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국내의 애국지사들은 일제(日帝)의 침략에 저항하고 친일파를 규탄하는 반일운동(反日運動)을 펼쳤다. 언론인 장지연(張志淵)은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게재하여 민중에게 국권피탈의 비극을 폭로하였고, 홍만식(洪萬植)·민영환(閔泳煥)·조병세(趙秉世) 등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홍암(弘巖) 나철(羅喆)은 감사의용단(敢死義勇團)을 조직해 을사오적(乙巳五賊)과 일진회를 처단하려고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1906년 3월부터는 을사늑약에 반발하여 민종식(閔宗植)·최익현(崔益鉉)·신돌석(申乭石)·정용기(鄭鏞基)·박장호(朴長浩) 등이 의병항쟁을 일으켰다. 일본 관청을 습격하고 유격전법(遊擊戰法)으로 일본군과 싸우는 의병들의 활동은 더욱 활발하고 드세어 갔다.
이같은 나라의 운명을 지켜보는 김좌진의 가슴 속에는 분노의 불길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하늘이 정의를 안다면 우리 민족을 보우하여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 두 도적들을 반드시 응징하리라!”
김좌진은 항상 시골에만 묻혀 살아 세상 물정에 어두운 자신에게 개화사상을 알려주어 눈을 뜨게 해준 김석범을 찾아가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울었다.
“저 야만스럽기 그지 없고 도의를 모르는 왜인들에게 나라의 주권이 유린당하고 있으니 이 원통한 일을 어찌합니까?”
김석범은 흐느끼는 김좌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우리 나라가 일본의 강압에 못 이겨 외교권을 빼앗기고 통감부에 의해 좌지우지되면서 나라 구실을 못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백성들이 무지했기 때문일세. 우리 나라는 중화사대주의(中華事大主義)와 성리학(性理學)이라는 낡은 이념에 갇혀 다른 나라들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였네. 나라가 부강해지고 독립을 이루려면 신식 문물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야 하네. 당장 새 인재들을 길러내는 교육이 먼저 필요하네.”
김좌진은 김석범의 조언에 크게 깨달은 바 있어 학교를 세워 인재들을 길러 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장 많은 학생들을 받아들여 가르쳐야 할 교사가 없는 것이 난처하였다. 작은 마을에 그 같은 큰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빌려 쓸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당장 교사를 새로 지을 만한 큰 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것저것 생각다 못한 김좌진은 90여칸이나 되는 자신의 저택을 우선 교사로 쓰기로 작정하고 어머니의 너그러운 이해를 구해 허락받았다. 그리하여 1907년 3월에 ‘호명학교(湖明學校)’라는 간판을 내걸고 문을 열었다.
처음 호명학교에서 받아들인 학생 수는 42명이었다. 김좌진은 한문·한글·수학·역사·지리·체육·수신 등 일곱개의 학과목을 교육하기로 하고 김석범의 도움을 받았다. 5월 하순에는 서울에 올라가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졸업한 박성태를 교사로 초빙하고 새로 학용품을 구입하였다.
이 때 그는 서울에서 조직된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와 인연을 맺고, 한성본부의 위임을 받아 홍성지부장의 책임을 맡았다. 그리고 또, 호명학교에서 수학한 우수한 학생을 추천하여 서울에 유학시킬 것도 약속받았다.
김좌진이 세운 호명학교가 지난날의 서당과는 판이한 새로운 체제로 운영되자, 사람들은 먼저 경의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게다가 그 가르치는 학문도 전날의 한문이나 성리학만이 아닌,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는 이른바 신학문들이었다. 이 같은 사실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은 오래지 않아 크게 감동하고 또한 공감하여 다투어 자녀들을 맡겨 왔다. 이렇게 되자 호명학교의 이름은 홍성은 물론, 널리 이웃 고을에까지 알려졌다.
