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준비기간 아주 오랜만에 깊고 달게 잔 것 같았다. 한밤중에 한 두 번은 깨어날 만큼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었는데. 하연은 간밤에 편안한 잠자리를 선뜻 벗어나기가 싫어서 오래도록 포근한 이불 속에 머물러 있었다. 생각해 보면,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편안함과 안락함을 찾아내는 재주가 생긴 자신과 이제는 간간이 따스함을 드러내는 민혁의 눈동자. 집 안에 떠돌아다니는 공기도 달라져 있었다. 거칠고 날카로운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던 민혁의 얼굴에서도 더 이상 딱딱하게 긴장된 차가움을 찾아내기는 힘들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하연은 민혁의 뒷모습, 그리고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민혁의 옆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결코 따스한 표정으로 마주보는 응답 같은 건 없었을지라도 하연은 부드럽게 이완된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게 마냥 좋았다. 똑― 똑― 하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하연은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방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아주머니였다. 여전히 따스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아침 식사가 올려진 쟁반을 든 채 하연의 방으로 들어오셨다. “아주머니, 언제 오셨어요? 당분간 못 오신다고 하셨잖아요. 몸은 괜찮으세요? 무릎이 많이 아프시다면서요? 걸음 걷는 건 괜찮으세요?” 아주머니는 이번에도 눈으로 대답했다. 온 지 얼마 안 됐고, 몸은 움직일 만 하다고. 무릎은 아직도 아픈 듯 살짝 찡그리셨다. 하연은 아주머니 손에 들린 쟁반을 받은 뒤, 혹시라도 불편한 곳은 더 없는 지 아주머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다행히 더 불편한 곳은 없는 듯 했다. “앞머리가 많이 길었어요. 제가 얼른 밥 먹고 밥값으로 대신 해드릴께요. 눈을 찌르면 불편하잖아요.” 아주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번거로움을 끼치기 싫어서 무조건 고개를 가로젓는 사람보다는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도록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훨씬 사려 깊은 사람이다. 하연은 문득 오래 전에 읽었던 어느 책 속의 구절이 떠올랐다. 그 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었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았다. 하연의 마음을 거절하지 않는 사려 깊음.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며 숟가락을 손에 쥐었다. 반찬은 간소했고 깔깔한 아침 입맛을 돋우워 주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찹쌀이 살짝 섞인 약간 질게 지어진 밥을 열심히 먹던 하연은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밥이 좀 질어요. 오늘은 물조절이 잘 안 되셨나봐요.” 사실 하연은 밥을 할 때마다 물조절을 잘 못하곤 했다. 어떤 날은 꼬들한 밥, 어떤 날은 진 밥이 되곤 했더랬다. 그냥 웃으면서 한 말이었는데, 하연은 아주머니의 표정이 조금 심각해지는 것을 보고 내심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하연은 아주머니가 써서 건넨 쪽지를 읽은 뒤, 깜짝 놀랐다. 〔위가 좋지 않을 땐, 진밥이 좋아요. 찹쌀이 싫은가요?〕 “어, 어떻게 아셨어요? 저 위 안 좋은 거요! 신경성 위염도 자주 생기고, 끼니를 제 때 하지 못해서 위가 잘 탈이 나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역시 빙그레 웃기만 하는 아주머니. 민혁을 비롯해서 상현과 아주머니까지 사람의 마음을 특별히 꿰뚫어보는 능력이라도 갖고 있는 건지. 하연은 놀랍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더 열심히 밥을 먹었다. 