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생산과잉으로 값이 폭락,천덕꾸러기로 전락했던 전남 고흥 유자가 수출까지 하는 효자 농산물로 명성을 되찾고 있다.
1960∼1970년대 제주도의 ‘감귤나무 한그루면 자식 대학 보낸다’는 말처럼 1980년대 후반 전남 고흥의 유자나무는 똑같은 말이 나올 정도의 고소득 작목이었다. 당시 산지 유자값만 ㎏당 6000원이 넘었다.
고흥군 특작계장 이춘성(53)씨는 “개당 1000원이 넘는 유자가 10∼15년생 유자나무 한 그루에서 500∼600개가 달렸다”며 “당시 국립대학 한 학기 등록금이 50만원가량이었으니 유자나무 두 그루면 1년 등록금은 됐던 셈”이라고 말했다.
이같이 유자가 각광을 받자,고흥을 비롯한 남해 바닷가 마을 주민들이 너도 나도 유자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전남과 경남의 해안가가 주산지인 유자의 전국 재배면적은 1985년 169㏊에서 1992년 15배인 2592㏊로 급격히 늘어났으며 1996년엔 30배인 5121㏊까지 증가했다. 고흥군도 1980년대 후반 360㏊에서 1997년 4배인 1436㏊까지 재배면적을 늘렸다.
재배면적 급증과 과잉생산으로 값이 폭락했다. 재배면적이 가장 많았던 1996년 유자값은 1980년대 후반의 10%에도 못미치는 ㎏당 500원까지 떨어졌다. 너도 나도 유자나무를 심었던 농민들은 빚을 졌고,유자나무를 뽑아내야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1993년 40억원을 투자해 유자 가공공장을 건립했던 고흥 두원농협도 적자 운영을 면치 못해 급기야 공장 폐쇄 위기를 맞기도 했다.
고흥지역 농협과 농민들 사이에 모두 같이 살아남기 위한 신사협정을 만들었다. 재배면적을 스스로 감축하기 시작했으며,발효 퇴비를 사용하고,농약은 절대 사용하지 않는 친환경농법으로 고품질의 유자 생산에 주력했다. 또 판로 확장 차원에서 해외시장 개척에도 적극 나섰다.
고흥 유자 ‘수출 효자상품’ 명성
한때 생산과잉으로 값이 폭락,천덕꾸러기로 전락했던 전남 고흥 유자가 수출까지 하는 효자 농산물로 명성을 되찾고 있다.
1960∼1970년대 제주도의 ‘감귤나무 한그루면 자식 대학 보낸다’는 말처럼 1980년대 후반 전남 고흥의 유자나무는 똑같은 말이 나올 정도의 고소득 작목이었다. 당시 산지 유자값만 ㎏당 6000원이 넘었다.
고흥군 특작계장 이춘성(53)씨는 “개당 1000원이 넘는 유자가 10∼15년생 유자나무 한 그루에서 500∼600개가 달렸다”며 “당시 국립대학 한 학기 등록금이 50만원가량이었으니 유자나무 두 그루면 1년 등록금은 됐던 셈”이라고 말했다.
이같이 유자가 각광을 받자,고흥을 비롯한 남해 바닷가 마을 주민들이 너도 나도 유자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전남과 경남의 해안가가 주산지인 유자의 전국 재배면적은 1985년 169㏊에서 1992년 15배인 2592㏊로 급격히 늘어났으며 1996년엔 30배인 5121㏊까지 증가했다. 고흥군도 1980년대 후반 360㏊에서 1997년 4배인 1436㏊까지 재배면적을 늘렸다.
재배면적 급증과 과잉생산으로 값이 폭락했다. 재배면적이 가장 많았던 1996년 유자값은 1980년대 후반의 10%에도 못미치는 ㎏당 500원까지 떨어졌다. 너도 나도 유자나무를 심었던 농민들은 빚을 졌고,유자나무를 뽑아내야 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1993년 40억원을 투자해 유자 가공공장을 건립했던 고흥 두원농협도 적자 운영을 면치 못해 급기야 공장 폐쇄 위기를 맞기도 했다.
고흥지역 농협과 농민들 사이에 모두 같이 살아남기 위한 신사협정을 만들었다. 재배면적을 스스로 감축하기 시작했으며,발효 퇴비를 사용하고,농약은 절대 사용하지 않는 친환경농법으로 고품질의 유자 생산에 주력했다. 또 판로 확장 차원에서 해외시장 개척에도 적극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