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세기 중국 명나라 때에, 오승은(吳承恩)이 지은 판타지 소설의 시조랄 수 있는 <서유기(西遊記)>를 보면, 삼장 팀(?)은 모두 80 번의 재난을 겪고 10만 8천 리를 걸어 서천에 도착하여 설법을 듣고 불경을 얻고, 당나라로 돌아오던 중 통천하에서 자라(鼈)가 석가여래에게 자기 수명을 알아오지 않았다고 삼장 일행을 물에 처넣어 끝내 81 난(難)을 채우게 된다.
- 유아(幼兒)적 사회의 사회적 유아(乳兒)
사회적으로도, 인격적으로도 미숙하여 배움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는 사람들 중에 어린아이 가르치듯 감히 동년배를 가르치려 드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쓴 글이랍시고, 하나도 빠짐없이 다른 사람 욕하거나 공격하는 글이다. 아무리 뒤져봐도 제대로 글 같은 글이라곤 써본 적이 없다.
함께 더불어 사회를 살아가는 방식이 천박하기 이를 데 없어 사회적이지 못하고, 치기어린 퇴행의 어휘들을 통한 배설일 뿐인 그들의 글을 보아 미숙한 인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름의 논리나 근거가 있지도 않다. 그저 감정적으로, 화학적으로 반응하면서, 그게 충고며, 관심이며, 애정이라고 되먹지 않은 분칠을 하고 포장을 해댄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는 "충고"에는 안하무인이면서, 사회적,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자신의 감정적이고 화학적인 충고(?)를 받아들이라고 생떼를 쓴다.
언젠가 말했거니와, 그들은 유아(幼兒)적 사회의 사회적 유아(乳兒)일 뿐이다.
- 퇴행(退行)과 성숙(成熟)
사고의 한계와 판단의 경직성, 그리고 '낯섦'과 '차이'에 대한 무분별한 적대감이나 그 바탕이 되는 열등감...
이런 것들은 토론과 논쟁이라는 대화 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사회적 유아(乳兒)들이나 유아(幼兒)적 사회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현상이다.
이들로 인해 일어나는 불협화음들은 논증 그 자체의 형식적 오류로 인한 분쟁(?)이 아니라, 동정, 시기, 질투, 증오, 성욕, 아첨, 위협, 권위, 협잡, 열등의식, 인신공격, 중상모략 등의 논증 외적 요인을 매개로 해서, 그것도 매우 즉흥적으로 발생하는, 소위 '심리적 오류'로 말미암은 것들이다.
그같은 심리적 오류의 하나로, 지극히 부정적인 심리 방어기제 중에 '고착(固着, fixation)'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그 유용성이 소실되어 부적절하게 되어버린 행동 양식을 고집하는 행태를 말한다. 정신분석학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고착이 '퇴행(退行, regression)'을 동반한다는 사실은 이 게시판(유아적 사회)과 몇몇 이용자(사회적 유아)들을 통해서 충분히 관찰할 수 있다.
인성의 성숙이란 대체로 반응 양식으로 표현되는 행동 양식의 점진적 변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법이다. 성숙의 증좌를 여러 모습으로 대별할 수 있겠지만, 아마 가장 일반적인 잣대는 사태에 대한 반응 양식과 그것의 베이스가 되는 정신 세계의 수준일 것이다.
따라서 행동 양식이 오랫동안 고착되거나, 비록 표현 형태는 바뀌어도 '유아기의 행동 패턴'을 그대로 반복한다면 참된 의미의 성숙을 기대하기는 요원하다.
대개 성숙(成熟, maturation)은 담장을 넘겨다보는 시선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로써 이웃의 차이들과 그 다양성에 노출되는 모험과 긴장이 '배움'의 중요한 과정으로 정착한다.
- 배움과 배설
배설의 전제 조건은 무엇보다 축적일 것이다. 그러나 축적한다고 해서 모두 배설되는 것은 아니다. 음식을 그저 먹는다고 해서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듯이, 정보를 끌어 모은다고 해서 현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가르침이 싸구려 덤핑(dumping)일 수 없듯이 배움과 성숙은 무작정 사재기(hoarding)가 아니다.
