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트] 안개꽃의 외출, 제7편

은하철도 2004.06.30
조회219

7.


남편이 날린 뺨따귀는 사랑인가, 질투인가,  아니면 지엄한 윤리의 채찍인가,

다음날 남편이 다시 중국으로 날아간 빈 터에서 돌이엄마는 또 하나의 의문을 품었다.  대모험이라는 시인을 통하여 발견된 자신을 앞에 두고 잘근잘근 씹어가는 자기성찰은 계속 이어졌다.  청바지에 가벼운 티셔츠를 입고 밖으로 나온 돌이엄마는 청량리역으로 향했다.  드라마에서만 보았던 모래시계의 촬영지인 정동진행 기차에 올랐다.  확실한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리이고 그 이외의 모든 관념은 허상이다.  서울을 빠져나가며 양수리 다리를 건너는 차창 밖으로 남한강은 파란색으로 빛났다. 


* 눈에 보이는 *


차창 밖으로 강물이 흐르고

산이 달리고 꽃이 스치네요.

손에 닿을 수 있는 꽃

꽃에 닿을 수 있는 나

그것만이 우리 사이겠지요.


통로 건너편에는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녀가 창밖으로 머리를 돌리고 웃고 떠들었다.  돌이엄마는 저런 시절이 없었다.  선을 본지 석 달 만에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떠났다.  결혼이 곧 사랑이고 첫날밤에 시트를 적신 새빨간 피가 순결인 줄 알았다.  시어머니의 눈총을 받으며 살림을 꾸려갔으며 아이를 낳자마자 곧바로 전쟁터 같은 일과에 시달렸다.  그 동안에 자신을 지탱시켜 주었던 최고의 가치는 현모양처였고 화목한 가정이었다.  남편이 실직했을 때에는 직접 밖으로 나돌아 돈도 벌어왔으며 눈치껏 투자한 부동산으로 목돈도 만졌다.  그러나 중년에 들어선 지금 수중에 남아있는 것은 무엇일까,  너저분하게 떠드는 중년의 위기도 아니고 적당한 바람도 아니다.  자기는 지금 확실한 외출을 준비하여 먼 길을 떠나려는지도 모른다.  목적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지금의 자리에서 떠나는 순간에 실종되었던 자신을 만날 수 있고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기차는 제천을 돌아 영월로 달렸다.  창밖에 어둠이 내리고 유리창에는 창백하게 비친 자신의 얼굴만 흔들리고 있었다.  돌이엄마는 피곤이 몰려왔다.  철컥철컥 거리는 쇠바퀴 소리가 가물가물 멀어져가며 머리를 창에 기댄 채 깊은 잠에 떨어졌다.  문득문득 잠에서 깨어 사방을 둘러보면 어스름한 차내등 불빛 아래로 졸음에 겨운 사람들만 보였다.  다시 눈을 감고 스르르 엷은 잠에 떨어지며 돌이엄마는 강원도 산골을 지나고 이름 모를 역을 스치면서 태백산맥을 넘고 있었다. 


눈결을 스치는 빛,

돌이엄마는 자꾸 파고드는 밝은 빛에 감은 눈을 떴다.  허리를 쭉 펴며 창밖을 내다보는 순간에 아 하는 탄성을 질렀다.  기차는 바로 옆으로 찰랑대는 파도를 끼고 달렸으며 또렷한 수평선 저쪽으로부터 일렁일렁 거리는 수만 가지의 빛이 밀려오고 있었다.  눈을 크게 뜬 돌이엄마의 입이 헤 벌어졌다. 

