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nd] #17 화성에서 온 왕자님

wagi2004.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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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라니의 변태


“오늘 저녁은 외식이다.”

 

“왜? 윤이한테 시키지.”

 

아직 한이 자신을 잡아 윤의 돈까스를 두 접시나 먹게 한 원한이 남은 온이 중얼거리자

한이 씩 웃어보였다.

 

“그래? 소원이라면... 윤아!”

 

“미쳤어! 농담이야, 농담!”

 

기겁을 하고 한의 입을 막는 온이었다.

 

“뭐 먹을 건데?”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라니의 손을 잡고 오는 윤이나 역시 기대로 부푼 유진은

메뉴를 정하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난 삼계탕 먹고 싶어.”

 

“양장피!”

 

“둘 다 입 다물어. 오늘 메뉴는 세진형이 결정하는 대로야.”

 

“왜?”

 

“대접받을 사람은 세진형이니까.”

 

‘헉, 한이가 알았나?’

 

왠지 가슴이 뜨끔한 세진이었다.

의미심장한 한의 윙크에 세진이 고민을 하건 말건 윤과 유진은 로비를 하느라 정신없었다.

 

“오빠, 삼계탕 먹자, 응?”

 

“양장피.”

 

그러나 먹을 것에 관해서라면 세진 역시 단호하다.

 

“골뱅이 먹고 싶은데...”

 

“골뱅이? 그게 무슨 저녁이야?”

 

“시끄러워. 세진형 마음대로라고 정했으니까 군말 말고 따라와.”

 

“그럼, 맥주도!”

 

라니는 말없이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먹을 거 정하는 게 저렇게 기쁜 일인가?

유진님도 웃고 있어. 나한텐 늘 인상을 찡그리면서.

아니, 화성에서는 늘 무표정이었어. 전쟁 때문에 힘든가보다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왠지 조금 부럽다고 생각하는 라니였다.


“자, 건배!”

 

“라니와 윤이의 화해를 기념하며!”

 

“건배!”

 

왁자지껄 떠들면서 잔을 부딪히는 사람들 틈에서

라니는 자기도 모르게 활짝 웃고 있었다.

비록 아직 아이라 콜라로 건배를 하고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아니,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감정이 전해져 와 들뜬 기분이었다.

 

“너무 매우면 말해. 다른 걸로 시켜 줄께.”

 

걱정스럽게 라니를 챙기는 윤에게 싱긋 웃어보였다.

 

“맛있어.”

 

“그래? 다행이다. 이건 먹을 수 있구나.”

 

입에서 불이 날 정도로 맵기는 했지만 그 이상으로 맛있다.

남자가 네 명에 남자 못지않게 잘 먹는 윤이다. 접시는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아쉬운 얼굴로 빈 접시를 바라보는 라니의 모습에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맛있어?”

 

“응.”

 

포크를 물고 올려다보는 라니는 정말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라서

일행은 모두 넋을 잃었다. 윤은 감격한 얼굴로 라니를 껴안았다.

역시 아이는 아이다운 게 제일 귀엽다.

 

“아아, 너무 사랑스러워.”

 

부비거리는 윤의 손길이 싫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놀라면서도 라니는 가르릉거리며 웃었다.

 

“많이 먹어.”

 

“응.”

 

술자리가 이어지는 동안 라니는 신나게 안주를 집어먹었다.

 

“켁!”

 

“왜 그래?”

 

“사레들렸나봐. 괜찮아?”

 

“사레들린 데는 맥주가 최곤데.”

 

“애한테 술을 먹이겠다는 거냐?”

 

“뭐 어때? 조금인데...”

 

“라니, 이거 마셔.”

 

“켈록 켈록...”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기침을 하던 라니는 입가에 닿은 액체를 들이켰다.

 

“맛없어!”

 

그 말을 끝으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탁자에 푹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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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안 일어나지?”

 

“그러게 말야. 큰일이네. 열은 어때?”

 

“떨어지질 않아. 술 좀 마셨다고 이렇게 열이 안 내리는 경우도 있나?”

 

“그러게 애한테 술 같은 걸 먹이고 그래!”

 

갑자기 쓰러진 라니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었다.

집으로 데려왔지만 라니는 거의 혼수상태였다.

 

“왜 이러지? 유진아, 뭐 좀 아는 거 없어?”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뭐든 좋으니까 좀 알아봐.”

 

“알았어.”

 

“병원에 데려가자. 이러다 정말 큰일나겠어.”

 

윤의 말에 한과 유진이 펄쩍 뛰었다.

