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에 입대해서 자대 배치를 받고, 내무반 고참들 얼굴도 다 기억하지 못할 만큼 새파란 신참 때였다. 토요일 오전일과를 다 끝내고, 내무반 침상에 꼿꼿한 부동자세로 앉아 고참들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한 중간 고참쯤 되는 행정병이 내무반으로 뛰어들어와 다짜고짜 침상에 앉아 있던 나를 노려보더니 군화발로 가슴팍을 내려 찍었다. TV를 보고있던 내무반장이 그걸 보고 왜 그러냐니까 저 신병놈 아버지가 면회를 왔단다. 난 내가 이 부대로 전입 온걸 집에 알릴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도 안되고.. 하지만 어떻게 나 있는 곳을 아셨는지 지금 내 아버지는 나를 찾아오셨다. 군에 전입 온지 1달 뒤에야 공식적인 면회가 가능한 것을 그새를 못참고 내 아버지가 찾아오신 모양이었다. 모두들 내가 몰래 집에 연락을 한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었다. 고참들은 절대 면회를 시키면 안된다고 방방 뛰고 있었지만 선임하사는 여기까지 찾아오신 분을 그냥 보내냐고 면회를 허락하였다. 나를 앞에 세우고 연실 퉁퉁거리며 면회장 까지 가는 길 내내 내무반장은 면회 끝나고 두고 보자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른 오후, 저만치 면회소에 홀로 앉아 계신 내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부대가 서울 한복판에 있었다. 그리고 근처가 아버지의 사무실이었다. 퇴근하여 집에 가시는 길에 당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여기까지 찾아 오게 됐노라고, 혹여 이 일로 하여 내 아들에게 불이익이 생기는 거라면 그냥 가겠노라고..
절대 그럴 일 없으니 시간에 구애 받지 마시고 얘기 많이 나누시라며 내무반장이 나를 아버지 앞으로 잡아 끌었다.
“네가 너무 보고 싶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여기까지 왔다.”
그 후 아버지와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지금은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면회가 끝나고 부랴부랴 들어선 내무반에서는 이미 살벌한 분위기가 가득했었고, 나는 여러 고참들에게 태어나 난생 처음으로 떡이 되도록 맞았다.
노인네.. 왜 쓸데없이 나를 찾아와 가지고..
복학 후, 대학 4학년 때 동기녀석의 아버님이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사실, 웬만한 경우가 아니면 벌써부터 우리들의 부모가 돌아가실 만큼 연세를 많이 드신 경우는 드문 일이었다. 처음에 친구 아버님의 부고를 들었을 때 솔직히 나는 무덤덤 했었다. 나와 관계 없는 이의 죽음에 솔직히 슬프다는 생각 따위는 전혀 들지 않기도 하였거니와 3일 후에 있을 중간고사에 대한 부담감과 그저 약간.. 그 친구가 안됐다는 생각만 잠시 해 보았다.
다른 친구들과 부랴부랴 밤늦게 들어선 초상집은 그야말로 잔칫집이었다. 초저녁부터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이와, 긴 밤을 지세우기 위해 벌써부터 화툿장을 매만지는 이들, 그리고 부산스럽게 음식을 나르는 사람들… 슬프고 가슴 아픈 이들은 오로지 유족들만이 아니었을까.
4월 말인가 5월 초인가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와이셔츠에 얇은 양복저고리만 걸쳐 입은 나로서는 3일장을 치루는 내내 쌀쌀한 밤공기를 견뎌내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저 장례가 끝나면 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이불 속에서 늘어지게 자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친구 아버님의 장례일.