음식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찬사는 열심히, 맛있게 남기지 않고 먹어주는 거라고 했던가. 하연은 진심 그대로 실천했다. “잘 먹었습니다.” 〔맛있게 먹어줘서 고마워요. 근데 지난번에 나한테 했던 질문 있죠?〕 “무슨 질문이요?” 〔도련님에 관한 질문. 그 질문에 내가 답할 수 있는 건 딱 두 가지 뿐이에요. 불쌍한 사람이라는 거. 그리고 참 좋은 사람이라는 거.〕 “좋은 사람이라는 건 저도 알아요, 이젠. 근데…불쌍한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철저히 배신당한 사람이에요. 한 번도 내색한 적 없지만 난 알아요. 난 목소리를 잃어버린 대신 마음의 소리를 듣는 능력이 생겼죠. 믿음 자체를 두려워해요. 배신당할까봐서.〕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원래부터 사람을 믿지 않거나 지극히 믿었던 사람에게 철저히 배신당했거나. 그래서 결코 마음속에 틈을 남겨두지 않는 거라고 생각 했었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어떤 사람 이길래 한 사람을 그토록 지독하게 상처투성이로 만들만큼 배신을 한 걸까. 그는 분명 상현을 시켜 무슨 일을 꾸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은 어마어마한 일임에 틀림없었고 아주 정성을 들이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배신의 대가를 마련하는 중인 것 같았다. 어렴풋이 그의 마음속에서 언뜻언뜻 분노가 비치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코 터무니없는 분노는 아닌 것 같았다. 하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자 아주머니는 다시 빠르게 쪽지를 써서 건넸다.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 때까지 하연씨가 도련님의 마음을 치료해 줘요.〕 하연은 아주머니가 건넨 쪽지를 들여다보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마음을 치료하는 간병인. 사실 간병인은 엄밀하게 말하면 돌봐주는 역할 일 뿐인데. 의사도 치료하지 못하는 마음의 병을 치료할 수 있을까. 곁에 다가서는 것조차 그토록 힘든데. 그런데 눈길을 붙잡는 한 마디. 얼마 남지 않았다? 뭐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까. 하연은 문득 민혁이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자기가 이 세상에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면 어떨 것 같으냐는 질문. 하연이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 아주머니는 가만히 손가락으로 하연의 입을 가리고는 쟁반을 챙겨서 방을 나갔다. 혹여 전처럼 민혁이 듣는 불상사가 생길까봐서 미리 손가락으로 막은 것이라는 걸 하연도 잘 알고 있었다. 불쌍한 사람. 누군가에게 철저히 배신당한 사람. 그리고 참 좋은 사람. 한참 쪽지를 들여다보던 하연은 문득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달력에 눈길이 갔다. 세상과 격리된 집에서 생활하다 보니 달력을 볼 일이 거의 없었다. 볼품없는 장식용으로 놓여 있던 달력을 집어든 하연은 손가락으로 하루씩 짚어 나갔다. 하루…이틀……열흘…. 한 달이 채워지기까지는 불과 며칠밖에 남지 않았다. 많은 날들이 흘러가버렸다. 두려움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해 하는 동안. 이제 겨우 곁에 다가섰을 뿐인데. 달력을 들고 있던 하연의 팔이 털썩, 하고 무릎 위로 떨어져 내렸다. 다음 달을 기약할 만큼 하연은 어리석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말을 했었구나. 하지만 그가 사라지는 건 아닌데. 단지 내가 이 집을 떠날 뿐인데. 한 달이라는 긴 시간을 어떻게 버텨내나 하는 걱정을 왜 했을까. 많다고 생각했던 날들은 이렇게 순식간에 흘러가 버리는 걸. 난 아직도 그 사람을 위해서 해준 게 아무 것도 없는데. 이 집을 떠나는 순간 그저 평생에 한 번도 겪기 어려운 일들을 겪었다고 생각하고 기억 속에 묻어버리면 될 줄 알았는데. ☆★☆ 하연은 한참동안 방문 앞에 서서 기다렸다. 벌써 대여섯 번 방문을 두드려 기척을 했지만 방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불안하게 응답을 기다리던 하연은 벌컥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다행히 하연이 걱정하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만, 방 안 어디에도 민혁의 모습은 없었다. 