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정확히 딱 한 걸음만 하연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나마 하연이었기에 입만 딱 벌린 채 서 있는 게 가능한 것이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기가 막혀 쓰러졌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연은 입을 벌린 채 침대 옆에 놓여 있는 커다란 상자를 자꾸만 들여다보았다. “이건…정말이지…. 이게 다 뭐에요…?” “그건 책입니다.” “…저도 알아요. 그런데 도대체가….” “뭐 잘못 됐습니까? 책이 필요하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분명 책은 틀림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책이 너무 많은데다 하연이 읽을만한 책은 한 권도 없다는 데 있었다. 하연은 ‘이코노미스트’ 잡지를 손에 들고 조비서를 향해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지금 저보고…이걸 읽으라는 말씀이시죠? 시간…보내기용으로…?” 단순히 소설책 몇 권이나 잡지 두어 권 정도를 바랬던 하연은 대형 박스 안에 빼곡히 담겨 있는 두꺼운 책들을 보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소설이라는 분류에 들어갈 책이나 과연 있을까 싶을 정도로 철학서적과 종교서적, 그리고 경제 경영, 우주항공 분야까지 전공서적들로 가득 차 있었다. 조비서는 하연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뻔히 알면서도 시치미를 뚝 뗐다. 사실 조비서도 그런 책들로 골라서 박스를 채우는데 꽤나 애를 먹었더랬다. “세상에! 불경, 성경에 코란까지! 나보고 지금 여기서 도(道)라도 닦으라는 건가요? 아무리 이 집이 적막하다지만…. 이건 뭐에요? 피아노도 없는 이 집에서 악보라도 들여다보면서 연구 해보라구요?” “분명 아무거나,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하연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자기는 분명 아무거나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사실 글씨가 있는 읽을거리라면 무엇이든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연은 그냥 주저앉아서 울고 싶은 심정이 되어 있었다. 얼마나 손꼽아서 기다렸었는데. “…알았어요. 고마워요, 조비서님.” “그럼 재미있게 읽으시길 바라겠습니다. 참, 왜 도련님께는 성함을 불러 드리면서 제게는 꼬박꼬박 조비서님이라고 하십니까, 진하연씨?” “간단해요. 성함을 모르니까요. 언제 저한테 성함이라도 알려준 적 있었어요?” “…제 이름은 조상현입니다. 앞으로는 저도 이름을 불러 주십시오.” “알았어요. 그렇게 할께요, 상현씨.” 필요 없다고 소리를 지르며 부탁하나 제대로 못 들어 주냐고 화를 내기는커녕 여자는 오히려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절대로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지 않고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생각하는 이해심 깊은 여자. 상현은 그런 여자라면 도련님 곁에 머물러 있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사실 상현이 일부러 읽기 어렵고 난해한 책들만 골라서 사 온 것은 이유가 있었다. 여자가 책에 빠져 있다면 안 그래도 조용한 집에서 민혁과 하연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더더욱 줄어들 것 같아서였다. 상현은 하연이 온 뒤로 민혁에게 일어나는 변화들이 내심 반가웠고 그녀라면 마음의 병을 능히 치료할 수 있을 거라는 결론을 이미 나름대로 내려두고 있었더랬다. “도련님께서 머리모양을 꽤 마음에 들어하시더군요.” “…거짓말이라도 기분은 좋네요. 그렇지만 상현씨가 그렇게 애쓸 필요는 없어요. 전 괜찮으니까요.” “왜 제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상현씨 말을 듣고 진실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그 말은 바꿔 말해, 민혁이 머리모양을 마음에 들어 했다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들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 하는 말이었다. 그냥 마음에 들어한 것도 아니고 꽤나 마음에 들어 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상현의 말은 사실이었다. 민혁의 방을 찾아갔을 때 거울을 보며 무심한 척 한 마디 툭 던졌더랬다. 〔…솜씨가 좋아.