그런데, 뜻밖에도 나라 안에 또 한번 거친 물결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일제는 고종을 수옥헌에 유폐시키고 경운궁에 경찰관들을 배치해 궁궐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감시하고 궁녀와 내시들을 매수해 은밀히 살펴보도록 했다. 그래도 틈새는 있는 법이다. 신민회(新民會)에서 활동하던 이회영(李會榮)이 고종의 시종인 조남익을 통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니 여기에 특사를 파견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폭로하자고 제안했다. 고종은 이를 옳다 여겨 이상설(李相卨)·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 세 사람에게 밀서를 주어 헤이그로 보냈다.
1907년 6월에 헤이그에 당도한 특사들은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면서 대한제국 대표로 회의에 참석하려 했으나 미국과 일본의 대표가 방해공작을 펴서 회의장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상설과 이위종은 영어와 러시아어, 프랑스어를 구사하면서 끊임없이 로비를 벌였다. 이들은 일본의 침략책동을 국제기자협회와 언론을 통해 낱낱이 고발해 세계 여론을 환기시키려 했다. 하지만 일본 측의 방해 또한 치열하여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이에 격분한 이준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 사건은 일본 정부에 즉각 보고되었다. 이토 통감은 일본 정부의 방침을 전달받고 시위대의 군인들이 이완용 내각을 타도하려 한다는 음모가 있음을 구실로 7월 22일 새벽 보병 1개 대대 병력을 경운궁으로 보내 고종의 측근 신하들을 체포하여 구금하도록 했다. 그리고 고종을 만나 일본과 맺은 협약을 위반했으니 황제의 자리를 황태자에게 내주고 뒷전으로 나앉으라고 윽박질렀다.
일본군은 왕궁을 포위하면서 남산 기슭에 6문의 대포를 설치하고 여차하면 경운궁이고 종로고 가릴 것 없이 포격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헌병들은 대오를 지어 거리를 순찰했다.
이토 통감은 고종에게 “그동안 서명을 거부한 일한간 조약문서에 도장을 찍고 일본에 건너가 아국 천황을 알현하여 사죄하시오”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이완용이 경운궁에 들어와 환도(環刀)를 세워들고 고종에게 퇴위하라고 소리쳤다. 고종은 밤새도록 버텼으나 신변의 위험을 느껴 결국 동의하고 말았다. 끝까지 거절하면 황태자마저 폐위하고 조카 이준용(李埈鎔)을 제위에 앉히려는 공작도 있었다. 고종은 이완용을 흘겨보며 “정히 그렇다면 제위를 넘겨주겠노라”고 내뱉었다. 이완용은 다음날 양위(讓位) 사실을 알렸다.
일제는 노회한 고종보다 병고에 시달리는 유악한 순종(純宗)을 더 만만하게 어겼다. 그리하여 순종을 황제로 인정하고 고종과 떨어뜨려 창덕궁(昌德宮)에 거처하도록 했다. 이토 통감은 순종이 황제로서 권리를 행사하는 국새(國璽)을 빼앗아 통감부로 가져갔다. 순종을 허수아비 군주로 만들어 자기네 마음대로 정무를 처리하고 도장을 찍어 합법을 가장하려는 음모였다. 아무리 힘이 없고 허울뿐인 황제라 하더라도 강요에 눌려 물러갔다는 일은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일제는 고문정치를 차관정치(次官政治)로 바꾸기 위해 일한신협약(日韓新協約) 체결을 서둘렀다. 그 요지는 구구하게 설명할 필요 없이 일본인 통감의 지도·감독 아래 모든 행정이 수행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르면 한국의 고등 관리는 통감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고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관리로 임명하게 된다. 내정이 통감의 손에 놀아나게 되었으니 완전 식민지화에 한 걸음 다가선 셈이었다. 정미7늑약(丁未七勒約)은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이토 통감이 조인하고 서명했다. 국정 최고 책임자인 순종 황제의 서명이 없었다.
다음에는 군대해산을 서둘렀다. 당시 대한제국의 군사병력은 서울의 시위대와 지방의 진위대를 합해 9천여명 정도였는데 그나마 일본군의 지휘를 받고 있었으므로 허울에 지나지 않았다. 허울뿐인 군대나마 그대로 두면 여러 가지 말썽을 피울 염려가 있다. 군대가 없는 나라는 존재가치가 없는 것과 같으니 군대해산은 식민지화의 첫 단계였다. 군사비용을 절약하기 위한 조치로 보이도록 이를 ‘군대 정리’라 불렀다.
