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克日의 상징’ 白冶 金佐鎭 장군 5.新民府 ⑶

조의선인2009.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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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민부는 어떤 방식으로 활동하였는가?

 

신민부(新民府)는 정의부(正義府)·참의부(參議府)와 마찬가지로 이주한국인의 경제적 부흥과 실업장려, 교육사업 등의 민정활동과 조국의 광복을 쟁취하기 위한 군정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 3부의 활동은 많은 유사점을 갖지만 그 세부적인 운영방법은 약간의 차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세부적인 신민부의 민정과 군정활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신민부의 민정활동을 고찰해보자. 신민부는 중앙조직에 교육·선전·법무·실업·민사·외교 및 교통·연락·경리·군사 등 여러 부서가 있었다. 이들 가운데 군사 이외의 부서들은 민정활동을 담당한 부서들이었다. 이들은 각지의 담당업무를 가지고 그를 실천하며 상호 협조하여 신민부 관할내 한국인들의 생활을 이끌었다.

 

신민부의 실업장려를 살펴보면 재정의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의무금과 모연금으로 마련하되 신민부 관할민에게는 의무금만 징수하고 모연금은 징수하지 않는 결의안을 1925년 3월에 발표한 바 있다. 매호 일정한 금액의 의무금을 받았던 정의부와 달리 신민부는 논과 밭에 따라 차등을 두고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는 소유한 재산의 20분의 1을 받았다.

 

이 같은 방법으로 신민부의 중앙조직은 재원을 확보하여 이를 기반으로 토지를 구매하여 관할지역 한국인들이 공동으로 경작할 수 있도록 한 공농제(共農制)를 실시하였고, 산업 진흥을 위한 식산조합(殖産組合)을 만들어 운영하였다. 또 한국인 촌락에 소비조합을 만들어 공동으로 운영하게 함으로써 불필요한 낭비를 하지 않도록 하였으며, 분업인 농사 이외의 부업을 장려하여 생활의 안정을 꾀할 수 있도록 지도하였다.

 

신민부의 간부들은 이 같은 산업 장려활동을 더욱 효과적이고 조직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1926년 11월 민생회(民生會)를 조직하였다. 민생회는 이주한국인들의 생활을 총괄적으로 관여하며 개선시키기 위한 단체였다. 이 단체가 어느 정도 효율성을 발휘하여 활동했는지 자료의 한계상 밝혀내기는 어렵지만, 민생회의 존재는 신민부가 관힐지역내 한국인들의 경제적 생활 향상을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신민부의 민정활동 가운데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교육사업이다. 1927년 12월 25일 석두하자에서의 총회 이후 중앙조직의 간부들이 민정파와 군정파로 나누어지게 된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신민부를 이끈 인물들의 의지와 정열은 대단하였다. 때문에 간부들은 그들이 가진 이상을 교육을 통해 폭을 넓히고 추진하고자 하였다. 1925년 3월 창립총회 결의안에 신민부가 추진하고자 한 교육사업에 대한 기초적 실행방안이 나와 있다. 즉 신민부는 1백호 이상의 한국인 촌락에 1개의 소학교를 설립하고, 중등교육을 받아야 할 학생이 많은 지역에는 중학교를, 그리고 중등 이상이 교육을 받은 인적자원이 충분한 지역에는 사범학교를 설립하도록 하였다. 이들 학교는 모두 중앙조직에서 책임을 갖고 설립할 계획이었으며, 수업년한은 소학교는 6년, 중학교는 4년으로 정하였다. 이들 학교에서 사용할 교재는 교육 내용을 통일시키기 위하여 중앙에서 모두 편찬토록 하였다. 또 이들 학교에 대한 관리는 중앙조직에서 제정하여 흐트러짐이 없는 교육이 실시되도록 하였으며, 일반 성인 청장년의 교육을 위해 각 촌락에 노동강습소나 통속강습소를 설치하여 운영토록 하였다.

 

이 같이 실시된 신민부의 교육사업은 1925년 10월 이후부터는 보다 확대되었다. 즉 학교수를 더욱 늘리고자 1백호 이상의 촌락에 설치하던 소학교를 30호 이상의 촌락부터 설치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1927년 8월 1일에는 해림(海林)에서 북만한인교육대회(北滿韓人敎育大會)를 개최하고 조국 광복을 기필코 달성한다는 목표 아래 민족주의 교육을 보다 활발하게 전개하여 제2의 국민인 어린 학생들에게 독립혁명사상을 뿌리 깊게 주입시킨다는 교육 목표를 의결하였다. 