〕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는 자신에게조차 칭찬이 인색한 사람이었다. 진하연씨, 이제 곧 알게 될 겁니다. 제가 한 말이 진실이라는 걸. “…왜 그렇게 웃어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닙니다. 헌데…진하연씨. 사실…도련님께서는 간병인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네? 뭐라구요? 제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이곳에 오기 전 상현씨가 저에게 도련님께서 필요로 하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게 일이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요.” “제가 도련님께 강요했습니다. 24시간 제가 곁에서 보살펴 드리면 아무 문제가 없지만 전 아시다시피 밖에서 일을 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집에 혼자 계시게 될 도련님께 무슨 일이 생기지 말라는 보장 같은 건 없지 않습니까.” “상현씨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가요?” “그러니까…도련님을 잘 돌봐 주십시오. 그게 제 요점입니다.” “알았어요. 그렇게 할께요.” “…그런 식이 아니라…마음을 다해서, 진심으로. 이건 하연씨에게 드리는 제 부탁입니다.” 하연은 뒤적거리던 책더미에서 물러나 화장대 의자에 앉았다. 마음을 다해서, 진심으로 라는 상현의 말은 하연의 마음을 이상하게 휘둘러 놓았다. 이게 뭐지.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거지. 하연은 이참에 상현과 민혁의 관계라도 알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에 슬쩍 상현을 떠보았다. “상현씨가 왜 그렇게 도련님을 신경 써야 하는 거죠?” 그런 하연의 생각을 눈치 채기라도 한 듯 상현은 선글라스를 검지손가락으로 치켜 올리며 다시 한 번 당부했다. “…신경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만….” 상현은 생각만 해도 즐거워졌다. 민혁의 굳어버린 마음은 이미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하연이라는 여자 때문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발자국씩만. 조금씩 둘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민혁에게 있어서 고질병이 되어 버린 마음의 병도 언젠가는 자연스레 치유될 수 있을거라 생각하니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뭐가 그렇게 즐겁지?” 거실에 선 채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던 상현은 순식간에 딱딱한 비서의 표정으로 되돌아 왔다. 민혁의 말투에는 심기가 불편하다는 의사가 고스란히 묻어났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잖아!” “…하연씨 때문에 웃었습니다.” 적당한 말로 버무리며 어물쩡 넘어가는 건 절대로 통하지 않는 민혁이었다. 사실이라고 하기엔 뭔가 조금 부족한, 그렇지만 거짓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진실한 대답이었다. 분명 의표를 찌르는 민혁의 가차 없는 질문이 곧장 뒤따를 것이라 생각했던 상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잠깐 틈을 두고 생각에 잠긴 민혁의 반응에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팔 다리가 모조리 잘린 기분이 어떨까?” “예? 무슨 말씀이신지….” “헛생각!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생각으로 날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아직도 모르겠나?”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흥진그룹 말이야. 팔다리가 하나씩 둘씩 잘려나가는 기분이 어떻겠느냐 이 말이지.” “꽤나 처참할 것입니다.” “처참. 처참이라…. 처참이든 잔혹이든 참혹이든 간에! 아직은 시작에 불과해.”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진행!” 상현은 짤막한 단어 하나가 의미하고 있는 참뜻을 알아차렸다. 짧지만 많은 것을 담고 있는 한 단어. 혹시라도 민혁의 입에서 ‘중단’이라는 단어가 나오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거침없이 진행이라고 말하는 민혁을 바라보던 상현은 피가 한 곳으로 쏠리는 듯한 느낌에 잠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례차례 잘라내다 보면 몸뚱이만 남겠지. 