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거래와 동맹 “헉, 헉.” 이제는 완전히 일상이 되어버린 일이었다. 오늘도 수상한 그림자를 발견하자마자 윤의 손을 잡고 도망치는 유진이 때문에 윤은 점심도 걸러야 했다. ‘배고프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면 유진이가 미안해하겠지? 참았다가 집에 가서 먹자.’ ‘아무래도 화성에서 누군가 온 것 같군. 포위방법이 치밀해졌어. MIB라면 이렇게 집요하게 쫓지 않을 거야. 걱정이군. 화성에서 온 거라면 결코 포기하지 않을 텐데.’ 꼬르르륵~ 갑자기 배에서 울리는 소리에 윤이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제서야 유진은 윤이 아침도 늦어서 못 먹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제, 젠장. 왜 하필 지금 울리고 난리야? 그것도 이렇게 큰소리로...’ “이런, 미안하다.” 난처한 듯한 유진의 표정에 윤은 다시 한번 자신의 배를 원망했다. ‘안 그래도 심난할 텐데. 이구, 이 눈치도 없는 것.’ 그때였다. 다시 한번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자신의 배를 감싼 윤은 유진의 얼굴이 붉게 물든 것을 발견했다. “너냐?” “응.” 윤은 큰소리로 웃었다.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던 유진도 따라서 웃고 말았다. “집에 가자.” “응.” 둘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 ‘아직 완전히 물러난 게 아니야. 이 근처에서 나를 보고 있겠지. 다행히 여기는 사람들이 많으니 쉽게 접근하지 못 하는 것뿐이야. 어떻게 하지? 이대로 윤이를 보내고 그들을 만나봐야 하는 건가? 아니, 메쉬 장로라면 어느 정도 물리적인 수단도 불사할 위인이니...’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던 유진은 문득 눈앞에 내밀어진 솜사탕을 발견했다. “뭐야?” “일단 허기라도 달래자 싶어서. 아무리 공원이라지만 솜사탕뿐이라니. 포장마차도 하나 없고.” “그래. 만득이 핫도그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걸.” 유진과 윤은 공유하는 서로 다른 기억을 떠올렸다. “저기 말야, 이런 말 한다고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고 들어줘.” “뭔데? 말해봐.” 윤은 갑자기 뚫어지게 유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뭐 묻었어?” “아니, 그게 아니라... 됐어. 그만 두자.” “왜 그래? 말을 하다 말고. 궁금하잖아. 말해봐.” “그만 둘래. 진짜 이상한 소리가 되어버릴 거 같아.” “이상한 소리라면 나도 엄청 한 거 같은데. 그러지 말고 말해. 진짜 궁금하단 말야.” 윤은 휴우 한숨을 쉬더니 벤치에 앉았다. “그때 내가 말했던 거 기억해?” “뭐?” “전에 내가 ‘사랑의 집’에서 했던 말 기억해? 조그만 애가 울고 있다고...” “응.” ‘당연히 기억하지. 네 무의식이 날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인데. 내가 그 소리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너는 모르겠지만.’ “요즘 그 꿈을 꾸는데... 이상하게 그 얼굴이 너인 거야. 어렸을 때 얼굴도 아니고 지금 네 얼굴.” “지금 내 얼굴?” “응. 에휴, 말 나온 김에 다 하자.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들어.” “이상한 기분이라니?” “딱 꼬집어서 말하긴 곤란한데... 그냥 그런 기분. 너를 보면 뭔가 생각날 듯하다가 사라지거든. 그러면 너무 속이 상해서... 그래서 그런 거야.” “그런 거라니?” “너한테 괜히 화내고 짜증 부린 거 미안하다고.” “윤아...” 유진은 가슴 속에 이는 격동을 참지 못하고 윤을 끌어안았다. 놀란 윤이 밀어내려고 했지만 유진은 완강했다. 결국 포기한 윤은 유진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괜찮아. 내가 잘못한 거니까... 