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의 전설, 카를로스 자칼 - 어싸인먼트

메로빈지언2004.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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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마 빈 라덴의 911 테러 이후, 테러에 대한 관심들이 많이 높아졌고, 대한민국 역시 이라크 파병 문제를 계기로, 결코 테러 안전 지대이지 못한 상황까지 왔지요. 무슬림 투사 오사마 빈 라덴의 테러리즘이 사실상 유일하게 세계 최강 양키제국에 위협이 되고 있는 가운데, 20세기 테러리스트의 전설로 불리우던 카를로스 자칼을 비디오로 한번 구경해 봅시다.

실제 인물 카를로스 자칼에 대해서는 하단에 여성동아에 실린 그의 근황을 참조하시면 비교적 상세한 내용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카를로스 자칼에 대해 생소한 분들께 한 마디 거들면, 오사마 빈 라덴의 911테러를 감옥에서 "예술이다."라고 극찬했다고 뉴스에 나왔던 바로 그 인물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자칼에 대한 영화는 3개가 있습니다.

 

1973년도에 제작된 것으로, 포사이스 원작 "자칼의 날"(The Day of the Jackal)을 영화화 한 "자칼의 날"(프레드 진네만 감독, 에드워드 폭스 주연)과

 

1998년 할리웃에서 리메이크한 "자칼"(마이클 케이튼-존스 감독, 브루스 윌리스, 리챠드 기어 주연),

 

그리고,

어싸인먼트(1998년, 크리스챤 두과이 감독, 에이단 퀸, 도날드 서덜랜드, 벤 킹슬리 주연) 인데요.

 

자칼의 날이나, 어싸인먼트나 모두 자칼에 대한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자칼을 수단에서 체포한 프랑스 정보부에서 자칼에 대한 수사 체포기록을 공개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가 94년에 체포되었으니 기밀 유지기간 30년 후인 2024년에나 공개되지 않나 생각되네요. 암튼 소설, 영화 모두 재미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자칼의 날은 오래된 영화여서 저도 우연한 기회에 유선방송에서 보고 비디오로는 보지 못했습니다만, 비디오로 나온 것은 분명하더군요. 원작에 충실하게 잘만든 영화라는 평가를 받고 있죠.

 

브루스 윌리스의 자칼은, 역시 할리웃답게 인물 설정과 그 전개가 다소 만화적이더군요. 걍 재미 있게 볼만했습니다.

 

어싸인먼트는

자칼과 똑같이 생긴 미해군 정보 장교를 혹독하고 무자비한 훈련을 통해 그를 자칼로 만들어서, 자칼을 잡는다는 것이 간략한 줄거리입니다. 자칼이 아닌데도 자칼로서 그의 은신처에 투입되어 자칼 행세를 해야 하는 스릴은 보는 사람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죠. 동료의 죽음으로 괴로워 하고, 정체성 문제로 그 자신과 아내가 고통 받기도 합니다.

볼만합니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뭔가 짜릿한 것을 찾는 분들이 조금씩 늘어나는 것 같은데, 충분히 보탬되리라고 추천합니다.

 

 

카를로스 자칼

(여성동아 2002년 1월호에서 펌)

 

테러의 전설, 카를로스 자칼 - 어싸인먼트 법조계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 자신을 담당한 여성 변호사와의 결혼계획 밝힌
전설적 테러리스트 카를로스 자칼

“우리를 떼어놓으려고 하면 그만큼 우리의 사랑은 더 타오릅니다”
‘자칼’은 발음부터가 흉악하다. 무언가 통증이 느껴지는 것 같다. 원래는 늑대와 비슷한 종류의 야생동물 이름. 그런데 사람 자칼은 전설적인 테러리스트다. 9·11 미국 테러참사로 우리 귀에도 익숙해진 테러리스트의 전형으로, 배우 브루스 윌리스가 주연한 <자칼>이라는 영화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하다. 테러리스트의 대명사로 불리던 자칼의 삶은 교소도에 수감중인 상태에서도 유별나다.

세상은 카를로스 자칼을 한동안 잊고 살았다. 그런데 그는 엉뚱한 뉴스의 주인공으로 우리에게 다시 다가왔다. 뉴스는 그의 세번째 결혼에 관한 것. 2001년 11월6일 미국의 신문 <월 스트리트 저널>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프랑스 교도소에 복역중인 악명 높은 테러범과 그를 변호하는 여성 변호사 간의 결혼을 법조계에서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신문에 보도된 ‘악명 높은 테러범’은 바로 카를로스 자칼이다. 본명은 일리히 라미레즈 산체스. 1949년 10월 남미의 베네수엘라에서 태어났다. 만 52세. 폭탄사고, 납치 등 각종 테러를 일삼으면서 무려 83명을 살해했다. ‘냉전시대 최악의 테러리스트’ ‘테러리스트 중의 테러리스트’라는 별명만으로도 그에 대한 상상이 가능하다.

