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좀 봐줘요.” “보고 싶지 않아!” “그러면서 절 그렸나요?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내내 생각했으면서….” “그냥 연습일 뿐이야!” “연습할 단계는 이미 넘어선 것 같은데요? 거짓말 하지 말아요.” “…나가.” 하연은 문으로 걸어가 방을 나가는 대신 민혁이 앉아 있는 책상으로 걸어갔다. 하연이 한 걸음씩 다가올수록 종이를 넘기는 속도는 점점 느려졌고 하연이 민혁의 곁에 갔을 땐 손에 들고 있던 파일은 이미 내려놓은 상태였다. 아직도 민혁은 하연을 보고 있지 않았다. 하연은 가만히 손을 뻗어 민혁의 얼굴이 자신과 마주보게 했다. “뭐 하는 짓이야! 손 치워!” “…난 분명히 말 했어요. 내 손길이 역겨울 땐 당신이 직접 팽개치라고.” “미쳤군! 내 얼굴에서 손 치우라고 말했어!” “날 밀어내 봐요! 할 수 있다면. 당신 지금 거짓말 하고 있잖아! 그런 거잖아요. 내 말 틀렸어요?” 하연은 눈물을 흘리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분명한 자신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확신과 믿음이 가득한 얼굴. 그리고 간절한 바램. 민혁은 하연의 얼굴을 마주하자 처음으로 하연 앞에서 말을 더듬거렸다. “나, 난…당신과 달라. 휘둘림이라고는 전혀 알지 못하는 당신하고는 달라!” “나와 똑같아 지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순간적으로 민혁의 얼굴을 휩쓸고 지나간 감정들을 하연은 얼핏 보았다. 빠른 속도로 지나쳐 간 감정들은 두려움, 혼란, 당혹스러움, 그리고 바램. 하연과 마찬가지로 민혁에게도 간절한 바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다만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 언제 그랬냐는 듯 민혁의 얼굴은 다시 딱딱하게 굳었지만 하연은 마음속에 더 강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하연의 얼굴 구석구석을 바라보던 민혁은 하연의 두 손을 얼굴에서 가만히 떼어내 그러쥐고는 살짝 내렸다. 그리고는 하연이 있는 반대쪽으로 살짝 휠체어를 돌려 방 한가운데로 가 버렸다. “도망치지 말아요!” “…도망친 적 없어! 도망칠 필요도 없고!” “또 거짓말. 감추고 숨기고 그럴 듯한 말로 상대방을 속이는 게 당신은 너무 익숙해요.”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아! 변할 수도 없고! 내가 당장 눈에 드러날 만큼 변하리라는 생각 따위는 집어 치워! 난 꽤 오랫동안 이렇게 살았어! 당신이란 여자가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때가 되면 변하겠지! 하지만 그딴 식으로 건방지게 멋대로 해석하지 마!” 사정없이 틈을 주지 않고 하연의 귓가로 민혁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단호하고 맹렬하게. 언제나 민혁의 목소리에는 폭풍이 숨어 있었다. 고요한 폭풍전야와 사정없이 몰아치는 매서운 폭풍, 그리고 지나간 뒤의 잠잠함. 하지만 예전처럼 살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고함 속에 하연을 달래려는 듯한 타이르는 말투가 살짝 숨어 있었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 하연은 조금씩 민혁에게 다가가다가 우뚝 멈춰섰다. 정확히 세 걸음만 더 가면 되는데.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 하연은 그 짧은 거리가 지독히도 멀게만 느껴졌다. “욕심 부리지 마. 당신은 간병인으로 이곳에 온 것 뿐 이야. 생각해 보니 약속했던 한 달이 다 되어 가는 군.” 하연은 훅, 하고 신음을 삼켰다. 앞에 있는 이 남자, 정말 해도해도 너무했다. 너무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한 달이라는 시간을 말하고 있는 이 남자. 가차 없이 거추장스러운 물건을 팽개치듯 말하고 있는 이 남자. “다시 말하지.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아. 알량한 동정심 때문에 지나친 감상 속으로 빠져든 것 같군. 냉정을 찾아.” “쉽지 않다는 것 뿐 이지 불가능한 건 아니잖아요.” “고작 그림 한 장 갖고 유난 떨 필요 없어. 