내가 그런 거니까 너는 그래도 괜찮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이없다는 듯 웃어버리는 윤이었지만 유진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미안해, 미안해. 너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하게 해서 미안해. 너한테서 지워버린 게 내게만 소중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어. 비겁해서 미안해. 너한테 미움받을까봐 무서워서... 솔직하지 못할 나도 용서해. 미안하다, 윤아. 정말 미안해.’ **************************** 유진을 뒤쫓던 검은 그림자는 밤이 되자 숙소로 물러났다. 마음이 급한 건 화성인들 뿐, MIB요원들은 당연하다는 듯 6시가 되자 퇴각을 건의해 왔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아 물러났던 화성의 사절이었지만 방으로 돌아온 후로는 매섭게 따지고 들었다. “도움을 주러 오신 겁니까, 아니면 방해하려 하시는 겁니까?” “그게...” 관장이 했던 말을 상기한 부관은 복잡한 내심을 감추고 얼굴을 굳혔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유진님을 지척에 두고도 보기만 했던 것은 지구인들에게 알리지 말아 달라는 당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진님이 혼자가 되실 때를 기다리지 않는다면 문제는 간단하겠지요. 하지만 그러지 않은 것은 지구를 배려해서였습니다. 이제 겨우 유진님을 따라잡는다 했는데 철수하는 이유가 뭡니까?” 화성의 사절, 지난은 화가 많이 난 듯 했다. 부관은 원망스럽게 자신의 상관을 상기하며 머리를 굴렸다. 뭐라고 해도 상관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이다. “지구의 사정을 보아주신다면 이것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지구에는 근무시간이라는 게 있어서 오후 6시가 되면 모든 일을 다음 날로 미루는 것이 관습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 화성과 다른 점을 이해해 달라는 부탁밖에 드릴 수가 없군요.” “이만 됐습니다. 내일부터는 오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내쳐진 부관은 닫힌 방문을 바라보다 머리를 긁적였다. “휴우... 관장님이 아시면 경을 칠 텐데...” ** 지구인들을 모두 돌려보낸 사절들은 회의를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상 지구인들의 도움은 바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들의 의도가 뭔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그들에게서 협력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이다. 누구 좋은 생각 없나?” 대표인 지난이 묻자 생각에 잠겨있던 페브리가 불쑥 물었다. “유진님께서 지구에 머무시는 이유가 뭘까요?” 메쉬 장로의 오른팔로서 머리를 쓰는데 능한 자다. 지난이 우직한 충신 타입이라면 페브리는 권모술수에 능한 책사였다. “지구에서 살고 싶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지구에서 살고 싶은 데는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가령 오늘 저희가 본 그 지구인이라던가.” “곁에 있던 그 여자를 말하는 건가?” “유진님께서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터득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보고서를 읽어보니 실제로 그걸 알게 되었다고 쓰여 있더군요. 그렇다면 유진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렇지. 그렇군. 그럼 그 여자가 유진님이 사랑하게 된 지구인이라는 건가?”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유진님이 정 화성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신다면 여자를 데리고 돌아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화성의 모든 것을 버리고 지구로 오신 유진님이니 그 여자가 화성에 있다면 화성으로 돌아오시겠지요.” 