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부 한식당 앞에서 맨땅을 발로 차며 현숙을 기다리는 수정은 반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을 자꾸 문지르고 있다. 잠시후에 현숙이 가방을 매고 나온다. -집에 먼저 가지, 왜 기다렸냐? -열쇠를 두고 와서... 수정이 베시시 웃으며 말하자 현숙이 한심하다는 듯 쳐다본다. -너는 무슨 애가 맨날 뭘 빠뜨리는 걸 취미로 하냐? 현숙이 앞서 걷자 수정이 혀를 낼름 거리며 다가와 현숙이 팔짱을 낀다. -진우 자식은 어떻게 했냐? -그냥 뭐..몇 대 패주구 말았어. -그 자식을 그냥 패주기만 했단 말야? 아주 작살을 내지 그랬어? 현숙의 말에 수정은 다시 우울해진다. 아무리 그래도 삼 년을 만났던 남자친군데 하루 아침에 헤어지고 보니 맘이 좋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 자식은 왜 하필 윤미하고 바람을 피웠대니, 그 년 생각하면 아주 치가 떨린다 내가....저 잘난 맛에 사는 년이지만, 또 그 잘난 꼴을 우찌 보냐고. -그러게. -너 이번에도 그냥 당하고만 있을 거냐? -그럼 뭐 어떡해....이미 바람은 피운 거구, 그걸로 끝났는데. -어이구, 속 터져...너는 왜 이렇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냐? 너하구 살다가 나까지 팔자 드러워지는 것 같애 이 기집애야. 현숙은 수정을 볼 때마다 답답하다. 하물며 수정의 속은 오죽하랴. 그때 수정의 휴대폰이 울린다. 현숙의 눈치를 보며 수정이 휴대폰을 꺼내 든다. 집에서 걸려 온 걸 보고 수정은 한숨부터 쉰다. -여보세요. 뚱한 얼굴로 전화를 받는다. -늬 아버지 낼 수술 잡았다, 올거지? 수정의 새어머니다. -네, 오후에 갈게요. -수술비는 준비 됐지? 새어머니의 말에 수정의 표정은 어둡다. 가늘게 한숨을 내쉰다. -네.... 힘없이 전화를 끊는 수정을 현숙이 혀를 차며 돌아본다. -졌다, 내가 니네집 식구들한테도 졌지만, 너한테도 졌다구. 현숙이 짜증난다는 듯 고개를 홱 돌리고 걸어간다. 수정이 땅꺼질 듯 한숨을 내쉬며 현숙의 뒤를 졸랑졸랑 따라간다. *********** 영업이 종료된 식당 안을 치우던 태희는 기운 없이 자리에 털썩 주저 앉는다. 하루종일 정신없이 치우고, 닦고, 셋팅하는데 지쳐 버린 태희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진다. 청소를 하던 민수가 태희를 보다 웃으며 다가와 선다. -먼저 가, 밖에서 형 친구가 기다리고 있어. -아버지한테 걸리는 날에 나 아주 인생 종쳐 임마. -머피의 법칙도 아니고, 회장님 오시는 날만 되면 꼭 그렇게 걸리더라. -아우, 씨이... 태희가 생각해도 정말 재수 없는 자신이다. 제 머리를 헝크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아버지의 부름으로 호텔로 왔을 때에는 정말 자신이 생각했던 근사한 호텔리어가 될 줄 알았다. 정작 현장에 오고 보니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직업이었다. 자신은 이벤트를 준비하고, 각종 행사를 담당하는 마케팅에서 일을 하고 싶었다. 태희가 그렇게 일에 대한 욕심을 가지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결국 일년 반개월만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일을 끝내고 태희는 서둘러 옷을 갈아 입고 나온다. -이제 가냐? 뒤를 돌아보니 총지배인이 웃으며 서 있다. 태희가 중지를 들어 보이며 엿 먹으라는 듯 돌아서 간다. 총지배인이 피식 웃는다. -너 기다리다 망부석 되는 줄 알았다 임마. 태희의 절친한 친구인 영석이다. -애들 기다린다, 어서 타. 영석이 차에 오른자 태희가 차문을 열고 올라 탄다. 시동을 걸고 차가 출발한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냐? 태희가 시큰둥하게 묻자 영석이 기분 좋게 웃으며 앞을 보고 말한다. -준호 자식 들어왔다. -뭐? -어제 들어왔다고 그러더라, 그 자식 이태리에 있는 동안 버터 엄청 먹었는지 아주 느끼해졌다니까. 영석의 말에 태희는 별로 반갑지 않은 눈치다. 그도 그럴 것이 잘나도 너무 잘나서 가끔 태희의 속을 긁어 놓곤 했다. 사실 준호가 대놓고 태희 속을 긁는 건 아니다. 