1907년 7월 31일에 이완용은 임금의 조칙을 날조해 군대해산을 지시했다. 서울에는 삼엄한 계엄이 펼쳐진 가운데 일본군이 한국군의 총기(銃器)와 탄약(彈藥)을 거두어들이고 훈련원에는 병사 1천 8백여명이 집합되어 해산식이 진행됐다. 시위대의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이 군대 해산식의 전갈을 받자 “나라가 망했다”고 외치면서 권총으로 자결하자 그의 부하 장병들은 비분강개하여 아직 일본군이 접수하지 않은 군기고(軍器庫)를 부수고 무장봉기하여 시가전(市街戰)을 벌였다. 그러나 일본군에게 전력의 열세로 밀리게 되자 일부 군인들은 지방으로 내려가 의병항쟁에 가세하기도 하였다.
1907년 한해에는 14만 1천 6백여명의 민중이 의병항쟁에 참가해 2천 8백여회에 걸쳐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특히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홍주분견대(洪州分遣隊)·강화분견대(江華分遣隊) 등의 군인들이 의병으로서 일제의 침략에 강력하게 항거하여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강년(李康年)·신돌석(申乭石)·민긍호(閔肯鎬)·허위(許蔿)·문태수(文泰洙)·홍범도(洪範圖) 등 기라성 같은 의병대장들의 지도 아래 문경·영해·장성·무주·진주·갑산 등 각지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정미의병항쟁(丁未義兵抗爭)은 일제의 조선병탄을 3년 더 늦추어지게 할 정도로 아주 치열했다.
이듬해 3월에는 통감부의 외교고문으로서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에 도움을 준 미국인 외교관 스티븐스(D.W. Stevens)가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일본이 한국을 지배해야 한다”고 발언하자 공립협회(共立協會)의 회원인 전명운(田明雲)과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의 회원인 장인환(張仁煥)이 오클랜드(Oakland)역에서 동시에 스티븐스를 저격·살해하는 반일의거(反日義擧)가 있었다. 이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그 사건을 신속하게 보도하면서 전명운과 장인환을 우국지사라고 크게 칭송하였다.
홍성의 갈뫼 마을에서 이 모든 소식을 전해 들은 김좌진의 가슴 속에서는 뜨거운 피가 끓어올랐다.
“새로운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도 중요하지만 왜인(倭人)들이 강성한 무력(武力)으로 이 나라를 집어삼키려고 하는데 이대로 시골에 눌러 앉아 있을 수가 없구나.”
김좌진은 당장 서울로 올라가 애국지사들을 만나 구국운동에 동참하고 싶었다.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를 응징하고 조국을 침략하는 일제의 원흉들을 처단하고 싶었다. 그러나 개교한 지 얼마되지 않은 호명학교의 경영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어머니가 바라는 동생의 혼인 문제도 모르는 체할 수 없었다.
김좌진은 깊이 생각한 끝에 우선 동생 김동진을 결혼시키기로 하고 어머니와 집안 일을 그에게 맡기기로 결심하였다. 또한 학교 문제는 김석범에게 그 경영을 위임하기로 하였다.
김동진을 장가보내고 나서 집안에서 소유하고 있던 농토를 팔아 얼마간의 돈을 마련한 김좌진은 그 돈을 김석범에게 주면서 학교 경영을 부탁했다.
“자네의 뜻은 잘 알겠네. 앞으로 학교에 무슨 중대한 일이 생기면 서울로 사람을 보내어 자네의 뜻을 물어 처리할 테니, 아무 걱정 말고 자네 몸조심이나 하게나!”
김석범은 이렇게 김좌진을 격려하며 기꺼이 그 무거운 책임을 맡아 주었다.
학교 일을 매듭지은 김좌진은 동생 동진을 불러 자신이 해야 할 일과 뜻을 밝혔다.