그럼 그 땐 정확하게 심장을 찌르는 거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꿀꺽. 상현은 뼈 속 깊숙이 각인된 민혁의 원한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다. 그의 처지를 백 번 이해했고 그의 손과 발이 되어 원한을 대신 갚아주고 싶다고 생각했기에 이렇게 곁에 머물러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웃음소리가 터져 나올 것 같은 민혁의 목소리를 듣자 마른침이 삼켜질 만큼 겁이 났다. “그 다음엔…어쩌실 생각 입니까?” “그건 그 때가서 알려주지. 내 의지를 알았으면 가봐.” 자신을 실패의 낭떠러지로 밀어버린 존재에 대해 조금씩 목을 조여들어가고 있던 민혁의 계획이 성공하리라는 것을 상현은 벌써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절대 인정을 보이지 않으리라는 사실도. ☆★☆ 상현이 사라진 뒤 민혁은 휠체어에 머리를 뒤로 젖혀 기댄 채 갚은 것을 고스란히 되돌려 준다는 사실에 짜릿한 흥분감을 맛보았다. 받은 건 절대로 잊지 않는다. 그리고 갚아줄 땐 어떤 경우에서든지 배로 갚아준다. 은혜든, 원수든! 잠깐동안 끔찍했던 기억들을 회상하던 민혁은 좀 전에 상현이 했던 대답이 떠오르자 순식간에 부드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민혁은 가만히 중얼거렸다. “진하연 때문에 웃었다면 이해가 되지. 그녀는…웃음을 전염시키는 힘이 있으니까.” 보통 사람 같았으면 벌써 이 집에 깔린 어둑신한 기운을 이겨내지 못하고 도망쳤거나 음울한 분위기에 녹아들어 마음속에 그늘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연은 몸살을 앓을 만큼 힘겹게 적응해 나가면서도 결코 우울함에 빠져들지 않았다. 하연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보고 싶었다. 전 같으면 간단히 호출만 해서 부르면 될 것을 요즘에는 하연의 방에 일부러 찾아가서 불러오곤 했다. 깊고 검은 그녀의 눈동자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좋았다. “뭘 하고 있지?” “아, 무슨 시킬 일이라도 있으세요?” 뒤적거리고 있던 책을 황급히 엎어놓고 하연은 민혁의 지시를 기다렸다. 민혁은 방을 들어오면서 이번에는 무엇을 지시할까 고민하던 찰나, 하연이 엎어놓은 책을 보자 지시할 만한 일이 떠올랐다. “내 방으로 와.” 하연은 세 걸음 정도 거리를 둔 채 민혁의 뒤를 따랐다.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절대 가까이로 오는 법이 없는 하연이었다. 방향 바꾸는 것까지도 능숙하게 혼자 해 낼 만큼 유연한 민혁의 휠체어를 밀어 주겠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민혁이 원하지도 않는 일을 마음대로 했다가는 또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라서였다. 반면 민혁은 바짝 붙어서 걷지 않는 하연에게 아쉬운 마음이 들어 괜한 트집을 잡았더랬다. “간병인이 이렇게 멀찌감치 떨어져서 뭘 어쩌겠다는 거지?” 하지만 방문 앞에 도착해 버린 터라 하연이 가까이 다가가고 말 것도 없었다. 민혁은 아예 새로운 지시사항 하나를 만들어냈다. “한 걸음 이상 떨어지지 말 것.” “네. 그렇게 할께요.” “책장 앞으로 가.” 하연은 민혁이 시키는 대로 했다. 처음엔 민혁의 명령조 말투가 거슬렸지만 말투도 사람의 일부라고 생각하자 크게 거슬릴 것도 없었다. 벽면은 붙박이 책장으로 설계되어 있었는데 한 칸도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으며 꽂힌 책들 또한 가지런했다. “맨 위에서부터 첫 번째, 그리고 오른쪽 옆이 두 번째. 이런 식으로 지시할 거야.” 하연은 속으로 책을 꺼내려면 손이 닿지 않는 곳은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고 민혁은 아래쪽 책은 절대로 대상에 넣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방에서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민혁과 하연은 그 생각의 차이가 둘 사이의 거리보다 훨씬 먼 듯싶었다. “첫 번째 칸 일곱 번 째. 네 번째 칸 아홉 번 째. 다섯 번째 칸 두 번 째.” 겨우 세 권을 찾아냈을 뿐인데. 하연의 등에서 땀방울이 주루룩 흘렀다. 혹시라도 잘못 뽑았으면 어쩌지? 하연은 조심스레 책 표지가 잘 보이도록 들어 민혁에게 보였다. “이 책들…제대로 골라 낸 거 맞나요?” “…두 번째 칸 여섯 번 째. 여섯 번째 칸 열아홉 번 째.” 민혁은 하연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조금 속도를 늦춰 위치를 불렀다. 하연은 틀렸다는 말이 없어서 자신이 제대로 골라 낸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처음부터 맞을 것도 틀릴 것도 없는데. 