괜히 준호만 보면 태희가 자괴감에 빠지는 것이다. 의욕상실, 콤플렉스, 라이벌의식...뭐 그딴 것일 수도 있다. 집안 좋고, 학벌 좋고, 인물까지 좋은 건 봐줄만 하다...거기다 똑똑하기 까지 한 것은 눈 뜨고 봐줄 수가 없다. 망할 놈의 신, 인간을 그런식으로 편애할 것 같으면, 왜 생식 기능을 줬냔 말이지....당신이 보고 싶은 인간들만 만들어 놓고 살면 될 일을 말야. 당신 말야, 설마 죽어서 그런 놈들만 천국으로 보낼 건 아니지? 나 같은 놈 죽어서까지 지옥 불구덩이 로 빠지면 정말, 두 번 다시는 이 땅에 나 만들어 놓지 말란 말야.. -넌 하나도 반가운 눈치가 아니다? 너, 준호랑 제일 친했잖냐. -왜 왔대냐? -글쎄, 양키가 지겨웠나보지 뭐....토종 여자가 안 그리웠겠냐? 영석이 키득대며 농을 던지지만 태희의 표정은 언잖다. *********** 늦은 시간 진우의 전화를 받고 집 근처 포장마차로 온 수정은 츄리닝 차림이다. 막 소주 한 병을 비운 진우는 얼굴이 벌겋다. 수정이 진우 앞에 앉으며 한심한 눈으로 진우를 본다. -니네 동네엔 포장마차가 없니, 왜 술을 여기까지 와서 마시니? 진우가 시큰둥하게 보다 아주머니가 내려 놓고 간 잔에 술을 따라 준다. 수정이 삐죽 거리며 진우를 흘겨보다 잔을 비운다. 파르르 몸을 떤다. 역시 소주는 쓰다. 식어 빠진 닭발을 쳐다보다 수정은 젓가락으로 집어 먹는다. -수정아.... -너, 그렇게 내 이름 부르지 마...그런다구 내가 이번 일 용서할 거 같니? -그래...용서하지마. 진우가 취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잔에 술을 따른다. 그리곤 길게 한숨을 내쉰다. 그런 진우를 짜증난 듯 수정이 본다. -너 그러는 거 이제 안 통해. 수정이 흘기다 잔을 또 비운다. 캬 소리가 절로 나온다. 진우가 풀린 눈으로 수정을 본다. -너 오늘 삼년동안 사귄 남자랑 헤어진 여자 안 같어. -그럼, 내가 울고불고 통곡이라도 해야 한단 말야? 그래....너랑 나 딱 삼년 됐어, 그 배신감 말로 다 못해...근데, 청승 떨면서 당장 죽을 것처럼 그러긴 싫어, 왜냐구? 그것두 억울해....사실대로 말해두 돼? -지금까지 그럼 니가 나한테 거짓말 했냐, 해....원래 너 디게 솔직하잖냐. 한숨을 내쉬며 진우가 제 잔을 비우며 건성으로 말한다. -너한테 고마워해야 할 것 같어....그 드러운 정 때문에 너만 봤는데 이참에 나, 맘 바꿨어. 사실, 너나 나 돈이 있냐, 배우길 많이 했냐.. 그렇다구 뭐, 부모님이 물려 줄 재산이라두 있냐? -그래서? -너두 사실 윤미 걔한테 혹한거, 돈 때문이었잖아? 나보다 잘난 거라곤 돈이 좀 많다는 거 말구, 걔가 볼 게 뭐 있냐? -웃기네...너 얼굴도 윤미한테 딸려, 몸매는 또 어떻구. 진우가 생각없이 툭 내뱉자 수정의 눈꼬리가 올라간다. 진우가 제 잔에 술을 따르고 수정의 잔에 술을 따르려다 수정의 표정을 보고 그제서야 실언을 했다는 걸 알아차린다. -아...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이쁜 건 윤미고 넌, 귀엽단 말이지. -내가 널 삼년 만났다. 미친 년...내가 미쳤지. 수정이 꼴아보다 잔을 비운다. -나, 이런 닭발에, 이런 포장마차에....맨날 싸구려 음식 먹구, 싸구려 옷 입구, 싸구려 화장품 바르면서 평생 살고 싶지 않어...나두, 욕심이 있단 말야. 너랑 나 그동안 별의 별 청승 다 떨고 살았어, 이제부터 나.....돈 많은 놈 찾아갈거야. 수정의 말에 진우가 비실비실 웃다가 결국은 큰 소리로 웃어댄다. -야...야, 황보수정....너, 무슨 배짱으로 그런 놈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하냐? 걔네들은 눈이 없냐, 정신이 나갔냐....너, 나정도 되니까 그동안 봐줬지, 재벌들이 너 쳐다나 본데? 모르지, 돈 많은 홀애비는 젊다는 이유로 또 널 좋아하게 될런지, 야..너, 너무 웃긴다. 진우의 말에 수정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야, 성진우. 너 그래서 윤미하구 바람 피웠니? 지금 니가 내 다리 붙잡고 싹싹 빌어도 시원찮을 판국에 뭐라구?....그래, 평생 윤미 머슴이나 하면서 살어, 이 나쁜 놈아. 수정이 홱 돌아서 가려다 다시 돌아본다. -너, 윤미가 싫증을 얼마나 잘내는지 알지? 넌 이미 싫증 난 애야. 걔 머슴은 뭐 아무나 하는 줄 아니? 이용당한 건 줄도 모르구, 그저 좋아서 침이나 흘렸지...