“동진아, 나는 무너지는 나라를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다. 서울로 올라가서 뜻이 맞는 동지들과 함께 나라를 구하는 일에 내 한몸을 던지기로 하였다. 너는 이미 장가를 들어 한 여인을 아내로 맞아 들였으니, 이제 한 집안의 의젓한 어른이 되었다. 앞으로는 이 형을 대신하여 집안 일을 잘 처리하되, 특히 어머니를 편안하게 잘 모시도록 하여라. 그것이 이 형의 간절한 부탁이다.”
1908년 4월, 새 생명들이 약동하는 따스한 봄날에 김좌진은 어머니와 아내 오숙근, 그리고 동생 김동진과 김석범, 호명학교 학생들의 전송을 받으며 서울행을 떠났다. 이 때가 김좌진의 나이 열아홉살이었다.
서울에 당도한 김좌진은 가회동 친척집 가까운 곳에 방 한칸을 얻어 세를 들고 권동진(權東鎭)·장지연(張志淵)·오세창(吳世昌)·남궁억(南宮檍) 등이 주축이 되어 조직된 대한협회(大韓協會)에 가입하여 그 당시 국내에서 단 하나뿐인 경성고아원의 총무를 맡아 어려운 재정을 도왔다.
김좌진은 또 윤치호(尹致昊)·최남선(崔南善)·차이석(車利錫)·이승훈(李昇薰) 등 신민회(新民會) 간부들에 의해 조직된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에 가입했는데, 그가 이 단체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기록이 전무하여 알 수가 없다. 그 밖에도 노백린(盧伯麟)·윤치성(尹致晟) 등과 함께 몰래 의병들에게 군자금을 전달해주는 일을 시작하였다.
김좌진은 배일민족운동(排日民族運動)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금 확보가 절실하다고 보고, 재정 마련을 위해 이찬양행이라는 상점을 열었다. 그러나 필요한 돈은 쉽게 모아지지 않아 그의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克日의 상징’ 白冶 金佐鎭 장군 2.敎育啓蒙運動 ⑵
★ 계몽운동에 나서다.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국내의 애국지사들은 일제(日帝)의 침략에 저항하고 친일파를 규탄하는 반일운동(反日運動)을 펼쳤다. 언론인 장지연(張志淵)은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게재하여 민중에게 국권피탈의 비극을 폭로하였고, 홍만식(洪萬植)·민영환(閔泳煥)·조병세(趙秉世) 등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홍암(弘巖) 나철(羅喆)은 감사의용단(敢死義勇團)을 조직해 을사오적(乙巳五賊)과 일진회를 처단하려고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1906년 3월부터는 을사늑약에 반발하여 민종식(閔宗植)·최익현(崔益鉉)·신돌석(申乭石)·정용기(鄭鏞基)·박장호(朴長浩) 등이 의병항쟁을 일으켰다. 일본 관청을 습격하고 유격전법(遊擊戰法)으로 일본군과 싸우는 의병들의 활동은 더욱 활발하고 드세어 갔다.
이같은 나라의 운명을 지켜보는 김좌진의 가슴 속에는 분노의 불길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하늘이 정의를 안다면 우리 민족을 보우하여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 두 도적들을 반드시 응징하리라!”
김좌진은 항상 시골에만 묻혀 살아 세상 물정에 어두운 자신에게 개화사상을 알려주어 눈을 뜨게 해준 김석범을 찾아가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울었다.
“저 야만스럽기 그지 없고 도의를 모르는 왜인들에게 나라의 주권이 유린당하고 있으니 이 원통한 일을 어찌합니까?”
김석범은 흐느끼는 김좌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우리 나라가 일본의 강압에 못 이겨 외교권을 빼앗기고 통감부에 의해 좌지우지되면서 나라 구실을 못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백성들이 무지했기 때문일세. 우리 나라는 중화사대주의(中華事大主義)와 성리학(性理學)이라는 낡은 이념에 갇혀 다른 나라들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였네. 나라가 부강해지고 독립을 이루려면 신식 문물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야 하네. 당장 새 인재들을 길러내는 교육이 먼저 필요하네.”