허락 없이 그린 건 사과하지.” “그런 말이 아니라는 거 알잖아요! 민혁씨는 지금 자신마저도 속이고 있잖아요!” “…솔직하면 뭐가 좋지?” 하연이 뭐라고 말하려던 찰나, 똑똑 하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오라는 짤막한 민혁의 대꾸에 방문을 열고 들어 선 사람은 상현이었다. 방 가운데 있는 민혁과 외면하고 있는 민혁을 바라보는 하연. 덕분에 상현은 어정쩡한 위치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하연은 그대로 방 안에 들어오기도 좀 그렇고 뒷걸음질 쳐서 나가기도 애매한 그런 위치에 멈춰선 상현을 보았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민혁은 하연에게 못을 박았다. “…날짜엔 비교적 철저한 편이지. 이곳에 왔을 때처럼 갈 때도 조비서가 알아서 처리해 줄 테니까 염려할 필요는 없어.” 말없이 민혁을 바라보고 있던 하연이 부르르르 떨었다. 민혁의 결정은 단호했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 없으니까 날짜가 되면 짐 싸서 떠나라는 뜻. 다시 한 번 한 달이라는 시간을 상기시켜주는 민혁이 야속하기만 했다. 참 모질기도 한 남자. 민혁은 등 뒤에서 전해지는 하연의 슬픈 원망을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진하연, 당신은 모르겠지. 절단수술을 행하는 내 마음을. “에…!”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나가봐도 되겠습니까?” 상현이 뭐라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연 것과 하연이 또박또박 떨어지는 목소리로 물어본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상현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하연의 말투는 냉정하지는 않았지만 군더더기 없이 똑 떨어지는 공손한 말투였다. 그러면서도 하연은 모질게 구는 민혁을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래요. 내가 떠날게요. 어차피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거잖아요. 가만히 있어도 시간은 흘러가는 건데. 그것마저도 나에게 상기시키려 하지 말아요. 난 전혀 고맙지 않으니까. 민혁이 고개를 한 번 끄덕, 하자 하연은 천천히 걸어서 방을 나갔다. 아랫입술을 꼬옥 깨물고 있는 하연의 표정 때문에 상현은 하연의 팔을 붙잡지도 못했더랬다. 하연이 사라지자마자 상현은 다급하게 물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참견하지 마!” “일부러 상처 주려고 작정하셨습니까? 도대체 왜…!” “참견하지 말라고 했어!” “…제가 알던 도련님이 맞습니까?” “…무슨 소리지?”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반드시 손에 넣고, 앞으로 갈 뿐 뒤로 물러서지 않는 분 아니었습니까? 제가 잘못 본 겁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진하연씨 잡으십시오. 붙잡으십시오! 도련님께서 아무리 부정하셔도…진실은 가려지지 않습니다. 정말로 고통까지 감내하면서 잘라내실 생각이십니까?” “…붙잡는다 해도! 지금은 아냐!” “휴우. 이미 진하연씨가 어떤 여자라는 것쯤은 도련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연씨도…도련님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아니, 단순히 좋아한다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강하게 끌리고 있습니다! 왜 자꾸 밀어내십니까?” “…이 몰골로 그녀를 곁에 두라는 건가?” “그런 모습은…!” “그만! 그만해! 방문 앞에 그녀가 있을 거야. 가서 데려다 주고 와.” “예? 무슨…말씀이신지…?” “방문 앞에 그녀가 있어. 걸을 힘조차 없는 그녀가. 그러니까 데려다 주고 와.” “…직접 하시지요.” “못 해! 그러니까 내말대로 해! 지금 당장!” “…알겠습니다.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방문을 사이에 두고서도 진하연씨를 온 몸으로 느끼시는 도련님께서 과연 잘라낼 수 있을지. 그다지 신뢰성이 가는 말씀은 아닌 듯 합니다.” 