너, 후회될거야, 반드시 내가 그렇게 만들고 말거야. 수정이 포장마차에서 나가자 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쫓아 나간다. -수정아... 진우가 수정의 팔을 잡자 수정이 거칠게 뿌리친다. -뭐, 또 긁을 일 남았어? -내가...잘못했어....한 번만 나 용서해주라...그 말하고 싶어서 왔는데 말이...헛나왔어, 너무 미안해서. -내가 쥐약 먹었니? 너랑 끝났어, 오늘부로 너랑 나 완전히 절교야. -수정아.. -백 날을 여기 서서 기다려봐, 내가 돌아오는지....바람 피울 땐 그정도 각오는 하고 피우는 거 아니니? 수정이 돌아서 가자 진우가 고개를 푹 꺽고 서 있다. 수정이 걸어가다 멈칫 서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황보수정, 뒤돌아 보지 말자, 너...돌아보는 순간 또 후회한다. 알았지? 수정이 제 맘을 다짐하고 눈을 부릅뜨고 걸어 올라간다. -난 이제 백마탄 왕자를 기다릴거야, 내 나이 스물 다섯...아직 그런 꿈을 꾸기엔 충분하다구. 평생을 이렇게 살다가기엔 내 인생이 너무 억울하잖아, 수정아 힘내자..넌, 반드시 그렇게 될거야. *********** 바를 하나 빌려 아주 파티 분위기를 냈다. 대여섯명의 사내와 세 명쯤 되는 여자들이 한데 섞여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한 쪽에선 두 남녀가 부둥켜 안고 춤을 추고 있다. 태희는 아까부터 시큰둥한 표정으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준호가 친구들과 얘길 나누다 태희를 보고는 씨익 웃으며 다가와 앉는다. -호텔 경영 수업 받는다며? 태희가 대답하지 않고 씩 보더니 다시 술을 마신다. 준호가 그런 태희의 어깨에 제 팔을 올리며 말한다. -십 년뒤쯤에 함께 일하지 않을래? 그동안 너도 나도 경영 수업 제대로 받아서 독립이란 걸 한 번 해보자구....부모님 빽 믿고 밑으로 들어가서 머슴처럼 사는 거 재미 없잖냐. 우리 힘으로 제대로 한 번 살아보는 것도 괜찮지 않냐? 잘난 척하는 것 같아 태희는 영 거슬린다.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만나서 반가웠다...다음에 또 보자. 태희의 행동에 준호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래, 다음에 또 보자. -강태희, 어딜 가, 이제 시작인데. 영석이 태희 앞에 서며 잡자 태희가 손을 들어 보이며 유유히 빠져 나간다. -담에 보자. -저 자식은 꼭 저렇게 튀드라. 영석이 태희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말하자 준호가 미소를 지으며 술을 마신다. 밖으로 나온 태희는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 앞까지 걸어 나온다. 그러다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는데 뭔가 손에 잡힌다. 꺼내 보면 수정이 준 명함이다. 게슴츠레 눈을 뜨고 명함을 본다. 그리곤 짜증난다는 듯 명함을 확 구겨서 던져 버린다. ************ 통장을 펼쳐 놓고 계산기를 두드려 보는 수정, 답답하기만 하다. 현숙이 씻고 들어오다 수정을 힐끔 보고는 화장대 앞에 앉는다. -보면 뭐 답이 나오냐? -어디 돈 구할 때 없을까? 수정이 현숙을 돌아본다. 스킨을 바르던 현숙이 수정을 보지 않고 딱 잘라 말한다. -나 돈 없다. 수정이 입을 삐죽거리며 다시 통장을 들여다 본다. -야, 니네 새엄마두 그렇다...왜 그걸 너한테 달라구 그러냐? 솔직히 말해서 지금까지 뼈빠지게 벌어서 갖다 바친 돈이 얼마냐? 그 돈 모았으면 너 벌써 24평짜리 아파트 전세는 얻었겠다....막말루다 자기가 델꼬 온 딸은 돈 한 푼 못벌게 하면서 왜 너만 잡냐구. 그 인간들 죄다 밧줄에 묶어서 한강에 집어 쳐 넣어야 하는데... 수정은 현숙의 말에 풀이 죽는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집에서 손을 벌린 게 얼마냔 말이다. 단 한 번도 싫은 내색하지 않고 꼬박 꼬박 돈을 붙여 준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평소에 고혈압이 있는데다 대장염까지 겹쳐서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새어머니와 열 살이나 많은 아버지는 곧 환갑이다. 