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克日의 상징’ 白冶 金佐鎭 장군 2.敎育啓蒙運動 ⑶

조의선인2009.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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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적 약탈에 앞장 선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

 

1909년 10월 26일에 한국인들의 반일의식을 고취시키고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한국 침략에 경종(警鐘)을 울리는 대사건이 일어났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지사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일본 최고의 겐로[元老]로서 일본이 한반도를 자국의 새로운 영토로 삼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만주 하얼빈[哈爾濱] 역에서 안중근(安重根)에게 암살당한 것이다.

 

안중근은 진보적인 애국계몽운동에 헌신했고 교육사업에 열정을 쏟았으며 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남궁억(南宮檍) 등을 도와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일제의 폭압이 날로 심해지자 온건적인 계몽운동이나 문화운동으로는 나라가 식민지로 전락하는 현실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무장투쟁으로 전환하기로 결심했다.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그는 최재형(崔在亨)이 이끄는 동의회(同義會)에 가입하여 이범윤(李範允)을 총사령관으로 추대한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의 참모중장에 임명되었다. 1908년 6월에는 독립특파대장 겸 아령지구군 사령관으로서 의병 3백여명을 거느리고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였으나 신아산전투(新牙山戰鬪)에서 일본군의 습격으로 참패하였다. 그는 북방의 차가운 온돌방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며 여러 가지 방략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는 조선 초대통감인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시찰하기 위해 러시아의 재무대신인 코코프체프와 만주 및 조선 문제를 놓고 회담을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최재형과 이강(李剛)을 만나 이토를 처단할 뜻을 밝힌 그는 우덕순(禹德淳)·조도선(曺道先)·유동하(劉東夏)와 함께 저격 실행책략을 모의하고 거사계획을 수립했다.

 

안중근은 일본인으로 가장하고 하얼빈 역 구내로 잠입했다. 이토가 탄 특별열차는 1909년 10월 26일 아침 9시 정각에 하얼빈 역에 도착했다. 그는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접근하여 품 속에서 벨기에제 브라우닝식 M1900 권총을 꺼내들고 이토의 가슴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이토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안중근은 스스로 권총을 내던지고 두 팔을 높이 들면서 “대한제국 만세!”를 러시아어로 외치다가 러시아 군사들에게 체포되었다. 병원으로 옮겨진 이토는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아무런 효과도 없이 사망하고 말았다. 이토가 숨이 끊어지기 전에 남긴 말은 “멍청한 조선인에게 어이없게 당했구나!” 였다고 한다.

 

안중근은 러시아 검찰관으로부터 예비 심문을 받을 때 가장 먼저 “이토는 죽었는가? 이토가 자신에게 총격을 한 사람이 조선인이란 사실을 알고 죽었는가?” 라고 물었다. 뤼순[旅順] 감옥으로 이송된 안중근은 변호사 선임조차 허용되지 않은 채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까지 단 8일동안 여섯 차례의 재판을 받은 뒤 사형을 언도받았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는 소식은 우리 민족에게 쾌거와 희망을 안겨주었다. 김좌진도 점점 항일투쟁의 열기가 사그러지는 것을 안타까워 하던 중에 하얼빈의거[哈爾濱義擧]의 소식을 듣자 온 몸의 피가 끓어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이제 됐다! 우리 나라의 주권을 침탈하는데 누구보다 앞장섰던 이토가 죽었으니 이제 조국의 독립이 다가오는 것은 시간 문제다.”

 

그러나 이 일은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대한제국을 흡수하는 것을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는 의지를 북돋우는데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10년 8월에 들어 서울 시내는 완전히 계엄령 발동 상태로 들어갔고 헌병과 순사들이 거리를 장악한 가운데 기마대가 순찰을 돌았다. 신임 한국통감으로 부임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긴밀히 연락하여 대한제국을 완전 식민지화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국새(國璽)는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가 순종(純宗)에게서 빼앗아 보관하고 있었다. 이완용은 위임장에 국새를 찍고 통감부에서 미리 준비한 병합문서에다 데라우치와 함께 서명 날인했다. 경술병합늑약(庚戌倂合勒約)은 이렇게 불법적인 방법으로 체결되었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병탄되자 서울 장안은 하나의 커다란 상가집처럼 되고 말았다. 시민들은 너나할 것 없이 문을 굳게 닫아 걸고 집 안에서 비통한 울음을 터뜨렸다. 시장이나 상가 또한 문이 닫히고, 저잣거리에는 장사꾼은 물론 오가는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다만 순찰을 도는 일본 헌병들의 말발굽 소리만이 고요를 깨뜨릴 뿐이었다. 그 말발굽 소리에 섞여 집집마다에서 새어 나오는 구슬프게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밀물처럼 흘렀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는 동안, 그 구슬픈 흐느낌 소리는 그만 통곡 소리가 되어 온 삼천리 강산을 뒤덮었다.