이곳저곳을 황급히 둘러보던 하연은 책상 위에 놓인 새로운 파일 뭉치들을 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현이 집에 올 때마다 서너 개의 파일들이 책상 위에 올려져 있곤 했으니까. 걱정했었다. 마음대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초조하게 이런 저런 상상을 하면서 차라리 방을 비워둔 채 밖에 나갔기를 얼마나 빌었는지 모른다. 심장발작으로 인해 푸르죽죽하게 변해가는 환자의 입술을 보면서도 침착하게 응급조치를 하고 신속하게 심장 마사지를 하던 하연이었다. 휠체어에 의지해서 생활할 뿐 생리학적인 측면에서는 모든 것이 정상인 민혁에 대해서는 왜 이렇게 견딜 수 없이 불안한 건지. 어느 새 익숙해진 나지막하면서도 메마른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릴 만큼 바짝 타들어갔으니 말이다. 책상 위에 엎어진 채 있는 작은 액자 하나. 하연은 머릿속에 불같이 화를 낼 지도 모를 민혁을 떠올리면서도 어느 새 손을 가져가 액자를 집어 들고 있었다. 낯선 여자와 함께 있는 낯선 남자. 두 남녀를 한참 들여다보고 있던 하연은 둘 중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냈다. 처음에 낯설다고 생각했던 남자는 다름 아닌 민혁이었다. 멋진 미소와 줄무늬 셔츠, 그리고 어깨에 걸쳐진 가디건과 바람에 살짝 휘날리는 듯한 머리카락. 사진 속 민혁의 모습은 휠체어에 앉아 있는 상처투성이의 모습과 정 반대의 모습이었다. 자신만만한 미소가 살짝 번져 있고 걷어붙인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은 탄탄했다. 파란 하늘을 등지고 선 두 남녀의 모습은 보고 있는 하연에게까지 행복을 전염시킬 만큼 아름다웠다. 하연은 마음속으로 사진 속의 민혁에게 가만가만 말을 걸었다. 이봐요, 이민혁씨. 당신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알고 싶어요. 당신의 모습은 이렇게나 당당하고 멋지고 따스한 미소까지 머금고 있는데. 누가 당신을 벼랑 끝으로 내 몰았나요…? 당신 곁에 서 있는 여자, 참 아름답네요. 예쁘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이나. 당신의 과거 모습을 이렇게 간직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신도 과거가 그립다는 것 일텐데. 아닌가요? 제가 잘못 생각한 건가요? 마음대로 당신의 과거를 봤다고 날 비난해도 상관없어요. 어떡하죠? 나 이제 어떡하면 좋죠? 이렇게 사진만 봐도 마음이 아픈데. 나에게조차 보여주지 않는 당신의 과거. 이렇게 한 조각만이라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적어도 당신에게 따스한 마음과 밝은 웃음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서요. 하연은 가슴에 가만히 품고 있던 액자를 있던 자리에 다시 내려놓았다. 그러다가 어떤 이끌림처럼 방 귀퉁이로 걸어갔다. 뭘까. 새까만 보자기로 덮인 그것은 얼핏 보기에 웅크리고 있는 아이의 그림자 같아서 또 한 번 하연은 놀라 주저앉을 뻔 했더랬다. 하연은 손으로 검정색 보자기를 살짝 벗겨 내었다. 캔버스위에 그려진 그림을 본 하연은 이번에야말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표정으로 그려져 있는 하연 자신의 얼굴. 전혀 꾸밈없는 모습에 어두운 배경이었지만 민혁의 묘한 붓놀림은 하연을 여신의 얼굴로 그려 놓았더랬다. 성스러운 모습에 넋을 잃고 쳐다보던 하연은 가슴 속에 점점 차오르는 강렬한 느낌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림은 어느 새 완성 단계에 와 있었다. 아직 서명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는 나름대로 다듬을 곳이 몇 군데 더 있는 듯 했다. 아니면 일부러 서명을 하지 않았거나. “…방을 비워두면 이런 일이 발생하는 군.” 등 뒤에서 민혁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하연은 살짝 고개만 돌렸을 뿐 바닥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내가 줄곧 당신 곁에 붙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내 모습을 이렇게 담아 낼 수 있었나요? 당신 마음속에도 내가 들어 있는 건가요? 