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克日의 상징’ 白冶 金佐鎭 장군 1.開化思想을 접하다 ⑸

조의선인2009.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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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克日의 상징’ 白冶 金佐鎭 장군 1.開化思想을 접하다 ⑸

★ 독립협회(獨立協會)의 사회·정치적 활동

 

단발령(斷髮令)에 대한 항거는 재야의 유생들로부터 시작되어 전국의 민중에게까지 확산되었다. 김홍집 내각은 경찰력을 동원하여 강압적인 방법으로 백성들의 상투를 잘랐다. 이에 각지의 유림들은 통문을 돌려 거의(擧義)를 모의했다. 이렇게 하여 1896년 1월 이후 안의, 원주, 홍주, 안동, 진주, 춘천, 강릉 등 전국에 걸쳐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의병들은 관아를 점령해 개화당 계열의 지방관을 잡아 죽이고 일본의 군사시설을 파괴하였다. 이때 활약한 대표적인 의병대장으로는 유인석(柳麟錫)·민용호(閔龍鎬)·이소응(李昭應)·김도현(金道鉉)·기우만(奇宇萬) 등이었다. 

 

일본의 꼭두각시인 김홍집 내각은 각 지방의 진위대(鎭衛隊)를 동원하여 의병항쟁을 진압하려고 했지만 기대에 못 미치자 중앙의 친위대(親衛隊) 병력까지 파견하려고 하였다. 이에 수도경비에 공백이 생겼고, 이 기회를 틈타 친러파 측은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려는 모의를 하게 되었다.

 

이범진은 궁녀 김씨(金氏)와 고종이 총애하던 엄귀비(嚴貴妃)를 통해 고종에게 접근하여 대원군과 친일파가 고종의 폐위를 공모하고 있으니 왕실의 안전을 위해 잠시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할 것을 종용하였고, 을미사변 이래 불안과 공포에 싸여 있던 고종은 그들의 계획에 동의하고 말았다.

 

한편 러시아 측은 1896년 2월 10일에 공사관 보호를 구실로 러시아 해병대 1백여명을 무장시켜 서울에 주둔시켰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에 이범진과 이완용이 국왕과 세자를 모시고 영추문(迎秋門)을 빠져나와 오전 7시에 러시아공사관에 도착했다. 이 아관파천(俄館播遷)은 고종과 이범진을 위시한 친러파, 베베르와 스피에르의 합작품이었다.

 

일본의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으로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한 고종은 총리대신 김홍집을 비롯해 김윤식·유길준·정병하 등을 파면시키고 김병시(金炳始)를 총리대신으로 삼아 박정양·이완용·이운용 등을 내각에 등용하고 안경수를 경무사로 삼았다. 김홍집을 비롯한 친일 내각의 대신들에게는 체포령을 내렸다.

 

김홍집과 정병하는 광화문 앞에서 군중에게 둘러싸여 피살되었고, 이 광경을 본 유길준·조희연·이두황·우범선 등은 일본공사관으로 도망쳤다. 아관파천으로 타격을 입은 일본은 러시아와의 무력충돌이 시기상조라고 판단하고 협상정책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비밀리에 5월 14일에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조선의 현실을 시인하고 앞으로 공동 보조를 취한다는 타협이 이루어졌다. 일본이 친러 내각을 인정하고 을미사변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시인함과 동시에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 병력을 축소·철수하고 러시아는 공사관과 영사관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군 주둔의 수를 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군대를 주둔시킨다는 내용의 협약은 그동안 일본이 독점적으로 누려온 권리를 러시아와 동등하게 나누어 가지게 된 것을 의미했다. 이로써 일본은 러시아의 입김으로 요동에서 쫓겨난 뒤 한반도에서도 그 우월적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무르는 1년 동안 조선 조정의 인사와 정책은 러시아공사와 친러파 세력에 의해 좌우되었다. 경원·종성 광산 채굴권,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압록강 유역과 울릉도 삼림 채벌권 등의 경제적 이권이 러시아에 탈취당했고 러시아인 알렉시에프(K. Alexiev)가 조선 조정의 탁지부 고문으로 부임하여 조선의 재정을 마음대로 차용하였다. 러시아뿐만 아니라 미국·독일·영국 등 열강도 이권 쟁탈에 열중하였는데, 아관파천에 대해서는 정치적 불간섭주의를 표명하였지만 경제적 이권에는 기회 균등을 요구하여 전차·철도부설권, 삼림 채벌권, 금광·광산 채굴권 등 시설 투자와 자원 개발에 관한 각종 이권을 획득하였고 일본은 열강으로부터 전매하는 방법으로 이권 쟁탈에 참가하였다. 그 결과 조선의 국가 재정이 더욱 어려워지면서 국운이 크게 기울어졌다.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체류 기간이 길어지면서 이와 같이 국가의 주권과 이권이 손상되자 국내외적으로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여론이 비등해졌다. 그리하여 고종은 경복궁보다 외국 공사관에 더 가깝고 경내도 넓지 않아 호위하기에도 편리한 점 등을 들어 환궁 장소를 경운궁으로 정했다. 2월 20일에 고종이 비빈과 상궁 나인들을 거느리고 경운궁으로 옮기자 대신들은 경운궁의 대유재(大猷齋)에서 국왕을 뵙고 축하례를 올렸다.