생각보다 무거운 망자의 관을 짊어지고 산을 올랐다. 어깨가 떨어질 것 같았고 사실 그 동안의 밤샘으로 적지 않게 피곤 했다. 옆에서 내내 들려오는 친구와 유족들의 울음소리보다는 관을 지고 가며 끙끙대는 사람들의 용쓰는 소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그 친구의 집안풍습은 ‘탈관’이었다. 관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누워 있던 망자를 꺼내 미리 파놓은 땅에 그냥 묻는 풍습이었다. 사실 나는 그때 처음 죽은 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친구의 남동생이 많이 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뿌려지는 흙에 시신의 절반 이상이 가려질 때쯤 발을 동동 구르며 울던 그 남동생의 모습을 보며 그냥 막연하게나마 처음으로 슬프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하지만 정말 그 때의 그 감정이 슬펐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장례를 무사히 마치고 학교 기숙사로 돌아와 나는 곧바로 시작되는 중간고사에 그 안스럽던 기억을 되새길 여유가 없었다.
어떻게 시험이 끝났는지 지금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시험이 끝나고 오랜만에 집으로 갔다. 밤늦게까지 안방에서 T.V를 보다가 그만 잠이 들어 버렸던 것 같다. 동도 트지않은 새벽녘에 불현듯 잠이 깨어서 장소를 분간할 수 없는 혼란스러움 속에서 문득 옆에 누워 주무시고 계신 내 아버지의 숨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항상 뻣뻣하고 두터운 그 아버지의 손을 잠시 잡아보았다. 아버지를 잃고 슬퍼하고 있을 그 친구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들과 상관없이 지금 내 옆에서 저렇게 건강하고 우뚝 선 나무와도 같이 살아계신 내 아버지께 새삼 감사함을 느끼며 언제까지나 그렇게 내 옆에서 우뚝 서 계시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야무지고 당당한 내 아버지의 몸이 점점 야위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저 환절기의 이유 없는 증상이려니 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입고 계시던 바지춤에 주먹이 두개가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야위어만 가던 아버지의 두 뺨은 이미 좋지 못한 병마가 몸 전체를 뒤덮었음을 알려주듯이 거무죽죽하게 타 들어 가기 시작했다.
당신께서 밤마다 시달리는 육체의 고통은 이미 젊은 시절부터 앓고 계시던 신경통의 되풀이가 아닌 듯 싶었다. 거친 숨까지 몰아 쉬며 밤잠을 못 이루시던 아버지의 고통을 보며 우리 가족들은 그냥 놔두어서는 안될 일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런 일을 예감하셨는지 병원 가기를 꺼려하기만 하시던 아버지를 식구들이 반 강제로 병원에 입원시켰다. 상태가 나쁜 것인가 묻던 나의 질문에 가족들은 아무도 나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다. 의사들도 뚜렷하고 명료하게 상황을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고 하였다. 그저 한결같이 좀 더 지켜 보자는 말뿐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당시 대학원 과정의 빠듯한 일정 때문에 거의 집을 못 들어 가는 형편이었는데, 마침 아버지가 입원해 계시던 병원 근처에 새살림을 낸 고등학교 동창녀석의 집들이에 초대를 받아 가는 길이어서 오랜만에 아버지를 보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병원으로 가는 내내 짜증스러운 교통체증을 헤치고 병원 정문을 들어서니 이미 저녁을 지나 깜깜한 밤중이었다. 그 때 차에서 내려 병원 건물쪽을 바라보는데 병원 건물 뒤로 나 있는 대로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대형 트럭이 대로를 폭주하는 굉음이었는데 마치 무슨 통곡소리도 같았다. 하지만 그때의 그 섬뜩하고 기분 나쁜 느낌은 왠지 나와 내 가족들에게 앞으로 닥쳐올 슬픈 소식을 알려주는 암시와 같은 것으로만 느껴졌다.
친구 집들이에 가서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기들을 만나 참 오랫동안 이야기하고 술을 마셨다. 자리를 옮겨 다니며 새벽 서 너 시 까지 술을 마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친구들은 아버지의 병환에 대해 물었고, 별일이야 있겠냐고 나는 대답했다. 그 다음 날이 연휴였기 때문에 나는 술이 깨는 대로 병원으로 가서 하루종일 아버지와 함께 있으리라는 계산으로 너무 늦은 시간 집으로 들어와 아무렇게나 쓰러져 잠이 들었다.