상현이 제 때 방을 나가지 않았다면 민혁은 근처에 놓인 꽃병을 그대로 집어던졌을 지도 몰랐다. 미치도록 아프다. 그녀의 손길이, 그녀의 눈빛이,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깊이 박혀 버렸다.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그녀의 감정상태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세상에는 잘 된 만남이 있고, 잘못된 만남이 있다. 둘 중 어느 쪽이든 간에 잘 된 만남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겁쟁이! 넌 비겁해! 민혁의 자아가 소리치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 속에 있는 뜨거운 불꽃마저 꺼트릴까봐 그게 두려워서 도망치고 있는 거라고! 차갑고 메마른 가슴은 갈증을 느낄 수 없을 만큼 바싹 말라있었다. 그런데 어느 새 그녀가 갈증을 달래주는 물줄기가 되어 있었다. 민혁의 얼굴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휠체어 팔걸이를 잡은 손은 부르르르 떨리고 있었다. 한편 상현이 밖으로 나갔을 때, 하연은 강인이 곁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가만히 털을 쓰다듬어 주는 하연의 손길을 느끼며 말없는 위안이 되어주고 있었다. 이미 눈물자국이 말라붙은 하연의 얼굴은 보는 사람마저도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에 충분했다. “…가려구요?” “아닙니다. 도련님께서…하연씨를 방에 데려다 주라고….” “상현씨는 알고 있었죠?” “…뭘…말입니까?” “민혁씨가…그리는 그림말이에요. 알고 있었잖아요. 근데 왜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아시지 않습니까. 도련님께서 원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럼 민혁씨는 내가 떠나는 걸 원하고 있을까요?” 상현은 말문이 딱 막혔다. 이럴 땐 도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냥 두 사람에게만 맡겨두지 말 걸 그랬다. 하연의 표정은 뭔가가 빠져있는 듯한 허전한 얼굴이었다. 미리부터 떠나보낼 성급한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았는데. 이를 어쩐다. “억지로…위로할 말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처음부터 예정된 거였잖아요.” “…도련님을…좋아하십니까?” “알면서 묻는 거에요, 아님 몰라서 묻는 거에요?” “…확인차원에서.” “네. 좋아해요. 민혁씨 좋아해요. 하지만 그걸로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잖아요. 며칠 눈물만 흘리면 되겠죠. 흘리는 눈물에 씻어버리면 되겠죠….” “…들어가십시오. 아무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하연은 팔을 붙잡는 상현을 제지했다. 그리고는 그냥 혼자 있고 싶다는 손짓으로 상현에게 말했다. 물끄러미 하연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상현은 짧게 한숨을 쉰 뒤 다시 민혁의 방으로 들어갔다. 상현은 지금 하연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지켜보는 게 때로는 가장 최선의 방법일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이 그랬다. “…접니다. 혼자 있고 싶다고 해서 그냥 들어 왔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도대체 언제 밝히실 생각이십니까?” “…하루 전. 그녀에게 언질을 주었나?” “아닙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루 전이야. 하루 전. 내 말 뜻 알아들었나?” “알겠습니다. 차질 없이 준비해 놓겠습니다.” “좋아. 이젠 일 이야기를 좀 해 볼까?” 빙그르르 휠체어를 돌리고 드러낸 민혁의 표정은 다시금 당당함에 가득 차 있었다. 상현은 하루 전이라던 민혁의 말을 가만히 되새기며 기억 속에 단단히 박아 넣었다. 언뜻 기쁜 기색마저 내비치는 민혁을 건너다보며 상현은 민혁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알 수 없는 기운에 압도 되었다. 