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부 한참이 지나서야 수정이 울음을 그친다. 호텔 앞 화단에 있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는 태희와 수정. 수정이 태희에게 손을 내밀자 태희가 멀뚱히 수정을 본다. -손수건 좀 빌려줘. 수정이 얄미운 태희는 어이없게 보다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네주자 수정이 기다렸다는 듯 코를 팽 하고 푼다. -어? 태희가 황당해하며 수정을 보자 수정이 코를 닦고 건네준다. -뭐야, 드럽게? -씻으면 되지, 이깟 것 가지고 지금 유세하니? 수정이 구깃구깃하게 접어 태희의 주머니속에다 찔러 넣는다. 태희는 그런 수정이 기막히고, 정말 이게 무슨 재수없는 인연인가 싶은 얼굴로 본다. -근데, 너 여기서 일하니? -남이야? 태희가 톡 쏘듯 눈을 치켜 뜨며 내뱉는다. 수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태희를 내려다 본다. -접때 일 고마워서 밥이라도 사고 싶은데, 지금 내가 너랑 밥 먹을 기분이 아니다. 담에 살게.... 태희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호텔 입구에서 윤미와 진우가 팔짱을 끼고 나오다 둘을 본다. 윤미가 수정을 보고 피식 웃는다. 수정이 돌아서다 윤미와 진우를 본다. 태희가 수정에게 뭐라고 하려다 수정이 보고 서 있는 쪽을 돌아보는데 진우가 낯이 익다. -어?.... 태희가 그제서야 생각난다는 듯 수정과 진우를 번갈아 쳐다본다. 진우는 엉거주춤 수정을 못 보고 서 있고, 윤미가 수정에게 다가와 서서 태희를 훑어 보더니 야릇한 표정을 짓는다. -그새 남자 꼬셨니? 호텔 보이두 뭐 너랑 잘 어울리긴 해....다행이다, 진우한테 아직 미련 남았음 어쩌나 그랬지, 조심해서 잘 가. 윤미가 돌아서 가자 수정보다도 태희가 더 열 받는다. -뭐, 뭐? 보이? 호텔 앞에 세워진 차에 오르는 윤미와 진우, 차 안에서 진우가 힐끔 수정을 본다. 수정이 그런 진우를 노려보고 서 있다. 차가 사라지고 태희는 수정을 돌아본다. -야, 꿀먹은 벙어리냐? 나한테는 말도 잘하더니 왜 한 마디도 못하고 서 있어? 너 쟤한테 뭐 받아 먹은 거 있냐? 화가 난 태희는 씩씩대며 수정을 잡아 먹을 듯 노려본다. -어, 받아 먹은 거 있어....나, 간다. 수정이 돌아서 가자 태희가 순간 멍하게 서서 그런 수정을 바라보고 서 있다. -아이씨...이게 아닌데, 아...짜증나...난, 왜 쟤하고만 부딪히면 정신이 하나도 없냐? 아이씨....가만, 근데 내가 여기에 왜 이러고 있지? -강태희, 너 거기서 뭐해? 빨리 안 튀어? 총지배인이 입구에서 소리를 지르자 그제서야 태희가 헐레벌떡 뛰어간다. 뛰어가다 돌아보는 태희, 수정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뭐야, 그럼 아까 그 여자한테 남자친구 뺏긴 거야? 태희가 궁시렁 거리며 돌아서 뛰어 간다. *********** 제주도 신라호텔 사장실에 앉아 있는 강회장의 표정이 좋지 않다. 고개도 못 들고 앉아 있는 부사장과 총지배인, 그들 뒤에 서 있는 박전무. 탁자위에 장부들이 펼쳐져 있다. 강회장이 화를 삭히는 듯 앉아 부사장을 노려본다. -너, 일하기 싫어? 대뜸 부사장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는 강회장. 움찔 놀라 부사장이 고개를 쪼아린다. 총지배인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다. -당신, 올해 나이가 몇이야? 그 옷 벗을 때도 됐지? -회...회장님? -회장님 소리 집어 쳐, 내가 당신 회장이긴 해? 강회장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장사하랬더니, 죽 써서 개준다고.....뒷 구멍으로 새어나간 돈이 대체 얼마야? 당신, 얼마나 해먹었어? -회장님...