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화성에서 온 왕자님

wagi2004.06.01
조회1,452

 

12. 사랑 vs 섹스 

 

 

“아씨... 이 기집애는 정말. 아직도 유진이 포기 못 했나?

근데 왜 날 걸고 넘어져? 그렇게 보고 싶으면 지가 직접 전화하던가. 왜 나한테 난리냐고.”

 

입을 쭉 내밀고 툴툴대던 윤은 잠시 핸드폰을 노려보았다가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미진의 협박이 무서운 건 아니지만 내민 미끼는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김유진! 뭐하냐?”

 

벌컥 방문을 열어젖힌 순간 윤은 기겁을 하고 뒤로 물러섰다.

 

“꺅! 너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창문크기만한 모니터에서는 벌거벗은 여자와 남자가 한창 민망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꺼! 당장 끄라고!”

 

“왜 그러는 게냐?”

 

“몰라서 물어? 대체 뭘 보고 있는 거야?”

 

“참으로 기괴한 자세로구나.”

 

“보지 마! 이딴 건 왜 보는 거야?”

 

“사랑에 관해 공부하려면 알아야 한다고 했다.”

 

“누가 그딴 소릴 해?”

 

“온이 형이.”

 

“그 웬수를 그냥! 얼른 못 꺼?”

 

-지구의 인간들은 신경질적이군요.

 

윤은 벌렁거리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고 에이피로 추정되는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벌겋게 충혈된 눈을 화면에서 떼며 유진이 쓰읍 침을 닦았다.

 

'남자들이란 그저... 화성인이나 지구인이나 똑같구만.'

 

자기도 모르게 쯔쯔 혀를 차는 윤이었다.

 

-화면 종료합니다.

 

윤을 괴롭히던 영상이 사라졌다. 그제서야 진정이 된 윤은 유진을 노려보았다.

 

“저딴 거 보지 마. 알았어?”

 

“하지만 사랑과 관련된 자료라고 온이 형이 준 거다.”

 

“아휴, 네가 알아야 할 건 사랑이야. 저런 거랑은 다르다고.”

 

“그럼 이건 뭐라고 하는 거냐?”

 

“이건 육체적인 사랑, 즉 세, 세, 섹스라고.”

 

새빨개지는 얼굴로 간신히 말하는 윤의 등줄기로 진땀이 흘러내렸다.

 

“섹스?”

 

“몸을 나눠서 마음을 확인하는 행위, 곧 마음이 통한 뒤에 서로를 받아들이는 거란 말야.

이런 저질 포르노하고 사랑은 다른 거야. 그러니까 네가 알 필요는 없어.”

 

“그 말은 곧 사랑을 하면 이런 행위를 한다는 뜻이냐?”

 

“그래, 그렇지만 그건 은밀하고 아름다운 거야.

이렇게 대놓고 말초적인 신경을 자극해서 쾌락을 주는 것과는 엄연히 달라.”

 

“그렇다면 왜 인간들은 이걸 보는 거냐?”

 

“그야 자극이 필요하니까... 겠지. 아마도.”

 

“자극이 왜 필요한 거냐?”

 

“인간에게는 성욕이라는 게 있어서 가끔 충동이 일기도 해.

그런 때를 위해서 만드는 거겠지.

하지만! 분명히 사랑하고는 달라. 그러니까 절대 다시는 보지 마.”

 

“필요하다면서 보지 말라는 건 또 뭐냐?”

 

“아무튼! 넌 상관없는 거니까 몰라도 된단 말야.”

 

“섹스와 사랑은 다른 거냐?”

 

“당연히 다르지.”

 

“뭐가 다르냐? 사랑을 하면 섹스도 한다면서?”

 

유진의 질문에 윤은 대답할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 땀만 뻘뻘 흘렸다.

난감한 순간에 윤을 구원해 준 것은 뜻밖에도 에이피였다.

 

-사랑과 섹스에 관해 자료를 찾았습니다.

 

“그래? 말해 보아라.”

 

-섹스는 동물의 종족번식 수단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단지 즐기기 위해서 섹스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이 경우에도 무의식적으로 종족번식을 원하는 근원적인 욕망이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가장 큰 요인이 바로 이성이라고 합니다.

사랑이란 단순한 종족번식을 위한 의사 감정이 아니라

인간의 특징이라는 이성이 개입된 초월적인 감정,

즉 단순한 짝짓기 행위를 뛰어넘는 보다 고차원적인 정신세계라는 것입니다.