적어도 아버지 곁에 새어머니라도 있어서 수정은 맘을 놓일 수 있었다. 힘 없고 건강까지 좋지 않은 판국에 곁에 남아 있는 게 어디냔 말인가. 허구헌날 눈에 가시처럼 구박을 받고 산 세월이 지겨워 막상 현숙의 집에 눌러 앉게 됐지만, 가족들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출근 안 할거야? 현숙이 일어나 옷을 갈아 입으며 툭 내뱉자 수정은 그제서야 시계를 본다. 그리곤 벌떡 일어나 옷을 갈아 입는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앞으론 제발 주지 마라, 어? 나도 그러고 싶다구...누군 좋아서 이러니, 하지만 어떡하니, 우리 아버지가 아직 저렇게 버젓이 살아 계시는데....피붙이라곤 나 하나 밖에 더 있니....수정은 궁시렁 대듯 혼자 중얼거리며 옷을 갈아 입는다. ********** 아침 식사하는 자리는 사뭇 엄숙하다. 아무 말 없이 뚱해서 밥 먹는 태희를 모친이 힐끔 본다. 태희 옆에 앉아 있는 형인 태경과 모친 옆에 앉아 있는 태경의 아내가 강회장의 표정을 힐끔 살핀다. 이건 도대체 찬물을 끼얹은 듯 밥을 먹어도 소화가 안 될성 싶다. -오늘부터 너, 차 압수야. 강회장이 드디어 말문을 열었지만 강회장의 말에 태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수저를 들고 본다. -아버지? -암말 말구 저 놈한테 차 내줬다가는 다들 나한테 죽을 줄 알어. 태희가 억울하다는 듯 한 표정으로 모친을 보는데 모친은 아무 말 없이 시선을 피한다. 형을 보고 다시 형수를 보지만 다들 모른 척 밥만 먹고 있다. -진짜 너무 하세요,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러세요? -넌 아직 멀었어 이놈아, 언제 철이 들런지..쯧 강회장이 수저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자 태경이 수저를 놓고 따라 일어나며 태희의 어깨를 두들겨 주며 나간다. -나 보지마, 그런다고 될 일 아냐. 태희가 모친을 보자 모친이 말하며 형수를 돌아보자 형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간다. -그러게 평소에 좀 잘하지, 왜 그렇게 아버지 눈 밖에 나서 그 고생을 해? 오늘부터라도 맘 잡고 열심히 해. -일년 넘도록 나, 사고 한 번 안치고 일했어,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다고 아버진 맨날 저러셔? -그 속을 내가 아니? 모친이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태희가 급하게 일어나 모친의 팔을 잡는다. -엄마, 나 좀 살려줘.. -나도 죽을 판이야, 늬 아버지 성질 몰라서 그래? -차 없이 어떻게 다니라구 그래? 이번엔 태희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나 귀 안먹었어, 늬 아버지 듣는다? 될 일을 가지고 사정해 이눔아. 아줌마, 남은 반찬 따로 담아놔요, 저번처럼 한데 섞어 놓지 말구. -네... 모친이 나가자 똥 마련 강아지처럼 태희가 졸랑졸랑 쫓아 나간다. -엄마.. -아, 글쎄 늬 엄마 힘없어...내가 이 집 부엌떼기지, 무슨 힘이 있다구 그래? 주말엔 아버지 집에 잘 안계시니까, 그때 가끔 몰고 나가. -나 회사 안 나가. 태희의 말에 모친이 태희의 등짝을 때리며 낮게 혼낸다. -제발 정신 좀 차려, 니가 한 두 살 먹은 어린애야? 스물 일곱이면 철 들 때도 됐는데 왜 그러니, 정말?...암말 말구 어서 출근 준비해. 태희가 완강하게 버티고 서 있자 모친이 등을 떠밀며 이층으로 올려 보낸다. -말씀 드려 볼테니까, 빨리 출근해. 태희가 화가 난 듯 쿵쿵 소리를 내며 계단을 밟고 올라가자 모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내쉰다. -어이, 들어와봐. 강회장의 목소리가 안방에서 들리자 모친은 안방쪽을 쏘아본다. -어이가 뭐야, 어이가...저 양반도 철 들려면 멀었다니까...어이그 내 팔자야. 투덜대며 안방쪽으로 걸어 간다.
신데렐라를 꿈꾸며-제2부-
제 2 부
한식당 앞에서 맨땅을 발로 차며 현숙을 기다리는 수정은 반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을 자꾸 문지르고 있다. 잠시후에 현숙이 가방을
매고 나온다.