김좌진은 김석범의 조언에 크게 깨달은 바 있어 학교를 세워 인재들을 길러 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장 많은 학생들을 받아들여 가르쳐야 할 교사가 없는 것이 난처하였다. 작은 마을에 그 같은 큰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빌려 쓸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당장 교사를 새로 지을 만한 큰 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것저것 생각다 못한 김좌진은 90여칸이나 되는 자신의 저택을 우선 교사로 쓰기로 작정하고 어머니의 너그러운 이해를 구해 허락받았다. 그리하여 1907년 3월에 ‘호명학교(湖明學校)’라는 간판을 내걸고 문을 열었다.
처음 호명학교에서 받아들인 학생 수는 42명이었다. 김좌진은 한문·한글·수학·역사·지리·체육·수신 등 일곱개의 학과목을 교육하기로 하고 김석범의 도움을 받았다. 5월 하순에는 서울에 올라가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졸업한 박성태를 교사로 초빙하고 새로 학용품을 구입하였다.
이 때 그는 서울에서 조직된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와 인연을 맺고, 한성본부의 위임을 받아 홍성지부장의 책임을 맡았다. 그리고 또, 호명학교에서 수학한 우수한 학생을 추천하여 서울에 유학시킬 것도 약속받았다.
김좌진이 세운 호명학교가 지난날의 서당과는 판이한 새로운 체제로 운영되자, 사람들은 먼저 경의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게다가 그 가르치는 학문도 전날의 한문이나 성리학만이 아닌,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는 이른바 신학문들이었다. 이 같은 사실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은 오래지 않아 크게 감동하고 또한 공감하여 다투어 자녀들을 맡겨 왔다. 이렇게 되자 호명학교의 이름은 홍성은 물론, 널리 이웃 고을에까지 알려졌다.
그런데, 뜻밖에도 나라 안에 또 한번 거친 물결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일제는 고종을 수옥헌에 유폐시키고 경운궁에 경찰관들을 배치해 궁궐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감시하고 궁녀와 내시들을 매수해 은밀히 살펴보도록 했다. 그래도 틈새는 있는 법이다. 신민회(新民會)에서 활동하던 이회영(李會榮)이 고종의 시종인 조남익을 통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니 여기에 특사를 파견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폭로하자고 제안했다. 고종은 이를 옳다 여겨 이상설(李相卨)·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 세 사람에게 밀서를 주어 헤이그로 보냈다.
1907년 6월에 헤이그에 당도한 특사들은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면서 대한제국 대표로 회의에 참석하려 했으나 미국과 일본의 대표가 방해공작을 펴서 회의장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상설과 이위종은 영어와 러시아어, 프랑스어를 구사하면서 끊임없이 로비를 벌였다. 이들은 일본의 침략책동을 국제기자협회와 언론을 통해 낱낱이 고발해 세계 여론을 환기시키려 했다. 하지만 일본 측의 방해 또한 치열하여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이에 격분한 이준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 사건은 일본 정부에 즉각 보고되었다. 이토 통감은 일본 정부의 방침을 전달받고 시위대의 군인들이 이완용 내각을 타도하려 한다는 음모가 있음을 구실로 7월 22일 새벽 보병 1개 대대 병력을 경운궁으로 보내 고종의 측근 신하들을 체포하여 구금하도록 했다. 그리고 고종을 만나 일본과 맺은 협약을 위반했으니 황제의 자리를 황태자에게 내주고 뒷전으로 나앉으라고 윽박질렀다.
일본군은 왕궁을 포위하면서 남산 기슭에 6문의 대포를 설치하고 여차하면 경운궁이고 종로고 가릴 것 없이 포격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헌병들은 대오를 지어 거리를 순찰했다.
이토 통감은 고종에게 “그동안 서명을 거부한 일한간 조약문서에 도장을 찍고 일본에 건너가 아국 천황을 알현하여 사죄하시오”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이완용이 경운궁에 들어와 환도(環刀)를 세워들고 고종에게 퇴위하라고 소리쳤다. 고종은 밤새도록 버텼으나 신변의 위험을 느껴 결국 동의하고 말았다. 끝까지 거절하면 황태자마저 폐위하고 조카 이준용(李埈鎔)을 제위에 앉히려는 공작도 있었다. 고종은 이완용을 흘겨보며 “정히 그렇다면 제위를 넘겨주겠노라”고 내뱉었다. 이완용은 다음날 양위(讓位) 사실을 알렸다.