 

이해 여름에는 전국에 가뭄이 들어 논밭이 타들어갔고 삼남일대에는 병충해가 번져 그나마 싹을 틔운 벼이삭마저 갉아먹고 말았다. 가을에 수확할 것이 없자 농민들의 한탄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사정인데도 궁내부에서는 연달아 경운궁 보수공사를 위해 국가재정을 마구 써댔다. 되도록이면 혈세(血稅)을 많이 끌어서라도 새 궁궐을 지어 국왕과 세자의 불편을 덜고 왕실의 체면을 세우려 했다. 경운궁에서는 새 건물을 짓느라 망치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한편, 갑신정변(甲申政變) 이후 미국으로 망명했던 송재(松齋) 서재필(徐載弼)은 그 무렵 한국에 돌아와 돈의문 언저리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뮤리엘 암스트롱이란 미국인과 결혼하고 필립 제이슨으로 개명하여 미국 시민권도 획득했던 서재필은 친러파 내각의 지원을 받아 신문의 발간을 진행하기로 합의하고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어 1896년 4월 7일에 주시경(周時經)과 손잡고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였다.

 

그의 집 가까운 거리에는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迎恩門)이 있었다. 서재필은 프랑스의 개선문(凱旋門)과 같은 조선 독립의 상징물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에서 독일공사관에 근무하는 스위스인 건축가에게 설계도를 부탁하고 서양식 교회나 학교 건물 짓는 일을 도운 경험이 있는 조선인 목수에게 제작을 맡겼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1월 20일에 영은문이 헐린 자리에 독립문(獨立門)이 세워졌다.

 

사실 독립신문 창간이나 독립문 건립은 서재필 혼자의 능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 사업에는 개화자강운동(開化自强運動)·민권운동(民權運動)을 위해 1896년 7월 2일 조직된 독립협회(獨立協會)가 주축으로 활약했는데, 안경수(安駉壽)가 회장으로 있었고 김가진(金嘉鎭)·이상재(李商在)·윤치호(尹致昊)·이완용(李完用) 등이 위원장을 맡았으며 남궁억(南宮檍)·오세창(吳世昌)·송헌빈(宋憲斌) 등이 간사원으로 활동했다. 서재필은 독립협회의 고문이 되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독립(獨立)이라는 개념은 전통적 사대질서를 거부하고 임오군란(壬午軍亂) 이후 청나라의 간섭을 배제하자는 뜻이었다. 독립협회에는 서울 정동에 있던 조선 고관들과 한국 주재 서양 외교관들의 사교·친목 단체인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 출신 인사들이 가장 많았는데, 이들은 자주 서양식 파티를 벌여 양주와 커피를 즐기며 놀았다.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고종(高宗)이 일본 제국주의 세력과 친일 내각에 두려움을 느껴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한 것도 정동구락부의 영향력이 가장 컸다.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정치단체인 독립협회는 이 해 가을부터 활발한 토론회를 벌였다. 서재필과 윤치호의 주도로 일요일마다 벌였던 토론회는 1년 동안 34회에 걸쳐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하급 벼슬아치, 유학을 다녀온 신청년, 각급 학교의 교사와 학생, 심지어 장사꾼들까지 참석해 자리를 메웠다. 이런 토론회는 회원들에게 효과적인 의사 표현의 방법과 민주적인 행동 성향을 체득하게 하였고, 일반 민중을 새로운 지식과 교양으로 적극 계몽하여 독립협회 안에 민중의 진출을 활성화시키는 데에 이바지하였다.