정말 억울합니다. -억울해? 지금 장부를 보고도 억울하단 소리가 나와? 입고량하고 재고량이 터무니없이 맞질 않잖아....결국 니들이 빼돌렸거나, 모조리 쓰레기통으로 버려졌다는 건데, 어느 쪽이야 그럼, 어디 입이 있으면 말을 해봐. 강회장의 말에 부사장과 총지배인은 아무 말도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결코 빼돌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유통기간이 지나 쓰레기통으로 쳐박힌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허술하게 관리한 건 전자나 후자나 마찬가지였다. 강회장은 박전무를 노려 본다. 박전무가 말없이 고개를 숙인다. -당신이 책임질거야? 보고할 때마다 뭐라 그랬어, 이것들이 아주 짜고 말아먹으려 작정들 했구만. 강회장의 심기가 불편할 수 밖에 없다. 강회장은 부사장을 쏘아본다. -당신, 오늘부로 이 일에서 손 떼...그리고, 이번 참에 아주 물갈이를 해야겠어. 총지배인, 당신도 오늘로 해고야....다들 나가, 꼴도 보기 싫어. 엉거주춤 일어나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부사장이 박전무를 쳐다보자 박전무가 나가라며 눈치를 준다. 둘은 굽신굽신 거리며 밖으로 나간다. -너 정말? 다들 나가자 강회장이 박전무 정강이를 냅다 차준다. 박전무가 죽을 표정을 지으며 정강이를 움켜 쥔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이건 하나하나 내 입을 안댈수가 없잖아. -죄....죄송합니다 회장님. -죄송, 죄송...이게 지금 죄송하단 말로 될 일이야? 박전무는 쩔쩔매며 똑바로 선다. 강회장이 박전무를 한심하게 쳐다보고는 돌아선다. -차 대기 시키라 그래, 서울로 올라 갈거야. ********** -여기가 놀이터야? 실장이 날카롭게 쏘아 붙이자 수정을 기 죽은 듯 고개를 쳐박고 서 있다. -오늘부로 넌 해고야, 당장 나가. 실장이 매섭게 쏘아보다 뒤돌아서자 수정이 놀란 눈으로 실장의 팔을 잡는다. -실..실장님. -입이 있으면 어디 한 번 말해봐, 매니저로써 니가 한 게 도대체 뭐야? 걸핏하면 접시를 깨먹질 않나, 손님 세탁비로 나간 돈만 해도 얼만지 알아? 하루라도 실수 안하고 넘어가는 날 있어? 실장의 말에 수정을 할말을 잃고 고개를 숙인다. -이건 맨날 가불에다, 심심하면 지 볼일 보러 시도때도 없이 나가질 않나....왜, 더 얘기해봐? -죄송합니다..다음부턴... -다음이란 말은 이제 없어, 낼부터 다른 매니저 출근하기로 했으니까 당장 니 짐 싸서 나가....참, 오늘까지 월급 계산했더니 오히려 니가 뱉어내야 겠더라...그건 뭐, 정도 있고 하니까 없던 걸로 하지. 실장이 매몰차게 돌아서 가버리자 수정은 거의 울상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직원들은 죄다 실장 눈치 보느라 아무 말도 못하고, 수정은 눈 앞이 깜깜해진다. *********** 허리가 쑤시는지 태희는 엄살처럼 제 허리를 손으로 툭툭 치며 어슬렁 거린다. 민수가 태희를 멀찌기서 보고는 씨익 웃는다. 틈만 나면 개길 생각만 하는 태희가 그다지 밉지는 않다. 태희는 눈치를 살피며 밖으로 나가려다 총지배인에게 뒷덜미를 잡힌다. -어딜 또 가시게? -아이씨...좀 놓구 말해. -자꾸 반말할래? 총지배인이 놓아주자 태희가 돌아서 본다. -담배 한 대 피고 올게. -너 자꾸 이런식으로 나오면 재미없다. -아, 증말....진짜 형까지 왜 이래? -너 말부터 똑바로 안해? 형이 뭐야, 내가 니 형이야? 지배인이라 불러, 그리고 너 자꾸 반말하면 혼난다? -아이씨...느닷없이 나한테 왜 이러냐구 글쎄. 우리 아부지한테 뭐 받아 먹은 거 있어? 총지배인이 태희의 머리통에 꿀밤을 먹인다. -이놈아, 내가 회장님한테 월급 받지 너한테 월급 받냐? 상사가 까라면 까는 거야 임마...너, 군대도 안갔지? -아이씨....