페브리의 말에 지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야. 하지만 과연 유진님께서 그 여자를 위해 순순히 화성으로 오실지는 모르겠군.” “사랑이라는 것이 유진님 말씀대로 가치가 있다면 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입니다.” 생각에 잠겨있던 지난은 눈을 빛냈다. “좋아, 내일부터 추적은 유진님이 아니라 그 여자로 목표를 바꾼다.” ************************ “전하, 아직 기침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굳게 닫힌 방문 앞에서 라니의 시녀들은 울상을 지었다. “어쩌면 좋지?” “함부로 들어갔다가 경을 칠지 모르는데.” “하지만 이렇게 늦잠을 주무시는 건 전례없던 일이라...” 서성이는 시녀들을 발견한 위병대장이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실은 전하께서 아직 기척이 없으십니다.” “뭐라고?” 위병대장은 순간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어제 전하께서 언제 방으로 돌아가셨지?’ “이봐, 어제 전하께서 방에 언제 들어가셨는가?” “글쎄요...” 그제서야 위병대장은 파랗게 질렸다. “어제 분명히 창 앞으로 가셨던 것은 기억나지만... 전하의 침대를 정리하고 전하가 납시지 않은 것도 몰랐다는 건가?” “어제 전하의 심기가 몹시 불편해 보여 저희들은 방을 정리한 뒤 물러났습니다. 눈에 띄면 역정을 내시는지라...” “앗! 장군! 무슨 짓을!” 위병대장은 라니의 침실 문을 열어젖혔다. “이 무슨 불경한 짓을... 아니되옵니다!” 시녀들이 몸으로 막아서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간 그는 빈 침대를 보고 새파랗게 질렸다. 따라 들어온 시녀들 역시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게 무슨!” 위병 대장은 그제서야 변이 생긴 줄 알고 달려오는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당장 추적기를 가져오라!” “추적기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교란기가 켜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대장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소중하고 소중한 왕녀시다. 라탄에 있어서는 더할 수 없이 귀한 존재인 것이다. 설마 왕녀가 제 발로 숙소를 빠져나갔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하는 대장이었다. 그의 머리속이 온통 불길한 상상으로만 가득 찼다. ‘누구일까? 왕녀께서는 라탄의 별궁에 요양 중이신 것으로 되어 있다. 저항군들이 아직 이 사실을 알았을 리 없건만. 정보상인들의 네트에도 별다른 소식이 없어 안심하고 있었는데... 이 일을 어찌해야 하는가!’ “MIB에 기별을 넣어라. 내가 직접 가겠다.” ** “왜 안 간다는 거야? 집에 가고 싶지 않아?” 달래는 온의 말에도 라니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뭐하는 거냐?” “아, 형. 라니가 죽어도 집에 안 가겠다지 뭐야. 부모님이 걱정하실 텐데.” 기가 막힌 한이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 “너 바보냐?” “또 그런다. 형 눈에는 내가 정말 바보로 보여?” “응.” 단호한 한의 말에 온은 상처받은 가슴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안 간다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내버려둬.” “하지만... 얘 가족들은 찾고 있을 거 아니야.” “유진이한테 물어봐. 연락해도 되는지.” “왜 그걸 유진이한테 물어?” “너 바보 맞다. 라니, 이리 와서 저녁 만드는 거나 거들어라. 바보랑 있으면 전염된다.” “형!” 라니는 얼른 뛰어 한에게로 갔다. ‘좀 무섭지만 적어도 귀찮진 않으니까.’ “라니! 너마저...” 카이사르의 대사를 마지막으로 온은 그 자리에 푹 쓰러졌다. 그 등을 한이 사정없이 밟고 지나갔다. 