-집에 먼저 가지, 왜 기다렸냐?
-열쇠를 두고 와서...
수정이 베시시 웃으며 말하자 현숙이 한심하다는 듯 쳐다본다.
-너는 무슨 애가 맨날 뭘 빠뜨리는 걸 취미로 하냐?
현숙이 앞서 걷자 수정이 혀를 낼름 거리며 다가와 현숙이 팔짱을 낀다.
-진우 자식은 어떻게 했냐?
-그냥 뭐..몇 대 패주구 말았어.
-그 자식을 그냥 패주기만 했단 말야? 아주 작살을 내지 그랬어?
현숙의 말에 수정은 다시 우울해진다. 아무리 그래도 삼 년을 만났던
남자친군데 하루 아침에 헤어지고 보니 맘이 좋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 자식은 왜 하필 윤미하고 바람을 피웠대니, 그 년 생각하면 아주
치가 떨린다 내가....저 잘난 맛에 사는 년이지만, 또 그 잘난 꼴을
우찌 보냐고.
-그러게.
-너 이번에도 그냥 당하고만 있을 거냐?
-그럼 뭐 어떡해....이미 바람은 피운 거구, 그걸로 끝났는데.
-어이구, 속 터져...너는 왜 이렇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냐? 너하구
살다가 나까지 팔자 드러워지는 것 같애 이 기집애야.
현숙은 수정을 볼 때마다 답답하다. 하물며 수정의 속은 오죽하랴.
그때 수정의 휴대폰이 울린다. 현숙의 눈치를 보며 수정이 휴대폰을
꺼내 든다. 집에서 걸려 온 걸 보고 수정은 한숨부터 쉰다.
-여보세요.
뚱한 얼굴로 전화를 받는다.
-늬 아버지 낼 수술 잡았다, 올거지?
수정의 새어머니다.
-네, 오후에 갈게요.
-수술비는 준비 됐지?
새어머니의 말에 수정의 표정은 어둡다. 가늘게 한숨을 내쉰다.
-네....
힘없이 전화를 끊는 수정을 현숙이 혀를 차며 돌아본다.
-졌다, 내가 니네집 식구들한테도 졌지만, 너한테도 졌다구.
현숙이 짜증난다는 듯 고개를 홱 돌리고 걸어간다. 수정이 땅꺼질 듯
한숨을 내쉬며 현숙의 뒤를 졸랑졸랑 따라간다.
***********
영업이 종료된 식당 안을 치우던 태희는 기운 없이 자리에 털썩 주저 앉는다.
하루종일 정신없이 치우고, 닦고, 셋팅하는데 지쳐 버린 태희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진다. 청소를 하던 민수가 태희를 보다 웃으며 다가와
선다.
-먼저 가, 밖에서 형 친구가 기다리고 있어.
-아버지한테 걸리는 날에 나 아주 인생 종쳐 임마.
-머피의 법칙도 아니고, 회장님 오시는 날만 되면 꼭 그렇게 걸리더라.
-아우, 씨이...
태희가 생각해도 정말 재수 없는 자신이다. 제 머리를 헝크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아버지의 부름으로 호텔로 왔을 때에는 정말 자신이 생각했던
근사한 호텔리어가 될 줄 알았다. 정작 현장에 오고 보니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직업이었다. 자신은 이벤트를 준비하고, 각종 행사를
담당하는 마케팅에서 일을 하고 싶었다. 태희가 그렇게 일에 대한 욕심을
가지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결국 일년 반개월만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일을 끝내고 태희는 서둘러 옷을 갈아 입고 나온다.
-이제 가냐?
뒤를 돌아보니 총지배인이 웃으며 서 있다. 태희가 중지를 들어 보이며
엿 먹으라는 듯 돌아서 간다. 총지배인이 피식 웃는다.
-너 기다리다 망부석 되는 줄 알았다 임마.
태희의 절친한 친구인 영석이다.
-애들 기다린다, 어서 타.
영석이 차에 오른자 태희가 차문을 열고 올라 탄다. 시동을 걸고 차가
출발한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냐?
태희가 시큰둥하게 묻자 영석이 기분 좋게 웃으며 앞을 보고 말한다.
-준호 자식 들어왔다.
-뭐?
-어제 들어왔다고 그러더라, 그 자식 이태리에 있는 동안 버터 엄청
먹었는지 아주 느끼해졌다니까.
영석의 말에 태희는 별로 반갑지 않은 눈치다. 그도 그럴 것이 잘나도
너무 잘나서 가끔 태희의 속을 긁어 놓곤 했다. 사실 준호가 대놓고
태희 속을 긁는 건 아니다. 괜히 준호만 보면 태희가 자괴감에 빠지는
것이다. 의욕상실, 콤플렉스, 라이벌의식...뭐 그딴 것일 수도 있다.