 

“병원은 무슨! 열나는 애를 옮기면 안 돼.”

 

“그럼그럼. 움직이면 안 되는 경우도 있다고.”

 

땀까지 흘려가며 둘러대는 한과 유진이었지만 윤은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걱정스럽게 라니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울먹일 뿐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 이대로 잘못되기라도 하면...”

 

“걱정 말고 윤이 넌 좀 들어가서 자라. 세진형이랑 온이랑 다 가서 좀 쉬어.

아무래도 장기전이 될 것 같으니까 교대로 간호하자. 알았지?”

 

“싫어. 곁에 있을래.”

 

“나도. 걱정돼서 잠도 안 올 것 같아.”

 

한과 유진이 동시에 세진에게 눈짓을 했다.

 

“자자, 환자 곁에 너무 사람이 많아도 안 좋아. 나가자.

그래도 한이랑 유진이는 의대생이잖아. 우리보다는 낫겠지.”

 

“그래도...”

 

머뭇거리는 두 사람을 세진이 끌고 나갔다.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는 한과 유진이었다.

 

“왜 이런 거냐?”

 

“나도 모르겠어. 잠깐만. 에이피를 부를께. 에이피, 접속해.”

 

-에이피 연결되었습니다.

 

유진과 세진이 이 집으로 오면서 아예 에이피의 메인 서버를 뜯어왔다.

화성에서 윤을 노린다는 사실을 안 유진이 보안을 위해 취한 조치였다.

 

“라니가 왜 이러는 거야?”

 

-증상을 말씀해 주십시오.

 

“열이 많이 나. 그리고 혼수상태인 것 같고. 눈동자에 전혀 반사신경이 없어.

그리고... 어? 팔목에 문신이 있는데? 앗, 뜨거워!”

 

유진은 라니의 팔을 놓칠 뻔 했다.

마치 온 몸의 열이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문신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문신이라구요? 어떤 모양입니까?

제 본체가 아니고는 스캔이 불가능하니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이상한 모양이네. 문자같기도 하고 무슨 새의 날개모양 같기도 하고.”

 

-‘왕의 날개’로군요. 라탄의 성인식입니다.

 

“뭐라고?”

 

-라탄인들이 성체로 변태하는 과정을 성인식이라고 부릅니다.

그때 나타나는 문양이 신분을 상징하지요. ‘왕의 날개’는 왕가에만 발현하는 특징입니다.

 

“들어본 것 같기도 하지만... 라니가 벌써 성인식을 할 때였나?

아직 6개월 정도 남았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약혼식도 성인식 이후로 잡기로 한 거였잖아.”

 

-‘신의 눈물‘을 마시면 시기가 빨라지기도 합니다.

라탄에서 말하는 ’신의 눈물’은 바로 알콜입니다.

 

“알콜? 하지만 아주 조금이었는데?”

 

-성인식을 전후해서는 몸의 밸런스가 무너집니다.

아주 불안정한 상태로 변화하는 거죠. 극소량이라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된다는 거야?”

 

한의 물음에 유진이 고개를 저었다.

 

“성인식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문신이 나타났다면 두세 시간 후에는 변태를 마칠 겁니다.

그때까지는 될 수 있는 한 어둡고 밀폐된 장소에 혼자 두십시오.

라탄에는 따로 태실(胎室)이 있겠지만 여기선 최대한 비슷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커튼을 치고 그 위를 담요로 꼼꼼하게 막는다.

암실과도 비슷하게 캄캄한 방을 만들어 놓고서야 둘은 이마의 땀을 훔쳤다.

 

“온이는 그렇다치고 윤이한텐 뭐라고 할래? 변태한다면 모습이 변한다는 거 아니야?”

 

“더이상 둘러댈 말도 없어.”

 

“하기야... 다른 사람이 떡 나타나서 라니라고 하면 기절할지도 모르지.”

 

“형... 차라리 이 기회에 다 고백해 버릴까?”

 

“그거야 너의 선택이지. 윤이가 믿고 안 믿고 선택하는 것처럼.”

 

“윤이가 어떻게 나올까?”

 

“너를 다시는 안 볼 거라는데 올인이다.”

 

“아아, 미치겠네.”

 

머리를 쥐어뜯어봤자 뾰족한 수가 생기지는 않는다.

 

“라니의 일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으니까 너랑 나랑 입 맞춰야지.

일단 라니는 외국 귀족가문이고 그 가문의 비밀이 바로 이 변태라는 걸로.”

 

“믿어줄까?”

 

“뭐, 우리 윤이가 의외로 대범한 데가 있지.”