오로지 한 가지 목표만을 향해 질주하는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을 그는 빚어내고 있었다. 그녀로 인해 감정 표현이 좀 더 풍부해진 것만큼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상현은 천천히 업무보고를 했다. “…긴급 이사회가 소집 된 상태입니다. 물론 대주주들의 반발은 이미 봉쇄된 상태입니다. 도련님께서 진행시킨 일들을 마무리 지어나갈 단계에 있습니다. 서서히 준비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맞는 말이야. 이제 슬슬 내가 등장 할 때가 된 것 같군! 한데 잠적했다는 한태서 회장은 찾았나? 샅샅이 뒤지는 중이라고 보고 받았던 것 같은데.” “그게…사실은….” “뜸들이지 말고 말 해.” “…어젯밤 바닷가 백사장에서 시신으로 발견 되었습니다. 부검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엄청난 소식일까. 민혁의 입에서 나온 한태서라는 이름 석 자. 그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 흥진그룹의 총수이자 젊은 나이에 엄청난 경영실력을 입증한 인물이 아니었던가! 게다가 그가 시신으로 발견 되었다니! 세상과 격리된 이 곳에서 민혁은 서서히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에도 무감각하게 반응하던 민혁이 상현을 향해 오늘의 지시사항을 말했다. “…저 그림은 화방에 가져가서 액자로 만들도록. 어떻게 처리할지는 알고 있겠지?” “예. 알겠습니다. 전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미 며칠 전 한태서 회장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민혁은 그의 수명도 끝이 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날카로운 직감이랄까. 세상 사람들은 흥진그룹을 흥진제국이라고도 불렀다. 그만큼 영역이 방대했고 그런 제국을 이끌어 왔던 총수였기에 경제지에 이름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던 인물이 바로 한태서였다. 그런 한태서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갔다는 사실에 눈도 꿈쩍 않던 민혁은 한참 만에 중얼거렸다. “…내 선물이 그토록 마음에 들었나, 한태서? 자네는 나에게 직접 선물했지만 난 자네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해주었지. 그 정도 아량을 베푼 건 과거의 인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 무더위 어떻게 이겨내고 계시나요? 특별히, 더위를 이겨내는 방법이 있으신가요? ^^ 오늘은 올렸습니다, 글. 하루라도 글을 올리지 않으면 어찌나 신경이 쓰이던지. 온통 네이트 게시판으로 집중되어 있었답니다. ㅎ 오늘은 댓글 대신 지난 이야기에 발자취 남겨주신 분들께 쪽지를 발송 했습니다. 쪽지 발송 못해드린 분들께는 따로 이 자리를 빌어 스페셜 코멘트 답니다~ㅎ 윤호사랑해님, 이제 민혁은 어느 정도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단계가 된 거겠죠..ㅎ 매일 물건 던지다가 기물파손 및 난폭함으로 넘 살벌해지면 안 되잖아요~헤헷. 민들레님, 궁금증...이건 제가 계속해서 글을 연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답니다. ^^ 하나도 안 궁금해요! 이런 분이 계시면 미강이 소심해서 글 못올려요. 헤헷. 감사합니다~ 후^^님, 두 사람이 이미 서로의 마음은 알고 있는 거겠죠? ^^ 다만..가까워지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ㅎ 메이아님, 다시 뵙게 되서 참 기쁩니다. ^^ 며칠 전까지만 해도 종오와 유현에게 빠져서 살았답니다. 완결지은 글 다듬느라. ㅋ 하연과 민혁도 지켜봐 주시겠죠? *^^* 선풍기 바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ㅠ_ㅠ 더위 이겨내는 방법 좀 알려 주세요~헤헷. 모쪼록 잠 못 이루는 무더운 밤이 아니길 바랍니다.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
※비밀의 성(城)을 향해 가는 길 [9-②]-준비기간※
☆★☆
“…나 좀 봐줘요.”
“보고 싶지 않아!”
