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를 들어선 은수의 얼굴은 여느 때와 같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가 너무도 밝아서 보고 있는 내 마음 한 구석이 저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어쩌면 죄책감인지도 몰랐다. 지금부터 내가 내뱉는 말들은 틀림없이 은수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결심을 번복할 수 없었다. 아니 이런 이야기는 시간을 끌수록 은수가 더 힘들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랬던가요? 후훗, 난 잘 모르겠네. 언제나 민재 씨가 나보다 먼저 와있으니까 내가 일찍 왔다는 느낌이 안 들어요. 그래서 늘 미안하기도 하고.”
은수가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수줍게 웃었다.
“미안하긴. 은수 씨를 기다리는 것도 나한테는 즐거움인데.”
“그래요? 그렇담 다행이지만. 아, 우리 뭐 마실까요? 민재 씨는 시켰어요?”
“난 그냥 커피.”
“또 커피? 민재 씨는 커피를 너무 좋아하더라. 몸에 안 좋은데, 그러지 말고 녹차 마셔요. 그게 더 몸에 좋다고요. 알았죠?”
“그래, 그럼.”
나는 짤막하게 대답하고 메뉴를 고르는 은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은수는 늘 그랬듯 볼을 살짝 부풀리고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메뉴 하나하나를 꼽아봤다. 아마 적어도 10여 분 정도는 걸릴 것이다. 나와는 달리 작은 일에도 세심하게 생각한 끝에 결정하는 것이 은수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흠, 뭐 마시면 좋을까.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네.”
은수가 입고 있는 원피스, 내가 작년에 생일선물로 사주었던 옷이다. 은수는 나를 만나는 날이면 내가 선물한 옷이나 액세서리를 반드시 착용하고 나온다. 내가 궁금해 할지도 모르는 선물에 대한 안부를 눈으로 확인시켜주기 위한 배려랄까. 이렇게 사소한 일에도 신경을 써주는 그녀가 좋았지만 오늘은 왠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오늘은 평소와는 다른 이야기를 꺼내야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막막했다.
“응? 왜 그렇게 봐요. 내 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아님 내가 너무 예쁜가. 후훗.”
문득 나의 시선을 느낀 은수가 고개를 들더니 생글 웃으며 말했다. 덕분에 나는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아, 아니야. 그냥…… 그런데 아직 못 골랐어?”
“아우, 그러게. 난 매번 왜 이런지 몰라. 정말 어려워요. 이걸 고르면 나중에 저게 더 마시고 싶어지는 걸 어떡해. 그래서 선뜻 고르지도 못하고 시간만 보내고.”
“그럼 내가 골라줄까?”
“그럴래요? 좋아요, 민재 씨가 골라주는 거면 뭐든 오케이에요.”
은수가 메뉴판을 내게 내밀었다.
“여기는 캐러멜마끼아또를 잘 하더라. 그거 마셔. 이 집에서 제일 잘하는 거라고 하더라고.”
“어머, 그래요? 그럼 그걸로 할게요. 그런데 민재 씨는 여기 와봤나 봐요? 난 여기 오늘 처음인 것 같은데. 나 말고 딴 여자랑 왔었나?”
“응? 아, 아니야. 그냥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야.”
“어머나 농담으로 한 이야긴데, 꽤 당황하네. 정말 나 몰래 다른 여자랑 온 거 아니에요? 민재 씨, 바람났구나.”
“아니라니까 그러네.”
“알아요, 그냥 해본 말인데…… 화났어요?”
“아니.”
사실 은수의 추측대로 이 카페에 와본 적이 있었다. 그것도 여러 번. 하지만 차마 그 사실을 은수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그런 사실이 중요하지 않았다. 긴장한 탓일까, 나도 모르게 얼굴에 열이 올랐다. 냉수를 마시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 사이에 은수는 차를 주문했다. 그리고 둘 사이에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난 마음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었고, 은수는 냅킨에 무언가를 깨알 같은 글씨로 적고 있었다.