문이 열린 틈으로 강인이가 걸어 들어왔다. 빠르게 걷지는 못했지만 이제는 제법 다친 다리에도 힘이 들어가는 게 여실히 보였다. 적어도 다리를 절룩거리지는 않을 듯싶었다. 강인이는 하연이 앉아 있는 옆으로 오더니 살풋이 배를 깔고 엎드렸다. 하얗게 비어있는 캔버스를 앞에 두고 그는 무슨 생각을 하며 내 모습을 그렸을까. “…아직 한 마디도 안 했어!” “네…. 그래요. 이제 겨우…말이 나오네요….” “아무리 바닥에 카펫이 깔려 있다지만 그렇게 주저앉아 있는 건 볼썽사나워!” 하연은 손으로 바닥을 짚고 겨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연이 일어나자 배를 깔고 엎드려 있던 강인이도 따라서 끙, 하며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나…당신 사진도 봤어요. 그 액자 말이에요.” “…대단하군! 미안하다, 죄송하다, 잘못했다! 하고 많은 말 중에 하필이면 그 말이야!” 민혁은 신경질적으로 파일에 묶인 종이들을 팩팩 넘겼다. 냉랭하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외면하는 민혁의 모습이 야속하기는커녕 금방이라도 달려가 어깨를 끌어안고 싶은 생각에 하연은 주먹을 꼬옥 쥐었다. ************************************************************************************* 파페포포님, ggumi님, 희동이마을님, 릴리화이트님, 하늘새님, 하양까망님... 붕어빵님, 민들레님, 윤현주님, 겨울아이님, 후^^님, 윤호사랑해님, 이수연님... 파랑새님, 무지개^^*님, 크리스탈님, 빨간망또차차님, 연수님, 밥풀님... 미운오리님, 채련님, 숲님, 봄꽃님, 박기자님, 희야님... 마루님, 코알라님, 까미님... 오늘은 댓글 대신 한 분, 한 분 가슴에 담아가며 불러 보았답니다. ^^ 사랑의 분홍빛으로... 바람의 유혹님, 늘 보내주시는 쪽지 감사드리고... 까미님~ 보내주신 사랑 빠짐없이 모으고 있답니다. 휴가계획 세우시는 님들, 즐겁게 계획 잘 세우시고... 이미 휴가 떠나신 분들께서는 무탈하게 재미있는 추억들 많이 만들고 오시길. 미강냥은 이만 총총총. 물러갑니다~ 행복하시길.... *************************************************************************************1
※비밀의 성(城)을 향해 가는 길 [9-①]-준비기간※
9. 준비기간
아주 오랜만에 깊고 달게 잔 것 같았다.
한밤중에 한 두 번은 깨어날 만큼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었는데.
하연은 간밤에 편안한 잠자리를 선뜻 벗어나기가 싫어서
오래도록 포근한 이불 속에 머물러 있었다.
생각해 보면,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편안함과 안락함을 찾아내는 재주가 생긴 자신과
이제는 간간이 따스함을 드러내는 민혁의 눈동자.
집 안에 떠돌아다니는 공기도 달라져 있었다.
거칠고 날카로운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던 민혁의 얼굴에서도
더 이상 딱딱하게 긴장된 차가움을 찾아내기는 힘들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하연은 민혁의 뒷모습,
그리고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민혁의 옆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결코 따스한 표정으로 마주보는 응답 같은 건 없었을지라도
하연은 부드럽게 이완된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게 마냥 좋았다.
똑― 똑― 하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하연은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방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아주머니였다.
여전히 따스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아침 식사가 올려진 쟁반을 든 채 하연의 방으로 들어오셨다.
“아주머니, 언제 오셨어요? 당분간 못 오신다고 하셨잖아요.
몸은 괜찮으세요? 무릎이 많이 아프시다면서요?
걸음 걷는 건 괜찮으세요?”
아주머니는 이번에도 눈으로 대답했다.
온 지 얼마 안 됐고, 몸은 움직일 만 하다고.
무릎은 아직도 아픈 듯 살짝 찡그리셨다.
하연은 아주머니 손에 들린 쟁반을 받은 뒤,
혹시라도 불편한 곳은 더 없는 지 아주머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다행히 더 불편한 곳은 없는 듯 했다.