왜 머리는 쥐어 박구 그래? -아프기나 하냐? 장식용 쇠머리가 아플 리가 없잖냐....빨랑 자리로 안 돌아가? 셋까지 센다, 안돌아가면 바로 회장님께 전화 넣을테니까 그리 알아...하나, 둘... -알았어, 가...간다구....가면 될 거 아냐. 투덜대며 태희가 자리로 돌아가자 총지배인이 그런 태희를 보고 피식 웃으며 돌아선다. 자기 자리로 돌아간 태희는 계속해서 불만스런 표정으로 서 있고, 멀리서 민수는 그런 태희가 재밌는지 킥킥대며 웃고 있다. 총지배인이 안보이자 태희는 주위를 살피며 후다닥 뛰어 나간다. 화장실로 들어간 태희는 소변을 시원하게 보고 휘파람을 불며 손을 씻는다. 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을 보며 흐뭇하게 요리조리 살피다 얼굴까지 씻는다. 그리고는 무심결에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는데, 느낌이 이상하다. 그제서야 수정이 코를 풀었던 걸 기억한다. -아이씨...아, 드러.... 태희가 다시 물을 틀고 얼굴을 씻고 수건을 손가락 끝으로 들어 휴지통에 집어 던진다. -이 웬수 같은 기집애....아이씨....찝찝해. ************* 허탈한 듯 버스정류장까지 힘없이 걸어가는 수정이 갑자기 귀를 후빈다. -아이씨..누가 내 욕하나? 하늘을 올려다 본다. 날씨는 드럽게도 좋다. 겨우겨우 구한 일자린데 수정은 정말 눈앞이 깜깜해진다. 이번 직장은 그래도 오래 버틸 줄 알았다. 하루 아침에 백조가 되어버린 수정은 정말 살 맛 안난다. 버스 정류장 앞에 서서 수정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러다 버스가 설 때마다 자신이 탈 버스가 아닌 걸 확인하고 먼 발치를 본다. 내 인생의 버스는 항상 내가 내려야 할 목적지를 어긋나서 나도 모르는 낯선 곳에 나를 내려 놓고 떠나갔다. 그러면 나는 다시 다음 버스를 타기 위해서 또 버스 정류장 앞에 선다. 25년동안 나는 단 한 번도 버스를 제대로 탄 적이 없다. 언제나 나는 버스 정류장 앞에서 다시 버스를 기다려야 했다. 도대체 내가 타야 할 버스는 언제 오는 것일까?....엄마, 나 너무 힘들어. 그래두 내가 엄마 딸인데, 위에서 보고 계시면 나 좀 도와줘요...왜 맨날 엉뚱한 버스를 타게 만드는 거야? 수정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 오른다. 그러나 울지 않는다. 집으로 가는 버스가 그때 도착한다. 수정이 물끄러미 버스를 바라보고 서 있다.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구나....그래, 또 다시 시작하란 말이죠? 수정이 눈물을 훔치며 버스에 오른다. 빈 자리에 앉아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본다. 언제나 그 풍경들 속에 자신이 조금전까지만해도 서 있었는데, 낯설기만 하다. 그 풍경 속에는 처음부터 자신을 빼고 그려진 그림처럼 느껴진다. 그때 휴대폰이 울린다. 발신자는 새어머니다. -늬 아버지 깨어 나셨어....아주 건강하셔, 수술비는 어떻게...마련했어? -알아서 한다구 했잖아요....내일 갈게요. -너 지금 돈 가지고 나한테 생색 내는 거니? 수정의 말투에 새어머니가 대뜸 쏘아 붙인다. -그런 거 아니에요....내일 일찍 갈게요. -그리구 너, 한 번만 더 늬 언니한테 손찌검하면 가만 안둬...돈 좀 번다구 유세 떠는 것도 아니구... 새어머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정이 전화를 끊어버린다. 정말 염치라곤 눈꼽만치도 없는 인간들이다. 수정이 속상한 맘에 한숨을 내쉬고 차창 밖을 본다. -이건 정말 너무 하잖아.... ********** 서울로 올라 온 강회장은 박전무와 태경을 불러 놓고 앉아 있다. 태경은 강회장의 심기가 불편한 것을 알고 눈치만 보고 앉아 있다. -서울에 있는 총지배인이 제주도에 가는 조건으로 태희를 보내야겠다. 