 

신민부 인사들의 교육에 대한 이러한 열성적 활동으로 관할지역인 주하(珠河)·목릉·밀산·요하(饒河)·돈화 등 15개 지역에는 약 50개의 신민부 관할 소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들 학교 중 밀산에 설립된 보신학교(報信學敎)의 교장 정해로(鄭海露)는 기독교 장로로서 교사인 전주호(全周鎬)·엄우영(嚴宇泳)·신명순(申明順)·이강훈(李康勳) 등과 더불어 신민부가 추구하는 혁명정신과 애국사상을 불어넣는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이 지역의 애국 청년들인 이용걸(李容傑)·오상세(吳祥世)·김수산(金秀山) 등과 함께 기사청년회(己巳靑年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친일한국인들을 처단하는 활동을 벌였다.

 

기사청년회의 회원들은 친일파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중국 경찰대의 탄압을 받는 등 어려운 일도 겪었다. 이 같은 난관을 청년회원들은 애국한국인들의 지원을 받으며 극복해 나갔으며, 현지 중국인들과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1929년 가을에는 한·중친목운동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보신학교 교원들의 활동상은 그들이 단지 2세들의 민족주의 교육에만 정열을 쏟은 것이 아니라 학교를 중심점으로 하여 독립운동을 실천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설립되어 운영된 각 지역의 민족학교에 신민부의 중앙조직에서는 수신·지리 및 역사 교과서를 순한글로 편찬해 배포하여 사용하도록 하였다. 일반 청장년의 교육을 위해 설립된 노동강습소와 통속강습소의 경우도 신민부가 지향한 교육적 성과를 달성할 수 있었다. 특히 노동강습소의 경우는 신민부 관할의 전 한국인 촌락에 설치되지는 못하였지만, 많은 지역에 설치되어 중앙조직의 교육부원이 교원으로 파견되었다. 이들 교육부원들은 관할 한국인들의 문맹퇴치와 반일의식 고취에 주력하였다.

 

교육사업과 함게 신민부는 이주한국인사회 구성원들에 대한 민족의식 고취와 중앙조직이 지향하고 있는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 기관지『신민보(新民報)』를 순간(旬刊)으로 발행하고, 선전문을 부정기적으로 발행하여 배포하였다.『신민보』는 1925년 4월 1일에 창간호가 발행되어 관할지역인 중동선 일대는 물론이고, 상해 민족운동계의 소식 및 독립운동에 대한 내용이 담긴 사회주의자들의 투고도 받아 게재하였다. 이로 볼 때 신민부는 이념상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명백하게 구별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단체는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사회주의 이념의 글이『신민보』에 게재됨으로 인해 이 기관지는 중국 측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즉 1926년 4월 일성(一星)이란 가명을 쓰고 있던 사회주의자 김봉환(金奉煥)과 강경애(姜敬愛)는 자신들이 가진 이념을 바탕으로 쓴 글을『신민보』에 게재하였다. 이에 대해 하얼빈의 일본영사관 측이 중동철도에 주둔하는 중국 호로군(護路軍)을 충동질하였다. 호로군 측은 1개 소대와 형사들을 풀어『신민보』발행지인 석두하자 흥륭촌(興隆村)을 습격하여 발행책임자인 선전부위원장 허성묵(許聖默)과 이광진(李光鎭)을 체포하였다. 피체된 이들 두 사람은 신의주 감옥으로 이송되었고, 이후『신민보』발행도 중지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신민부의 군사활동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재만독립군(在滿獨立軍)들이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상대로 무장투쟁(武裝鬪爭)을 벌이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를 수행할 독립군의 양성이었다. 이에 앞에서 거론한 바와 같이 신민부에서는 무장투쟁을 전개할 지휘관을 양성하고 독립군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목릉현(穆陵縣) 소추풍(小秋風)에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고 연 2회 속성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최초로 150명의 사관후보생이 선발되어 백종렬을 포함한 5명의 교관들에게 교육을 받았다. 이렇게 육성된 독립군 병력은 총 5백여명이었는데, 이들은 신민부 군사력의 근간이 되었다.