그의 활동 무대는 유럽과 중동. 1972년 뮌헨올림픽 때 이스라엘 선수단을 공격했으며 1975년엔 빈의 석유수출국기구 각료 납치사건을 벌였다. 그는 1994년 아프리카의 수단에서 프랑스 당국에 체포돼 종신형을 선고받고 프랑스에서 복역중이다.

자칼의 변호사는 48세의 이자벨 쿠탕-페르. 자칼과 이자벨은 2001년 9월에 약혼을 했고 올해 결혼할 계획이다. 이자벨의 개인사에 관해서는 외국 언론들도 자세히 쓰지 않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자벨은 매주 세 차례 이상 약혼자 자칼을 방문한다. 남부 파리의 라상테 교도소는 이들의 데이트 장소가 돼버렸다.

한 신문은 “테러리스트 자칼은 파리의 감옥에서 사랑과 시가 담배,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를 이자벨과 함께 나누고 있다”고 썼다. 전통적으로 사랑에는 약한 프랑스지만 이번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 같다. ‘국민 세금으로 테러리스트에게 시가를 대주고 애인과 앉아 노닥거리도록 할 수는 없다’는 반대 여론도 나오고 있다.

이자벨이 소속돼 있는 파리 변호사협회도 이 둘의 약혼에 못마땅하다는 표정이다. 개인적인 관계가 변호사 직무상 이해와 상충된다는 것. 그럴수록 이자벨은 자칼에 대한 사랑이 더 강해진다고 한다.

이자벨은 자칼에 대해 “너무나도 따뜻한 사람”이라고 묘사한다. 이자벨은 “우리의 결혼은 사랑의 결혼이며 사상이 일치하는 결혼”이라는 표현도 썼다. 뚱뚱한 신사 타입의 자칼은 테러리스트의 대명사였지만 그녀는 “일리히(자칼)의 실제 인간성은 나쁘게 알려진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고 말하기도 했다.

자칼은 자신의 고국 베네수엘라의 한 신문사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이제 전사로서의 내 여생을 이자벨과 함께 지낼 것이다. 그녀는 내가 이성적으로, 그리고 정열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프랑스변호사협회측은 “쿠탕-페르 변호사가 결혼을 강행할 경우 그녀를 협회에서 축출하고 변호사 업무를 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다. 이자벨 역시 물러서지 않고 있다. “프랑스 법에 변호사가 복역중인 고객과 결혼하지 말라는 내용은 없다”고 그녀는 주장하고 있다.

공산주의자인 아버지에 의해 테러리스트로 키워진 자칼

이자벨은 약혼자 자칼이 언젠가는 석방될 것으로 믿고 있다. 자칼 사건을 맡았던 많은 변호사들이 “이 사건은 도저히 안된다”면서 손을 뗐어도 그녀는 계속 변호에 매달리고 있다. 한편 ‘자칼이 이자벨을 꼬드겨서 결혼을 하고 결국은 석방될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장 루이스 브루기어라는 반(反) 테러 연구 전문가는 “자칼이 과거에 여러 여자를 유혹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이자벨을 유혹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자칼은 두번 결혼했다. 현재 부인은 막달레나 코프. 아직 이혼하지 않은 상태다. 그녀는 독일의 유명한 테러 조직인 적군파의 소속원이었다. 적군파는 1967년 결성돼 1970년대부터 1992년 활동을 마칠 때까지 납치, 암살, 폭파 등 유럽 최악의 테러활동을 했던 조직이다. 막달레나는 폭약 소지 혐의로 1982년 프랑스에서 체포됐다. 자칼은 프랑스 정부에 그녀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폭탄 테러를 저지르기도 했다. 1985년 그녀가 풀려나자 둘은 결혼했다. 하지만 요즘 막달레나는 자칼을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허풍장이, 미친놈’으로 묘사하고 있다.

자칼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는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호세 알타그라시아 라미레즈 나바스는 아들 이름을 블라디미르 일리야치 울리야노프 레닌에서 따서 ‘일리히’라고 지었다. 아버지 호세는 그만큼 공산주의에 푹 빠져있었다. 일리히의 동생 이름은 아예 ‘레닌’이라고 지었다. 공산주의자인 아버지와 사사건건 갈등을 빚던 어머니는 일리히가 열세살 때 결국 이혼했다.

아버지는 일리히를 공산주의자 학교에 보냈다. 이어 일리히는 아버지에 의해 쿠바의 테러 학교로 보내졌다. 거기서 쿠바, 에콰도르와 구 소련 출신의 악명 높은 게릴라들에게서 테러 기술을 전수받았다. 자동소총 사격, 폭파, 문서위조, 암호해독 및 지뢰공격 등이었다. 이렇게 그는 테러리스트로 키워졌다.