태양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붉은빛이, 초록빛이, 또 파란빛이, 그리고 노란빛이...... 아니다. 그것은 빛이 아닌 바람, 바다에서 춤추는 바람이었다.  황금융단을 수평선 저 끝에서부터 쫙 펼쳐오며 동쪽으로 서쪽으로 마구 불어대는 바람은 하늘을 솟구치다가 아래로 향하기도 하고, 달리는 차창에 바짝 붙어서 돌이엄마를 유혹하듯 팔랑팔랑 몸을 흔들었다.  벌떡 일어선 돌이엄마는 재빠른 걸음으로 통로를 빠져나와 열려진 열차의 문에 매달렸다.  파도소리가 달리는 바퀴소리를 뚫고 귓전을 때리고 가슴을 울렁이게 하고, 점점 환한 모습으로 변하는 오색바람은 돌이엄마의 머리카락을 휘날리고 티셔츠자락을 날리고, 활짝 펴진 돌이엄마의 표정을 사방에 뿌리고......


돌이엄마는 마구 소리를 질렀다.

"너무 예쁜 햇님이에요.  내가 오니깐 그렇듯 예쁜 모습으로 마중 나오셨나요?"

비릿한 바닷내음이 소리치며 벌린 돌이엄마의 입속에 가득 차고, 벌렁벌렁 커진 콧구멍으로 밀려들었다. 

"햇님~ 나를 무척 많이 기다리셨죠?  정말 미안해요. 제가 그 동안에 햇님을 잊었어요. 이제부터는 햇님을 꼭 끌어안고 있을게요. 너무너무 반가워요."

한 손을 밖으로 쭉 뻗으며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햇님, 얼른 오셔서 제 손바닥 위에 살짝 앉아 보세요. 제가 키스해 드릴게요."

바다 전체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떠오르는 태양은 장관이었다.  머리꼭지를 수평선 끝에 불쑥 드러낸 태양은 붉은색으로 둥실둥실 바다에 떠다니듯 하더니 한 손으로 바다를 턱 잡아 몸을 쑥 들어올렸다. 

돌이엄마는 마구 웃었다. 웃음은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가슴에서 머리에서 그리고 아랫배에서 마구 솟아나오는 것이다.  기차는 돌이엄마의 웃음소리를 매달고 정동진역에 들이닥치고 있었다.


"조심하세요."

돌이엄마는 뒤에서 들리는 낮선 남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복을 입고 모자를 쓴 차장이 빙긋이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호호, 죄송해요. 너무 햇님이 예뻐 죽겠어요."

차장은 어깨를 으쓱 들어올리고는 한쪽 눈을 찔끔 감으며 말했다.

"이제 종착역인 정동진이에요."


* 당신의 빛 *


어쩌면 그토록 눈부신가요,

어쩌면 그토록 예쁘신가요,

손끝에 찰랑대는 당신,

어쩌면 그토록 애교가 많으세요.


당신의 정체는 바람이고,

당신의 정체는 빛이고,

당신의 정체는 곧 나에요.

내가 바로 당신이잖아요.


역을 나서며 돌이엄마는 집에 전화를 걸었다.  아침 여섯시 경이면 딸아이가 일어나서 밥을 먹고 학원에 갈 준비를 할 시간이었다. 

벨소리가 울리자마자 펄쩍 수화기를 드는 소리가 들렸다.  딸은 엄마가 아버지와 싸운 후에 신경을 온통 엄마에게 곤두세우고 있었다.

"엄마야?  엄마, 지금 어디야?"

착 달라붙는 듯한 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지금 정동진에 도착했다. 호호, 햇님이 얼마나 예쁜지 모르지?"

"정말? 지금 정동진이라는 곳에 있단 말이야?"

"응, 눈앞에 파도가 찰랑대는데, 지금 파도소리 안 들리니?"

"아이, 엄마는 나빠, 혼자서만 갔다는 말이야?"

"호호호, 미안하다.  다음에 같이 오면 되잖아. 아...... 너무 시원하고 좋은 것 있지?"

"아이, 몰라. 정말 엄마는 나빠."

정동진 앞바다에 선 돌이엄마의 목소리는 떠오르는 햇살을 타고 멀리멀리 퍼지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