 

사관학교 출신의 이들 독립군과 함께 신민부는 군구제(軍區制)를 실시하여 독립군의 대오를 편성하였다. 즉 관할지역내에 거주하고 있는 만17세 이상 40세 미만 남성들을 대상으로 군적(軍籍)을 작성했다. 그리고 이들을 평소에는 농업에 종사하면서 훈련을 받도록 하고 유사시에는 정규군에 편입시켜 독립군 부대원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신민부 군구제는 크게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유는 북만주를 주목하고 있던 일본군의 중국 측을 이용한 공작 때문이었다. 일제는 중국 측에 압력을 가해 한국 독립군이 출현하면 즉시 공격토록 하였고, 그들 자신도 영사관 경찰대를 동원하여 공격해왔다. 이러한 상황이 연이어 전개되었으므로 생업에 종사하면서 독립운동을 해야 했던 신민부 군구제에 의해 편성된 독립군은 그들을 당해내기가 어려웠다.

 

신민부는 또한 군구제와 거의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으나 군사조직면에서 조금 더 충실하게 운영할 수 있는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였다. 독립군 장병들이 훈련을 받으며 농사도 지어 자급자족으로 군사력을 키워갈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는 1910년대 서간도의 백서농장(白西農庄)이나 그 밖의 많은 독립군 진영에서 실시했던 독립군 양성 방법이기도 하였다. 군구제에 의한 군적을 가진 남성들 이외 신민부 소속의 독립군은 성동사관학교 출신을 근간으로 한 약 530명이었다. 이들은 영안현의 산림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런데 이 같이 많은 인원을 한 곳에 모아 놓고 군사훈련을 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530명이 넘는 젊은 청년들을 입히고 먹이고 거주시켜야 했고, 훈련에 필요한 무기 구입도 병행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는 막대한 군자금이 없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방안은 반농반군(半農半軍)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둔전제 실시로 귀결되었다.

 

둔전제를 실시할 지역으로 처음 채택된 곳은 밀산(密山)이었다. 이곳은 1910년대부터 독립운동 근거지로 개발된 지역인데다 청산리전투 이후 독립군이 소련의 자유시로 이동할 때 일시적이긴 하지만 대부대가 주둔했던 일도 있었기에 이 제도를 실시하기에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민부 인사들은 1926년 5월 심판원장인 김돈과 그의 비서 겸 수행원으로 이강훈을 파견하여 최적지를 물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의 상황은 과거와 달라져 있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물밀듯이 들어 온 사회주의 사상을 흡수한 층과 원래부터 형성되어있던 민족주의계열, 그리고 일정한 그룹을 형성한 기독교계열의 인사들이 혼재하여 대립하고 있어 그들의 지원을 받아 둔전제를 효과적으로 실시할 적지를 찾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밀산에서 실시하고자 한 둔전제 계획은 포기하고 말았다.

 

다음으로 결정된 지역은 안도현(安圖縣)이었다. 백두산과 가까운 안도현은 산림이 울창하여 신민부뿐만 아니라 다른 독립군단들도 병사들을 주둔시키기에 가장 알맞은 지역으로 생각하는 곳이었다. 신민부는 1927년 5월 별동대원인 임강(林堈)·장치락(張致洛)·이강훈 등 10여명을 이곳에 파견하였다. 그런데 이곳은 동포들의 문제가 아니라 외부적 요인으로 둔전제를 실시할만한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험악한 산림지대에 살고 있는 이곳의 중국인들은 농사철에는 농업에 종사하였지만, 농한지가 되면 무리를 지어 마적행위를 자행하고 있었다. 대규모 독립군을 주둔시킨다면 이들 마적을 격퇴하며 둔전제를 시행할 수 있었으나 주변의 촌락에 거주하고 있는 동포들에게 미칠 후환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따라서 안도현의 경우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신민부의 독립군 양성계획은 이 같이 어려움을 겪으며 확실한 기반을 구축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신민부의 구상이 워낙 컸기 때문에 그를 실천하려 노력한 것이었고, 기간 병사들로 구성된 530명의 독립군 요원들은 자신들의 편제를 유지하며 꾸준히 무장투쟁을 실천해 나갔다. 신민부의 독립군은 관할지역내 친일 세력을 척결하고 유격대를 편성하여 만주와 국내에서 일제의 군사시설과 경찰분견소 등을 습격·파괴하는 무장활동을 수행하였다.