일리히는 런던, 파리에서도 공부했다가 역시 아버지의 권유로 모스크바의 한 대학에 진학했다. 일리히는 공산주의 심장부인 소련에 온 것이 기뻤지만 규율이 너무 심해 공부보다는 술을 마시고 여자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데 더 열심이었다고 한다. 이후 그가 테러리스트 자칼로 활동했을 때도 플레이보이로 알려질 정도로 여자관계가 복잡했다.

모스크바에서 일리히는 몇몇 팔레스타인 학생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무용담에 귀를 기울였다. 특히 이스라엘에 폭력적인 투쟁을 선언한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을 이끄는 와디 하다드의 활동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당시 인민해방전선은 비행기 납치 등 국제 테러에 나섰고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중동지역 테러리스트의 활동에 반한 일리히는 1970년 베이루트의 테러캠프를 방문해 훈련을 받았다. 그가 ‘카를로스 자칼’이라는 이름을 받은 곳도 여기였다. 자칼은 그해 9월 여객기 4대 동시 납치 테러에 신참 대원으로 참여해 탄약창고 경비를 서기도 했다.

이어 영국에서 암살대상 요인의 명단을 작성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는 중동의 다른 테러리스트들이 비행기를 납치하는 동안 시내 쇼핑상가에서 테러를 벌이는 방식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1972년 9월에는 독일 뮌헨올림픽에 참가중이던 이스라엘 선수들의 숙소를 습격해 마라톤 선수와 코치를 살해하고 다른 선수들을 인질로 잡은 ‘검은 9월단’의 테러에 참여했다.

테러의 전설, 카를로스 자칼 - 어싸인먼트 “테러는 여자를 쫓아다닐 때 느껴지는 쾌락과 같은 것”

1973년 10월30일 일요일, 런던의 부자 동네. 영국 최대의 백화점 회장이고 이스라엘을 위해 많은 돈을 대고 있던 당시 68세의 유태인 조셉 시프라의 집을 찾아와 총알을 날린 사람은 바로 자칼이었다. 자칼은 경찰을 따돌리고 도망쳤다. 시프는 얼굴에 총상을 입었지만 치료 후 생명을 건졌다. 자칼의 첫 단독 테러였고 이 사건으로 테러리스트들 사이에 그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됐다.

수년간의 테러 활동으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게 된 자칼은 점점 큰 일을 맡는다. 그는 1975년 12월엔 오스트리아 빈의 OPEC 본부 회의장을 습격해 11명의 각료들을 상대로 인질사건을 벌였다.

자칼은 자신을 ‘직업혁명가’라고 부른 적이 있다. 20년 이상 국제 테러리스트로 활동하면서 리비아의 카다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등을 위해 프리랜서로 일하기도 했다. 테러 활동을 후원하는 지도자와 그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것.

자칼은 수십건의 테러활동을 통해 자기 손으로 83명을 살해했다고 밝히고 있다. 또 추종자들로 작은 군대를 조직했는데 이 조직은 24명을 살해하고 2백57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자칼 스스로 “나는 평생 감옥에서 살아야 한다”면서 “감옥 문 밖으로 나가는 순간 총알을 맞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자칼이 이런 짓을 벌이고도 붙잡히지 않은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리비아 등 그를 지원하는 나라가 그에게 숨을 곳과 돈을 대줬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자칼이 직업혁명가라면 그에게 혁명은 무엇이었을까. 키워진 테러리스트는 왜 테러에 인생을 걸었을까. 감옥에 수감중인 자칼과 몇차례 인터뷰를 한 뒤 ‘카를로스 자칼’이란 책을 쓴 AP통신의 기자는 이렇게 분석했다. “자칼은 ‘나에게 혁명이란 것은 여자를 쫓아다니고 사치를 즐길 때와 비슷한 도취감을 준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자칼에게 테러는 쾌락 같은 것이었고 그의 몸속에는 테러를 즐기는 차가운 피가 흐르고 있다는 이야기다.

9·11 미국 참사 이후 나온 ‘자칼의 후예’라는 말은 바로 오사마 빈 라덴을 가리키는 것. ‘새로운 자칼들’이란 제목의 빈 라덴에 관한 책이 미국에서 나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자칼과 빈 라덴은 차이가 많다. 자칼은 요인 암살 등으로 일반인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고 표적이 된 사람을 겨냥한 테러를 주로 한 반면 빈 라덴은 자신이 ‘적’이라고 분류한 불특정 다수에게 테러를 가한다. 9·11 테러처럼 여객기로 빌딩을 들이받아 빌딩에 있던 여러 나라 출신의 여러 직종의 사람들에게 무차별로 테러를 가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 그나마 자칼이 활동하던 시절만 해도 ‘일반인은 보호한다’는 가장 중요한 원칙이 지켜졌던 것일까.