강회장의 말에 태경이 놀란 눈으로 쳐다 보고 박전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태희는 아직... -너나 똑바로 해, 물러 터진 건 형이나 동생이나 똑같애....다음주까지 멤버들 구성해서 제주도에 내려 보내, 그리고 박전무는 매주 월요일마다 제주도에 내려가서 직접 관리하도록 하고. -네 회장님. -태경이 넌, 서울을 맡아서 관리하도록 해. -아버지...아니, 회장님. 여기 일도 벅찬데.. -니가 하는 게 뭐 있어? 사무실에 앉아서 맨날 펜대나 굴려대지, 머리를 쓰기나 해, 힘을 쓰기나 해? 너도 할 말 없는 놈이야, 제주도 관리 잘하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어? 너도 정강이 까이고 싶냐? 강회장의 말에 태경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인다. -성질 같아선 니들 다 옷 벗기고 나 송장 치울 때까지 안 보고 싶어. 잘 난 놈들 하나 없고, 어디서 모자라는 것들만 자리 차고 앉아서 하는 꼬락서니라고는...쯧쯧...내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믿어 볼거야, 이번에 또 한 번 실망 시키는 날엔, 아주 내가 이놈의 호텔 불사지르고 말어. 내일 아침 9시까지 회의 소집해. 강회장이 한심한 표정으로 태경과 박전무를 보다 손짓으로 나가라 하면 둘이 일어나 목례를 하고 나간다. *********** 현숙이 방문을 열자 수정이 혼자 앉아 마른 멸치에다 소주를 마시고 있다. -혼자 술 판 벌였냐? 현숙이 들어와 가방을 내려 놓고 수정이 앞에 털썩 앉는다. -왔어? 수정이 제 잔에 술을 따라 마신다. -뭐야, 뭔데 혼자서 청승 떨고 앉았어? 현숙의 말에 수정이 길게 한숨을 내쉰다. -어쭈, 박자까지....그래가지고 땅이 꺼지겠냐? -나 오늘...짤렸다. -뭐.....뭐? 수정의 말에 현숙이 놀란 눈으로 본다. 수정이 잔에 다시 술을 따른다. -왜....왜 잘렸는데? -내가 뭐...그렇지....아침부터 윤미 그 기집애한테 자존심 다 버렸지, 거기다 회사까지 짤렸지.....뭐, 수술비는 그나마 건져서 다행이지만. 수정의 말에 현숙이 속상하고, 수정의 잔을 빼앗아 마신다. -그러게 왜 짤리냐? 어떻게 구한 직장인데....아이씨, 증말 구질구질 해서 못 살겠네. 현숙이 잔에 술을 따르자 수정이 물끄러미 본다. -그 잔...내껀데. -으이그... 수정의 말에 현숙이 한심한 듯 쏘아보고는 잔을 다시 비운다. -현숙아....니가 생각해두 나 정말 재수없는 애 같지? -어. 당연하다는 듯 현숙이 대답을 대뜸 하고는 멸치를 잘근잘근 씹어 먹는다. 수정이 한숨을 내쉰다. -백마탄 왕자두, 나 같이 재수없는 애한테는 절대로 올 일이 없겠지? -왕자가 약 먹었냐? 왕자가 타고 오는 백마를 끄는 머슴이면 몰라두 니 인생에 그럴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다. 현숙의 말에 수정이 입을 삐죽거리고는 잔을 빼앗아 술을 따른다. -아니...솔직히 너랑 나한테 어떤 미친놈이 마음을 주겠냐? 우리가 뭐, 돈이 많길 하냐, 얼굴이 이쁘길 하냐, 그렇다고 배운 게 많냐? 얼굴만 딱 봐도, 재수 없게 생겼잖냐....이놈의 인생은 도대체 언제나 풀리냐고 정말. 현숙이 말은 그렇게 해도 수정이 속상해하는 걸 잘 안다. 겉으론 항상 씩씩한 척 해도 수정이나 저 자신이나 안풀리는 게 매한가지고, 답답한 것 또한 마찬가지다. ****오늘 무지 바쁜 하룹니다. 일찍 올리려구 했는데 좀 늦었네요^^ 점심 맛있게들 드셨어요?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시구요, 너무 기둘리게 해서 지송합니다~
신데렐라를 꿈꾸며-제4부-
제 4 부
한참이 지나서야 수정이 울음을 그친다. 호텔 앞 화단에 있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는 태희와 수정. 수정이 태희에게 손을 내밀자 태희가
멀뚱히 수정을 본다.