뒤에서 들리는 처절한 비명을 배경음악삼아 즐겁게 웃는 한의 얼굴에 라니는 조금 공포를 느꼈다. “이게 숟가락, 이게 젓가락. 젓가락은 두개가 한 쌍이야.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람 수대로 한 자리에 하나씩 놓는 거야. 여섯 개를 놓으면 되겠지?” 한의 설명을 들은 라니는 조심스럽게 숟가락과 젓가락을 놓았다. ‘왕녀인 내가 이런 짓이나 하고 있어야 하다니... 하지만 역시 이 사람은 어려워.’ “그래, 유진이랑은 무슨 거래를 했지?” “네?” 놀란 라니가 한을 올려다보았지만 한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유진이랑 관계있다면 너도 지구인은 아닐 테지. 저 바보는 모르는 것 같지만. 꽤 귀한 신분이신 것 같은데 정말 연락하지 않아도 괜찮겠어?” “알고 있었어?” “나 눈치가 꽤 빠르거든.” “알고 있다니 편하게 이야기하도록 하지. 난 라탄의 왕녀로 유진님의 약혼자야.” “그런 소리는 못 들었는데. 뭐 어쨌건 상관없어. 그래서?” “유진님은 나와 결혼해야 해. 그것이 라탄과 화성을 위하는 길이니까.” “내가 물은 건 그게 아닌데.” “화성과 지구는 유진님의 눈치를 보느라 강압적인 수단을 사용하지 못하지만 라탄은 달라. 특히 내 위병대장은 나의 안전이 최우선이라 나를 라탄으로 데려갈 수만 있다면 유진님을 강제로 끌고 가는 데에도 전혀 거리낌이 없는 인물이지. 그래서 나는 라탄과 연락하지 않기로 한 거야.” “대신 유진이는?” “내 감시하에 놓이는 거지.” “그다지 너한테 유리할 게 없는 조건인데?” “글쎄, 그럴까?” 싱긋 웃는 라니의 얼굴에 한이 슬쩍 비웃음을 띄웠다. “윤이한테 손대는 것만 아니라면 뭐든 눈감아주지. 안 그래도 유진이 녀석, 미적거리는 게 지겨워지기 시작한 참이니까.” “좋아. 약속하지.” 한과 라니는 자신과 똑같은 존재에 대한 혐오감과 시원하게 말이 통하는 즐거움을 함께 느끼며 동맹성립의 미소를 지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비야님, 호홋, 윤이랑 유진이가 역사가 있는데 설마 라니땜에 갈라지기야 하겠어요? 비록 첩첩산중이지만... ^^;; 그리고 표는 한 사람에 한 표랍니다. ㅋㅋㅋ 봄꽃님, 헉, 제가 그런 소리를 들을까봐 얼마나 조심했는데...-_-;; 온이는 그냥 '소녀'에 열광하는 것 뿐이랍니다. 강아지를 좋아하는 거나 별 차이가 없어요. 라니한텐 실례인가... ^^;; 희동이마을님, 애정문제에 있어 열쇠가 따로 있겠어요? 그냥 마음가는 대로 하는 거죠. ^^ 어떻게 풀려갈지는 저도 아직 잘 모르겠네요. 시온님, 아하, 님 딱 걸렸어요~! 저도 독촉! 좀 해 보겠네요. 캬캬캬 도망가셔도 지구끝까지 추격할 겁니다. ^^ 윤호사랑해님. ㅎㅎㅎ 님 덕택에 라엘님한테서 한이 사수 성공했어요. 감사합니다~ 그러나 라엘님이 절대 포기하지 않으실듯. -_-;; 계속 비가 오는데요, 시원해서 좋기는 한데 침수되는 곳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에궁, 언제나 그런 소식 안 들을 수 있을지. 꽃송이님, ㅎㅎㅎㅎ 한이는 지금 저와 라엘님이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고 있어요. ^^절대 다른 여자 못 줍니다. ㅋㅋㅋㅋ 기억제거약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시는데요. 간단히 설명을 드리자면, 부작용 있고 해약 없습니다. 윤이가 가물가물 뭔가 생각해 내는 건 부작용이죠. ^^ 하지만 외계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부정하게 되니까 그에 관련된 기억들을 못해내는 거지요. 밥풀님, ㅎㅎㅎ 그게 작가의 횡포라는 거지요. ^^ 뭐, 제가 이겨서 한이 차지하게 되면 한이가 세컨드를 봐줄리 없으니... 버려야 하나. -_-;; 관장님도 좋은데. 사각관계라고 하기도 민암합니다만... 뭐 어떻게 되겠죠. (뻔뻔) -_- 라엘님, 헉, 저 패시게요? *_* 생일도 지난지 오래니 그 빵은 안 먹기로 하겠습니다. ^^;; 그리고 한이는... 역시 포기할 수 없어욧~! 넘본게 아니라 처음부터 제거였단 말입니다. 엉엉엉 수정맘님,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새벽에 깜짝 놀랐지 뭐예요. 저희 집은 전창이라서 비 감상하기는 좋은데 요즘 그럴 정신이 없네요. 슬퍼라. 여름이 다 가기전에 한번 나가봐야 할텐데 계속 비가 와서 그럴 수도 없네요. ㅠ.ㅠ
[2nd] #13 화성에서 온 왕자님
13. 거래와 동맹
“헉, 헉.”