머리로는 사회주의 사상으로 무장하고 온몸으로 테러 기술을 익힌 희대의 테러리스트 자칼. 그가 파리 지하감옥으로 자신을 찾아오는 여자 변호사 이자벨과 약혼한 것은 한 인간으로서 사랑의 표현일 수 있다. 하지만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사람 목숨을 끊는 잔인한 살인 기술자가 지하감옥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수단을 확보하려는 트릭일 가능성도 있다.

이자벨은 주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자칼과 결혼할 태세다. 또 한차례 화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 말한 대로 사상과 애정의 두 측면에서 진정한 짝을 만났다면 그녀는 감옥 안의 자칼과 결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전문가는 “종신형의 자칼을 감옥 밖으로 꺼내기를 기대해선 안될 것”이라며 이렇게 강조한다. “결혼은 하려면 해라. 둘 다 감옥에서 살면 되겠지.”


   테러리즘의 역사   ‘로마 황제 줄리어스 시저의 암살에서부터 빈 라덴의 9·11 폭탄테러까지’

인류역사상 테러리스트의 활동기록은 2000년이 넘는다. 기원전 줄리어스 시저 로마 황제의 암살도 정치적 테러의 한가지였다. 기원후 팔레스타인 종교집단들이 결성한 테러단체는 로마의 통치에 협력하는 유태인들을 공격했다. 11세기에서 13세기까지는 페르시아에 흩어져 있던 이슬람 과격 종교단체들이 암살자를 고용하여 기독교 지도자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이 같은 테러양상은 21세기인 오늘까지 똑같다. 유태인과 팔레스타인인을 중심으로 한 ‘피의 보복전’은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 서로 어린이까지 포함해 상대방을 죽이는 일에 몰두해 있는 것.

16세기와 17세기에는 백성을 못살게 구는 폭군을 시해하는 테러리스트 활동이 있었다. 18세기말 프랑스 혁명기에는 집권세력이 합법적으로 상대방을 폭력으로 짓밟는 방식의 테러가 널리 행해졌다. 20세기 초에는 무정부주의자들이 정부 주요 요인을 암살하는 등 테러가 빚어졌다. 테러는 히틀러 치하 나치 독일이나 스탈린 치하의 소련 같은 전체주의 국가의 국가정책수단이 됐다. 20세기 중반에는 식민제국에 대항하는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테러리즘이 활용됐다. 당시 일부 지식층과 급진주의자들은 자유와 해방을 위한 수단으로 테러리즘을 받아들였다.

현대적 테러리즘은 1960년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1967년 6월 전쟁에서 이스라엘에 패배한 아랍인들은 세계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알리기 위해 테러 방식을 택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을 주축으로 한 테러리스트 단체들이 만들어졌다. 가장 효과적이고 극적인 방법은 항공기 납치. 1968년 7월 조지 하바시가 이끄는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 소속의 테러리스트들이 이스라엘 항공기 엘 알기를 공중 납치하는 등 그 해에만 항공기 납치 사건이 35건 발생했다.

테러리즘은 1970년대에 전세계로 확산됐다.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 일본의 적군파, 서독의 적군파 등 국제 테러리스트 단체들의 협력이 가시화됐다. 바로 이때가 남미 출신인 카를로스 자칼이 유럽과 중동 여러 나라를 드나들면서 테러활동을 벌이던 시기이기도 하다.

전세계로 확산되는 테러리즘에 대한 대비도 강화됐다. 일본과 독일의 적군파는 해체됐지만 팔레스타인 테러단체들의 주요 공격목표가 됐던 서독, 이스라엘, 미국 등은 테러리스트와 싸우는 특공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이때 만들어진 미국의 특공부대 델타포스는 2001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여했다.

1980년대부터 테러리즘은 무차별적이고 대형화한다. 테러에 쓰이는 무기의 성능이 갈수록 좋아지는데다 테러를 지원하는 나라까지 생겨났기 때문. 테러 사건이 한번 터지면 큰 피해가 발생했다. 1980년대 후반에 테러가 감소하는 듯했지만 1990년대 들어 다시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일본 도쿄의 사린가스 테러,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빌딩 테러 등과 같이 ‘아무나 죽어라’는 식의 테러까지 나타난 것.

국제회의를 개최하는 도시들은 국제 시위대 때문에 몸살을 앓던 시절이 그립기만 하다. 이젠 가공할 무기로 무장한 테러조직들, 자신의 몸을 던져가며 자살폭탄 테러에 뛰어드는 젊은 테러리스트들을 우려해야 하기 때문. 2002년, 세계는 또 어디서 어떤 테러리스트를 만나게 될까. 특히 월드컵 행사가 열리는 우리나라는 테러에 대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