 

“그래, 바로 그거야! 사랑이 없는 섹스를 하는 건 저차원적이라는 얘기지.”

 

-그 건에 관해서는 다른 학설도 있습니다만, 말씀드릴까요?

 

“됐어! 안 해도 돼!”

 

놀란 윤이 빽 소리를 지르자 에이피는 불쾌한 듯 회색으로 변했다.

 

“그, 그런데 에이피는 참 대단하네. 어느새 그런 걸 찾았대?”

 

‘아씨, 뭐냐. 기계 비위를 맞춰야 하는 신세라니.

그래도 무섭단 말야. 유진이놈이야 그렇다 치지만 말하는 기계는 역시 무서워.’

 

-에이피는 1초 만에 지구상의 모든 문헌을 검색할 수도 있습니다.

 

“정말? 그럼 나 나중에 리포트낼 때 에이피한테 물어봐도 돼?”

 

-사용허가가 있다면 도와 드릴 수도 있습니다.

 

“알았다. 나중에 필요한 일이 있으면 에이피한테 물어도 좋다.”

 

-그럼 이윤을 에이피 사용권자로 등록하겠습니다.

 

“야호! 리포트로부터의 해방이다! 유진이가 화성인이라서 좋은 점도 있구나.”

 

“무슨 일로 온 것이냐? 오늘은 쉰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럴려고 했는데 미진이가 나오래. 클럽데이 데려가 준다고.”

 

“클럽데이? 그게 뭐냐?”

 

“가 보면 알아.”

 

‘사실은 나도 안 가봐서 모른다고.

가고 싶다고 내가 그렇게 난리칠 땐 들은 척도 안 하더니

유진이놈을 끌어내기 위해 써먹다니. 미진이 그건 진짜 못 됐다니까.’


 

********************


 

나름대로 신경써서 입고나온 윤을 본 미진은 콧방귀를 날려 불편한 심기를 대신했다.

 

‘늘 후줄근하게 다니더니 오늘은 왜 저렇게 차려입고 나온 거야?

그래봤자 본판이 안 되잖아, 본판이. 흥, 옷이 아깝다.’

 

“유진아, 이런 데는 한번도 못 와봤지? 하긴... 윤이가 데리고 다닐 데야 뻔하지 뭐.”

 

“이렇게 시끄러운 곳을 들어가자는 얘기냐?”

 

“가면 재밌을 거야. 어서 들어가자.”

 

유진의 팔을 잡아끄는 미진과 눈싸움을 하면서

난생 처음 클럽이란 곳을 들어간 윤은 휘황한 불빛에 눈을 크게 떴다.

 

“우와... 사람 무지 많네.”

 

“여기서 대체 뭘 하자는 얘기냐?”

 

눈쌀을 찌푸리면서 유진이 물었지만 이미 윤과 미진은 안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늘 물 괜찮네.”

 

“물? 그러고보니 목마른데 한잔 다오.”

 

시끄러운 음악과 반짝이는 조명,

그리고 그 안에서 난리 부르스를 추는 사람들 때문에 유진은 그야말로 혼이 빠질 것 같았다.

 

“너무 시끄럽다. 나가면 안 되는 거냐?”

 

“일단 들어왔으니까 우리도 춤 좀 추고 가자.”

 

“춤?”

 

서로의 목소리가 안 들려서 셋은 빽빽 소리를 지르면서 의사소통을 해야 했다.

자리를 잡고 슬슬 몸을 푸는 미진을 보며

윤은 뻣뻣한 몸으로도 열심히 따라했지만

유진은 도무지 뭘 하자는 건지 몰라 멍청히 서 있기만 했다.

 

“머리는 왜 미친 사람처럼 흔드는 게냐?”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미진을 피해 유진이 윤의 뒤로 숨었다.

머리를 풀어헤진 미진은 윤이 보기에도 공포스러웠다.

 

“미, 미진아...”

 

같이 온 사람들의 존재까지 잊고 무아지경에서 흔드는 미진의 머리카락은 진정 무기 수준이었다.

윤과 유진은 미진의 머리카락을 피하느라 자연스럽게 같이 테크노를 추게 됐다.

 

“헉, 헉. 뭐야? 벌써 한시간이잖아? 독한 것.”

 

“이제 그만 나가면 안 되냐?”

