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형사이야기 episode3 악연의 시[惡緣의 詩]3

전선인간2004.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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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선일님의 안타까운 죽음앞에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부디 다음 세상엔 님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좋은 나라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만나게 되시길 희망합니다. 같은 하늘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정말 죄송합니다.

 

 

  남형사 이야기 episode3 악연의 시[惡緣의 詩]3

 

 

“머라구? 켁 켁”


채연의 말에 남 형사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서둘러 뜨거운 커피를 단숨에 들이키기 시작했다.

뜨거운 커피 속의 박하사탕이 마치 뱉을 수 없는 가시처럼 목에 걸렸다.

그러나 정작 채연은  일상생활 속의 이야기라도 하듯이 다시 한번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저 암에 걸렸다구요. 유방암 2기래요.

3주 후에 수술이 잡혔구요.“


“오 맙소사. 그럼 설마? 가슴을........

음........

괜찮아?”


의학적인 지식이 부족한 이 40대 중반의 남 형사에게 유방암이란 그 진행 시기에

상관없이 가슴을 도려내야만 하는 병으로만 생각되었고

그는 채연에게 가슴을 도려내야하냐는 질문을 차마 할 수 없어서

10년 전의 그때처럼 괜찮아 라는 말을 꺼낼 뿐이었다.


“전 괜찮아요. 정밀 검사결과에 따라서 어쩌면 가슴을 완전 절개하지 않고도

수술이 가능할지도 모르고요.

또 어차피 제 가슴은 그날 그때 이미 도려져 버렸는 걸요“


채연은 씁쓸한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남형사는 이제야 목에 걸린 사탕을

손으로 뱉어낸 뒤 침과 가래로 뒤범벅이 된 박하사탕을 손으로 닦아내기 시작했다.

‘상처들도 이렇게 다 닦아내어지면 좋으련만........‘



“남 형사님! 아니 아저씨!

저 부탁이 있어요“


“응?”


“그때 아저씨가 하신 말 기억하시죠? 언제든 어느 때든

제 사건을 해결 해주신다던........“


“응 그랬지 분명”


“아저씨! 저 사실 가슴하나 없어도 살 수 있어요. 아시잖아요 제 가슴은 이미

그때 다 죽어버렸다는 거, 그치만 제가 다시 살 수 있게, 제가 다시 여자임을

깨닫게 해준 우리 그이에게 저 무언가를 주고 싶어요.

저희 부부 지난 3년간 단 한번도 섹스를 한 적이 없거든요.

내 몸과 마음을 그에게 주고 싶은데 항상

지난 날의 상처가 풀리지 않는 족쇄가 되어서

그이에게 저를 열어주지를 않아요.


아저씨 저 완전한 여자일 때 아직은 가슴이 두 쪽 다 붙어있는 육체적으로

완전한 여자일 때 이렇게 모자라고 상처받은 저를

아껴주는 그이에게 저를 주고 싶어요.“


채연은 두 손을 꺼내어 남형사의 왼 손을 꾸욱 잡았다.


“그래......그렇지........그래”


“아저씨 저 이제 지난 날의 족쇄를 풀고 싶어요.

나를 어린 나를 범했던 그 짐승 같은 놈이 만들어놓은 족쇄에서 이제는 해방되고 싶어요

그 놈을 벌해주세요. 그래서 그 놈으로 하여금 제게

용서를 빌게 해주세요. 그래서 제가 제발 이 더러운 사슬에서 벗어나

한 여자로서의 기쁨을 단 한번만이라도 느낄 수 있게 아저씨가 제발 도와주세요.“


채연의 손끝이 지난 날의 아픔을 고스란히 기억이라도 하듯 세차게 떨려왔다.


“얼굴은 두려워서 보지 못했지만 그 놈은 약 175~180정도의 키에

오른쪽 어깨에 거미 문신이 있었어요. 아 참 그리고 이거

그날 제가 그의 상의에서 뜯었던 증거예요“


채연은 그제서야 10년 전의 그날 자신이 그 강간범의 상의에서 뜯었던

무언가를 남 형사에게 꺼내어 주었다.

그것은 이미 지난날의 상처만큼이나 낡아버린 교복의 학교 마크였다.