 

독립협회의 활동이 점차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가운데 고종은 1897년 8월 16일에 광무(光武)라는 연호를 제정하여 사용하고 10월 12일에는 원구단(圓丘壇)에서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선포하는 의식을 진행하면서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개칭했다.

 

1897년 말기에 보수적 관료층의 외세의존적 정책을 비판하기 시작한 독립협회는 협성회(協成會)나 광무협회(光武協會) 같은 학생단체에 의한 대중동원체제를 확보하고 민중계몽(民衆啓蒙)을 통해 민중의 정치 참여를 촉구하였다. 이리하여 1898년에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가 개최되어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 고문의 철환을 결의하였고, 정부는 이 결의에 따라 러시아 공사관에 만민공동회의 요구를 담은 문서를 발송하였다. 만민공동회는 민중의 힘으로 자주 독립권 수호를 위한 확고한 결의를 내외에 과시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러시아와 일본은 1898년 4월 25일 로젠-니시 협정(Rosen-Nish Agreement)을 체결하여 양국이 대한제국의 주권과 완전한 독립을 확인하고 내정에 간섭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동시에 대한제국이 군사 교관이나 재정 고문의 초빙을 요청하는 경우에도 양국의 사전 동의 없이는 응낙할 수 없도록 협약하였다. 이것은 대한제국을 둘러싼 열강들의 영향력이 국제 세력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는 점을 의미했다. 대한제국 입장에서는 외세를 물리치고 자주 독립을 강화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민영기(閔泳綺)·윤용선(尹容善)·신기선(申箕善) 등 수구파 관료들은 독립협회 중심의 개화파에 위협을 느끼고 독립협회가 고종을 폐위한 뒤 (朴定陽)을 대통령, 윤치호(尹致昊)를 부통령으로 하는 공화제(共和制)를 수립하려 한다는 내용의 전단을 뿌렸다. 이에 고종은 크게 놀라 경무청(警務廳)과 친위대(親衛隊)에게 독립협회 간부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조병식(趙秉式) 내각을 출범시킨 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어린 김좌진에게 나라 안팎의 정세와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입, 신문물의 도입과 신식 교육의 필요성 등을 들려준 김석범이란 청년도 독립협회에서 개최한 만민공동회에 여러 차례 참가했던 경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김좌진은 스승의 생질인 김석범으로 인해 사고(思考)의 변화를 겪게 된다. 이것은 그가 훗날 가노(家奴)를 해방시키고 농토(農土)를 분배한 근대적 개혁의지를 몸소 실천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 개혁의 의미를 상실한 광무경장(光武更張)

 

조선의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바뀌고 고종의 보위(寶位)가 군왕에서 황제로 승격됨에 따라 윤용선(尹容善)·민영환(閔泳煥)·이용익(李容翊)·심상훈(沈相薰)·박제순(朴齊純) 등 수구파 정치인들은 왕권 강화에 중점을 둔 경장사업(更張事業)을 실시하였는데, 1899년 8월 17일에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제정·공포한 것이 그 시초였다.

 

이 국제(國制)에 의하면 대한제국의 황제는 무한불가침의 군권(君權)을 향유하며, 입법·사법·행정·사전(赦典)·강화·계엄·해엄에 관한 권한을 가진다고 규정하였다. 왕권이 경장 이전으로 복고되었을 뿐 아니라, 여기에 근대 제국의 절대왕정체제를 도입하여 왕권의 전제화가 법제적으로 뒷받침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원수부(元守府)가 창설돼 그 아래에 친위대(親衛隊)·시위대(侍衛隊)·호위대(扈衛隊)를 뒀고, 이들 부대는 서울의 방어와 황제의 호위를 맡았다. 을미개혁 당시에는 친위대 병력 3개 대대밖에 없었는데 아관파천 이후 인원이 계속 증가했다. 호위대는 궁내에만 배치했는데 1900년에는 730여명을 충원했으며 친위대와 시위대는 1902년까지 각각 2개 연대를 두었다. 원수부는 궁내에 두었으며 최고 사령관인 대원수는 고종의 명령을 받도록 했다.