“그러면서 절 그렸나요?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내내 생각했으면서….”
“그냥 연습일 뿐이야!”
“연습할 단계는 이미 넘어선 것 같은데요? 거짓말 하지 말아요.”
“…나가.”
하연은 문으로 걸어가 방을 나가는 대신 민혁이 앉아 있는 책상으로 걸어갔다.
하연이 한 걸음씩 다가올수록 종이를 넘기는 속도는 점점 느려졌고
하연이 민혁의 곁에 갔을 땐
손에 들고 있던 파일은 이미 내려놓은 상태였다.
아직도 민혁은 하연을 보고 있지 않았다.
하연은 가만히 손을 뻗어 민혁의 얼굴이 자신과 마주보게 했다.
“뭐 하는 짓이야! 손 치워!”
“…난 분명히 말 했어요. 내 손길이 역겨울 땐 당신이 직접 팽개치라고.”
“미쳤군! 내 얼굴에서 손 치우라고 말했어!”
“날 밀어내 봐요! 할 수 있다면. 당신 지금 거짓말 하고 있잖아!
그런 거잖아요. 내 말 틀렸어요?”
하연은 눈물을 흘리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분명한 자신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확신과 믿음이 가득한 얼굴.
그리고 간절한 바램.
민혁은 하연의 얼굴을 마주하자 처음으로 하연 앞에서 말을 더듬거렸다.
“나, 난…당신과 달라. 휘둘림이라고는 전혀 알지 못하는 당신하고는 달라!”
“나와 똑같아 지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순간적으로 민혁의 얼굴을 휩쓸고 지나간 감정들을 하연은 얼핏 보았다.
빠른 속도로 지나쳐 간 감정들은
두려움, 혼란, 당혹스러움, 그리고 바램.
하연과 마찬가지로 민혁에게도 간절한 바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다만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
언제 그랬냐는 듯 민혁의 얼굴은 다시 딱딱하게 굳었지만
하연은 마음속에 더 강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하연의 얼굴 구석구석을 바라보던 민혁은
하연의 두 손을 얼굴에서 가만히 떼어내 그러쥐고는 살짝 내렸다.
그리고는 하연이 있는 반대쪽으로
살짝 휠체어를 돌려 방 한가운데로 가 버렸다.
“도망치지 말아요!”
“…도망친 적 없어! 도망칠 필요도 없고!”
“또 거짓말.
감추고 숨기고 그럴 듯한 말로 상대방을 속이는 게 당신은 너무 익숙해요.”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아! 변할 수도 없고!
내가 당장 눈에 드러날 만큼 변하리라는 생각 따위는 집어 치워!
난 꽤 오랫동안 이렇게 살았어!
당신이란 여자가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때가 되면 변하겠지!
하지만 그딴 식으로 건방지게 멋대로 해석하지 마!”
사정없이 틈을 주지 않고 하연의 귓가로 민혁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단호하고 맹렬하게.
언제나 민혁의 목소리에는 폭풍이 숨어 있었다.
고요한 폭풍전야와
사정없이 몰아치는 매서운 폭풍,
그리고 지나간 뒤의 잠잠함.
하지만 예전처럼 살벌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고함 속에 하연을 달래려는 듯한 타이르는 말투가 살짝 숨어 있었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
하연은 조금씩 민혁에게 다가가다가 우뚝 멈춰섰다.
정확히 세 걸음만 더 가면 되는데.
가까워질 수 없는 거리.
하연은 그 짧은 거리가 지독히도 멀게만 느껴졌다.
“욕심 부리지 마. 당신은 간병인으로 이곳에 온 것 뿐 이야.
생각해 보니 약속했던 한 달이 다 되어 가는 군.”
하연은 훅, 하고 신음을 삼켰다.
앞에 있는 이 남자, 정말 해도해도 너무했다.
너무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한 달이라는 시간을 말하고 있는 이 남자.