-손수건 좀 빌려줘.
수정이 얄미운 태희는 어이없게 보다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네주자 수정이 기다렸다는 듯 코를 팽 하고 푼다.
-어?
태희가 황당해하며 수정을 보자 수정이 코를 닦고 건네준다.
-뭐야, 드럽게?
-씻으면 되지, 이깟 것 가지고 지금 유세하니?
수정이 구깃구깃하게 접어 태희의 주머니속에다 찔러 넣는다.
태희는 그런 수정이 기막히고, 정말 이게 무슨 재수없는 인연인가 싶은
얼굴로 본다.
-근데, 너 여기서 일하니?
-남이야?
태희가 톡 쏘듯 눈을 치켜 뜨며 내뱉는다. 수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태희를 내려다 본다.
-접때 일 고마워서 밥이라도 사고 싶은데, 지금 내가 너랑 밥 먹을 기분이
아니다. 담에 살게....
태희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호텔 입구에서 윤미와
진우가 팔짱을 끼고 나오다 둘을 본다. 윤미가 수정을 보고 피식 웃는다.
수정이 돌아서다 윤미와 진우를 본다. 태희가 수정에게 뭐라고 하려다
수정이 보고 서 있는 쪽을 돌아보는데 진우가 낯이 익다.
-어?....
태희가 그제서야 생각난다는 듯 수정과 진우를 번갈아 쳐다본다.
진우는 엉거주춤 수정을 못 보고 서 있고, 윤미가 수정에게 다가와 서서
태희를 훑어 보더니 야릇한 표정을 짓는다.
-그새 남자 꼬셨니? 호텔 보이두 뭐 너랑 잘 어울리긴 해....다행이다,
진우한테 아직 미련 남았음 어쩌나 그랬지, 조심해서 잘 가.
윤미가 돌아서 가자 수정보다도 태희가 더 열 받는다.
-뭐, 뭐? 보이?
호텔 앞에 세워진 차에 오르는 윤미와 진우, 차 안에서 진우가 힐끔 수정을
본다. 수정이 그런 진우를 노려보고 서 있다. 차가 사라지고 태희는 수정을
돌아본다.
-야, 꿀먹은 벙어리냐? 나한테는 말도 잘하더니 왜 한 마디도 못하고
서 있어? 너 쟤한테 뭐 받아 먹은 거 있냐?
화가 난 태희는 씩씩대며 수정을 잡아 먹을 듯 노려본다.
-어, 받아 먹은 거 있어....나, 간다.
수정이 돌아서 가자 태희가 순간 멍하게 서서 그런 수정을 바라보고 서 있다.
-아이씨...이게 아닌데, 아...짜증나...난, 왜 쟤하고만 부딪히면 정신이 하나도
없냐? 아이씨....가만, 근데 내가 여기에 왜 이러고 있지?
-강태희, 너 거기서 뭐해? 빨리 안 튀어?
총지배인이 입구에서 소리를 지르자 그제서야 태희가 헐레벌떡 뛰어간다.
뛰어가다 돌아보는 태희, 수정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뭐야, 그럼 아까 그 여자한테 남자친구 뺏긴 거야?
태희가 궁시렁 거리며 돌아서 뛰어 간다.
***********
제주도 신라호텔 사장실에 앉아 있는 강회장의 표정이 좋지 않다.
고개도 못 들고 앉아 있는 부사장과 총지배인, 그들 뒤에 서 있는 박전무.
탁자위에 장부들이 펼쳐져 있다. 강회장이 화를 삭히는 듯 앉아 부사장을
노려본다.
-너, 일하기 싫어?
대뜸 부사장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는 강회장. 움찔 놀라 부사장이 고개를
쪼아린다. 총지배인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다.
-당신, 올해 나이가 몇이야? 그 옷 벗을 때도 됐지?
-회...회장님?
-회장님 소리 집어 쳐, 내가 당신 회장이긴 해?
강회장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장사하랬더니, 죽 써서 개준다고.....뒷 구멍으로 새어나간 돈이 대체 얼마야?
당신, 얼마나 해먹었어?
-회장님...정말 억울합니다.