붙박이 책장의 구조는 민혁의 머릿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한 칸에 대략 스물여덟 권 정도를 꽂을 수 있고 가로로 일곱 칸이 줄지어 있는 책장. 책들을 더듬어 나가는 하연의 검지손가락. 하연의 왼쪽 팔에 쌓이는 책들. 높은 곳에 있는 책을 뽑을 때 살짝 들리는 하연의 뒤꿈치. 흘러내린 잔머리를 넘기는 하연의 손. 민혁은 하연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내 책상 위에 놔 둬.” 하연은 책들을 민혁의 책상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잠깐 소파에 앉지.” 언제 하연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냐는 듯 민혁은 유유히 커피 메이커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커피 메이커와 찻잔, 머그컵들이 놓여 있는 작은 협탁의 높이 역시 앉아있는 민혁의 높이와 맞추어져 있었다. 하연은 소파에 앉으며 다시 한 번 숨을 골랐다. 방금 전 등 뒤에서 날아오던 지시들. 손가락 끝까지 집중을 해야만 했던 하연에게 있어서는 온 몸에 힘이 쭉 빠져버릴 지경이었다. 빙그르르 등을 돌리는 민혁을 보고 찻잔을 받기 위해 엉거주춤 일어나던 하연은 민혁의 손에 들린 잔이 한 개 뿐인 것을 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 여기는 아직도 비가 많이 오고 있답니다. 이제 좀 그쳐줘도 될 것 같은데..^^ 오늘도 어김없이 남겨주신 리플들에 댓글 달아 놓았구요, 소중한 쪽지들은 잘 보관해 놨답니다. 처음 쪽지 날리시는 님들, 닉넴 알려주세요. ^^ 닉넴이 없으면 미강이가 어느 분인지 모르거든요. 기억해둬야죠~ㅎ 일촌 신청 해주신 님들도 리플 남길때 쓰시는 닉넴 살짝 알려주세요~ 헤헷. 지난 이야기에...머리 손질해주는 그림, 아름다웠나요? 언제나 설레임 가득한 글을 쓰고픈 미강이는 이만 물러갑니다. 날이 밝으면, 좀 화창해 지려나요...? *^^* 행복하세요~ *************************************************************************************
※비밀의 성(城)을 향해 가는 길 [6-①]-정확히 딱 한 걸음만※
6. 정확히 딱 한 걸음만
하연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나마 하연이었기에 입만 딱 벌린 채 서 있는 게 가능한 것이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기가 막혀 쓰러졌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연은 입을 벌린 채 침대 옆에 놓여 있는 커다란 상자를 자꾸만 들여다보았다.
“이건…정말이지…. 이게 다 뭐에요…?”
“그건 책입니다.”
“…저도 알아요. 그런데 도대체가….”
“뭐 잘못 됐습니까? 책이 필요하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분명 책은 틀림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책이 너무 많은데다
하연이 읽을만한 책은 한 권도 없다는 데 있었다.
하연은 ‘이코노미스트’ 잡지를 손에 들고 조비서를 향해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지금 저보고…이걸 읽으라는 말씀이시죠? 시간…보내기용으로…?”
단순히 소설책 몇 권이나 잡지 두어 권 정도를 바랬던 하연은
대형 박스 안에 빼곡히 담겨 있는 두꺼운 책들을 보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소설이라는 분류에 들어갈 책이나 과연 있을까 싶을 정도로
철학서적과 종교서적, 그리고 경제 경영,
우주항공 분야까지 전공서적들로 가득 차 있었다.
조비서는 하연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뻔히 알면서도 시치미를 뚝 뗐다.
사실 조비서도 그런 책들로 골라서 박스를 채우는데 꽤나 애를 먹었더랬다.
“세상에! 불경, 성경에 코란까지!
나보고 지금 여기서 도(道)라도 닦으라는 건가요?
아무리 이 집이 적막하다지만…. 이건 뭐에요?
피아노도 없는 이 집에서 악보라도 들여다보면서 연구 해보라구요?”
“분명 아무거나,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하연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자기는 분명 아무거나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사실 글씨가 있는 읽을거리라면 무엇이든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연은 그냥 주저앉아서 울고 싶은 심정이 되어 있었다.
얼마나 손꼽아서 기다렸었는데.
“…알았어요. 고마워요, 조비서님.”
“그럼 재미있게 읽으시길 바라겠습니다.
참, 왜 도련님께는 성함을 불러 드리면서
제게는 꼬박꼬박 조비서님이라고 하십니까, 진하연씨?”