“앞머리가 많이 길었어요.
제가 얼른 밥 먹고 밥값으로 대신 해드릴께요. 눈을 찌르면 불편하잖아요.”
아주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번거로움을 끼치기 싫어서 무조건 고개를 가로젓는 사람보다는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도록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훨씬 사려 깊은 사람이다.
하연은 문득 오래 전에 읽었던 어느 책 속의 구절이 떠올랐다.
그 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었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았다.
하연의 마음을 거절하지 않는 사려 깊음.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며 숟가락을 손에 쥐었다.
반찬은 간소했고
깔깔한 아침 입맛을 돋우워 주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찹쌀이 살짝 섞인 약간 질게 지어진 밥을 열심히 먹던 하연은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밥이 좀 질어요. 오늘은 물조절이 잘 안 되셨나봐요.”
사실 하연은 밥을 할 때마다 물조절을 잘 못하곤 했다.
어떤 날은 꼬들한 밥, 어떤 날은 진 밥이 되곤 했더랬다.
그냥 웃으면서 한 말이었는데, 하연은 아주머니의 표정이 조금 심각해지는 것을 보고
내심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하연은 아주머니가 써서 건넨 쪽지를 읽은 뒤, 깜짝 놀랐다.
〔위가 좋지 않을 땐, 진밥이 좋아요. 찹쌀이 싫은가요?〕
“어, 어떻게 아셨어요? 저 위 안 좋은 거요!
신경성 위염도 자주 생기고, 끼니를 제 때 하지 못해서 위가 잘 탈이 나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역시 빙그레 웃기만 하는 아주머니.
민혁을 비롯해서 상현과 아주머니까지
사람의 마음을 특별히 꿰뚫어보는 능력이라도 갖고 있는 건지.
하연은 놀랍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더 열심히 밥을 먹었다.
음식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찬사는
열심히, 맛있게 남기지 않고 먹어주는 거라고 했던가.
하연은 진심 그대로 실천했다.
“잘 먹었습니다.”
〔맛있게 먹어줘서 고마워요. 근데 지난번에 나한테 했던 질문 있죠?〕
“무슨 질문이요?”
〔도련님에 관한 질문. 그 질문에 내가 답할 수 있는 건 딱 두 가지 뿐이에요.
불쌍한 사람이라는 거. 그리고 참 좋은 사람이라는 거.〕
“좋은 사람이라는 건 저도 알아요, 이젠. 근데…불쌍한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철저히 배신당한 사람이에요.
한 번도 내색한 적 없지만 난 알아요.
난 목소리를 잃어버린 대신 마음의 소리를 듣는 능력이 생겼죠.
믿음 자체를 두려워해요. 배신당할까봐서.〕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원래부터 사람을 믿지 않거나
지극히 믿었던 사람에게 철저히 배신당했거나.
그래서 결코 마음속에 틈을 남겨두지 않는 거라고 생각 했었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어떤 사람 이길래 한 사람을
그토록 지독하게 상처투성이로 만들만큼 배신을 한 걸까.
그는 분명 상현을 시켜 무슨 일을 꾸미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은 어마어마한 일임에 틀림없었고
아주 정성을 들이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배신의 대가를 마련하는 중인 것 같았다.
어렴풋이 그의 마음속에서
언뜻언뜻 분노가 비치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코 터무니없는 분노는 아닌 것 같았다.
하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자
아주머니는 다시 빠르게 쪽지를 써서 건넸다.
〔얼마 남지 않았어요. 그 때까지 하연씨가 도련님의 마음을 치료해 줘요.〕
하연은 아주머니가 건넨 쪽지를 들여다보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마음을 치료하는 간병인.
사실 간병인은 엄밀하게 말하면 돌봐주는 역할 일 뿐인데.
의사도 치료하지 못하는 마음의 병을 치료할 수 있을까.
곁에 다가서는 것조차 그토록 힘든데.
그런데 눈길을 붙잡는 한 마디.
얼마 남지 않았다?
뭐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까.