“또 적는 거야?”
나는 은수가 냅킨에 무엇을 적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 날짜와 시간, 그리고 간략한 메모 남기기. 은수가 처음 가는 장소에서 꼭 빼먹지 않고 하는 행동이었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은수는 그렇게 말하면서 데이트 기록을 마무리 지었다. 나는 손을 뻗어 은수의 손가락 끝을 살짝 건드렸다. 은수가 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왜요? 무슨 할 말 있어요? 오늘 민재 씨, 조금 이상한 것 같아. 다른 날이랑 달라요. 무슨 일인지 말해 봐요.”
이제 기회가 왔다. 이번마저 놓치면 오늘은 영영 기회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생각이 들자 마른기침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있잖아, 실은 은수 씨한테 할 말이 있어.”
은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 정말 많이 생각을 해봤거든. 그리고 어렵게 결정을 내렸어. 어쩌면 내가 내린 결정을 은수 씨가 받아들이기 힘들지도 몰라. 아니 틀림없이 그럴 거야. 하지만 먼저 알아줬으면 하는 것은 내가 정말 힘들게 결정을 내렸다는 거야.”
“무슨 이야기인데 그래요. 괜히 겁나네.”
“저기 있잖아…….”
은수의 얼굴이 흔들렸다. 아니 은수를 바라보는 내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아주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내가 지난 며칠동안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을 은수에게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또박또박 발음했다.
“……있잖아. 우리 이제 그만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 헤어지자.”
‘자’라는 음절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가슴이 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아!”
은수는 가볍게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차를 가지고 오던 카페 종업원과 부딪치면서 쟁반이 엎어지고 말았다. 은수는 감정을 표현할 때 유난히 제스처가 큰 편이었다.
“어머나, 죄송해요. 손님 괜찮으세요? 이걸 어째…….”
자신의 실수가 아니었는데도 종업원은 황송해하며 허둥지둥 깨진 컵의 조각들을 치웠다. 그리고는 연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은수는 그녀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은 듯 일어선 그대로 굳어버린 채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입을 벌렸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금세 물기가 고인 눈동자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대신하여 내게 많은 것을 묻고 있었다. 물론 나는 은수가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설명할 용의가 있었고 당연히 그래야했다. 하지만 설명에 앞서 우선은 은수를 진정시키는 것이 올바른 순서였다.
“지금 은수 씨가 얼마나 놀랬는지 짐작이 안 가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만일 반대 입장이었다면 나도 그랬을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내 이야기를 더 들어줘. 자, 얼른 앉아.”
나는 종업원에게 자리를 비켜달라며 양해를 구하고는 은수를 자리에 앉혔다. 은수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내 손에 몸을 맡겼다. 손이 은수의 어깨에 닿았을 때, 은수가 몹시 떨고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위로의 말을 건네기보다는 은수가 좀더 현실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은수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미안해. 이러고 싶지 않았지만 어차피 알게 될 거라면 미리 말해주는 것이 좋을 거라 생각했어. 그래야 은수 씨도 덜 상처를 입을 거라 생각했고.”
은수가 나를 외면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 이유가 뭐죠. 이유를 듣고 싶어요.”
“그래, 말해줄게. 그럼 내가 먼저 물어볼게. 은수 씨는 나를 사랑해?”
내가 물었다.
“그게 이유였어요? 내가 민재 씨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그래요?”
“그런 거 아니야. 대답부터 해봐. 은수 씨는 날 사랑해?”
“사랑해요.”
은수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질문에 대답했다.
“정말로 그럴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잘 생각해봐. 은수 씨가 날 사랑하고 있다는 감정이 어쩌면 사랑이 아닐 수도 있어. 그냥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오랫동안 같이 지내다보니 사랑하고 있는 거라 생각하는지도 몰라. 자기최면 같은 거 말이야.”
“아니에요, 난 정말…….”