가차 없이 거추장스러운 물건을 팽개치듯 말하고 있는 이 남자.
“다시 말하지.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아.
알량한 동정심 때문에 지나친 감상 속으로 빠져든 것 같군. 냉정을 찾아.”
“쉽지 않다는 것 뿐 이지 불가능한 건 아니잖아요.”
“고작 그림 한 장 갖고 유난 떨 필요 없어. 허락 없이 그린 건 사과하지.”
“그런 말이 아니라는 거 알잖아요!
민혁씨는 지금 자신마저도 속이고 있잖아요!”
“…솔직하면 뭐가 좋지?”
하연이 뭐라고 말하려던 찰나, 똑똑 하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오라는 짤막한 민혁의 대꾸에 방문을 열고 들어 선 사람은 상현이었다.
방 가운데 있는 민혁과 외면하고 있는 민혁을 바라보는 하연.
덕분에 상현은 어정쩡한 위치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하연은 그대로 방 안에 들어오기도 좀 그렇고
뒷걸음질 쳐서 나가기도 애매한
그런 위치에 멈춰선 상현을 보았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민혁은 하연에게 못을 박았다.
“…날짜엔 비교적 철저한 편이지.
이곳에 왔을 때처럼 갈 때도 조비서가 알아서 처리해 줄 테니까 염려할 필요는 없어.”
말없이 민혁을 바라보고 있던 하연이 부르르르 떨었다.
민혁의 결정은 단호했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필요 없으니까 날짜가 되면 짐 싸서 떠나라는 뜻.
다시 한 번 한 달이라는 시간을 상기시켜주는 민혁이 야속하기만 했다.
참 모질기도 한 남자.
민혁은 등 뒤에서 전해지는 하연의 슬픈 원망을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진하연, 당신은 모르겠지. 절단수술을 행하는 내 마음을.
“에…!”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나가봐도 되겠습니까?”
상현이 뭐라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연 것과
하연이 또박또박 떨어지는 목소리로 물어본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상현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하연의 말투는 냉정하지는 않았지만 군더더기 없이 똑 떨어지는 공손한 말투였다.
그러면서도 하연은 모질게 구는 민혁을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래요. 내가 떠날게요.
어차피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거잖아요.
가만히 있어도 시간은 흘러가는 건데.
그것마저도 나에게 상기시키려 하지 말아요.
난 전혀 고맙지 않으니까.
민혁이 고개를 한 번 끄덕, 하자
하연은 천천히 걸어서 방을 나갔다.
아랫입술을 꼬옥 깨물고 있는 하연의 표정 때문에
상현은 하연의 팔을 붙잡지도 못했더랬다.
하연이 사라지자마자 상현은 다급하게 물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참견하지 마!”
“일부러 상처 주려고 작정하셨습니까? 도대체 왜…!”
“참견하지 말라고 했어!”
“…제가 알던 도련님이 맞습니까?”
“…무슨 소리지?”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반드시 손에 넣고, 앞으로 갈 뿐
뒤로 물러서지 않는 분 아니었습니까? 제가 잘못 본 겁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진하연씨 잡으십시오. 붙잡으십시오!
도련님께서 아무리 부정하셔도…진실은 가려지지 않습니다.
정말로 고통까지 감내하면서 잘라내실 생각이십니까?”
“…붙잡는다 해도! 지금은 아냐!”
“휴우. 이미 진하연씨가 어떤 여자라는 것쯤은 도련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연씨도…도련님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아니, 단순히 좋아한다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강하게 끌리고 있습니다!
왜 자꾸 밀어내십니까?”
“…이 몰골로 그녀를 곁에 두라는 건가?”
“그런 모습은…!”
“그만! 그만해! 방문 앞에 그녀가 있을 거야. 가서 데려다 주고 와.”
“예? 무슨…말씀이신지…?”
“방문 앞에 그녀가 있어. 걸을 힘조차 없는 그녀가. 그러니까 데려다 주고 와.”