“간단해요. 성함을 모르니까요. 언제 저한테 성함이라도 알려준 적 있었어요?”
“…제 이름은 조상현입니다. 앞으로는 저도 이름을 불러 주십시오.”
“알았어요. 그렇게 할께요, 상현씨.”
필요 없다고 소리를 지르며 부탁하나 제대로 못 들어 주냐고 화를 내기는커녕
여자는 오히려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절대로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지 않고
모든 것을 자기 탓으로 생각하는 이해심 깊은 여자.
상현은 그런 여자라면 도련님 곁에 머물러 있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사실 상현이 일부러 읽기 어렵고 난해한 책들만 골라서 사 온 것은 이유가 있었다.
여자가 책에 빠져 있다면
안 그래도 조용한 집에서 민혁과 하연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더더욱 줄어들 것 같아서였다.
상현은 하연이 온 뒤로
민혁에게 일어나는 변화들이 내심 반가웠고
그녀라면 마음의 병을 능히 치료할 수 있을 거라는 결론을
이미 나름대로 내려두고 있었더랬다.
“도련님께서 머리모양을 꽤 마음에 들어하시더군요.”
“…거짓말이라도 기분은 좋네요. 그렇지만 상현씨가 그렇게 애쓸 필요는 없어요.
전 괜찮으니까요.”
“왜 제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상현씨 말을 듣고 진실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그 말은 바꿔 말해, 민혁이 머리모양을 마음에 들어 했다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들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 하는 말이었다.
그냥 마음에 들어한 것도 아니고 꽤나 마음에 들어 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상현의 말은 사실이었다.
민혁의 방을 찾아갔을 때 거울을 보며 무심한 척 한 마디 툭 던졌더랬다.
〔…솜씨가 좋아.〕
빈틈없이 일을 처리하는 자신에게조차 칭찬이 인색한 사람이었다.
진하연씨, 이제 곧 알게 될 겁니다. 제가 한 말이 진실이라는 걸.
“…왜 그렇게 웃어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닙니다. 헌데…진하연씨. 사실…도련님께서는 간병인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네? 뭐라구요? 제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이곳에 오기 전
상현씨가 저에게 도련님께서 필요로 하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게 일이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요.”
“제가 도련님께 강요했습니다.
24시간 제가 곁에서 보살펴 드리면 아무 문제가 없지만
전 아시다시피 밖에서 일을 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집에 혼자 계시게 될 도련님께 무슨 일이 생기지 말라는 보장 같은 건
없지 않습니까.”
“상현씨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가요?”
“그러니까…도련님을 잘 돌봐 주십시오. 그게 제 요점입니다.”
“알았어요. 그렇게 할께요.”
“…그런 식이 아니라…마음을 다해서, 진심으로.
이건 하연씨에게 드리는 제 부탁입니다.”
하연은 뒤적거리던 책더미에서 물러나 화장대 의자에 앉았다.
마음을 다해서, 진심으로 라는 상현의 말은
하연의 마음을 이상하게 휘둘러 놓았다.
이게 뭐지.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거지.
하연은 이참에 상현과 민혁의 관계라도 알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에
슬쩍 상현을 떠보았다.
“상현씨가 왜 그렇게 도련님을 신경 써야 하는 거죠?”
그런 하연의 생각을 눈치 채기라도 한 듯
상현은 선글라스를 검지손가락으로 치켜 올리며 다시 한 번 당부했다.
“…신경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만….”
상현은 생각만 해도 즐거워졌다.
민혁의 굳어버린 마음은 이미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진하연이라는 여자 때문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발자국씩만.
조금씩 둘 사이가 가까워질수록
민혁에게 있어서 고질병이 되어 버린 마음의 병도
언젠가는 자연스레 치유될 수 있을거라 생각하니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뭐가 그렇게 즐겁지?”
거실에 선 채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던 상현은
순식간에 딱딱한 비서의 표정으로 되돌아 왔다.
민혁의 말투에는 심기가 불편하다는 의사가 고스란히 묻어났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잖아!”
“…하연씨 때문에 웃었습니다.”
적당한 말로 버무리며 어물쩡 넘어가는 건 절대로 통하지 않는 민혁이었다.