일제는 노회한 고종보다 병고에 시달리는 유악한 순종(純宗)을 더 만만하게 어겼다. 그리하여 순종을 황제로 인정하고 고종과 떨어뜨려 창덕궁(昌德宮)에 거처하도록 했다. 이토 통감은 순종이 황제로서 권리를 행사하는 국새(國璽)을 빼앗아 통감부로 가져갔다. 순종을 허수아비 군주로 만들어 자기네 마음대로 정무를 처리하고 도장을 찍어 합법을 가장하려는 음모였다. 아무리 힘이 없고 허울뿐인 황제라 하더라도 강요에 눌려 물러갔다는 일은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일제는 고문정치를 차관정치(次官政治)로 바꾸기 위해 일한신협약(日韓新協約) 체결을 서둘렀다. 그 요지는 구구하게 설명할 필요 없이 일본인 통감의 지도·감독 아래 모든 행정이 수행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르면 한국의 고등 관리는 통감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고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관리로 임명하게 된다. 내정이 통감의 손에 놀아나게 되었으니 완전 식민지화에 한 걸음 다가선 셈이었다. 정미7늑약(丁未七勒約)은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이토 통감이 조인하고 서명했다. 국정 최고 책임자인 순종 황제의 서명이 없었다.
다음에는 군대해산을 서둘렀다. 당시 대한제국의 군사병력은 서울의 시위대와 지방의 진위대를 합해 9천여명 정도였는데 그나마 일본군의 지휘를 받고 있었으므로 허울에 지나지 않았다. 허울뿐인 군대나마 그대로 두면 여러 가지 말썽을 피울 염려가 있다. 군대가 없는 나라는 존재가치가 없는 것과 같으니 군대해산은 식민지화의 첫 단계였다. 군사비용을 절약하기 위한 조치로 보이도록 이를 ‘군대 정리’라 불렀다.
1907년 7월 31일에 이완용은 임금의 조칙을 날조해 군대해산을 지시했다. 서울에는 삼엄한 계엄이 펼쳐진 가운데 일본군이 한국군의 총기(銃器)와 탄약(彈藥)을 거두어들이고 훈련원에는 병사 1천 8백여명이 집합되어 해산식이 진행됐다. 시위대의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이 군대 해산식의 전갈을 받자 “나라가 망했다”고 외치면서 권총으로 자결하자 그의 부하 장병들은 비분강개하여 아직 일본군이 접수하지 않은 군기고(軍器庫)를 부수고 무장봉기하여 시가전(市街戰)을 벌였다. 그러나 일본군에게 전력의 열세로 밀리게 되자 일부 군인들은 지방으로 내려가 의병항쟁에 가세하기도 하였다.
1907년 한해에는 14만 1천 6백여명의 민중이 의병항쟁에 참가해 2천 8백여회에 걸쳐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특히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홍주분견대(洪州分遣隊)·강화분견대(江華分遣隊) 등의 군인들이 의병으로서 일제의 침략에 강력하게 항거하여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강년(李康年)·신돌석(申乭石)·민긍호(閔肯鎬)·허위(許蔿)·문태수(文泰洙)·홍범도(洪範圖) 등 기라성 같은 의병대장들의 지도 아래 문경·영해·장성·무주·진주·갑산 등 각지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정미의병항쟁(丁未義兵抗爭)은 일제의 조선병탄을 3년 더 늦추어지게 할 정도로 아주 치열했다.
이듬해 3월에는 통감부의 외교고문으로서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에 도움을 준 미국인 외교관 스티븐스(D.W. Stevens)가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일본이 한국을 지배해야 한다”고 발언하자 공립협회(共立協會)의 회원인 전명운(田明雲)과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의 회원인 장인환(張仁煥)이 오클랜드(Oakland)역에서 동시에 스티븐스를 저격·살해하는 반일의거(反日義擧)가 있었다. 이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그 사건을 신속하게 보도하면서 전명운과 장인환을 우국지사라고 크게 칭송하였다.