“…직접 하시지요.”
“못 해! 그러니까 내말대로 해! 지금 당장!”
“…알겠습니다.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방문을 사이에 두고서도 진하연씨를 온 몸으로 느끼시는 도련님께서
과연 잘라낼 수 있을지.
그다지 신뢰성이 가는 말씀은 아닌 듯 합니다.”
상현이 제 때 방을 나가지 않았다면
민혁은 근처에 놓인 꽃병을 그대로 집어던졌을 지도 몰랐다.
미치도록 아프다.
그녀의 손길이,
그녀의 눈빛이,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깊이 박혀 버렸다.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그녀의 감정상태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세상에는 잘 된 만남이 있고, 잘못된 만남이 있다.
둘 중 어느 쪽이든 간에 잘 된 만남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겁쟁이! 넌 비겁해!
민혁의 자아가 소리치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 속에 있는 뜨거운 불꽃마저 꺼트릴까봐
그게 두려워서 도망치고 있는 거라고!
차갑고 메마른 가슴은 갈증을 느낄 수 없을 만큼 바싹 말라있었다.
그런데 어느 새 그녀가 갈증을 달래주는 물줄기가 되어 있었다.
민혁의 얼굴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휠체어 팔걸이를 잡은 손은 부르르르 떨리고 있었다.
한편 상현이 밖으로 나갔을 때,
하연은 강인이 곁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가만히 털을 쓰다듬어 주는 하연의 손길을 느끼며
말없는 위안이 되어주고 있었다.
이미 눈물자국이 말라붙은 하연의 얼굴은
보는 사람마저도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에 충분했다.
“…가려구요?”
“아닙니다. 도련님께서…하연씨를 방에 데려다 주라고….”
“상현씨는 알고 있었죠?”
“…뭘…말입니까?”
“민혁씨가…그리는 그림말이에요. 알고 있었잖아요.
근데 왜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아시지 않습니까. 도련님께서 원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럼 민혁씨는 내가 떠나는 걸 원하고 있을까요?”
상현은 말문이 딱 막혔다.
이럴 땐 도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냥 두 사람에게만 맡겨두지 말 걸 그랬다.
하연의 표정은 뭔가가 빠져있는 듯한 허전한 얼굴이었다.
미리부터 떠나보낼 성급한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았는데.
이를 어쩐다.
“억지로…위로할 말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처음부터 예정된 거였잖아요.”
“…도련님을…좋아하십니까?”
“알면서 묻는 거에요, 아님 몰라서 묻는 거에요?”
“…확인차원에서.”
“네. 좋아해요. 민혁씨 좋아해요. 하지만 그걸로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잖아요.
며칠 눈물만 흘리면 되겠죠. 흘리는 눈물에 씻어버리면 되겠죠….”
“…들어가십시오. 아무 생각도 하지 마십시오.”
하연은 팔을 붙잡는 상현을 제지했다.
그리고는 그냥 혼자 있고 싶다는 손짓으로 상현에게 말했다.
물끄러미 하연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상현은
짧게 한숨을 쉰 뒤 다시 민혁의 방으로 들어갔다.
상현은 지금 하연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지켜보는 게 때로는 가장 최선의 방법일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이 그랬다.
“…접니다. 혼자 있고 싶다고 해서 그냥 들어 왔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도대체 언제 밝히실 생각이십니까?”
“…하루 전. 그녀에게 언질을 주었나?”
“아닙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루 전이야. 하루 전. 내 말 뜻 알아들었나?”
“알겠습니다. 차질 없이 준비해 놓겠습니다.”
“좋아. 이젠 일 이야기를 좀 해 볼까?”
빙그르르 휠체어를 돌리고 드러낸 민혁의 표정은
다시금 당당함에 가득 차 있었다.
상현은 하루 전이라던 민혁의 말을 가만히 되새기며
기억 속에 단단히 박아 넣었다.