이제는 완전히 일상이 되어버린 일이었다.
오늘도 수상한 그림자를 발견하자마자
윤의 손을 잡고 도망치는 유진이 때문에 윤은 점심도 걸러야 했다.
‘배고프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면 유진이가 미안해하겠지?
참았다가 집에 가서 먹자.’
‘아무래도 화성에서 누군가 온 것 같군. 포위방법이 치밀해졌어.
MIB라면 이렇게 집요하게 쫓지 않을 거야.
걱정이군. 화성에서 온 거라면 결코 포기하지 않을 텐데.’
꼬르르륵~
갑자기 배에서 울리는 소리에 윤이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제서야 유진은 윤이 아침도 늦어서 못 먹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제, 젠장. 왜 하필 지금 울리고 난리야? 그것도 이렇게 큰소리로...’
“이런, 미안하다.”
난처한 듯한 유진의 표정에 윤은 다시 한번 자신의 배를 원망했다.
‘안 그래도 심난할 텐데. 이구, 이 눈치도 없는 것.’
그때였다. 다시 한번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자신의 배를 감싼 윤은 유진의 얼굴이 붉게 물든 것을 발견했다.
“너냐?”
“응.”
윤은 큰소리로 웃었다.
민망한 듯 고개를 숙였던 유진도 따라서 웃고 말았다.
“집에 가자.”
“응.”
둘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
‘아직 완전히 물러난 게 아니야. 이 근처에서 나를 보고 있겠지.
다행히 여기는 사람들이 많으니 쉽게 접근하지 못 하는 것뿐이야.
어떻게 하지? 이대로 윤이를 보내고 그들을 만나봐야 하는 건가?
아니, 메쉬 장로라면 어느 정도 물리적인 수단도 불사할 위인이니...’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던 유진은 문득 눈앞에 내밀어진 솜사탕을 발견했다.
“뭐야?”
“일단 허기라도 달래자 싶어서.
아무리 공원이라지만 솜사탕뿐이라니. 포장마차도 하나 없고.”
“그래. 만득이 핫도그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걸.”
유진과 윤은 공유하는 서로 다른 기억을 떠올렸다.
“저기 말야, 이런 말 한다고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말고 들어줘.”
“뭔데? 말해봐.”
윤은 갑자기 뚫어지게 유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뭐 묻었어?”
“아니, 그게 아니라... 됐어. 그만 두자.”
“왜 그래? 말을 하다 말고. 궁금하잖아. 말해봐.”
“그만 둘래. 진짜 이상한 소리가 되어버릴 거 같아.”
“이상한 소리라면 나도 엄청 한 거 같은데.
그러지 말고 말해. 진짜 궁금하단 말야.”
윤은 휴우 한숨을 쉬더니 벤치에 앉았다.
“그때 내가 말했던 거 기억해?”
“뭐?”
“전에 내가 ‘사랑의 집’에서 했던 말 기억해? 조그만 애가 울고 있다고...”
“응.”
‘당연히 기억하지. 네 무의식이 날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인데.
내가 그 소리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너는 모르겠지만.’
“요즘 그 꿈을 꾸는데... 이상하게 그 얼굴이 너인 거야.
어렸을 때 얼굴도 아니고 지금 네 얼굴.”
“지금 내 얼굴?”
“응. 에휴, 말 나온 김에 다 하자.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자꾸 이상한 기분이 들어.”
“이상한 기분이라니?”
“딱 꼬집어서 말하긴 곤란한데... 그냥 그런 기분.
너를 보면 뭔가 생각날 듯하다가 사라지거든.
그러면 너무 속이 상해서... 그래서 그런 거야.”
“그런 거라니?”
“너한테 괜히 화내고 짜증 부린 거 미안하다고.”
“윤아...”
유진은 가슴 속에 이는 격동을 참지 못하고 윤을 끌어안았다.
놀란 윤이 밀어내려고 했지만 유진은 완강했다.
결국 포기한 윤은 유진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괜찮아. 내가 잘못한 거니까... 내가 그런 거니까 너는 그래도 괜찮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이없다는 듯 웃어버리는 윤이었지만 유진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미안해, 미안해. 너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하게 해서 미안해.