-억울해? 지금 장부를 보고도 억울하단 소리가 나와? 입고량하고 재고량이
터무니없이 맞질 않잖아....결국 니들이 빼돌렸거나, 모조리 쓰레기통으로
버려졌다는 건데, 어느 쪽이야 그럼, 어디 입이 있으면 말을 해봐.
강회장의 말에 부사장과 총지배인은 아무 말도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결코 빼돌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유통기간이 지나 쓰레기통으로 쳐박힌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허술하게 관리한 건 전자나 후자나 마찬가지였다.
강회장은 박전무를 노려 본다. 박전무가 말없이 고개를 숙인다.
-당신이 책임질거야? 보고할 때마다 뭐라 그랬어, 이것들이 아주 짜고
말아먹으려 작정들 했구만.
강회장의 심기가 불편할 수 밖에 없다. 강회장은 부사장을 쏘아본다.
-당신, 오늘부로 이 일에서 손 떼...그리고, 이번 참에 아주 물갈이를 해야겠어.
총지배인, 당신도 오늘로 해고야....다들 나가, 꼴도 보기 싫어.
엉거주춤 일어나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부사장이 박전무를 쳐다보자
박전무가 나가라며 눈치를 준다. 둘은 굽신굽신 거리며 밖으로 나간다.
-너 정말?
다들 나가자 강회장이 박전무 정강이를 냅다 차준다. 박전무가 죽을
표정을 지으며 정강이를 움켜 쥔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이건 하나하나 내 입을 안댈수가 없잖아.
-죄....죄송합니다 회장님.
-죄송, 죄송...이게 지금 죄송하단 말로 될 일이야?
박전무는 쩔쩔매며 똑바로 선다. 강회장이 박전무를 한심하게 쳐다보고는
돌아선다.
-차 대기 시키라 그래, 서울로 올라 갈거야.
**********
-여기가 놀이터야?
실장이 날카롭게 쏘아 붙이자 수정을 기 죽은 듯 고개를 쳐박고 서 있다.
-오늘부로 넌 해고야, 당장 나가.
실장이 매섭게 쏘아보다 뒤돌아서자 수정이 놀란 눈으로 실장의 팔을
잡는다.
-실..실장님.
-입이 있으면 어디 한 번 말해봐, 매니저로써 니가 한 게 도대체 뭐야?
걸핏하면 접시를 깨먹질 않나, 손님 세탁비로 나간 돈만 해도 얼만지
알아? 하루라도 실수 안하고 넘어가는 날 있어?
실장의 말에 수정을 할말을 잃고 고개를 숙인다.
-이건 맨날 가불에다, 심심하면 지 볼일 보러 시도때도 없이 나가질
않나....왜, 더 얘기해봐?
-죄송합니다..다음부턴...
-다음이란 말은 이제 없어, 낼부터 다른 매니저 출근하기로 했으니까
당장 니 짐 싸서 나가....참, 오늘까지 월급 계산했더니 오히려 니가
뱉어내야 겠더라...그건 뭐, 정도 있고 하니까 없던 걸로 하지.
실장이 매몰차게 돌아서 가버리자 수정은 거의 울상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직원들은 죄다 실장 눈치 보느라 아무 말도 못하고, 수정은 눈 앞이
깜깜해진다.
***********
허리가 쑤시는지 태희는 엄살처럼 제 허리를 손으로 툭툭 치며 어슬렁
거린다. 민수가 태희를 멀찌기서 보고는 씨익 웃는다. 틈만 나면
개길 생각만 하는 태희가 그다지 밉지는 않다. 태희는 눈치를 살피며
밖으로 나가려다 총지배인에게 뒷덜미를 잡힌다.
-어딜 또 가시게?
-아이씨...좀 놓구 말해.
-자꾸 반말할래?
총지배인이 놓아주자 태희가 돌아서 본다.
-담배 한 대 피고 올게.
-너 자꾸 이런식으로 나오면 재미없다.
-아, 증말....진짜 형까지 왜 이래?
-너 말부터 똑바로 안해? 형이 뭐야, 내가 니 형이야? 지배인이라 불러,
그리고 너 자꾸 반말하면 혼난다?
-아이씨...느닷없이 나한테 왜 이러냐구 글쎄. 우리 아부지한테 뭐 받아
먹은 거 있어?
총지배인이 태희의 머리통에 꿀밤을 먹인다.
-이놈아, 내가 회장님한테 월급 받지 너한테 월급 받냐? 상사가
까라면 까는 거야 임마...너, 군대도 안갔지?