 

원수부의 창설에 이어 헌병, 포병, 공병, 치중병, 군악대 등이 설치되어 완전히 신식편제로 전환되었다. 이제 어느 정도 구색은 갖추었으나 해군만은 창설되지 못했으며 징병제도 미처 실시하지 못했다.

 

지방 군사제도도 개편되었다. 지방 또는 요해지의 수비를 맡았던 진위대(鎭衛隊)와 지방대는 1900년에 진위대로 통합되었는데, 모두 6개 연대였으며 연대마다 3개 대대를 두었다. 이외에도 평양, 제주 등에 특별부대를 두었다. 그리고 1898년에 그동안 초빙되던 러시아와 미국의 교관을 해고하고 새로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세워 군대 증설에 따른 필연적인 지휘관 양성에 진력하였다.

 

경찰력의 강화도 뒤따랐다. 1900년에는 내부 소속의 경무청(警務廳)이 독립되어 황제의 지휘를 받았다. 지방에도 17개 군에 순교(巡校)를 두어 치안을 담당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여 포교(布敎)와 포졸(布卒)은 완전히 사라지고 순교와 순검(巡檢)이 1884년 처음 등장한 이래 완전한 틀을 갖추었다. 또 특수조직으로 전국의 부상(負商)을 모아 상무영(商務營)을 신설해 군사 교련을 시켰는데, 이들은 일종의 경찰업무에 투입되어 만민공동회 등 대중집회를 해산하거나 탄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같은 군사력·경찰력의 증강 및 확보는 국가의 국방·치안 강화보다는 황실 호위 병력의 강화나 전제군주제의 고수에 중점을 둔 것이었으므로 자주독립을 위한 부국강병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였으며 황제에게 행정권은 물론, 입법·사법권과 육·해군 통수권까지 부여하면서도 그를 제한할 수 있는 어떠한 조항도 두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는 구시대로의 퇴행에 가까웠다. 게다가 경제정책에서도 전국의 광산, 철도, 홍삼 제조, 수리관개사업 등의 수입을 정부 예산과 분리해 황제의 수입으로 삼고, 상업과 공장 설립에서도 민간 산업을 억제하고 황실 직영업종에 중점을 두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예산을 세워 국가 재정을 운영한다든지 돈으로 조세를 내게 한다든지 토지조사를 철저히 하고 호구조사를 강화한다든지 하는 방법을 써서 재정을 관리했다. 1898년에 토지를 측량하는 양전사업(量田事業)을 실시하고 1901년에는 토지 소유자에게 증서를 발급하는 지계사업(地契事業)을 전개했다. 그러나 양전사업과 지계사업은 당초 근대적인 토지제도의 수립에 목적을 두었으나, 실제 시행 결과 봉건적인 지주의 권한만 강화됐을 뿐 농민들의 요구 사항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양전사업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농민 소유였던 토지들이 다수 황실 소유의 궁방전(宮房田) 등으로 강제 편입되면서 정부와 농민 사이에 크고 작은 분쟁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대한제국 정부는 국내 상인을 보호하고 외국 상인의 침투를 억제한다는 취지 아래 상무사(商務社)라는 기관을 두어 자유상업을 억제하는 동시에 통제를 강화했지만, 민간의 상인조직을 허가하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영세 상인의 몰락을 가져왔다. 한편으로는 화폐본위제(貨幣本位制)를 도입하고 중앙은행을 설립했으며 1903년에는 금본위제(金本位制)를 실시한 데 이어 태환금권(兌換金券)을 조례로 확정하여 금화, 은화 등이 발행되었고 백동화가 남발되었다. 하지만 금이 대부분 일본으로 유출되어 절대량이 모자라는 상황에서는 허울뿐인 금융제도에 지나지 않았다.

 

‘자주독립국가’의 이름을 세계에 천명하기 위해 야심차게 출범되었던 대한제국 정부가 당면한 시대적 과제를 방기하고 황실 이익 극대화의 여러 사치성 사업을 전개하는 동안, 러시아와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의 국제 정세는 근본적인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