 

신민부가 성립되어 활동을 시작한 1925년 이후는 앞에서 거론했던 삼시협정(三矢協定)이 체결되어 독립군의 활동은 심각한 제약을 받았다. 즉 동년(同年) 6월 11일 조선총독부의 미쓰야[三矢宮松] 경무국장과 중국 봉천전성(奉天全省)의 우진(于珍) 경무국장 사이에 체결된 이 조약은 일제가 중국 측에 압력을 가하여 중국 군경으로 하여금 한국의 독립운동 관련자를 체포하여 일본 경찰에 넘기도록 한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그러자 친일한국인들은 한국 독립군을 탄압하는 중국 관헌과 마찬가지로 독립군의 소재지나 배일한인(排日韓人)을 지목해 일본 경찰대에 알려주고 상금을 받아가는 민족반역행위를 자행하였다. 이러한 상황이었으므로 신민부의 독립군은 이들을 척결하는 것을 우선적인 목표로 정할 수밖에 없었다.

 

친일한국인들은 보민회(保民會)·조선인회(朝鮮人會)·권농회(勸農會) 같은 명칭의 단체를 만들어 반민족행위를 자행하였는데 해림(海林)에는 배두산(裵斗山)이라는 자가 하얼빈 영사관의 비호를 받으며 조선인회를 이끌고 친일행위를 자행하며 신민부에 타격을 주었다. 이에 신민부에서는 배두산에게 신민부 관할지역 밖으로 퇴거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반항하며 더욱 노골적인 친일행위를 서슴지 않았고, 신민부에서는 어쩔 수 없이 별동대를 파견하여 그를 제거하게 하였다.

 

1927년 9월 26일에는 황일초(黃一樵)·최진만(崔晉萬)·채세윤(蔡世允)·이영조(李永祖)·박병찬(朴秉瓚) 등으로 구성된 신민부 의용군 유격대가 하얼빈 조선인회의 본부를 급습하여 친일파들을 척결하고 관련 문서를 압수하였다. 대원들은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본대로 귀가하려 하였지만, 그 시기 하얼빈이 워낙 일제의 세력이 강했던 지역이라 결국은 일본 경찰대의 추격을 받고 전원 피체되고 말았다. 피체된 대원 가운데 황일초는 여순감옥에서 사형을 받아 순국하였고, 나머지 대원들은 20년형·15년형 등을 받고 옥고를 치뤘다.

 

이에 앞서 군사부위원장 김좌진은 8월에 이중삼(李重三) 등 4명의 대원을 불러 특수공작대를 구성하고 국내로 파견하였다. 이들 공작대는 압록강을 건너 강계를 거쳐 평양까지 가는 제1노선, 백두산으로부터 함경도, 강원도, 경상도 등 3도의 산맥을 타고 전라도의 지리산까지 조사하는 제2노선, 두만강을 건너 경성을 거쳐서 북청까지 조사하는 제3노선 등으로 나뉘어 국내로 잠입하였다. 즉 김좌진 장군이 공작대원들에게 내린 임무는 이 같은 경로를 거치면서 그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일제의 군대나 경찰 병력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결코 순탄한 경로가 아니었지만, 북만주 산악지대에서 혹독한 훈련을 이겨낸 대원들이었기에 이 계획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대하였다.

 

김좌진 장군은 그들의 보고를 받으면서 그들이 모아 온 자료를 정리하여 자세한 작전 지도를 그려 대대적인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고자 하였다.

 

신민부는 국내와 상당히 떨어진 북만주를 무대로 무장투쟁을 전개한 중심단체였다. 항일무장투쟁은 현지 교민들로 하여금 강력한 투쟁의식과 독립정신을 일깨우는 요인이었다. 이러한 신민부가 탄생하고 활동하는 데에는 북로군정서의 지휘관으로서 청산리전투를 독립군의 승리로 이끌었던 김좌진 장군의 역할이 가장 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