“좀더 자신에게 솔직해봐. 은수 씨는 나를 만나면서 가슴이 설렌 적이 있었어? 나와 헤어지고 나면 내가 보고 싶어서 기다리는 시간이 고통스러운 적이 있었냐고. 나부터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어. 물론 은수 씨를 싫어한다는 말이 아냐. 나 은수 씨 많이 좋아해. 친구 이상으로. 하지만 사랑까지는 아닌 것 같아. 아니 분명히 사랑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그냥 편하고 좋았어. 그냥 그 뿐이야.”
“그래요. 나도 민재 씨 말처럼 가슴이 설렌다거나 뭔가 아픈 느낌은 없었어요. 하지만 사랑이 꼭 그런 격정적이어야만 하나요? 난 말이에요. 지금까지 한 번도 나와 민재 씨를 따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단 한 번도요.”
“그건 서로에게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이야.”
“아니에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난 언제나 나의 미래에 이민재란 남자와 함께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일들, 꿈, 그런 것들은 모두 민재 씨가 곁에 있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들이라고요.”
예상은 했지만 은수는 나의 결정에 쉽게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하고 싶지 않았던 말까지 꺼내야 했다.
“은수 씨가 알아야 할 것이 또 하나 있어.”
“그게 뭐죠?”
“아까 말했었지. 나는 사랑을 하면 가슴이 설레고 헤어진 후에는 기다리는 시간이 고통스러워진다고.”
“네, 그랬어요.”
“만났어. 그런 사람을.”
은수가 내 말을 이해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네?”
“만나면 가슴이 설레고 헤어지면 다시 만날 때까지 내내 아픈, 그런 사람을 만났다고.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단 말이야.”
은수가 메모를 했던 냅킨을 꽉 움켜쥐었다. 너무 세게 쥐어서 펜의 잉크가 손에 묻었지만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뭐……뭐라고요?”
“미안해. 이건 내 의지로 바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처음엔 나도 부정을 했었어. 아닐 거야, 이건 그냥 순간적인 감정이겠지. 나한테는 은수 씨가 있으니까. 하지만 부정을 할수록 그 사람에게 끌리는 거야.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어. 난 이런 게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해.”
은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고, 나는 차마 눈을 마주할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나쁜 사람.”
툭.
은수의 눈물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그 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크게 들려왔다. 은수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만들어낸 환청인지도 몰랐지만 눈물이 떨어지는 소리는 더욱 크고 선명하게 들려왔다.
“저기 은수 씨……”
나는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주려고 했지만 이번엔 은수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은수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창밖을 내다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행복한가요? 나와 있을 때보다 더…… 그 사람이 그렇게 좋아요? 내 심장에 비수를 꽂으면서까지 함께 있고 싶을 만큼. 그래요?”
“은수 씨, 나는…….”
“알았어요. 민재 씨가 하는 말, 모두 알아들었으니까 그만해요. 나도 바보는 아니에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아들었다고요.”
“미안해, 정말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말아요. 알아요? 민재 씨,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그래…….”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한테도 시간이 필요해요. 민재 씨가 고민한 만큼, 나도 생각할 시간을 줘요. 민재 씨가 하고 싶은 말을 했듯 나도 그럴 기회를 달라고요. 민재 씨의 말을 들었으니까 나도 충분히 생각을 해보고 대답을 해줄게요. 지금은 이 말밖에 할 수가 없네요. 이 말밖에는…….”
은수는 말끝을 흐리더니 흐느끼기 시작했다. 가녀린 어깨가 움찔거릴 때마다 안아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저 착잡한 마음으로 말없이 지켜봐야 했다. 어설픈 위로의 말도 도리어 독이 될 수가 있었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릴 수 없는 당신 (1)
그릴 수 없는 당신
이별을 고하다
카페를 들어선 은수의 얼굴은 여느 때와 같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가 너무도 밝아서 보고 있는 내 마음 한 구석이 저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어쩌면 죄책감인지도 몰랐다. 지금부터 내가 내뱉는 말들은 틀림없이 은수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결심을 번복할 수 없었다. 아니 이런 이야기는 시간을 끌수록 은수가 더 힘들어질 것이 분명했다.