언뜻 기쁜 기색마저 내비치는 민혁을 건너다보며
상현은 민혁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알 수 없는 기운에 압도 되었다.
오로지 한 가지 목표만을 향해 질주하는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을
그는 빚어내고 있었다.
그녀로 인해 감정 표현이 좀 더 풍부해진 것만큼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상현은 천천히 업무보고를 했다.
“…긴급 이사회가 소집 된 상태입니다.
물론 대주주들의 반발은 이미 봉쇄된 상태입니다.
도련님께서 진행시킨 일들을 마무리 지어나갈 단계에 있습니다.
서서히 준비하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맞는 말이야. 이제 슬슬 내가 등장 할 때가 된 것 같군!
한데 잠적했다는 한태서 회장은 찾았나?
샅샅이 뒤지는 중이라고 보고 받았던 것 같은데.”
“그게…사실은….”
“뜸들이지 말고 말 해.”
“…어젯밤 바닷가 백사장에서 시신으로 발견 되었습니다.
부검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엄청난 소식일까.
민혁의 입에서 나온 한태서라는 이름 석 자.
그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 흥진그룹의 총수이자
젊은 나이에 엄청난 경영실력을 입증한 인물이 아니었던가!
게다가 그가 시신으로 발견 되었다니!
세상과 격리된 이 곳에서 민혁은 서서히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에도 무감각하게 반응하던 민혁이
상현을 향해 오늘의 지시사항을 말했다.
“…저 그림은 화방에 가져가서 액자로 만들도록. 어떻게 처리할지는 알고 있겠지?”
“예. 알겠습니다. 전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미 며칠 전 한태서 회장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민혁은
그의 수명도 끝이 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날카로운 직감이랄까.
세상 사람들은 흥진그룹을 흥진제국이라고도 불렀다.
그만큼 영역이 방대했고 그런 제국을 이끌어 왔던 총수였기에
경제지에 이름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던 인물이 바로 한태서였다.
그런 한태서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갔다는 사실에
눈도 꿈쩍 않던 민혁은 한참 만에 중얼거렸다.
“…내 선물이 그토록 마음에 들었나, 한태서?
자네는 나에게 직접 선물했지만 난 자네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해주었지.
그 정도 아량을 베푼 건 과거의 인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
무더위 어떻게 이겨내고 계시나요? 특별히, 더위를 이겨내는 방법이 있으신가요? ^^
오늘은 올렸습니다, 글.
하루라도 글을 올리지 않으면 어찌나 신경이 쓰이던지. 온통 네이트 게시판으로
집중되어 있었답니다. ㅎ
오늘은 댓글 대신 지난 이야기에 발자취 남겨주신 분들께 쪽지를 발송 했습니다.
쪽지 발송 못해드린 분들께는 따로 이 자리를 빌어 스페셜 코멘트 답니다~ㅎ
윤호사랑해님, 이제 민혁은 어느 정도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단계가 된 거겠죠..ㅎ 매일 물건 던지다가 기물파손 및 난폭함으로 넘 살벌해지면 안 되잖아요~헤헷.
민들레님, 궁금증...이건 제가 계속해서 글을 연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답니다. ^^ 하나도 안 궁금해요! 이런 분이 계시면 미강이 소심해서 글 못올려요. 헤헷. 감사합니다~
후^^님, 두 사람이 이미 서로의 마음은 알고 있는 거겠죠? ^^ 다만..가까워지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ㅎ
메이아님, 다시 뵙게 되서 참 기쁩니다. ^^ 며칠 전까지만 해도 종오와 유현에게 빠져서 살았답니다. 완결지은 글 다듬느라. ㅋ 하연과 민혁도 지켜봐 주시겠죠? *^^*
선풍기 바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ㅠ_ㅠ
더위 이겨내는 방법 좀 알려 주세요~헤헷.
모쪼록 잠 못 이루는 무더운 밤이 아니길 바랍니다.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