집안 좋고, 학벌 좋고, 인물까지 좋은 건 봐줄만 하다...거기다 똑똑하기
까지 한 것은 눈 뜨고 봐줄 수가 없다. 망할 놈의 신, 인간을 그런식으로
편애할 것 같으면, 왜 생식 기능을 줬냔 말이지....당신이 보고 싶은
인간들만 만들어 놓고 살면 될 일을 말야. 당신 말야, 설마 죽어서 그런
놈들만 천국으로 보낼 건 아니지? 나 같은 놈 죽어서까지 지옥 불구덩이
로 빠지면 정말, 두 번 다시는 이 땅에 나 만들어 놓지 말란 말야..
-넌 하나도 반가운 눈치가 아니다? 너, 준호랑 제일 친했잖냐.
-왜 왔대냐?
-글쎄, 양키가 지겨웠나보지 뭐....토종 여자가 안 그리웠겠냐?
영석이 키득대며 농을 던지지만 태희의 표정은 언잖다.
***********
늦은 시간 진우의 전화를 받고 집 근처 포장마차로 온 수정은 츄리닝
차림이다. 막 소주 한 병을 비운 진우는 얼굴이 벌겋다. 수정이
진우 앞에 앉으며 한심한 눈으로 진우를 본다.
-니네 동네엔 포장마차가 없니, 왜 술을 여기까지 와서 마시니?
진우가 시큰둥하게 보다 아주머니가 내려 놓고 간 잔에 술을 따라 준다.
수정이 삐죽 거리며 진우를 흘겨보다 잔을 비운다. 파르르 몸을 떤다.
역시 소주는 쓰다. 식어 빠진 닭발을 쳐다보다 수정은 젓가락으로 집어
먹는다.
-수정아....
-너, 그렇게 내 이름 부르지 마...그런다구 내가 이번 일 용서할 거 같니?
-그래...용서하지마.
진우가 취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잔에 술을 따른다. 그리곤 길게 한숨을
내쉰다. 그런 진우를 짜증난 듯 수정이 본다.
-너 그러는 거 이제 안 통해.
수정이 흘기다 잔을 또 비운다. 캬 소리가 절로 나온다. 진우가 풀린 눈으로
수정을 본다.
-너 오늘 삼년동안 사귄 남자랑 헤어진 여자 안 같어.
-그럼, 내가 울고불고 통곡이라도 해야 한단 말야? 그래....너랑 나 딱 삼년
됐어, 그 배신감 말로 다 못해...근데, 청승 떨면서 당장 죽을 것처럼
그러긴 싫어, 왜냐구? 그것두 억울해....사실대로 말해두 돼?
-지금까지 그럼 니가 나한테 거짓말 했냐, 해....원래 너 디게 솔직하잖냐.
한숨을 내쉬며 진우가 제 잔을 비우며 건성으로 말한다.
-너한테 고마워해야 할 것 같어....그 드러운 정 때문에 너만 봤는데
이참에 나, 맘 바꿨어. 사실, 너나 나 돈이 있냐, 배우길 많이 했냐..
그렇다구 뭐, 부모님이 물려 줄 재산이라두 있냐?
-그래서?
-너두 사실 윤미 걔한테 혹한거, 돈 때문이었잖아? 나보다 잘난 거라곤
돈이 좀 많다는 거 말구, 걔가 볼 게 뭐 있냐?
-웃기네...너 얼굴도 윤미한테 딸려, 몸매는 또 어떻구.
진우가 생각없이 툭 내뱉자 수정의 눈꼬리가 올라간다. 진우가 제 잔에
술을 따르고 수정의 잔에 술을 따르려다 수정의 표정을 보고 그제서야
실언을 했다는 걸 알아차린다.
-아...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이쁜 건 윤미고 넌, 귀엽단 말이지.
-내가 널 삼년 만났다. 미친 년...내가 미쳤지.
수정이 꼴아보다 잔을 비운다.
-나, 이런 닭발에, 이런 포장마차에....맨날 싸구려 음식 먹구, 싸구려
옷 입구, 싸구려 화장품 바르면서 평생 살고 싶지 않어...나두, 욕심이
있단 말야. 너랑 나 그동안 별의 별 청승 다 떨고 살았어, 이제부터
나.....돈 많은 놈 찾아갈거야.
수정의 말에 진우가 비실비실 웃다가 결국은 큰 소리로 웃어댄다.
-야...야, 황보수정....너, 무슨 배짱으로 그런 놈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하냐? 걔네들은 눈이 없냐, 정신이 나갔냐....너, 나정도 되니까
그동안 봐줬지, 재벌들이 너 쳐다나 본데? 모르지, 돈 많은 홀애비는
젊다는 이유로 또 널 좋아하게 될런지, 야..너, 너무 웃긴다.