사실이라고 하기엔 뭔가 조금 부족한,
그렇지만 거짓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진실한 대답이었다.
분명 의표를 찌르는 민혁의 가차 없는 질문이 곧장 뒤따를 것이라 생각했던 상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잠깐 틈을 두고 생각에 잠긴 민혁의 반응에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팔 다리가 모조리 잘린 기분이 어떨까?”
“예? 무슨 말씀이신지….”
“헛생각!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생각으로 날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아직도 모르겠나?”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흥진그룹 말이야. 팔다리가 하나씩 둘씩 잘려나가는 기분이 어떻겠느냐 이 말이지.”
“꽤나 처참할 것입니다.”
“처참. 처참이라…. 처참이든 잔혹이든 참혹이든 간에! 아직은 시작에 불과해.”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진행!”
상현은 짤막한 단어 하나가 의미하고 있는 참뜻을 알아차렸다.
짧지만 많은 것을 담고 있는 한 단어.
혹시라도 민혁의 입에서 ‘중단’이라는 단어가 나오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거침없이 진행이라고 말하는 민혁을 바라보던 상현은
피가 한 곳으로 쏠리는 듯한 느낌에 잠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례차례 잘라내다 보면 몸뚱이만 남겠지.
그럼 그 땐 정확하게 심장을 찌르는 거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꿀꺽. 상현은 뼈 속 깊숙이 각인된 민혁의 원한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다.
그의 처지를 백 번 이해했고
그의 손과 발이 되어 원한을 대신 갚아주고 싶다고 생각했기에
이렇게 곁에 머물러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웃음소리가 터져 나올 것 같은 민혁의 목소리를 듣자
마른침이 삼켜질 만큼 겁이 났다.
“그 다음엔…어쩌실 생각 입니까?”
“그건 그 때가서 알려주지. 내 의지를 알았으면 가봐.”
자신을 실패의 낭떠러지로 밀어버린 존재에 대해
조금씩 목을 조여들어가고 있던 민혁의 계획이 성공하리라는 것을
상현은 벌써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절대 인정을 보이지 않으리라는 사실도.
☆★☆
상현이 사라진 뒤 민혁은
휠체어에 머리를 뒤로 젖혀 기댄 채 갚은 것을 고스란히 되돌려 준다는 사실에
짜릿한 흥분감을 맛보았다.
받은 건 절대로 잊지 않는다.
그리고 갚아줄 땐 어떤 경우에서든지 배로 갚아준다.
은혜든, 원수든!
잠깐동안 끔찍했던 기억들을 회상하던 민혁은
좀 전에 상현이 했던 대답이 떠오르자 순식간에 부드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민혁은 가만히 중얼거렸다.
“진하연 때문에 웃었다면 이해가 되지. 그녀는…웃음을 전염시키는 힘이 있으니까.”
보통 사람 같았으면 벌써 이 집에 깔린 어둑신한 기운을 이겨내지 못하고 도망쳤거나
음울한 분위기에 녹아들어 마음속에 그늘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연은 몸살을 앓을 만큼 힘겹게 적응해 나가면서도
결코 우울함에 빠져들지 않았다.
하연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보고 싶었다.
전 같으면 간단히 호출만 해서 부르면 될 것을
요즘에는 하연의 방에 일부러 찾아가서 불러오곤 했다.
깊고 검은 그녀의 눈동자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좋았다.
“뭘 하고 있지?”
“아, 무슨 시킬 일이라도 있으세요?”
뒤적거리고 있던 책을 황급히 엎어놓고 하연은 민혁의 지시를 기다렸다.
민혁은 방을 들어오면서 이번에는 무엇을 지시할까 고민하던 찰나,
하연이 엎어놓은 책을 보자 지시할 만한 일이 떠올랐다.
“내 방으로 와.”
하연은 세 걸음 정도 거리를 둔 채 민혁의 뒤를 따랐다.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절대 가까이로 오는 법이 없는 하연이었다.
방향 바꾸는 것까지도 능숙하게 혼자 해 낼 만큼 유연한
민혁의 휠체어를 밀어 주겠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민혁이 원하지도 않는 일을 마음대로 했다가는 또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라서였다.
