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성(城)을 향해 가는 길 [7-①]-시기 적절한 때※

미강2004.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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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시기적절한 때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하연은 책장을 넘기고는 있지만

 

결코 종이 위에 있는 깨알 같은 글씨들을 읽고 있지는 않았다.

 

 

하연이 단추에 관한 이야기라도 꺼낼라 치면

 

민혁은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터에

 

꼼짝없이 혼자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알고 있으면서도 왜 모른 체 했을까.

 

 

처음에 모른 체 하고 넘어가려 했던 일을 왜 하필이면 그 순간 이야기를 꺼낸 것일까.

 

 

게다가 하연은 단추 하나를 달아준 일을 빌미로

 

민혁에게 뭘 어떻게 요구해 보겠다는 생각 자체는 없었다.

 

 

처음부터 아무런 보답도 바라지 않고 마음으로 행동한 것인데.

 

 

 

오래 전 심장이 죽었다는 남자.

 

도대체 무슨 일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일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점 때문에

 

하연은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그리고 삼일 동안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 하나.

 

 

 

그 사람의 심장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

 

 

그 사람의 눈동자 속에서 차가움을 걷어 내주고 싶다.

 

 

그 사람이 겪은 절망과 고통과 아픔을 알고 싶다.

 

 

그 사람에게 타인을 믿는 마음을 가르쳐 주고 싶다.

 

 

그리고 그 사람의 가슴 속에 맺힌 피멍을 낫게 해주고 싶다.

 

 

 

이민혁이라는 사람만 떠올리면

 

하연은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이었다.

 

 

차라리 약으로 치료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안타깝지는 않았을 텐데.

 

 

 

똑― 똑―

 

 

 

“제가 방해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 상현씨, 아니에요. 방해랄 것도 없었어요.

 

정말 오랜만에 뵙는 것 같네요.

 

그 동안 많이 바빴나요? 밥은 챙겨 먹고 다니는 거죠?

 

도련님은 뵙고 오는 길인가요? 아직 식사 전이죠? 난…난….”

 

 

 

빠르게 입술을 움직이며 한꺼번에 여러개의 질문들을 쏟아내던 하연은

 

당황해서 버벅거렸다.

 

 

왠지 속마음이 들킨 것 같아서 양쪽 볼에 불이 붙은 듯 화끈거렸다.

 

하연은 두 손으로 얼굴을 몇 번 쓸어내고 나서야 머쓱한 표정으로 웃을 수 있었다.

 

 

 

“진하연씨, 괜찮은 겁니까?”

 

 

“네? 아, 네! 괜찮아요. 괜찮고말고요. 별 일 있을 리가 없잖아요.”

 

 

“…정말로 별 일이라도 있었던 겁니까?”

 

 

“아니라니까요! 아니에요! 왜 그렇게 사람 말을 못 믿어요?”

 

 

 

쨍 하고 소리를 지른 하연은 자기가 지른 소리에 자기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작 상현은 그런 하연을 묘한 눈초리로 샅샅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미, 미안해요. 제가 좀 예민해졌나봐요.”

 

 

“괜찮습니다.”

 

 

“정말…괜찮은거죠?”

 

 

“No, problem! 그런데 하연씨는 화내는 일이 익숙지 않은 것 같습니다.”

 

 

“…화내는 일도 익숙해져야 하나요?”

 

 

“화낸 뒤 1초도 안 되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건 조금 문제가 있죠.”

 

 

 

상현은 하연의 약점을 정확히 집어냈다.

 

어린시절부터 터득한 나름대로의 방식이었다.

 

 

상대방이 화를 낼 일은 만들지 않고,

 

화를 나게 했더라도 자기가 먼저 사과해 버리는 방식.

 

 

그것 때문이었을까.

 

 

하연의 얼굴은 부끄러운 비밀을 들켜버린 것처럼 새빨갛게 변해 버렸다.

 

눈치 빠른 상현이 그걸 놓칠 리가 없었다.

 

 

 

“미안합니다. 제가 괜한 말을 한 것 같은데요.”

 

 

“…휴우. 아니에요. 사실인데요, 뭘.

 

맞아요, 전 화내는 일에 익숙지 않아요. 보세요!

 

상현씨가 미안하다고 말해버려서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수그러들잖아요.

 

그런데, 아직 제가 한 질문에 한 가지도 답을 안 해 준 거 알고 있어요?”

 

 

 

“많이 바빴고, 끼니는 거르지 않습니다.

 

도련님은 아직 뵙지 않았고 이미 밖에서 식사는 해결했습니다.”

 

 

 

“순서 하나도 틀리지 않네요. 근데 저한테 무슨 특별히 전할 말이라도 있나요?”

 

 

“왜 그렇게 물어보십니까?”

 

 

“…도련님도 뵙지 않고 저한테 먼저 오신 건 이유가 있어서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여자의 직감입니까? 예리하군요. 사실은 이걸 전해드리려고 먼저 들렀습니다.”

 

 

 

전해줄 게 있어서 들렀다는 상현의 말에 하연의 눈동자가 반짝, 하고 빛났다.