진우의 말에 수정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야, 성진우. 너 그래서 윤미하구 바람 피웠니? 지금 니가 내 다리
붙잡고 싹싹 빌어도 시원찮을 판국에 뭐라구?....그래, 평생 윤미 머슴이나
하면서 살어, 이 나쁜 놈아.
수정이 홱 돌아서 가려다 다시 돌아본다.
-너, 윤미가 싫증을 얼마나 잘내는지 알지? 넌 이미 싫증 난 애야.
걔 머슴은 뭐 아무나 하는 줄 아니? 이용당한 건 줄도 모르구, 그저 좋아서
침이나 흘렸지...너, 후회될거야, 반드시 내가 그렇게 만들고 말거야.
수정이 포장마차에서 나가자 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쫓아 나간다.
-수정아...
진우가 수정의 팔을 잡자 수정이 거칠게 뿌리친다.
-뭐, 또 긁을 일 남았어?
-내가...잘못했어....한 번만 나 용서해주라...그 말하고 싶어서 왔는데
말이...헛나왔어, 너무 미안해서.
-내가 쥐약 먹었니? 너랑 끝났어, 오늘부로 너랑 나 완전히 절교야.
-수정아..
-백 날을 여기 서서 기다려봐, 내가 돌아오는지....바람 피울 땐 그정도
각오는 하고 피우는 거 아니니?
수정이 돌아서 가자 진우가 고개를 푹 꺽고 서 있다. 수정이 걸어가다
멈칫 서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황보수정, 뒤돌아 보지 말자, 너...돌아보는 순간 또 후회한다. 알았지?
수정이 제 맘을 다짐하고 눈을 부릅뜨고 걸어 올라간다.
-난 이제 백마탄 왕자를 기다릴거야, 내 나이 스물 다섯...아직 그런
꿈을 꾸기엔 충분하다구. 평생을 이렇게 살다가기엔 내 인생이 너무
억울하잖아, 수정아 힘내자..넌, 반드시 그렇게 될거야.
***********
바를 하나 빌려 아주 파티 분위기를 냈다. 대여섯명의 사내와 세 명쯤
되는 여자들이 한데 섞여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한 쪽에선 두 남녀가
부둥켜 안고 춤을 추고 있다. 태희는 아까부터 시큰둥한 표정으로 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준호가 친구들과 얘길 나누다 태희를 보고는 씨익
웃으며 다가와 앉는다.
-호텔 경영 수업 받는다며?
태희가 대답하지 않고 씩 보더니 다시 술을 마신다. 준호가 그런 태희의
어깨에 제 팔을 올리며 말한다.
-십 년뒤쯤에 함께 일하지 않을래? 그동안 너도 나도 경영 수업
제대로 받아서 독립이란 걸 한 번 해보자구....부모님 빽 믿고 밑으로
들어가서 머슴처럼 사는 거 재미 없잖냐. 우리 힘으로 제대로 한 번
살아보는 것도 괜찮지 않냐?
잘난 척하는 것 같아 태희는 영 거슬린다.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만나서 반가웠다...다음에 또 보자.
태희의 행동에 준호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래, 다음에 또 보자.
-강태희, 어딜 가, 이제 시작인데.
영석이 태희 앞에 서며 잡자 태희가 손을 들어 보이며 유유히 빠져 나간다.
-담에 보자.
-저 자식은 꼭 저렇게 튀드라.
영석이 태희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말하자 준호가 미소를 지으며 술을
마신다. 밖으로 나온 태희는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 앞까지 걸어 나온다.
그러다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는데 뭔가 손에 잡힌다. 꺼내 보면
수정이 준 명함이다. 게슴츠레 눈을 뜨고 명함을 본다. 그리곤
짜증난다는 듯 명함을 확 구겨서 던져 버린다.
************
통장을 펼쳐 놓고 계산기를 두드려 보는 수정, 답답하기만 하다.
현숙이 씻고 들어오다 수정을 힐끔 보고는 화장대 앞에 앉는다.
-보면 뭐 답이 나오냐?
-어디 돈 구할 때 없을까?
수정이 현숙을 돌아본다. 스킨을 바르던 현숙이 수정을 보지 않고
딱 잘라 말한다.
-나 돈 없다.
수정이 입을 삐죽거리며 다시 통장을 들여다 본다.
-야, 니네 새엄마두 그렇다...왜 그걸 너한테 달라구 그러냐? 솔직히
말해서 지금까지 뼈빠지게 벌어서 갖다 바친 돈이 얼마냐? 그 돈
모았으면 너 벌써 24평짜리 아파트 전세는 얻었겠다....막말루다
자기가 델꼬 온 딸은 돈 한 푼 못벌게 하면서 왜 너만 잡냐구.