 

“하아... 언제까지 윤이를 속여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고민 많이 해라.”

 

“잔인해...”

 

“먼저 잔인한 건 너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 줬으면 하는데.”

 

“으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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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난 라니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졌다.

 

“아파...”

 

몸이 두 쪽으로 갈라지면 이런 고통일까. 아픔에 눈물이 줄줄 흘렀다.

 

“이게 뭐지?”

 

어깨에 와 닿은 실 같은 것을 들어보던 라니는

그것이 자신의 머리카락이라는 사실에 경악했다.

금빛 찬란한 곱슬머리. 라탄 왕가의 특징이다.

 

“설마 나... 변태한 건가?”

 

빈틈없이 창을 막아뒀어도 아침의 햇살은 어느 정도 사물을 식별가능하게 만들어주었다.

라니는 아픔도 잊고 벌떡 일어나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이게... 나?”

 

거울 안에는 발치까지 닿을 듯

물결치는 금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성숙한 여자가 서 있었다.

하얀 피부에 물빛 눈동자, 탐스러운 가슴과 엉덩이,

길게 내려뻗은 다리까지 어디를 보나 완벽한 성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직 성인식까지는 6개월 이상이 남았는데?”

 

잠시 생각하던 라니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지러워. 라탄에 돌아가야 하는 건가? 신역에 들지 않으면...”

 

성인식을 마치고나면 한달 정도 요양하다가 신역에 들어야 한다.

갑자기 커진 몸에 맞는 힘을 지녀야 하기 때문이다.

몸에 걸맞는 힘을 갖지 못하면 몸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아직 유진님에게 확답도 듣지 못했는데.”

 

침대에 걸쳐진 옷을 보던 라니는

아직도 통증이 다 가시지 않은 몸을 힘겹게 움직여 그것을 입었다.

윤의 옷인지 조금 짧다.

 

“꺄악! 누구야?”

 

“라, 라니?”

 

“호오, 미인이 됐는걸.”

 

밖으로 나가자 제각각 의미를 알 수 없는 탄성을 터트린다.

라니는 사람들의 열광적인 반응에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정말 라니야? 듣기는 했지만... 놀라워.”

 

윤은 라니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 했다.

유진이 털어놓은 비밀에 따르자면

라니는 고대로부터 어떤 특수한 힘을 이어받은 가문의 후계자란다.

그 가문의 사람들은 20년 이상을 어린아이 모습으로 지내다가

어떤 순간이 오면 성인의 모습으로 탈바꿈한다는 것이었다.

 

들을 때도 믿겨지지 않았는데 직접 눈으로 보고서는 더 믿기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랑 비슷한 구석도 있네. 하지만 이렇게 완전히 바뀌는 건 줄은 몰랐어.”

 

아주 조금 외국애 같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어린 라니는 그다지 한국인과 다른 것이 없었다.

검은 머리는 빛나는 금발로, 검은 눈동자는 비쳐보일 듯 투명한 옅은 물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정말 예쁘다, 라니.”

 

순수한 감탄이 어린 윤의 눈에 조금 쑥스러워진 라니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라니가 일어났...”

 

마침 바깥에서 들어오던 온이 라니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진짜 미인이 됐지, 오빠? 너무너무 아름다워.”

 

윤의 말에도 온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뚫어져라 라니만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너무 예뻐서 반한 거야?”

 

윤이 옆구리를 쿡 찌르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온이 중얼거렸다.

 

“내 라니는... 귀엽고 작은 라니는 어디로 간 거니?”

 

쓸쓸히 등을 돌려 현관을 나서는 온의 모습에 라니의 가슴이 찌릿 아팠다.

 

“온이 오빠는 정말... 라니, 기분나빠 하지 마.

온이 오빠가 원래 좀 어린애들을 좋아해서 그런 거니까.”

 

‘작은 라니가 더 좋아? 왜? 나 예쁘지 않아?’

 

라니는 문득 슬퍼졌다.

 

‘왜 좋아해 주지 않아? 작지 않은 나는... 라니가 아니야?’

 

라탄인들에게 있어 성인식이란 말 그대로

그때부터 한 사람의 인간으로 대우받는다는 의미가 있어서

어린 아이의 모습을 하고 살면서 성인식을 치르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하지만 라니는 막상 기쁘지 않았다.

아름다운 모습에 유진까지도 감탄어린 눈으로 바라보지만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다시 아이로 돌아가고 싶어.’

 

축하해 주는 사람들 중에 온이 없다는 사실이 못내 가슴아픈 라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