 

혹시….

 

 

하지만 서류가방 속에 들어있던 것을 꺼내드는 상현을 보자

 

금세 풀 죽은 얼굴이 되었다.

 

 

그럼 그렇지.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는 말은 아마도 이런 때 쓰나 보다.

 

 

 

“이젠 저보고 요리책이나 보면서 군침을 삼키고 있으라는 말인가요?”

 

 

“제가 골고루 고른다고 했는데 요리책은 빠트린 것 같아서 따로 사왔습니다.

 

한식, 중식, 일식, 양식. 전부 있으니 볼 만 할 겁니다.”

 

 

“…상현씨, 여자 놀리는 취미라도 갖고 계시나요? 그런 줄은 몰랐는데.”

 

 

“지금 제가 하연씨를 상대로 장난치는 것 같습니까?”

 

 

“아뇨. 전혀요.”

 

 

 

농담을 할 때조차도 비서라는 직책을 철저히 기억하고 있는 사람.

 

 

상현은 빙글거리며 말하지도 않았고,

 

어조를 달리해 장난스러운 말투를 하는 적도 결코 없었다.

 

 

심지어 엉뚱한 요리책을 전해줄 때조차도

 

마치 서류뭉치를 건네주는 것처럼 행동했다.

 

 

직업병에 걸려도 단단히 걸린 것 같다고 생각하며 하연은

 

상현에게서 요리책들을 건네받았다.

 

 

“제가 오지 않는 며칠 사이에 도련님께서는 잘 지내셨습니까?”

 

 

“네? 아, 네…네. 느, 늘 그렇죠!”

 

 

“근데 하연씨는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노, 놀라긴요. 도련님께서는 잘 지내셨어요.

 

화도 안 내시고, 불편하신 곳도 없었고, 잠도 편안히 주무시는 것 같구요.”

 

 

“…하연씨가 곁에서 잘 돌봐 드렸나 보군요.”

 

 

 

상현은 하연의 방을 나서기 전 하연의 마음이 뜨끔할 만한 말을 기어이 하고 나갔다.

 

 

의미심장한 상현의 말을 들은 하연은

 

괜시리 속마음이 들켜버린 것 같아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진하연, 너 왜 이래. 맙소사!

 

민혁씨가 했던 말만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거리는 건 또 뭐람.

 

확실히 이상했다.

 

 

 

☆★☆

 

 

 

 민혁의 방으로 들어서던 상현은

 

그 자리에 꽁꽁 얼어붙은 듯 멈춰섰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장면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얼마나 놀랐는지 어떤 상황에도 꿈쩍하지 않던 상현도

 

안경을 벗고 손으로 두 눈을 쓱쓱 비볐을 정도였다.

 

 

 

“…들어오지 않을 거면 그 문 닫고 나가!”

 

 

 

문!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날아드는 냉랭한 민혁의 목소리에 번쩍 정신을 차린 상현은

 

자기가 문을 닫지도 않은 채

 

한 발을 방 안에 걸쳐놓고 그대로 얼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황급히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민혁은 하고 있던 일에 열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제가 오지 않은 삼 일 사이에…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보고나 해!”

 

 

“…예상외로 D-day가 앞당겨질 것 같습니다.”

 

 

“음, 그래. 가속도가 붙었군.”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한 뒤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게다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변수가 생기는 바람에 더 가속화된 것 같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변수?”

 

 

“독일 게른하르트사에서 계약을 번복하고 나섰습니다.”

 

 

“…잘됐군. 모레쯤이면 천국이 붕괴되는 건가?”

 

 

“…예. 그렇습니다.”

 

 

 

천국붕괴.

 

민혁이 준비한 시나리오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천국이 붕괴된다면 이야기의 결말은

 

거의 다 드러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치밀하고 조심스럽게 진행된 시나리오의 결론은

 

이미 민혁이 원하는 방향대로 움직여지고 있었다.

 

 

끝을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열과 성을 다해 공들여 쌓은 성이 무너지는 것을

 

코앞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심정.

 

 

지옥과도 같은 끔찍한 망연자실함을

 

그들에게 고스란히 돌려주고 있는 것이었다.

 

 

보고를 끝마친 상현은 그제서야 긴장을 풀며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상현은 눈으로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아직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다 태워버리시지 않았습니까?”

 

 

“완전한 소멸은 없어. 더구나 일부러 내가 남겨둔 이상은!”

 

 

“더 필요하신 게 있다면 말씀하십시오.”

 

 

“없어. 하지만…조금 더 진행되면 부족한 색이 있을지도.”

 

 

 

민혁은 캔버스 위에 열심히 붓을 놀리고 있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기름냄새가 상현은 왠지 반가웠다.

 

 

다시 붓을 잡은 민혁의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좀처럼 유난을 떨지 않는 성격의 상현이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함성을 지르며 덩실덩실 춤을 췄을지도 몰랐다.

 

 

사실 민혁은 오래 전, 그림 실력에 있어서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낼 정도였다.

 

 

그냥 잘 그린다는 말로 설명하기엔 터무니 없이 부족한 '재능'.