너한테서 지워버린 게 내게만 소중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어.
비겁해서 미안해. 너한테 미움받을까봐 무서워서...
솔직하지 못할 나도 용서해. 미안하다, 윤아. 정말 미안해.’
****************************
유진을 뒤쫓던 검은 그림자는 밤이 되자 숙소로 물러났다.
마음이 급한 건 화성인들 뿐, MIB요원들은 당연하다는 듯 6시가 되자 퇴각을 건의해 왔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아 물러났던 화성의 사절이었지만
방으로 돌아온 후로는 매섭게 따지고 들었다.
“도움을 주러 오신 겁니까, 아니면 방해하려 하시는 겁니까?”
“그게...”
관장이 했던 말을 상기한 부관은 복잡한 내심을 감추고 얼굴을 굳혔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유진님을 지척에 두고도 보기만 했던 것은
지구인들에게 알리지 말아 달라는 당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진님이 혼자가 되실 때를 기다리지 않는다면 문제는 간단하겠지요.
하지만 그러지 않은 것은 지구를 배려해서였습니다.
이제 겨우 유진님을 따라잡는다 했는데 철수하는 이유가 뭡니까?”
화성의 사절, 지난은 화가 많이 난 듯 했다.
부관은 원망스럽게 자신의 상관을 상기하며 머리를 굴렸다.
뭐라고 해도 상관의 명령은 절대적인 것이다.
“지구의 사정을 보아주신다면 이것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지구에는 근무시간이라는 게 있어서 오후 6시가 되면
모든 일을 다음 날로 미루는 것이 관습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 화성과 다른 점을 이해해 달라는 부탁밖에 드릴 수가 없군요.”
“이만 됐습니다. 내일부터는 오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내쳐진 부관은 닫힌 방문을 바라보다 머리를 긁적였다.
“휴우... 관장님이 아시면 경을 칠 텐데...”
**
지구인들을 모두 돌려보낸 사절들은 회의를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상 지구인들의 도움은 바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들의 의도가 뭔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그들에게서 협력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이다. 누구 좋은 생각 없나?”
대표인 지난이 묻자 생각에 잠겨있던 페브리가 불쑥 물었다.
“유진님께서 지구에 머무시는 이유가 뭘까요?”
메쉬 장로의 오른팔로서 머리를 쓰는데 능한 자다.
지난이 우직한 충신 타입이라면 페브리는 권모술수에 능한 책사였다.
“지구에서 살고 싶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지구에서 살고 싶은 데는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가령 오늘 저희가 본 그 지구인이라던가.”
“곁에 있던 그 여자를 말하는 건가?”
“유진님께서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터득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보고서를 읽어보니 실제로 그걸 알게 되었다고 쓰여 있더군요.
그렇다면 유진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렇지. 그렇군. 그럼 그 여자가 유진님이 사랑하게 된 지구인이라는 건가?”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유진님이 정 화성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신다면
여자를 데리고 돌아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화성의 모든 것을 버리고 지구로 오신 유진님이니
그 여자가 화성에 있다면 화성으로 돌아오시겠지요.”
페브리의 말에 지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야.
하지만 과연 유진님께서 그 여자를 위해 순순히 화성으로 오실지는 모르겠군.”
“사랑이라는 것이 유진님 말씀대로 가치가 있다면
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입니다.”
생각에 잠겨있던 지난은 눈을 빛냈다.
“좋아, 내일부터 추적은 유진님이 아니라 그 여자로 목표를 바꾼다.”
************************
“전하, 아직 기침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굳게 닫힌 방문 앞에서 라니의 시녀들은 울상을 지었다.
“어쩌면 좋지?”
“함부로 들어갔다가 경을 칠지 모르는데.”
“하지만 이렇게 늦잠을 주무시는 건 전례없던 일이라...”
서성이는 시녀들을 발견한 위병대장이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실은 전하께서 아직 기척이 없으십니다.”
“뭐라고?”