 

“저 섬나라 야만족이 이 나라와 민족의 땅을 빼앗다니, 이 치욕을 어떻게 씻는단 말인가!”

 

김좌진은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는 곧 가회동 자기 거처에서 윤치성(尹致晟)·권태진(權泰鎭)·임병한(林炳翰)·김한종(金漢鍾)·최한영(崔漢泳) 등의 동지들을 모아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에 모든 힘을 쏟기로 다짐하였다. 1915년 박상진(朴尙鎭)·양제안(梁濟安)·우재룡(禹在龍) 등이 이끄는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과 채기중(蔡祺中)·유창순(庾昌淳)·한훈(韓焄) 등이 이끄는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이 통합하여 광복단(光復團)이 결성되자 김좌진은 노백린(盧伯麟)·신현대(申鉉大)·윤홍중(尹弘仲) 등과 함께 이 단체에 가입하여 항일투쟁(抗日鬪爭)을 시작하였다.

 

광복단은 주로 친일파 부자들을 습격하여 그들의 재물을 빼앗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여 경학사(耕學社) 같은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려는 집단에 전달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구의 부호 장승원, 전라남도 보성의 갑부 양재학, 전라남도 낙안의 지주 서도현 등을 처단하고 그 집안의 돈을 빼앗아 챙겼다.

 

그 때, 김좌진은 서울 돈의동(敦義洞)에 사는 족질(族姪) 김종근(金鍾根)을 찾아가 자신이 광복단의 단원임을 밝히고 독립운동 자금 지원에 협조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나라가 망하여 우리 민족이 왜인들의 노예가 되었는데도 그대는 그냥 보고만 있을 작정인가? 왜인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나라를 찾고자 하는 일에 협조한다면 그대는 역사에 귀한 이름을 남기리라.”

 

김종근은 순순히 김좌진의 요구에 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나라를 되찾는 일에 돈이 필요하다고 하니 도와야 하겠지만 지금은 당장 돈을 내줄 수가 없으니 내일 다시 온다면 은행에서 현금을 찾아 드리겠습니다.”

 

김좌진은 김종근의 말을 철썩같이 믿고 가회동 거처로 돌아갔다가 이튿날 다시 김종근의 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김종근의 밀고를 받고 미리 잠복해 대기하고 있던 일본 순사들에게 둘러싸여 체포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김좌진은 서대문 형무소에 갇혀 2년 6개월간 복역하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김좌진이 옥살이를 하는 동안 광복단은 단원인 이종국(李鍾國)의 밀고로 총단장인 박상진을 비롯한 37명이 체포되어 사실상 와해되고 말았다.

 

여기서 잠깐, 일제의 식민지 수탈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조선을 점령하여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식민지 정책을 펼친 근본적인 이유는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였다. 러일전쟁 때부터 한반도 곳곳에 군용시설을 만들어 놓은 일제는 한반도의 농지를 직접 소유하여 쌀과 콩을 생산해 일본 열도로 가져가 자국의 농산물 시장을 번창시킬 계획을 세웠다. 당시 일제는 식민지로 만든 대만과 훗카이도, 그리고 하와이 사탕수수밭의 노동자 유출만으로는 팽창하고 있는 인구를 배출하기에 부족하고 식량과 원료를 공급하기에도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판단함에 따라 일본 농민과 빈민을 조선에 대규모로 이주시키려 하였다.

 

일본 정부는 1901년에 이민법을 고쳐 한국과 중국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도록 했다. 일본 관리들은 한국에서 미개간지가 많고 땅값이 상대적으로 싸고 조선 농민의 농업생산력이 높아 농업 식민지로는 가장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자국의 농민·노동자들을 한국으로 이주시키는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일본 농민들은 정부 시책에 호응해 “조선에 가서 땅을 사고 부자가 되자, 조선에서 농사를 지어 쌀을 일본으로 가져오자!” 하고 외치면서 1902년부터 1906년까지 무려 10만이 넘는 인원이 한국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통감부에서는 한국 노동자의 하와이 이주를 금지했다. 당시 하와이 사탕수수밭에 노역으로 종사하고 있는 일본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통감부는 내각에 일본인이 조선에서 가옥과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규칙과 토지를 불하받을 수 있는 법을 만들라고 요구했다. 그리하여 1906년 이후 일본인 농장과 농업회사들이 무수히 생겨났다. 일제는 미개간지를 개척한다는 미명 아래 1908년 삼림령(森林令)을 발동해 국유지를 빼앗아갔다. 농민들이 국가에 세금을 내고 붙여먹던 논밭을 빼앗은 것이다. 게다가 왕실이나 국가 재산이었던 역둔토(驛屯土)·궁장토(宮庄土)를 탁지부에 소속시켜 일본 민간인들에게 불하해 주었다. 