“오래 기다렸어요?”
약속시간에 맞추려고 뛰어왔는지 은수는 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나와 마주보며 앉았다.
“아니, 아직 3분이나 남았는걸. 은수 씨가 언제 약속시간을 어긴 적이 있나.”
“그랬던가요? 후훗, 난 잘 모르겠네. 언제나 민재 씨가 나보다 먼저 와있으니까 내가 일찍 왔다는 느낌이 안 들어요. 그래서 늘 미안하기도 하고.”
은수가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수줍게 웃었다.
“미안하긴. 은수 씨를 기다리는 것도 나한테는 즐거움인데.”
“그래요? 그렇담 다행이지만. 아, 우리 뭐 마실까요? 민재 씨는 시켰어요?”
“난 그냥 커피.”
“또 커피? 민재 씨는 커피를 너무 좋아하더라. 몸에 안 좋은데, 그러지 말고 녹차 마셔요. 그게 더 몸에 좋다고요. 알았죠?”
“그래, 그럼.”
나는 짤막하게 대답하고 메뉴를 고르는 은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은수는 늘 그랬듯 볼을 살짝 부풀리고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메뉴 하나하나를 꼽아봤다. 아마 적어도 10여 분 정도는 걸릴 것이다. 나와는 달리 작은 일에도 세심하게 생각한 끝에 결정하는 것이 은수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흠, 뭐 마시면 좋을까.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네.”
은수가 입고 있는 원피스, 내가 작년에 생일선물로 사주었던 옷이다.
은수는 나를 만나는 날이면 내가 선물한 옷이나 액세서리를 반드시 착용하고 나온다. 내가 궁금해 할지도 모르는 선물에 대한 안부를 눈으로 확인시켜주기 위한 배려랄까. 이렇게 사소한 일에도 신경을 써주는 그녀가 좋았지만 오늘은 왠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오늘은 평소와는 다른 이야기를 꺼내야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막막했다.
“응? 왜 그렇게 봐요. 내 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아님 내가 너무 예쁜가. 후훗.”
문득 나의 시선을 느낀 은수가 고개를 들더니 생글 웃으며 말했다. 덕분에 나는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아, 아니야. 그냥…… 그런데 아직 못 골랐어?”
“아우, 그러게. 난 매번 왜 이런지 몰라. 정말 어려워요. 이걸 고르면 나중에 저게 더 마시고 싶어지는 걸 어떡해. 그래서 선뜻 고르지도 못하고 시간만 보내고.”
“그럼 내가 골라줄까?”
“그럴래요? 좋아요, 민재 씨가 골라주는 거면 뭐든 오케이에요.”
은수가 메뉴판을 내게 내밀었다.
“여기는 캐러멜마끼아또를 잘 하더라. 그거 마셔. 이 집에서 제일 잘하는 거라고 하더라고.”
“어머, 그래요? 그럼 그걸로 할게요. 그런데 민재 씨는 여기 와봤나 봐요? 난 여기 오늘 처음인 것 같은데. 나 말고 딴 여자랑 왔었나?”
“응? 아, 아니야. 그냥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야.”
“어머나 농담으로 한 이야긴데, 꽤 당황하네. 정말 나 몰래 다른 여자랑 온 거 아니에요? 민재 씨, 바람났구나.”
“아니라니까 그러네.”
“알아요, 그냥 해본 말인데…… 화났어요?”
“아니.”
사실 은수의 추측대로 이 카페에 와본 적이 있었다. 그것도 여러 번. 하지만 차마 그 사실을 은수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그런 사실이 중요하지 않았다.