그 인간들 죄다 밧줄에 묶어서 한강에 집어 쳐 넣어야 하는데...
수정은 현숙의 말에 풀이 죽는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집에서
손을 벌린 게 얼마냔 말이다. 단 한 번도 싫은 내색하지 않고 꼬박
꼬박 돈을 붙여 준 것은 아버지 때문이었다. 평소에 고혈압이 있는데다
대장염까지 겹쳐서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새어머니와 열 살이나 많은 아버지는 곧 환갑이다. 적어도 아버지
곁에 새어머니라도 있어서 수정은 맘을 놓일 수 있었다. 힘 없고
건강까지 좋지 않은 판국에 곁에 남아 있는 게 어디냔 말인가.
허구헌날 눈에 가시처럼 구박을 받고 산 세월이 지겨워 막상 현숙의
집에 눌러 앉게 됐지만, 가족들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출근 안 할거야?
현숙이 일어나 옷을 갈아 입으며 툭 내뱉자 수정은 그제서야 시계를
본다. 그리곤 벌떡 일어나 옷을 갈아 입는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앞으론 제발 주지 마라, 어?
나도 그러고 싶다구...누군 좋아서 이러니, 하지만 어떡하니, 우리
아버지가 아직 저렇게 버젓이 살아 계시는데....피붙이라곤 나 하나
밖에 더 있니....수정은 궁시렁 대듯 혼자 중얼거리며 옷을 갈아 입는다.
**********
아침 식사하는 자리는 사뭇 엄숙하다. 아무 말 없이 뚱해서 밥 먹는
태희를 모친이 힐끔 본다. 태희 옆에 앉아 있는 형인 태경과 모친
옆에 앉아 있는 태경의 아내가 강회장의 표정을 힐끔 살핀다.
이건 도대체 찬물을 끼얹은 듯 밥을 먹어도 소화가 안 될성 싶다.
-오늘부터 너, 차 압수야.
강회장이 드디어 말문을 열었지만 강회장의 말에 태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수저를 들고 본다.
-아버지?
-암말 말구 저 놈한테 차 내줬다가는 다들 나한테 죽을 줄 알어.
태희가 억울하다는 듯 한 표정으로 모친을 보는데 모친은 아무 말
없이 시선을 피한다. 형을 보고 다시 형수를 보지만 다들 모른 척
밥만 먹고 있다.
-진짜 너무 하세요,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러세요?
-넌 아직 멀었어 이놈아, 언제 철이 들런지..쯧
강회장이 수저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자 태경이 수저를 놓고
따라 일어나며 태희의 어깨를 두들겨 주며 나간다.
-나 보지마, 그런다고 될 일 아냐.
태희가 모친을 보자 모친이 말하며 형수를 돌아보자 형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간다.
-그러게 평소에 좀 잘하지, 왜 그렇게 아버지 눈 밖에 나서 그 고생을
해? 오늘부터라도 맘 잡고 열심히 해.
-일년 넘도록 나, 사고 한 번 안치고 일했어,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다고
아버진 맨날 저러셔?
-그 속을 내가 아니?
모친이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태희가 급하게 일어나 모친의 팔을
잡는다.
-엄마, 나 좀 살려줘..
-나도 죽을 판이야, 늬 아버지 성질 몰라서 그래?
-차 없이 어떻게 다니라구 그래?
이번엔 태희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나 귀 안먹었어, 늬 아버지 듣는다? 될 일을 가지고 사정해 이눔아.
아줌마, 남은 반찬 따로 담아놔요, 저번처럼 한데 섞어 놓지 말구.
-네...
모친이 나가자 똥 마련 강아지처럼 태희가 졸랑졸랑 쫓아 나간다.
-엄마..
-아, 글쎄 늬 엄마 힘없어...내가 이 집 부엌떼기지, 무슨 힘이 있다구
그래? 주말엔 아버지 집에 잘 안계시니까, 그때 가끔 몰고 나가.
-나 회사 안 나가.
태희의 말에 모친이 태희의 등짝을 때리며 낮게 혼낸다.
-제발 정신 좀 차려, 니가 한 두 살 먹은 어린애야? 스물 일곱이면
철 들 때도 됐는데 왜 그러니, 정말?...암말 말구 어서 출근 준비해.
태희가 완강하게 버티고 서 있자 모친이 등을 떠밀며 이층으로 올려
보낸다.
-말씀 드려 볼테니까, 빨리 출근해.
태희가 화가 난 듯 쿵쿵 소리를 내며 계단을 밟고 올라가자 모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내쉰다.
-어이, 들어와봐.
강회장의 목소리가 안방에서 들리자 모친은 안방쪽을 쏘아본다.
-어이가 뭐야, 어이가...저 양반도 철 들려면 멀었다니까...어이그 내 팔자야.
투덜대며 안방쪽으로 걸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