 

1908년 8월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를 설립해 토지를 침탈하고 관리에 나서도록 했다. 말이 주식회사이지 실제로는 통감부의 지원을 받으며 반관(半官)의 역할까지 맡았다. 이 회사는 서울에 본점을 두고 도쿄와 지방에 지점을 두었는데, 설립 초기에는 전국에 10개의 지점을 두고 통감부에서 약탈한 국유지를 인계받아 관리했다. 이들 토지는 주로 일본인들에게 불하했다. 1909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소유한 토지는 1만 2천 64정보(町步)였다.

 

그러면 왜 도쿄에도 지점을 두었을까? 바로 일본인 농업이민을 주선하기 위한 공작이었다. 자본이 있거나 수완이 좋은 일본 농부는 농장주가 되어 많은 논밭을 가지고 조선인 노동자를 두고 농사를 짓거나 소작을 주어 소작료를 챙겼다. 이 무렵 일본인 농장주가 차지한 토지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보다 많은 3만여 정보를 헤아렸다. 1909년의 경우, 일본인 소유의 농지는 논과 밭, 산림을 합해 40만 정보에 이르렀다. 이때까지 국유지로 등록된 토지가 100만 정보쯤 되었으니 일본인 소유 농지가 얼마나 많았는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일본 자본가와 농장주들은 땅을 사서 부동산 투기를 일삼았다. 부패한 벼슬아치들과 간교한 거간꾼들은 자기 명의로 토지를 사서 일본인에게 되파는 수법을 써서 토지 방매를 부추겼다. 기생방에 드나드는 방탕한 지주의 자식이나 끼닛거리를 마련하지 못한 소농민들은 싼값으로 토지를 처분했다. 일본인 농장은 대개 소작 경영을 했는데, 거대한 회사나 다름이 없어서 소작인의 사택을 지어 주거나 병원도 차려 소작인의 병을 치료했다. 농사만 짓는 게 아니라 복숭아, 포도, 토마토 등 개량된 과수를 심는 과수원도 많았다. 따라서 조선 땅은 완전히 일본의 식량 공급 기지가 되었고 원료 공급지로 전락했다.

 

★ 무단정치(武斷政治)와 헌병경찰제(憲兵警察制) 

 

1910년 8월 경술병합늑약(庚戌倂合勒約)으로 대한제국을 멸망시켜 한반도를 자국의 새로운 영토로 삼은 일본 제국주의 세력은 한국통감부(韓國統監府)를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로 바꾸고 강력한 무단정치를 실시했다. 조선총독은 육군이나 해군의 현역대장 중에서 일본 황제가 직접 임명했는데, 일본 내각과 동등한 통치권을 부여받아 일본에서 시행되는 민법과 형법 등의 법률을 조선에 적용하지 않고, 식민지 조선을 지배할 수 있는 독자적인 법률을 별도로 제정해 시행할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하였다. 총독 밑에는 정무총감을 두어 각 부서의 사무를 감독하게 했다. 정무총감은 일본 내각의 대신급에 해당하며 영국 등 다른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에서 두었던 부총독보다 더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였다.

 

일제는 총독부에 사법부·농상공부·탁지부·내무부·총무부 등 다섯개의 기구를 두고 총독의 비서실인 총독관방(總督官房)을 부와 같은 수준으로 두었다. 다음으로는 영림창·전매국·임시토지조사국·경무총감부·중추원 등 총독 소속의 19개 관서를 두었다. 총독부의 직위로는 총독과 정무총감 아래의 장관과 국장, 참사관·비서관·서기관·사무관·기사 등 정규직과 속관직(屬官織)인 촉탁·기수(技手)·통역관을 두었고, 또 다른 임시직과 고용원도 많았으며 법률기관으로는 1912년에 고등법원·복심법원·지방법원 등 3급 3심제로 개편되어 검찰이 독립되어 있지 않고 재판소에 소속되었다.