 

지친 얼굴의 유진과 함께 밖으로 나온 윤은 털썩 가게 옆에 주저앉았다.

 

“에구... 너무 흔들었나. 허리가 다 아프네.”

 

“이런 데는 뭐하러 온 거냐? 그냥 밥이나 먹으러 가지.”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는 유진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윤과 유진은 나란히 앉아 콜라를 마셨다.

 

“저 사람들 뭐하는 거냐?”

 

“응? 어디?”

 

어두운 골목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유진이 물었다.

 

“어? 요즘은 안 판다고 하던데... 간이 크네, 저 인간.”

 

“그게 무슨 소리냐?”

 

“엑스터시 파는 건가봐. 클럽 근처에서 판다고는 들었지만 정말로 볼 줄은 몰랐어.”

 

“엑스터시? 그게 뭐냐?”

 

“유행하는 마약이래. 중독성이 없다고 그래서 유명했는데 아니라더라.”

 

“마약? 인간에게는 엔돌핀이라는 최상의 마약이 있는데 뭐하러 일부러 섭취한다는 거냐?”

 

“엔돌핀이 마약이었어?”

 

“인간의 몸에서 엔돌핀이 분비되는 경우는 육체적인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다.

육체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신경들을 진정시키고

신경전달 물질의 기능을 약화시켜 통증을 완화시킨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마약류와 비슷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체내 마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뇌내 마약물질은 강력한 진통력을 가지고 있으며

몸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내기 때문에 부정적인 피드백(feedback:반동)도 없다.”

 

“헉, 엔돌핀에 그렇게 깊은 뜻이?”

 

“왜 인간들은 내부에 그렇게 훌륭한 치유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외부의 것에 의존하는지 모르겠구나.”

 

“그렇게 들으니까 조금 부끄럽다.”

 

“그런데 마약팔면 돈은 좀 버는 것이냐?”

 

“됐네. 돈 벌기 전에 감옥부터 갈 걸.”

 

“참 지구인들은 여러 가지로 이상한 점이 많다.”

 

“마약을 팔고 사는 사람들은 아주 극소수야.

너무 그런 걸로 지구인 전체를 몰아붙이지는 말라고.”

 

“아니, 꼭 마약뿐만이 아니라... 사랑과 섹스도 그렇다.

화성에서는 사랑을 배우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데

정작 인간들은 사랑보다 섹스에 탐닉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더구나. 뭐, 보니 재미는 있더라만.”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으니까 모르겠지만...

그래도 인간이라면 사랑을 소중하게 생각할 거라고 믿어.

생명 자체가 부모님의 사랑으로 만들어지는 거니까.”

 

“사람과 사람이 만나 사랑을 하면 아이가 태어난다니... 믿기지 않는 일이다.”

 

“신비롭기도 하고.”

 

“......그렇구나.”

 

멀리 하늘을 올려다보는 유진의 얼굴은 어딘지 공허해 보였다.

윤은 처음 보는 유진의 표정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둘은 산발을 한 미진이 찾으러 나올 때까지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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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세진은 가계부를 쓰다가 왁 울음을 터트렸다.

 

“흑흑... 이달은 완전히 적자야... 아직 지원금이 오려면 열흘이나 남았는데...”

 

다시 한번 처음부터 계산해 봤지만 역시 결과는 같았다.

 

“유진님... 제발 빨리 사랑을 배우세요. 이러다가 우리 전기세도 못 내겠단 말입니다. 흑흑.”

 

세진은 그렇게 한참을 엎드려 울다가 벌떡 일어났다.

 

“아니지, 내가 지금 이러고 있어선 안 돼.

유진님의 연구가 잘 되도록 최선을 다 해 돕는 것이 나의 임무.

겨우 생활비 때문에 유진님을 방해해서야...”

 

세진은 주섬주섬 옷을 걸쳐 입었다.

 

“요 앞 튀김집에서 아르바이트 구한다던데... ”

 

문을 열고 나가려던 세진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방싯 웃었다.

 

“남는 건 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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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습니다. 죄송해요. (__)(--)(__)

 

이야기가 점점 진지해지니 저도 생각할 것이 많아지는군요.

 

좀 더 재미있게 풀어낼 수도 있는 이야기인데...

새삼 스스로 부족함을 느낍니다.

 

11편 리플에 인사말씀 미리 드렸습니다.

확인해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