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였으며 인조는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기에 이른다. 이후에도 그는 아들인 소현세자를 박해하는 등 차마 임금답지 못한 행동을 보여주었다.
(( 노무현과 광해군---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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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과 광해군이 닮은 점이 많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오늘, 노무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을 보고 그 말로 마저 닮아있어 대단히 놀라웠다. 물론, 지금부터 내가 쓰고자 하는 것이 견강부회식으로 말을 끼워맞춘 것일 수도 있으나 그래도 두 사람이 닮았다는 생각은 지워버릴 수가 없다.
1. 순탄치 않은 집권과정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2년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까지 그다지 눈에 띄는 정치인은 아니었다. 국회의원 2번 역임하고 해양수산부 장관을 한 번 했던 수 많은 정치인 중 한명일 뿐이었다. 그러던 그가 민주당 국민경선을 통해 대통령후보로 확정된 것은 가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대통령후보로 확정된 이후의 행보는 결코 순탄치 않았다. 보수진영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이회창 당시 후보에게 여론조사에서 뒤쳐지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2002년 치뤄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대패를 하였고 노무현 대통령의 리더십은 크게 의심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내놓은 방책은 정몽준 후보와의 연합이었다. 월드컵의 여파로 국민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았던 정몽준 의원과 연합하여 단일화를 이루어내었고 지지율을 크게 끌어 올렸다. 그러나 정몽준 의원과의 알력이 생겼고 정몽준 의원은 대통령 선거가 치뤄지기 하루전에 단일화 무효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에 가뜩이나 오리무중 상태였던 16대 대선은 더 미궁으로 빠졌고 개표결과 겨우 60만표의 차이로 노무현 후보가 승리, 대통령에 당선된다.
광해군의 부왕인 선조는 조선에서 최초로 방계 계승을 한 임금이다. 그래서 정통성 문제에 늘 휩쓸리게 되었고 자신의 후계만큼은 정실 부인의 소생으로 뒤를 잇게 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정비인 의인왕후는 자식을 낳지 못하였고 후궁들 사이에서 13명의 아들을 두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급작스레 임진왜란이 발발하였고 왕실의 기강을 세운다는 명분하에서 발발한지 한달이 되지 않아 광해군을 세자로 옹립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분조를 이끌며 병사들을 독려하였고 전란을 승리로 이끌었다. 왕자들 사이에서 가장 총명하였던 광해군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1606년, 선조의 계비였던 인목왕후는 선조의 유일한 대군인 영창대군을 생산하였고 광해군의 입지는 크게 흔들린다. 선조는 정실부인의 소생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에 조정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파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파로 나뉘어졌고 점차 영창대군파가 힘을 얻기 시작하였다. 사세가 광해군에게 불리해져만 갔는데 1608년 선조가 갑작스레 붕어함으로써 광해군은 마침내 등극할 수 있었다
2. 지지기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지기반은 민주당 중에서도 신진세력에 속한다. 이광재, 안희정, 유시민 같은 젊은 층의 정치인들이 그를 지지하였고 비교적 민주당의 핵심 권력을 지녔던 한화갑 등은 그를 지지하긴 하였으나 지지기반이라고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듯 소장파로 이루어진 그의 친위군은 그러나 기반을 확실히 닦지 못하였고 결국 열린우리당이라는 신당으로 독립되어 나갔다.
광해군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북인중에서도 대북파들이었다. 이산해를 영수로 했던 대북파들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소북파에 밀려 선조 말기에는 힘을 쓰지 못하였으나 광해군이 집권한 이후 집권하여 권력을 형성해 내갔다. 선조 시대에 당파는 크게 서인과 동인으로 구분되었고 동인은 다시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어졌다. 대북파는 그 북인 가운데서도 한 파에 불과하였으므로 이들이 얼마나 소수의 세력이었는지 알 수 있다.
3. 개혁정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선에서 행정수도 건설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집권한 뒤에는 연기군 일대를 행정수도로 지정하여 '세종시'를 새롭게 만들었지만 이는 곧 보수주의 세력에 막히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헌법재판소에서 여론수렴없는 행정수도 이전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받았고 행정수도는 지금도 건설중이지만 그가 내놓았던 구상에 비해 그 규모면에서 크게 축소되었다. 그는 또 투기를 억제하고자 종합부동산세를 신설하여 투기열풍을 어느 정도 잠재웠으나 여전히 보수세력으로부터 비난의 소리를 들어야 했다.