 

전국의 행정구역은 13도 11부 333군으로 나누었고, 부윤과 군수에게서 국세징수·지방재정 편성·경찰형벌 등 사법적 권한 등을 빼앗아 종전에 지방관이 가지고 있던 권한을 대폭 축소시켰다. 또 왕조시대 군현제의 보조기구였던 면을 말단 행정관청으로 만들고 면장을 부윤과 군수가 임명하게 했다. 총독부는 한성부를 경성부로 고쳐 경기도에 편입시키고 부에 있던 면을 군에 넣고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는 곳을 지정면으로 정했다. 총독부에서 중앙의 고위직은 거의 일본인이 차지했으며 각 도의 참사관이나 군수에는 조선인을 배치했다. 조선인을 등용할 경우에는 적극적 친일파나 한국병합에 공로가 있는 인사들에 한했다. 통역관은 일본어와 조선어를 모두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을 임명했으므로 조선인과 일본인이 섞여 있었다.

 

데라우치 총독의 하수인인 헌병대 사령관 아카시 겐지로[明石元二郞]는 헌병경찰제(憲兵警察制)를 진두 지휘해 집회·결사의 자유를 억압하고 모든 언론을 통제했다. 총독부는 자신들의 식민지 정책을 대외에 선전하기 위해「서울 프레스」라는 영자신문을 발행했다. 이 신문은 조선에 있는 외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에 있는 외국인은 물론 미국, 중국 등 해외에도 배포되었다. 조선이 광명의 사회로 발전한다는 등의 기사를 끊임없이 내보내 제국주의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선전했다.

 

헌병경찰제는 병합 이후 조선인들의 저항운동이 벌어질 것을 우려한 총독부가 식민지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 효율적인 경찰기구를 만들어낸 제도였다. 헌병경찰대는 첩보수집, 폭도토벌, 범죄의 즉결, 우편물 호위, 납세권고, 불온한 인사의 감시와 통제, 일본어 보급 등 광범위한 분야를 주된 업무로 삼았다. 총독부는 헌병분견소와 파견소를 주요한 지점 또는 면 단위로 두었고, 이곳에서 실제적인 대민감시와 업무가 이루어졌다. 모든 헌병기구에는 조선인 헌병보조원이 배치되었다. 헌병 또는 경찰에 즉결처분권이 주어졌는데, 재판에 회부되지 않고 즉결처분을 할 수 있는 대상은 구류, 태형, 벌금, 과태료, 도박죄 등을 비롯하여 3개월 이하의 징역형에 해당하는 상해죄, 3개월 이하의 형벌에 처하는 행정법규 위반자 등이었다. 범법자를 적발하면 경찰서나 헌병대로 끌고 가 문초를 하고 태형(笞刑)을 가했다.

 

조선인들이 마을에서 도박판을 벌이거나 총독부에서 시키는 일을 게을리하면 모조리 잡아들여 태형을 안겼다. 신작로 부역이나 철도보수를 위해 내려진 동원령에 응하지 않으면 형판에 붙들어 매고 헝겊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엉덩이에 매질을 했다. 반항하면 물에 고춧가루를 타서 코에 붓거나 비행기 태우기 등의 고문을 자행하기도 했다. 일정한 직업이나 거주지가 없이 떠도는 사람도 잡아들였으며 밤 11시가 넘어서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는 사람도 즉결처분을 받았다. 술을 먹고 주정하는 사람, 길거리에서 싸움질을 하는 사람도 예외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불온하다고 여기는 사람을 갑호와 을호로 구분하여 감시의 눈을 떼지 않았다. 만일 무슨 사건이 생기거나 조그마한 소요라도 일어나면 그들을 무작정 체포하여 구금하거나 문초를 가하고 구류에 처했다. 

 

그리하여 조선인들은 경찰서 또는 헌병대를 그야말로 포도청보다 더 무서운 지옥으로, 형벌 담당자를 염라대왕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검정 옷을 입은 순사나 누런 옷을 입은 헌병이 마을 주변에 얼쩡거리기라도 하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뚝 그쳤다. 조선의 모든 지역이 철창 없는 감옥과도 같았다.

 

이렇게 우리 민족이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쉽게 죽을 수 없는 비참한 운명에 빠져 신음하고 있는 동안 김좌진은 반일독립운동(反日獨立運動)의 최일선에 뛰어들기 위해 1918년 봄에 만주로 망명하게 된다. 그런데 그가 망명하기 전에 이러한 일화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김좌진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3년 임기를 마치고 나온 뒤 지금의 사직공원 터에서 30여명의 동지들을 모아 비밀회합을 가졌다. 당시 총독부가 조선인들에게 집회·결사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미루어보면 참으로 대담하고 위험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이 모임은 금새 일본 경찰에게 들통나 김좌진 일행은 순식간에 포위되고 말았다.