하연은 문득 민혁이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자기가 이 세상에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면 어떨 것 같으냐는 질문.
하연이 무엇인가를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
아주머니는 가만히 손가락으로 하연의 입을 가리고는
쟁반을 챙겨서 방을 나갔다.
혹여 전처럼 민혁이 듣는 불상사가 생길까봐서
미리 손가락으로 막은 것이라는 걸 하연도 잘 알고 있었다.
불쌍한 사람.
누군가에게 철저히 배신당한 사람.
그리고 참 좋은 사람.
한참 쪽지를 들여다보던 하연은
문득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달력에 눈길이 갔다.
세상과 격리된 집에서 생활하다 보니
달력을 볼 일이 거의 없었다.
볼품없는 장식용으로 놓여 있던 달력을 집어든 하연은
손가락으로 하루씩 짚어 나갔다.
하루…이틀……열흘….
한 달이 채워지기까지는 불과 며칠밖에 남지 않았다.
많은 날들이 흘러가버렸다.
두려움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해 하는 동안.
이제 겨우 곁에 다가섰을 뿐인데.
달력을 들고 있던 하연의 팔이 털썩, 하고 무릎 위로 떨어져 내렸다.
다음 달을 기약할 만큼 하연은 어리석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말을 했었구나.
하지만 그가 사라지는 건 아닌데.
단지 내가 이 집을 떠날 뿐인데.
한 달이라는 긴 시간을 어떻게 버텨내나 하는 걱정을 왜 했을까.
많다고 생각했던 날들은 이렇게 순식간에 흘러가 버리는 걸.
난 아직도 그 사람을 위해서 해준 게 아무 것도 없는데.
이 집을 떠나는 순간
그저 평생에 한 번도 겪기 어려운 일들을 겪었다고 생각하고
기억 속에 묻어버리면 될 줄 알았는데.
☆★☆
하연은 한참동안 방문 앞에 서서 기다렸다.
벌써 대여섯 번 방문을 두드려 기척을 했지만
방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불안하게 응답을 기다리던 하연은 벌컥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다행히 하연이 걱정하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만, 방 안 어디에도 민혁의 모습은 없었다.
이곳저곳을 황급히 둘러보던 하연은
책상 위에 놓인 새로운 파일 뭉치들을 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현이 집에 올 때마다 서너 개의 파일들이 책상 위에 올려져 있곤 했으니까.
걱정했었다.
마음대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초조하게 이런 저런 상상을 하면서
차라리 방을 비워둔 채 밖에 나갔기를
얼마나 빌었는지 모른다.
심장발작으로 인해 푸르죽죽하게 변해가는 환자의 입술을 보면서도
침착하게 응급조치를 하고
신속하게 심장 마사지를 하던 하연이었다.
휠체어에 의지해서 생활할 뿐
생리학적인 측면에서는 모든 것이 정상인 민혁에 대해서는
왜 이렇게 견딜 수 없이 불안한 건지.
어느 새 익숙해진 나지막하면서도 메마른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릴 만큼 바짝 타들어갔으니 말이다.
책상 위에 엎어진 채 있는 작은 액자 하나.
하연은 머릿속에 불같이 화를 낼 지도 모를 민혁을 떠올리면서도
어느 새 손을 가져가 액자를 집어 들고 있었다.
낯선 여자와 함께 있는 낯선 남자.
두 남녀를 한참 들여다보고 있던 하연은
둘 중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냈다.
처음에 낯설다고 생각했던 남자는 다름 아닌 민혁이었다.
멋진 미소와 줄무늬 셔츠,
그리고 어깨에 걸쳐진 가디건과 바람에
살짝 휘날리는 듯한 머리카락.
사진 속 민혁의 모습은 휠체어에 앉아 있는 상처투성이의 모습과
정 반대의 모습이었다.
자신만만한 미소가 살짝 번져 있고
걷어붙인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은 탄탄했다.
파란 하늘을 등지고 선 두 남녀의 모습은
보고 있는 하연에게까지
행복을 전염시킬 만큼 아름다웠다.