광해군의 대표적인 개혁정책은 '대동법'의 시행이었다. 지역의 토산물을 받치는 공물제도는 백성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으로 다가왔는데 광해군은 경기도에서 대동법을 시행하기에 이른다. 대동법의 시행으로 백성들의 부담을 줄어들었으나 부작용도 나타나기도 하였다. 한편, 광해군도 한때는 천도를 고려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의 파주지역인 교하로 도읍을 옮기려 하였으나 결국은 시행되지 못하였다. 또, 오랑캐로만 치부되던 후금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여 중립외교를 실시함으로써 조선의 안정을 꾀하였다.
4. 축출
2004년 3월, 대한민국은 헌정사상 초유의 탄핵사건이 발생한다. 다수파였던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힘을 모아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시킨 사건인데 당시 큰 이슈가 되었다. 많은 국민들이 평소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으나 막상 그가 탄핵당하자 동정론이 형성되었고 촛불시위 등으로 이어졌다. 이는 그해 있었던 총선에 영향을 끼쳐 비교적 소수정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은 절반을 뛰어넘은 152석의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를 두고 권력이 약했던 대통령이 그 힘을 모으고자 일부러 탄핵사태를 일으켜 동정론을 형성시킨 것이 아니냐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어찌되었건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되어 대통령은 다시 정무에 들어갔다.
광해군에 대해 재야에 있던 서인은 크게 반발하였다. 권력에서 배제된 것이 가장 큰 이유였겠으나 '인목대비 유폐사건'과 '명과 후금 사이의 중립외교'도 이 같은 반발을 한 몫 거들었다. 효를 중시했던 조선 사회에서 사적으로는 양어머니인 인목대비를 유폐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었고 사대의 예로 섬기던 명을 돕는 것이 아니라 오랑캐로만 취급되면 후금과 중립외교를 펼치는 것이 눈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이에 이들은 김자점을 중심으로 하여 쿠테타를 모의하였고 성공하여 능양군 종을 왕위에 옹립하였다.
5. 비참한 말로
역대 전직 대통령과는 달리 노무현 대통령은 고향이 경남 김해의 봉하마을로 내려가 그곳에서 환경운동을 펼쳤다. 이에 세인들은 집권 당시보다 오히려 더 그를 지지하였으나 봉하마을의 사택은 관광명소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후원자였던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이 각종 로비혐의로 구속되고 영부인, 아들은 물론 본인도 피의자의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검찰의 일방적 주장을 통한 대통령 본인이 직접 금품을 수수했다는 확인되지않은 사실에 국민들은 충격에 빠졌고 여론의 집중 포화를 받았다. 집요한 검찰조사와 여론의 집중공격속에 그는 지쳐갔고 마침내 2009년 5월 23일, 봉화산에서 뛰어내림으로써 63세의 생을 마감하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직후,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었는데 인조반정이 일어난 것이 1623년의 일이고 광해군이 사망한 것이 1641년의 일이니 무려 19년간 유배되었다. 한편, 그의 아들인 폐세자 질도 강화도로 유폐되었는데 폐세자빈 박씨와 함께 탈출을 기도하다 발각되었고 인조로부터 자결명령을 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6. 그들의 후임
보수 세력은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진 좌파세력의 '잃어버린 10년'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강하게 밀어붙였고 그 결과 제17대 대통령으로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많은 국민들은 유명 CEO출신인 그가 경제를 다시 일으켜 줄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집권 2년째인 현재까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이며 민주주의를 역행한다는 거센 비난을 받고 있다. 아직 3년의 시간이 남긴 하였으나 그가 과연 국민들의 성원에 보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광해군의 중립외교정책을 포기하고 전처럼 명을 사대의 예로 섬긴다. 이는 후금의 누르하치를 분노하게 하였고 그들의 군대는 두번이나 조선을 유린한다. 특히, 2차 침공이었던 병자호란 때에는 청 태종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였으며 인조는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기에 이른다. 이후에도 그는 아들인 소현세자를 박해하는 등 차마 임금답지 못한 행동을 보여주었다.
-----------------------[출처] 노무현과 광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