 

잔재주가 아닌 재능.

 

 

그러한 재능마저도 절망 속으로 처박아 놓던 민혁이 아니었던가.

 

 

 

“역시 도련님은 그림을 전공하셨어야 했습니다.”

 

 

“…아직 안 나가고 있었나?”

 

 

“잠시만…더 있게 해주십시오. 방해는 하지 않겠습니다.”

 

 

“…방해는 이미 하고 있잖아! 좋을대로.”

 

 

 

아직 시작단계에 불과하지만 윤곽만으로도

 

상현은 민혁이 그리고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 대번에 알아냈다.

 

 

진하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

 

 

사람 형상을 겨우 갖출락 말락 하는 단계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아내는 상현의 눈썰미 또한 날카로웠다.

 

 

아무렇게나 치덕치덕 물감을 바르고 있는 듯한 민혁의 손놀림.

 

 

하지만 그 손놀림이 반복되면 될수록 얼마나 대단한 작품이 되는지는

 

상현 스스로 더 잘 알고 있었다.

 

 

 

“…필요하시다면 불러 올까요?”

 

 

“무슨 소리야?”

 

 

“모델 말입니다. 진하연씨요.”

 

 

“아무리 조상현이라 해도 넘치는 참견은 못참아!”

 

 

“그래도 좀 해야겠습니다. 거슬리셔도 들으십시오.”

 

 

“…해 봐!”

 

 

“왜 자꾸 진하연씨와 일정한 거리를 두시려고 합니까?

 

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진하연씨도 그렇고 도련님, 아니 선배도 그렇고!

 

이렇게 답답하신 분 아니잖습니까!”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지?”

 

 

 

“정말 몰라서 물으십니까? 진하연씨 좋은 사람이라는 거 선배가 더 잘 알지 않습니까!”

 

 

“거기까지. 더 이상의 참견은 참기 힘들어. 나가 봐!”

 

 

 

이쯤 되면 어느 정도 동요할 법도 한데.

 

 

땅에 깊이 박혀버린 바윗돌처럼 민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민혁은 그저 무심히 붓만 열심히 움직일 뿐이었다.

 

 

그리고 상현도 답답한 표정 그대로 민혁의 등 뒤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윽고 어느 정도 흥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상현이 말했다.

 

 

 

“…언젠가 제게 하신 말씀 기억하십니까?”

 

 

“…아니.”

 

 

“음악과 그림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도대체 왜 시간만 흘려보내는 그림을 그리느냐고 묻는 제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르겠는데.”

 

 

“시치미 떼실 생각 하지 마십시오. 지금 도련님께서 그리는 그림이 뭡니까?

 

진하연씨 아닙니까.

 

화가는 그리고 싶지 않은 그림을 절대 그리지 않고,

 

음악가는 마음에 들지 않은 음악은 절대 연주할 수 없다고 하셨잖습니까.”

 

 

 

이젠 아예 상현이 무슨 말을 지껄이든 아무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민혁이 대꾸조차 하지 않고서 팔레트 위에 물감을 으깨는 걸 보면.

 

 

상현의 말은 정확했다.

 

지금 민혁의 마음은 하연을 향해 서서히 열리고 있는 중이었다.

 

 

다만 사실로 인정하고 있지 않을 뿐.

 

그래서 상현은 더더욱 답답했다.

 

 

말이 먹혀들지 않는 민혁의 태도에 지친 상현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을 때, 민혁은 리모콘을 작동시켜

 

프로코피예프 교향곡이 흘러나오도록 했다.

 

 

그것은 일종의 경고였다.

 

한 마디만 더 꺼내면 폭발하겠다는 경고.

 

 

상현은 민혁의 경고를 순순히 받아들이고는 뒤돌아섰다.

 

 

하지만 상현이 한 걸음 남겨두고

 

방을 나가기 전 민혁이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한 마디를 던졌다.

 

 

 

“시기적절한 때! 그 때가 아냐, 지금은. 시기적절한 때가 되면 한 번 생각해 보지.”

 

 

 

이미 때는 왔습니다!

 

시기적절 찾으시다가 후회라도 하시면 어쩌렵니까!

 

 

괜시리 상현은 민혁의 방문에다 대고 신경질을 벅벅 부렸다.

 

 

쾅 하고 문을 닫아 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답답함에 화가 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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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에 여러 님들께서 느끼신 긴장이 너무나 커서...

 

그 떨림의 잔상이 아직도 남아...자칫 오늘 올릴 글이 와닿지 않을까봐

 

또 다시 염려하고 있답니다. ^^

 

 

혼자만의 공간에서 한 사람을 캔버스 위에 담고 있는 남자의 모습...

 

그걸 담아내고 싶었답니다.

 

 

빗줄기 가로긋는 어두운 밤...제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의 가슴 속에

 

사랑의 기억과 사랑의 추억이 가득차길 바라며...미강이는 이만 총총총 물러갑니다~

 

(아시죠? ^^ 지난 이야기에 빠짐없이 댓글 달아 놓는 거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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