-아이씨....왜 머리는 쥐어 박구 그래?
-아프기나 하냐? 장식용 쇠머리가 아플 리가 없잖냐....빨랑 자리로
안 돌아가? 셋까지 센다, 안돌아가면 바로 회장님께 전화 넣을테니까 그리
알아...하나, 둘...
-알았어, 가...간다구....가면 될 거 아냐.
투덜대며 태희가 자리로 돌아가자 총지배인이 그런 태희를 보고 피식
웃으며 돌아선다. 자기 자리로 돌아간 태희는 계속해서 불만스런 표정으로
서 있고, 멀리서 민수는 그런 태희가 재밌는지 킥킥대며 웃고 있다.
총지배인이 안보이자 태희는 주위를 살피며 후다닥 뛰어 나간다. 화장실로
들어간 태희는 소변을 시원하게 보고 휘파람을 불며 손을 씻는다.
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을 보며 흐뭇하게 요리조리 살피다 얼굴까지 씻는다.
그리고는 무심결에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는데, 느낌이 이상하다.
그제서야 수정이 코를 풀었던 걸 기억한다.
-아이씨...아, 드러....
태희가 다시 물을 틀고 얼굴을 씻고 수건을 손가락 끝으로 들어 휴지통에
집어 던진다.
-이 웬수 같은 기집애....아이씨....찝찝해.
*************
허탈한 듯 버스정류장까지 힘없이 걸어가는 수정이 갑자기 귀를 후빈다.
-아이씨..누가 내 욕하나?
하늘을 올려다 본다. 날씨는 드럽게도 좋다. 겨우겨우 구한 일자린데
수정은 정말 눈앞이 깜깜해진다. 이번 직장은 그래도 오래 버틸 줄 알았다.
하루 아침에 백조가 되어버린 수정은 정말 살 맛 안난다.
버스 정류장 앞에 서서 수정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러다 버스가 설 때마다
자신이 탈 버스가 아닌 걸 확인하고 먼 발치를 본다.
내 인생의 버스는 항상 내가 내려야 할 목적지를 어긋나서 나도 모르는
낯선 곳에 나를 내려 놓고 떠나갔다. 그러면 나는 다시 다음 버스를 타기
위해서 또 버스 정류장 앞에 선다. 25년동안 나는 단 한 번도 버스를
제대로 탄 적이 없다. 언제나 나는 버스 정류장 앞에서 다시 버스를 기다려야
했다. 도대체 내가 타야 할 버스는 언제 오는 것일까?....엄마, 나 너무 힘들어.
그래두 내가 엄마 딸인데, 위에서 보고 계시면 나 좀 도와줘요...왜 맨날
엉뚱한 버스를 타게 만드는 거야?
수정의 눈에 눈물이 가득 차 오른다. 그러나 울지 않는다. 집으로 가는
버스가 그때 도착한다. 수정이 물끄러미 버스를 바라보고 서 있다.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구나....그래, 또 다시 시작하란 말이죠?
수정이 눈물을 훔치며 버스에 오른다. 빈 자리에 앉아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본다. 언제나 그 풍경들 속에 자신이 조금전까지만해도
서 있었는데, 낯설기만 하다. 그 풍경 속에는 처음부터 자신을 빼고
그려진 그림처럼 느껴진다. 그때 휴대폰이 울린다. 발신자는 새어머니다.
-늬 아버지 깨어 나셨어....아주 건강하셔, 수술비는 어떻게...마련했어?
-알아서 한다구 했잖아요....내일 갈게요.
-너 지금 돈 가지고 나한테 생색 내는 거니?
수정의 말투에 새어머니가 대뜸 쏘아 붙인다.
-그런 거 아니에요....내일 일찍 갈게요.
-그리구 너, 한 번만 더 늬 언니한테 손찌검하면 가만 안둬...돈 좀
번다구 유세 떠는 것도 아니구...
새어머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정이 전화를 끊어버린다. 정말
염치라곤 눈꼽만치도 없는 인간들이다. 수정이 속상한 맘에 한숨을 내쉬고
차창 밖을 본다.
-이건 정말 너무 하잖아....
**********
서울로 올라 온 강회장은 박전무와 태경을 불러 놓고 앉아 있다.
태경은 강회장의 심기가 불편한 것을 알고 눈치만 보고 앉아 있다.