긴장한 탓일까, 나도 모르게 얼굴에 열이 올랐다. 냉수를 마시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 사이에 은수는 차를 주문했다. 그리고 둘 사이에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난 마음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었고, 은수는 냅킨에 무언가를 깨알 같은 글씨로 적고 있었다.
“또 적는 거야?”
나는 은수가 냅킨에 무엇을 적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 날짜와 시간, 그리고 간략한 메모 남기기. 은수가 처음 가는 장소에서 꼭 빼먹지 않고 하는 행동이었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은수는 그렇게 말하면서 데이트 기록을 마무리 지었다.
나는 손을 뻗어 은수의 손가락 끝을 살짝 건드렸다. 은수가 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왜요? 무슨 할 말 있어요? 오늘 민재 씨, 조금 이상한 것 같아. 다른 날이랑 달라요. 무슨 일인지 말해 봐요.”
이제 기회가 왔다. 이번마저 놓치면 오늘은 영영 기회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생각이 들자 마른기침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있잖아, 실은 은수 씨한테 할 말이 있어.”
은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 정말 많이 생각을 해봤거든. 그리고 어렵게 결정을 내렸어. 어쩌면 내가 내린 결정을 은수 씨가 받아들이기 힘들지도 몰라. 아니 틀림없이 그럴 거야. 하지만 먼저 알아줬으면 하는 것은 내가 정말 힘들게 결정을 내렸다는 거야.”
“무슨 이야기인데 그래요. 괜히 겁나네.”
“저기 있잖아…….”
은수의 얼굴이 흔들렸다. 아니 은수를 바라보는 내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아주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내가 지난 며칠동안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을 은수에게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또박또박 발음했다.
“……있잖아. 우리 이제 그만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 헤어지자.”
‘자’라는 음절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가슴이 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아!”
은수는 가볍게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차를 가지고 오던 카페 종업원과 부딪치면서 쟁반이 엎어지고 말았다. 은수는 감정을 표현할 때 유난히 제스처가 큰 편이었다.
“어머나, 죄송해요. 손님 괜찮으세요? 이걸 어째…….”
자신의 실수가 아니었는데도 종업원은 황송해하며 허둥지둥 깨진 컵의 조각들을 치웠다. 그리고는 연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은수는 그녀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은 듯 일어선 그대로 굳어버린 채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입을 벌렸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금세 물기가 고인 눈동자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대신하여 내게 많은 것을 묻고 있었다.
물론 나는 은수가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설명할 용의가 있었고 당연히 그래야했다. 하지만 설명에 앞서 우선은 은수를 진정시키는 것이 올바른 순서였다.
“지금 은수 씨가 얼마나 놀랬는지 짐작이 안 가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만일 반대 입장이었다면 나도 그랬을 거야. 그러니까 조금만 내 이야기를 더 들어줘. 자, 얼른 앉아.”
나는 종업원에게 자리를 비켜달라며 양해를 구하고는 은수를 자리에 앉혔다. 은수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내 손에 몸을 맡겼다.
손이 은수의 어깨에 닿았을 때, 은수가 몹시 떨고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위로의 말을 건네기보다는 은수가 좀더 현실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은수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미안해. 이러고 싶지 않았지만 어차피 알게 될 거라면 미리 말해주는 것이 좋을 거라 생각했어. 그래야 은수 씨도 덜 상처를 입을 거라 생각했고.”
은수가 나를 외면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 이유가 뭐죠. 이유를 듣고 싶어요.”
“그래, 말해줄게. 그럼 내가 먼저 물어볼게. 은수 씨는 나를 사랑해?”
내가 물었다.
“그게 이유였어요? 내가 민재 씨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그래요?”
“그런 거 아니야. 대답부터 해봐. 은수 씨는 날 사랑해?”
“사랑해요.”
은수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질문에 대답했다.