채연의 억양이 흥분으로 고조되고 그날에 겪은 일에 관한 여러 가지 증거들을

말할 때마다 남 형사는 어쩐지 더욱 곤란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무척이나 힘들었다.

이 너무나 상처받고 당연히 용서로서 아픔을 씻어야할 채연에게

무슨 말로 어떻게 현재의 상황을 설명해야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아저씨 벌해주실 거죠? 약속 지켜주실 수 있죠?”


머뭇거리는 남 형사를 보며 채연은 불안한 듯 확답을 받기 위해 재차 되물었고

그는 그때마다 입술을 한번씩 꾸욱 깨물을 뿐이었다.

목이 마른 듯 그는 커피 잔을 다시 들어 마시기 시작했지만 실상

이미 커피 잔은 비워있었고 그는 단지 커피를 마시는 시늉을 하며

어려운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저 채연아! 너 친고죄라고 아니?”


그가 어렵게 말을 꺼낸 것은 입안에서 박하사탕을 와사삭하고

깨물어버린 후였다.


“네 친고죄가 먼데요?”


“친고죄는 범죄의 피해자의 고소·고발이 있어야 공소할 수 있는 범죄를 말하는 것으로

혼인빙자 간음과 강간죄 등이 여기에 속해.

친고죄를 두는 이유는 피해자나 피해자 가족의 의사와

명예를 존중해야할 경우가 있기 때문이지

즉 강간당한 사람의 고소가 있어야만 그 강간범을 벌할 수 있는 거야.

그런데 넌 그때 고소나 고발을 하지 않았었지“


“네 그럼 지금 제가 고소하면 되는 거죠. 어떻게 고소하면 되죠?”


“그런데 채연아!

강간의 공소시효는 미안하지만 정말 미안하지만 7년 뿐이야.

즉 강간당한 자가 7년 이내에 고소나 고발을 하지 않으면 그 후엔 그 어떤

법으로도 강간한 자를 벌할 수 가 없어.

지금 채연이의 경우는 ......... 그를 벌할 수가 없구나.

정말 미안하다.“


남형사는 테이블의 맞은 편에 앉아있는 채연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고개를

푹 하고 수그려뜨렸다.


“그런 게....... 그런 게 무슨 법이예요. 그런게 어딨어요. 그럼

다른 사람의 가슴에 10년 이상 씩이나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고 그냥

자기는 7년만 도망 다니면 끝나는 건가요? 그따위 법이 어딨어요.


아저씨! 그때 아저씨가 약속했잖아요. 언제든 어느 때든 오라고

근데 왜 지금 와서 안 된다구 하시는 거예요.

아저씬 약속 지키는 사람이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제발

절 이 지긋지긋한 악몽 속에서 구해 달라구요 제발요“


“미안하다. 정말........ 정말 미안하다.”


남형사는 어린 소녀에게 한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자신이 지킬 수 없도록

만들어놓은 법이 부끄러워 더욱 가슴 속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그래요 그렇군요. 결국 상처는 혼자만이 간직해야하는 것이고

약속은 지금 내리는 비처럼 내리고 나면 잊혀지는 것이네요.

아무도 나를 구원해줄 수 없군요. 이 지긋지긋한 족쇄를요.“


채연은 민원상담실의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비속을 뛰쳐나가는 그녀를 보며 남 형사는 그녀가 우산을 가져가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서둘러 그녀를 쫒아나갔다.


“채연아! 우산!”


그러나 채연은 그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계속해서 빗속을 뛰쳐 나갔고 남형사는 상담실의 콘크리트 벽 앞에서

서럽도록 내리고 있는 굵은 빗방울의 차가운 온도를 통해

시리도록 아픈 채연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에잇 시발!”


“퍽”


그는 채연을 상처에서 구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분노와

앞으로 채연이 짊어지고 가야할 고통에 대한 연민의 치밀어 올라

세차게 민원상담실의 콘크리트 외벽을 주먹으로 치고 말았다.

너무나 세차게 벽을 때렸는지 남형사의 오른 주먹 살갗 위로 피가 스며 나왔다.

살 갗 위로 흐르는 피와 내리는 빗물이 그의 오른 손 등에

시큼한 고통과 차가움을 주었다.

그렇게 어린 소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그 소녀를 고통 속에서 구해주지 못하는 대한민국 한 중년 경찰의 가슴엔

피 빛 장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