하연은 마음속으로 사진 속의 민혁에게 가만가만 말을 걸었다.
이봐요, 이민혁씨.
당신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알고 싶어요.
당신의 모습은 이렇게나 당당하고 멋지고 따스한 미소까지 머금고 있는데.
누가 당신을 벼랑 끝으로 내 몰았나요…?
당신 곁에 서 있는 여자, 참 아름답네요.
예쁘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이나.
당신의 과거 모습을 이렇게 간직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신도 과거가 그립다는 것 일텐데.
아닌가요? 제가 잘못 생각한 건가요?
마음대로 당신의 과거를 봤다고 날 비난해도 상관없어요.
어떡하죠? 나 이제 어떡하면 좋죠?
이렇게 사진만 봐도 마음이 아픈데.
나에게조차 보여주지 않는 당신의 과거.
이렇게 한 조각만이라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적어도 당신에게 따스한 마음과 밝은 웃음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서요.
하연은 가슴에 가만히 품고 있던 액자를 있던 자리에 다시 내려놓았다.
그러다가 어떤 이끌림처럼 방 귀퉁이로 걸어갔다.
뭘까.
새까만 보자기로 덮인 그것은 얼핏 보기에 웅크리고 있는 아이의 그림자 같아서
또 한 번 하연은 놀라 주저앉을 뻔 했더랬다.
하연은 손으로 검정색 보자기를 살짝 벗겨 내었다.
캔버스위에 그려진 그림을 본 하연은
이번에야말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표정으로 그려져 있는 하연 자신의 얼굴.
전혀 꾸밈없는 모습에 어두운 배경이었지만
민혁의 묘한 붓놀림은 하연을 여신의 얼굴로 그려 놓았더랬다.
성스러운 모습에 넋을 잃고 쳐다보던 하연은
가슴 속에 점점 차오르는 강렬한 느낌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림은 어느 새 완성 단계에 와 있었다.
아직 서명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는
나름대로 다듬을 곳이 몇 군데 더 있는 듯 했다.
아니면 일부러 서명을 하지 않았거나.
“…방을 비워두면 이런 일이 발생하는 군.”
등 뒤에서 민혁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하연은 살짝 고개만 돌렸을 뿐
바닥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내가 줄곧 당신 곁에 붙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내 모습을 이렇게 담아 낼 수 있었나요?
당신 마음속에도 내가 들어 있는 건가요?
문이 열린 틈으로 강인이가 걸어 들어왔다.
빠르게 걷지는 못했지만 이제는 제법
다친 다리에도 힘이 들어가는 게 여실히 보였다.
적어도 다리를 절룩거리지는 않을 듯싶었다.
강인이는 하연이 앉아 있는 옆으로 오더니
살풋이 배를 깔고 엎드렸다.
하얗게 비어있는 캔버스를 앞에 두고 그는 무슨 생각을 하며 내 모습을 그렸을까.
“…아직 한 마디도 안 했어!”
“네…. 그래요. 이제 겨우…말이 나오네요….”
“아무리 바닥에 카펫이 깔려 있다지만 그렇게 주저앉아 있는 건 볼썽사나워!”
하연은 손으로 바닥을 짚고 겨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연이 일어나자 배를 깔고 엎드려 있던 강인이도 따라서
끙, 하며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나…당신 사진도 봤어요. 그 액자 말이에요.”
“…대단하군! 미안하다, 죄송하다, 잘못했다! 하고 많은 말 중에 하필이면 그 말이야!”
민혁은 신경질적으로 파일에 묶인 종이들을 팩팩 넘겼다.
냉랭하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외면하는 민혁의 모습이 야속하기는커녕
금방이라도 달려가 어깨를 끌어안고 싶은 생각에 하연은 주먹을 꼬옥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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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미님~ 보내주신 사랑 빠짐없이 모으고 있답니다.
휴가계획 세우시는 님들, 즐겁게 계획 잘 세우시고...
이미 휴가 떠나신 분들께서는 무탈하게 재미있는 추억들 많이 만들고 오시길.
미강냥은 이만 총총총. 물러갑니다~ 행복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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