 

김좌진은 일본 경찰관 두명을 공격하여 재빠른 동작으로 권총(拳銃) 한 자루를 빼앗고 골목길로 도망쳐 들어갔다. 일본 경찰관들이 그의 뒤를 호루라기를 불어대며 쫓아갔는데, 한참을 쫓기던 김좌진은 어느 골목집의 높은 담을 뛰어넘어 그 집 방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그 곳은 궁궐에서 일하던 상궁(尙宮)의 집이었는데, 그 상궁의 딸이 김좌진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를 다락방에 숨겨주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김좌진은 그녀 덕분에 일본 경찰관들의 추격을 따돌릴 수 있었는데, 이 때 그를 도와준 상궁의 딸은 이름이 박계숙(朴桂淑), 혹은 김계월(金桂月)이라고 전한다. 그녀가 바로 2002년 SBS-TV 드라마《야인시대(野人時代)》의 주인공인 김두한(金斗漢)의 모친이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과연 사실일까? 김두한이 과연 알려진 대로 김좌진 장군의 친자가 맞는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후술하겠지만 이것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될 문제이기 때문에 사실 여부를 꼭 따져야 한다.

 

어쨌든, 김좌진은 백발노인으로 변장하고 두만강을 건너 사나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만주 벌판으로 들어갔다. 만주 지역은 일찌기 우리 민족이 건국했던 고대 국가 고조선(古朝鮮)·부여(夫餘)·고구려(高句麗)·발해(渤海) 등의 중심 무대였으며, 당시 많은 한국인 농민들이 이 일대에 정착해 살고 있었다. 일찌기 신민회(新民會) 출신의 애국지사인 이상룡(李相龍)·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 등은 이곳에서 새로운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려고 좋은 지리적 조건을 물색하다가 요령성(遼寧省)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를 지정해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고 교육계몽운동(敎育啓蒙運動)과 산업진흥운동(産業振興運動)에 힘써 무력(武力)을 길러 즐기찬 항일투쟁(抗日鬪爭)을 전개한다는 목적을 세웠다.

 

바로 이런 때 만주로 온 김좌진은 봉황성(鳳凰城)에 한동안 머물면서 자신의 진로를 모색하고 있었는데, 이 시기에 단장지통(斷腸之痛)이라는 시(詩)를 읊었다고 한다.

 

적막한 달밤에 칼 끝의 바람은 세찬데 (刀頭風動關山月)

칼 끝에 찬 서리가 고국 생각을 돋우는구나 (劒末霜寒故國心)

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웬 말인가? (三千槿城倭何事)

단장의 아픈 마음 쓸어버릴 길 없구나 (不斷腥塵一掃尋)

 

일본 경찰대와 헌병대의 움직임을 살피며 봉황성을 몰래 빠져나간 김좌진은 길림 지역으로 이동하여 서일(徐一)·계화(桂和) 등이 이끄는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에 가입하였다. 만주 각지에 5개 분단과 70여개 지단을 설치하고 있던 대한정의단은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위해 군정회(軍政會)를 따로 조직하여 병사 모집과 훈련에 주력하고 있었다.

 

그 해 10월에는 군정회 조직이 군정부(軍政府)로 확대, 개편됨에 따라 김좌진은 군사부장에 임명되어 병력을 보강하고 총기(銃器)·탄약(彈藥)을 확보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았다. 그러던 가운데 11월에는 김좌진을 비롯하여 조소앙(趙素昻)·김동삼(金東三)·이동녕(李東寧)·신채호(申采浩)·신규식(申圭植)·이상룡(李相龍)·이동휘(李東輝) 등 만주·노령 지역의 독립운동 지도자 39명이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에 서명하고 이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무오독립선언서의 내용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은 완전한 자주독립국가이며 민주주의적인 자주국임을 선포하고 타민족의 영향에 의해 움직이는 국체(國體)가 아니라 우리 민족만의 국체이며 우리 한토(韓土)는 완전한 한인(韓人)의 한토이니, 우리의 독립운동은 민족을 스스로 보호하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지, 결코 사원(私怨)의 감정으로 보복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의 병합 수단은 사기와 강박과 무력폭행 등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이니,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할지어다’, ‘부디 2천만 동포들은 국민된 본령이 독립인 것을 명심하여 육탄혈전(肉彈血戰)함으로써 독립을 완성해야 할 것이다’.....

 

무오독립선언서는 한국 독립운동사 최초의 독립선언으로 3·1운동의 촉진제가 될 기미독립선언서(己未獨立宣言書)의 전주곡이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