그것은 터지는 경험이며, 무너지는 절망이며, 부서지는 아픔이며, 아득히 먼 지평이며, 망연해지는 상실인 것이다.
금고 속의 보석을 찾아가는 것이 배움의 뜻이라면, 10만 8천 리를 걸어 구한 불경이 배움의 목적이라면, 터지고, 무너지고, 부서지고, 아득해지고, 망연해질 이유도 없다.
벽을 밀치고 선을 넘어가는 분출, 이것이 배움이며, 이것이 배설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괄약근'이 개입해야만, 배설은 '싸는 행위'에서 벗어나 '낳는 행위'로 격상한다.
선천적으로 괄약근의 생성에 장애가 있었는지, 아니면 후천적으로 괄약근 지배 신경이 손상된 것인지, 괄약근이 잘 오므라들지 않는 사람들 몇몇이 그저 질질 싸지르고 줄줄 흘린 배설물들이 오늘도 눈 돌리는 곳마다 여기저기 역겹다.
- Outro
그렇게 총 81번의 고난을 겪은 삼장 일행이 가져와 당 태종에게 바친 진경(眞經)은 아무 것도 씌여있지 않은 백지였다......
tabula rasa (백지 상태)!
*) tabula rasa 에 대하여는 아래를 참조하실 것.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22t1591a
배움의 과정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이 유명한 동양고전은 올림픽 메달 색깔이나 숫자처럼 오직 결과의 유용성만을 중시하는 공리주의를 낭만적으로 비판한다.
아무도 네게서 배워야 할 만큼, 너처럼 어리석은 자 없으니, 너부터 먼저 배워라.
깻잎머리 10대 양아치 소녀들이 자신들의 행태와 언어가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는지도 모르고 그저 자신들이 멋있다고 폼 잡으며 깔깔거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천박한 인성을 돌아보고, 감히 다른 사람을 향해 배설하지 말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넘겨보면서 배우고, 하나라도 더 배움으로써 신체와 정신이 골고루 발육하고 자라서 바람직한 사회인으로서의 성숙(成熟)에 다가설 일이다.
배설 론
16 세기 중국 명나라 때에, 오승은(吳承恩)이 지은
판타지 소설의 시조랄 수 있는 <서유기(西遊記)>를 보면,
삼장 팀(?)은 모두 80 번의 재난을 겪고 10만 8천 리를 걸어
서천에 도착하여 설법을 듣고 불경을 얻고,
당나라로 돌아오던 중
통천하에서 자라(鼈)가 석가여래에게 자기 수명을 알아오지 않았다고
삼장 일행을 물에 처넣어 끝내 81 난(難)을 채우게 된다.
- 유아(幼兒)적 사회의 사회적 유아(乳兒)
사회적으로도, 인격적으로도 미숙하여
배움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는 사람들 중에
어린아이 가르치듯 감히 동년배를 가르치려 드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쓴 글이랍시고,
하나도 빠짐없이 다른 사람 욕하거나 공격하는 글이다.
아무리 뒤져봐도 제대로 글 같은 글이라곤 써본 적이 없다.
함께 더불어 사회를 살아가는 방식이 천박하기 이를 데 없어
사회적이지 못하고,
치기어린 퇴행의 어휘들을 통한 배설일 뿐인 그들의 글을 보아
미숙한 인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름의 논리나 근거가 있지도 않다.
그저 감정적으로, 화학적으로 반응하면서,
그게 충고며, 관심이며, 애정이라고
되먹지 않은 분칠을 하고 포장을 해댄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는 "충고"에는 안하무인이면서,
사회적,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자신의
감정적이고 화학적인 충고(?)를 받아들이라고
생떼를 쓴다.
언젠가 말했거니와,
그들은
유아(幼兒)적 사회의 사회적 유아(乳兒)일 뿐이다.
- 퇴행(退行)과 성숙(成熟)
사고의 한계와 판단의 경직성,
그리고 '낯섦'과 '차이'에 대한 무분별한 적대감이나
그 바탕이 되는 열등감...
이런 것들은 토론과 논쟁이라는 대화 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사회적 유아(乳兒)들이나 유아(幼兒)적 사회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현상이다.