-서울에 있는 총지배인이 제주도에 가는 조건으로 태희를 보내야겠다.
강회장의 말에 태경이 놀란 눈으로 쳐다 보고 박전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태희는 아직...
-너나 똑바로 해, 물러 터진 건 형이나 동생이나 똑같애....다음주까지
멤버들 구성해서 제주도에 내려 보내, 그리고 박전무는 매주 월요일마다
제주도에 내려가서 직접 관리하도록 하고.
-네 회장님.
-태경이 넌, 서울을 맡아서 관리하도록 해.
-아버지...아니, 회장님. 여기 일도 벅찬데..
-니가 하는 게 뭐 있어? 사무실에 앉아서 맨날 펜대나 굴려대지,
머리를 쓰기나 해, 힘을 쓰기나 해? 너도 할 말 없는 놈이야, 제주도
관리 잘하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어? 너도 정강이 까이고 싶냐?
강회장의 말에 태경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인다.
-성질 같아선 니들 다 옷 벗기고 나 송장 치울 때까지 안 보고 싶어.
잘 난 놈들 하나 없고, 어디서 모자라는 것들만 자리 차고 앉아서 하는
꼬락서니라고는...쯧쯧...내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믿어 볼거야, 이번에
또 한 번 실망 시키는 날엔, 아주 내가 이놈의 호텔 불사지르고 말어.
내일 아침 9시까지 회의 소집해.
강회장이 한심한 표정으로 태경과 박전무를 보다 손짓으로 나가라 하면
둘이 일어나 목례를 하고 나간다.
***********
현숙이 방문을 열자 수정이 혼자 앉아 마른 멸치에다 소주를 마시고
있다.
-혼자 술 판 벌였냐?
현숙이 들어와 가방을 내려 놓고 수정이 앞에 털썩 앉는다.
-왔어?
수정이 제 잔에 술을 따라 마신다.
-뭐야, 뭔데 혼자서 청승 떨고 앉았어?
현숙의 말에 수정이 길게 한숨을 내쉰다.
-어쭈, 박자까지....그래가지고 땅이 꺼지겠냐?
-나 오늘...짤렸다.
-뭐.....뭐?
수정의 말에 현숙이 놀란 눈으로 본다. 수정이 잔에 다시 술을 따른다.
-왜....왜 잘렸는데?
-내가 뭐...그렇지....아침부터 윤미 그 기집애한테 자존심 다 버렸지,
거기다 회사까지 짤렸지.....뭐, 수술비는 그나마 건져서 다행이지만.
수정의 말에 현숙이 속상하고, 수정의 잔을 빼앗아 마신다.
-그러게 왜 짤리냐? 어떻게 구한 직장인데....아이씨, 증말 구질구질
해서 못 살겠네.
현숙이 잔에 술을 따르자 수정이 물끄러미 본다.
-그 잔...내껀데.
-으이그...
수정의 말에 현숙이 한심한 듯 쏘아보고는 잔을 다시 비운다.
-현숙아....니가 생각해두 나 정말 재수없는 애 같지?
-어.
당연하다는 듯 현숙이 대답을 대뜸 하고는 멸치를 잘근잘근 씹어 먹는다.
수정이 한숨을 내쉰다.
-백마탄 왕자두, 나 같이 재수없는 애한테는 절대로 올 일이 없겠지?
-왕자가 약 먹었냐? 왕자가 타고 오는 백마를 끄는 머슴이면 몰라두
니 인생에 그럴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다.
현숙의 말에 수정이 입을 삐죽거리고는 잔을 빼앗아 술을 따른다.
-아니...솔직히 너랑 나한테 어떤 미친놈이 마음을 주겠냐? 우리가 뭐,
돈이 많길 하냐, 얼굴이 이쁘길 하냐, 그렇다고 배운 게 많냐?
얼굴만 딱 봐도, 재수 없게 생겼잖냐....이놈의 인생은 도대체 언제나
풀리냐고 정말.
현숙이 말은 그렇게 해도 수정이 속상해하는 걸 잘 안다. 겉으론 항상
씩씩한 척 해도 수정이나 저 자신이나 안풀리는 게 매한가지고,
답답한 것 또한 마찬가지다.
****오늘 무지 바쁜 하룹니다.
일찍 올리려구 했는데 좀 늦었네요^^
점심 맛있게들 드셨어요?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시구요, 너무 기둘리게 해서
지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