위병대장은 순간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어제 전하께서 언제 방으로 돌아가셨지?’
“이봐, 어제 전하께서 방에 언제 들어가셨는가?”
“글쎄요...”
그제서야 위병대장은 파랗게 질렸다.
“어제 분명히 창 앞으로 가셨던 것은 기억나지만...
전하의 침대를 정리하고 전하가 납시지 않은 것도 몰랐다는 건가?”
“어제 전하의 심기가 몹시 불편해 보여 저희들은 방을 정리한 뒤 물러났습니다.
눈에 띄면 역정을 내시는지라...”
“앗! 장군! 무슨 짓을!”
위병대장은 라니의 침실 문을 열어젖혔다.
“이 무슨 불경한 짓을... 아니되옵니다!”
시녀들이 몸으로 막아서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간 그는
빈 침대를 보고 새파랗게 질렸다.
따라 들어온 시녀들 역시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게 무슨!”
위병 대장은 그제서야 변이 생긴 줄 알고 달려오는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당장 추적기를 가져오라!”
“추적기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교란기가 켜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대장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소중하고 소중한 왕녀시다. 라탄에 있어서는 더할 수 없이 귀한 존재인 것이다.
설마 왕녀가 제 발로 숙소를 빠져나갔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하는 대장이었다.
그의 머리속이 온통 불길한 상상으로만 가득 찼다.
‘누구일까? 왕녀께서는 라탄의 별궁에 요양 중이신 것으로 되어 있다.
저항군들이 아직 이 사실을 알았을 리 없건만.
정보상인들의 네트에도 별다른 소식이 없어 안심하고 있었는데...
이 일을 어찌해야 하는가!’
“MIB에 기별을 넣어라. 내가 직접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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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안 간다는 거야? 집에 가고 싶지 않아?”
달래는 온의 말에도 라니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뭐하는 거냐?”
“아, 형. 라니가 죽어도 집에 안 가겠다지 뭐야. 부모님이 걱정하실 텐데.”
기가 막힌 한이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
“너 바보냐?”
“또 그런다. 형 눈에는 내가 정말 바보로 보여?”
“응.”
단호한 한의 말에 온은 상처받은 가슴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안 간다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내버려둬.”
“하지만... 얘 가족들은 찾고 있을 거 아니야.”
“유진이한테 물어봐. 연락해도 되는지.”
“왜 그걸 유진이한테 물어?”
“너 바보 맞다. 라니, 이리 와서 저녁 만드는 거나 거들어라.
바보랑 있으면 전염된다.”
“형!”
라니는 얼른 뛰어 한에게로 갔다.
‘좀 무섭지만 적어도 귀찮진 않으니까.’
“라니! 너마저...”
카이사르의 대사를 마지막으로 온은 그 자리에 푹 쓰러졌다.
그 등을 한이 사정없이 밟고 지나갔다.
뒤에서 들리는 처절한 비명을 배경음악삼아 즐겁게 웃는 한의 얼굴에 라니는 조금 공포를 느꼈다.
“이게 숟가락, 이게 젓가락. 젓가락은 두개가 한 쌍이야.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람 수대로 한 자리에 하나씩 놓는 거야. 여섯 개를 놓으면 되겠지?”
한의 설명을 들은 라니는 조심스럽게 숟가락과 젓가락을 놓았다.
‘왕녀인 내가 이런 짓이나 하고 있어야 하다니... 하지만 역시 이 사람은 어려워.’
“그래, 유진이랑은 무슨 거래를 했지?”
“네?”
놀란 라니가 한을 올려다보았지만 한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유진이랑 관계있다면 너도 지구인은 아닐 테지. 저 바보는 모르는 것 같지만.
꽤 귀한 신분이신 것 같은데 정말 연락하지 않아도 괜찮겠어?”
“알고 있었어?”
“나 눈치가 꽤 빠르거든.”
“알고 있다니 편하게 이야기하도록 하지.
난 라탄의 왕녀로 유진님의 약혼자야.”
“그런 소리는 못 들었는데. 뭐 어쨌건 상관없어. 그래서?”