홍성의 갈뫼 마을에서 이 모든 소식을 전해 들은 김좌진의 가슴 속에서는 뜨거운 피가 끓어올랐다.
“새로운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도 중요하지만 왜인(倭人)들이 강성한 무력(武力)으로 이 나라를 집어삼키려고 하는데 이대로 시골에 눌러 앉아 있을 수가 없구나.”
김좌진은 당장 서울로 올라가 애국지사들을 만나 구국운동에 동참하고 싶었다.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를 응징하고 조국을 침략하는 일제의 원흉들을 처단하고 싶었다. 그러나 개교한 지 얼마되지 않은 호명학교의 경영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어머니가 바라는 동생의 혼인 문제도 모르는 체할 수 없었다.
김좌진은 깊이 생각한 끝에 우선 동생 김동진을 결혼시키기로 하고 어머니와 집안 일을 그에게 맡기기로 결심하였다. 또한 학교 문제는 김석범에게 그 경영을 위임하기로 하였다.
김동진을 장가보내고 나서 집안에서 소유하고 있던 농토를 팔아 얼마간의 돈을 마련한 김좌진은 그 돈을 김석범에게 주면서 학교 경영을 부탁했다.
“자네의 뜻은 잘 알겠네. 앞으로 학교에 무슨 중대한 일이 생기면 서울로 사람을 보내어 자네의 뜻을 물어 처리할 테니, 아무 걱정 말고 자네 몸조심이나 하게나!”
김석범은 이렇게 김좌진을 격려하며 기꺼이 그 무거운 책임을 맡아 주었다.
학교 일을 매듭지은 김좌진은 동생 동진을 불러 자신이 해야 할 일과 뜻을 밝혔다.
“동진아, 나는 무너지는 나라를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다. 서울로 올라가서 뜻이 맞는 동지들과 함께 나라를 구하는 일에 내 한몸을 던지기로 하였다. 너는 이미 장가를 들어 한 여인을 아내로 맞아 들였으니, 이제 한 집안의 의젓한 어른이 되었다. 앞으로는 이 형을 대신하여 집안 일을 잘 처리하되, 특히 어머니를 편안하게 잘 모시도록 하여라. 그것이 이 형의 간절한 부탁이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형님의 당부 말씀 가슴에 새겨 명심하겠습니다. 아무쪼록 형님께서나 몸조심하십시오.”
동생 김동진은 믿음직스럽게 대답하였다.
1908년 4월, 새 생명들이 약동하는 따스한 봄날에 김좌진은 어머니와 아내 오숙근, 그리고 동생 김동진과 김석범, 호명학교 학생들의 전송을 받으며 서울행을 떠났다. 이 때가 김좌진의 나이 열아홉살이었다.
서울에 당도한 김좌진은 가회동 친척집 가까운 곳에 방 한칸을 얻어 세를 들고 권동진(權東鎭)·장지연(張志淵)·오세창(吳世昌)·남궁억(南宮檍) 등이 주축이 되어 조직된 대한협회(大韓協會)에 가입하여 그 당시 국내에서 단 하나뿐인 경성고아원의 총무를 맡아 어려운 재정을 도왔다.
김좌진은 또 윤치호(尹致昊)·최남선(崔南善)·차이석(車利錫)·이승훈(李昇薰) 등 신민회(新民會) 간부들에 의해 조직된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에 가입했는데, 그가 이 단체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기록이 전무하여 알 수가 없다. 그 밖에도 노백린(盧伯麟)·윤치성(尹致晟) 등과 함께 몰래 의병들에게 군자금을 전달해주는 일을 시작하였다.
김좌진은 배일민족운동(排日民族運動)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금 확보가 절실하다고 보고, 재정 마련을 위해 이찬양행이라는 상점을 열었다. 그러나 필요한 돈은 쉽게 모아지지 않아 그의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