반면 민혁은 바짝 붙어서 걷지 않는 하연에게
아쉬운 마음이 들어 괜한 트집을 잡았더랬다.
“간병인이 이렇게 멀찌감치 떨어져서 뭘 어쩌겠다는 거지?”
하지만 방문 앞에 도착해 버린 터라 하연이 가까이 다가가고 말 것도 없었다.
민혁은 아예 새로운 지시사항 하나를 만들어냈다.
“한 걸음 이상 떨어지지 말 것.”
“네. 그렇게 할께요.”
“책장 앞으로 가.”
하연은 민혁이 시키는 대로 했다.
처음엔 민혁의 명령조 말투가 거슬렸지만
말투도 사람의 일부라고 생각하자 크게 거슬릴 것도 없었다.
벽면은 붙박이 책장으로 설계되어 있었는데
한 칸도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으며 꽂힌 책들 또한 가지런했다.
“맨 위에서부터 첫 번째, 그리고 오른쪽 옆이 두 번째. 이런 식으로 지시할 거야.”
하연은 속으로 책을 꺼내려면 손이 닿지 않는 곳은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고
민혁은 아래쪽 책은 절대로 대상에 넣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방에서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민혁과 하연은
그 생각의 차이가 둘 사이의 거리보다 훨씬 먼 듯싶었다.
“첫 번째 칸 일곱 번 째. 네 번째 칸 아홉 번 째. 다섯 번째 칸 두 번 째.”
겨우 세 권을 찾아냈을 뿐인데.
하연의 등에서 땀방울이 주루룩 흘렀다.
혹시라도 잘못 뽑았으면 어쩌지?
하연은 조심스레 책 표지가 잘 보이도록 들어 민혁에게 보였다.
“이 책들…제대로 골라 낸 거 맞나요?”
“…두 번째 칸 여섯 번 째. 여섯 번째 칸 열아홉 번 째.”
민혁은 하연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조금 속도를 늦춰 위치를 불렀다.
하연은 틀렸다는 말이 없어서 자신이 제대로 골라 낸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처음부터 맞을 것도 틀릴 것도 없는데.
붙박이 책장의 구조는 민혁의 머릿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한 칸에 대략 스물여덟 권 정도를 꽂을 수 있고
가로로 일곱 칸이 줄지어 있는 책장.
책들을 더듬어 나가는 하연의 검지손가락.
하연의 왼쪽 팔에 쌓이는 책들.
높은 곳에 있는 책을 뽑을 때 살짝 들리는 하연의 뒤꿈치.
흘러내린 잔머리를 넘기는 하연의 손.
민혁은 하연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내 책상 위에 놔 둬.”
하연은 책들을 민혁의 책상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잠깐 소파에 앉지.”
언제 하연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냐는 듯
민혁은 유유히 커피 메이커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커피 메이커와 찻잔, 머그컵들이 놓여 있는 작은 협탁의 높이 역시
앉아있는 민혁의 높이와 맞추어져 있었다.
하연은 소파에 앉으며 다시 한 번 숨을 골랐다.
방금 전 등 뒤에서 날아오던 지시들.
손가락 끝까지 집중을 해야만 했던 하연에게 있어서는
온 몸에 힘이 쭉 빠져버릴 지경이었다.
빙그르르 등을 돌리는 민혁을 보고 찻잔을 받기 위해 엉거주춤 일어나던 하연은
민혁의 손에 들린 잔이 한 개 뿐인 것을 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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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아직도 비가 많이 오고 있답니다. 이제 좀 그쳐줘도 될 것 같은데..^^
오늘도 어김없이 남겨주신 리플들에 댓글 달아 놓았구요,
소중한 쪽지들은 잘 보관해 놨답니다.
처음 쪽지 날리시는 님들, 닉넴 알려주세요. ^^ 닉넴이 없으면 미강이가 어느 분인지
모르거든요. 기억해둬야죠~ㅎ
일촌 신청 해주신 님들도 리플 남길때 쓰시는 닉넴 살짝 알려주세요~ 헤헷.
지난 이야기에...머리 손질해주는 그림, 아름다웠나요?
언제나 설레임 가득한 글을 쓰고픈
미강이는 이만 물러갑니다.
날이 밝으면, 좀 화창해 지려나요...? *^^*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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