“유진님은 나와 결혼해야 해. 그것이 라탄과 화성을 위하는 길이니까.”
“내가 물은 건 그게 아닌데.”
“화성과 지구는 유진님의 눈치를 보느라
강압적인 수단을 사용하지 못하지만 라탄은 달라.
특히 내 위병대장은 나의 안전이 최우선이라
나를 라탄으로 데려갈 수만 있다면
유진님을 강제로 끌고 가는 데에도 전혀 거리낌이 없는 인물이지.
그래서 나는 라탄과 연락하지 않기로 한 거야.”
“대신 유진이는?”
“내 감시하에 놓이는 거지.”
“그다지 너한테 유리할 게 없는 조건인데?”
“글쎄, 그럴까?”
싱긋 웃는 라니의 얼굴에 한이 슬쩍 비웃음을 띄웠다.
“윤이한테 손대는 것만 아니라면 뭐든 눈감아주지.
안 그래도 유진이 녀석, 미적거리는 게 지겨워지기 시작한 참이니까.”
“좋아. 약속하지.”
한과 라니는 자신과 똑같은 존재에 대한 혐오감과
시원하게 말이 통하는 즐거움을 함께 느끼며 동맹성립의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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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야님, 호홋, 윤이랑 유진이가 역사가 있는데 설마
라니땜에 갈라지기야 하겠어요?
비록 첩첩산중이지만... ^^;;
그리고 표는 한 사람에 한 표랍니다. ㅋㅋㅋ
봄꽃님, 헉, 제가 그런 소리를 들을까봐 얼마나 조심했는데...-_-;;
온이는 그냥 '소녀'에 열광하는 것 뿐이랍니다.
강아지를 좋아하는 거나 별 차이가 없어요.
라니한텐 실례인가... ^^;;
희동이마을님, 애정문제에 있어 열쇠가 따로 있겠어요?
그냥 마음가는 대로 하는 거죠. ^^
어떻게 풀려갈지는 저도 아직 잘 모르겠네요.
시온님, 아하, 님 딱 걸렸어요~!
저도 독촉! 좀 해 보겠네요. 캬캬캬
도망가셔도 지구끝까지 추격할 겁니다. ^^
윤호사랑해님. ㅎㅎㅎ 님 덕택에 라엘님한테서 한이 사수 성공했어요.
감사합니다~ 그러나 라엘님이 절대 포기하지 않으실듯. -_-;;
계속 비가 오는데요, 시원해서 좋기는 한데 침수되는 곳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에궁, 언제나 그런 소식 안 들을 수 있을지.
꽃송이님, ㅎㅎㅎㅎ 한이는 지금 저와 라엘님이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고 있어요. ^^
절대 다른 여자 못 줍니다. ㅋㅋㅋㅋ
기억제거약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시는데요.
간단히 설명을 드리자면, 부작용 있고 해약 없습니다.
윤이가 가물가물 뭔가 생각해 내는 건 부작용이죠. ^^
하지만 외계인이라는 존재에 대해 부정하게 되니까
그에 관련된 기억들을 못해내는 거지요.
밥풀님, ㅎㅎㅎ 그게 작가의 횡포라는 거지요. ^^
뭐, 제가 이겨서 한이 차지하게 되면 한이가 세컨드를 봐줄리 없으니...
버려야 하나. -_-;; 관장님도 좋은데.
사각관계라고 하기도 민암합니다만... 뭐 어떻게 되겠죠. (뻔뻔) -_-
라엘님, 헉, 저 패시게요? *_*
생일도 지난지 오래니 그 빵은 안 먹기로 하겠습니다. ^^;;
그리고 한이는... 역시 포기할 수 없어욧~!
넘본게 아니라 처음부터 제거였단 말입니다. 엉엉엉
수정맘님,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새벽에 깜짝 놀랐지 뭐예요.
저희 집은 전창이라서 비 감상하기는 좋은데
요즘 그럴 정신이 없네요. 슬퍼라.
여름이 다 가기전에 한번 나가봐야 할텐데
계속 비가 와서 그럴 수도 없네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