“정말로 그럴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잘 생각해봐. 은수 씨가 날 사랑하고 있다는 감정이 어쩌면 사랑이 아닐 수도 있어. 그냥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오랫동안 같이 지내다보니 사랑하고 있는 거라 생각하는지도 몰라. 자기최면 같은 거 말이야.”
“아니에요, 난 정말…….”
“좀더 자신에게 솔직해봐. 은수 씨는 나를 만나면서 가슴이 설렌 적이 있었어? 나와 헤어지고 나면 내가 보고 싶어서 기다리는 시간이 고통스러운 적이 있었냐고. 나부터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어. 물론 은수 씨를 싫어한다는 말이 아냐. 나 은수 씨 많이 좋아해. 친구 이상으로. 하지만 사랑까지는 아닌 것 같아. 아니 분명히 사랑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그냥 편하고 좋았어. 그냥 그 뿐이야.”
“그래요. 나도 민재 씨 말처럼 가슴이 설렌다거나 뭔가 아픈 느낌은 없었어요. 하지만 사랑이 꼭 그런 격정적이어야만 하나요? 난 말이에요. 지금까지 한 번도 나와 민재 씨를 따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단 한 번도요.”
“그건 서로에게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이야.”
“아니에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난 언제나 나의 미래에 이민재란 남자와 함께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일들, 꿈, 그런 것들은 모두 민재 씨가 곁에 있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들이라고요.”
예상은 했지만 은수는 나의 결정에 쉽게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하고 싶지 않았던 말까지 꺼내야 했다.
“은수 씨가 알아야 할 것이 또 하나 있어.”
“그게 뭐죠?”
“아까 말했었지. 나는 사랑을 하면 가슴이 설레고 헤어진 후에는 기다리는 시간이 고통스러워진다고.”
“네, 그랬어요.”
“만났어. 그런 사람을.”
은수가 내 말을 이해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네?”
“만나면 가슴이 설레고 헤어지면 다시 만날 때까지 내내 아픈, 그런 사람을 만났다고.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단 말이야.”
은수가 메모를 했던 냅킨을 꽉 움켜쥐었다. 너무 세게 쥐어서 펜의 잉크가 손에 묻었지만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뭐……뭐라고요?”
“미안해. 이건 내 의지로 바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처음엔 나도 부정을 했었어. 아닐 거야, 이건 그냥 순간적인 감정이겠지. 나한테는 은수 씨가 있으니까. 하지만 부정을 할수록 그 사람에게 끌리는 거야.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어. 난 이런 게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해.”
은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고, 나는 차마 눈을 마주할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나쁜 사람.”
툭.
은수의 눈물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그 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크게 들려왔다. 은수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만들어낸 환청인지도 몰랐지만 눈물이 떨어지는 소리는 더욱 크고 선명하게 들려왔다.
“저기 은수 씨……”
나는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주려고 했지만 이번엔 은수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은수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창밖을 내다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행복한가요? 나와 있을 때보다 더…… 그 사람이 그렇게 좋아요? 내 심장에 비수를 꽂으면서까지 함께 있고 싶을 만큼. 그래요?”
“은수 씨, 나는…….”
“알았어요. 민재 씨가 하는 말, 모두 알아들었으니까 그만해요. 나도 바보는 아니에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아들었다고요.”
“미안해, 정말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말아요. 알아요? 민재 씨,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그래…….”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한테도 시간이 필요해요. 민재 씨가 고민한 만큼, 나도 생각할 시간을 줘요. 민재 씨가 하고 싶은 말을 했듯 나도 그럴 기회를 달라고요. 민재 씨의 말을 들었으니까 나도 충분히 생각을 해보고 대답을 해줄게요. 지금은 이 말밖에 할 수가 없네요. 이 말밖에는…….”
은수는 말끝을 흐리더니 흐느끼기 시작했다.
가녀린 어깨가 움찔거릴 때마다 안아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저 착잡한 마음으로 말없이 지켜봐야 했다. 어설픈 위로의 말도 도리어 독이 될 수가 있었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담배를 꺼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