이들로 인해 일어나는 불협화음들은
논증 그 자체의 형식적 오류로 인한 분쟁(?)이 아니라,
동정, 시기, 질투, 증오, 성욕, 아첨, 위협, 권위, 협잡, 열등의식, 인신공격, 중상모략 등의
논증 외적 요인을 매개로 해서, 그것도 매우 즉흥적으로 발생하는,
소위 '심리적 오류'로 말미암은 것들이다.
그같은 심리적 오류의 하나로,
지극히 부정적인 심리 방어기제 중에 '고착(固着, fixation)'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그 유용성이 소실되어 부적절하게 되어버린 행동 양식을 고집하는 행태를 말한다.
정신분석학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고착이 '퇴행(退行, regression)'을 동반한다는 사실은
이 게시판(유아적 사회)과 몇몇 이용자(사회적 유아)들을 통해서
충분히 관찰할 수 있다.
인성의 성숙이란 대체로
반응 양식으로 표현되는 행동 양식의 점진적 변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법이다.
성숙의 증좌를 여러 모습으로 대별할 수 있겠지만,
아마 가장 일반적인 잣대는
사태에 대한 반응 양식과
그것의 베이스가 되는 정신 세계의 수준일 것이다.
따라서 행동 양식이 오랫동안 고착되거나,
비록 표현 형태는 바뀌어도 '유아기의 행동 패턴'을 그대로 반복한다면
참된 의미의 성숙을 기대하기는 요원하다.
대개 성숙(成熟, maturation)은 담장을 넘겨다보는 시선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로써 이웃의 차이들과 그 다양성에 노출되는 모험과 긴장이
'배움'의 중요한 과정으로 정착한다.
- 배움과 배설
배설의 전제 조건은 무엇보다 축적일 것이다.
그러나 축적한다고 해서 모두 배설되는 것은 아니다.
음식을 그저 먹는다고 해서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듯이,
정보를 끌어 모은다고 해서 현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가르침이 싸구려 덤핑(dumping)일 수 없듯이
배움과 성숙은 무작정 사재기(hoarding)가 아니다.
그것은
터지는 경험이며,
무너지는 절망이며,
부서지는 아픔이며,
아득히 먼 지평이며,
망연해지는 상실인 것이다.
금고 속의 보석을 찾아가는 것이 배움의 뜻이라면,
10만 8천 리를 걸어 구한 불경이 배움의 목적이라면,
터지고, 무너지고, 부서지고, 아득해지고, 망연해질 이유도 없다.
벽을 밀치고 선을 넘어가는 분출,
이것이 배움이며,
이것이 배설이다.
그러나
정.신.적.인 '괄약근'이 개입해야만,
배설은
'싸는 행위'에서 벗어나
'낳는 행위'로 격상한다.
선천적으로 괄약근의 생성에 장애가 있었는지, 아니면
후천적으로 괄약근 지배 신경이 손상된 것인지,
괄약근이 잘 오므라들지 않는 사람들 몇몇이
그저 질질 싸지르고 줄줄 흘린 배설물들이
오늘도 눈 돌리는 곳마다
여기저기 역겹다.
- Outro
그렇게 총 81번의 고난을 겪은 삼장 일행이 가져와
당 태종에게 바친 진경(眞經)은
아무 것도 씌여있지 않은 백지였다......
tabula rasa (백지 상태)!
*) tabula rasa 에 대하여는 아래를 참조하실 것.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22t1591a
배움의 과정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이 유명한 동양고전은
올림픽 메달 색깔이나 숫자처럼 오직 결과의 유용성만을 중시하는 공리주의를
낭만적으로 비판한다.
아무도 네게서 배워야 할 만큼,
너처럼 어리석은 자 없으니,
너부터 먼저 배워라.
깻잎머리 10대 양아치 소녀들이
자신들의 행태와 언어가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는지도 모르고
그저 자신들이 멋있다고 폼 잡으며
깔깔거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천박한 인성을 돌아보고,
감히 다른 사람을 향해 배설하지 말고,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넘겨보면서 배우고,
하나라도 더 배움으로써
신체와 정신이 골고루 발육하고 자라서
바람직한 사회인으로서의 성숙(成熟)에 다가설 일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