둘째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 차 집에 와 있던 누나가 다급하게 나를 잡아 흔들어 깨우던 게 아마도.. 아침 여섯시 쯤. 대충 두시간 밖에 못 잔 상태 여서 정신이 잠시 멍한 상태였다.
아버지 상태가 갑자기 나빠지셨단다. 그러니 빨리 병원으로 가잔다.
불안해 하는 누나를 옆에 태우고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나는 별일 아닐 거 라고 누나를 위로했다. 하지만 사실 나도 도무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매우 혼란스러웠다.
병실문을 들어서니 한달 내내 아버지 병수발에 몸이 녹초가 되신 어머니가 오히려 병자 같은 모습으로 아버지 침대 옆에 불안한 기색으로 앉아 계셨고, 어머니 만큼이나 피곤에 지친 내 형이 그 곁에 서 있었다. 이미 눈동자가 흐릿해진 아버지의 양 콧구멍에는 산소공급용 카테터가 꽂혀 있었고 듣고 있기에도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한 고통스러운 신음소리와 두 눈에 맺힌 눈물…
왜 우시는 거였을까... 가족들도 알아볼 수 없는 혼수상태 였지만 곧 숨이 끊어질 거라는 두려움을 느끼고 계셨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사랑하는 가족들을 남겨두고 떠나는 것에 대한 슬픔이었을까, 아니면 단지 육신의 통증에 대한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까.
그 광경을 보면서도 나는 별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별일이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때 내 나이 스물 아홉, 내 아버지 예순 하나.. 우리가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할 만큼 세상을 오래 살아온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병실 복도에 나와서 창밖을 바라 보면서도 나는 내내 저러다 아버지가 곧 일어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니, 그게 아니다. 저렇게 고통스러워 할거면 차라리 지금 당장 돌아가시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얼마 후 갑자기 병실에서 누군가가 후다닥 뛰어나와 어디론가 황급히 뛰어갔고, 이윽고 젊은 의사들과 간호사들과 함께 병실로 뛰어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누워계신 침대를 끌고 나와서 가족들과 함께 어느 방인가로 급하게 이동을 하였다. 가슴이 철렁 하고 내려 앉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좋은가.. 나는..
“코드 블루 이ㅇㅇ!”, “코드 블루 이ㅇㅇ!” 내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병원 천정 스피커에서 다급하게 외치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젠가 환자 하나가 죽어나갈 때 똑 같은 방송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의사들이 하나 둘 아버지가 계신 방으로 급하게 뛰어들어갔고, 이윽고 누군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방에서 나와 복도에 멍청히 서있던 나를 다급하게 불렀다. 임종의 순간….
임종을 하는 아버지를 본다는 것이 당시 나한테는 슬픔 보다는 망설임이었다. 내 평생을 살면서 내내 내 머릿속에 그 가슴 아픈 장면을 각인 시켜 놓고 싶지 않았다. 그것을 기억하면서 평생을 살아갈 용기가 내게는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숨이 막 끊어지려는 순간이라고 느꼈을 때 다시 그 병실을 뛰어 나갔고,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라는 누군가의 말에 참견 말라며 소리지르며 욕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난 어쩌면 좋단 말인가..
환자의 맥박이 끊어졌음을 알리는 신호음이 한동안 길게 늘어지는 것이 내 귀에 들렸고, 아직 저렇게 숨을 쉬고 있지 않냐고, 죽은 게 아니라고 의사의 가슴을 두 주먹으로 치며 절규하는 내 어머니, 그리고 오열하는 누나와 형…
복도로 도망쳐 나와 있다가 가족들의 울음소리를 듣고서 아버님이 임종하셨음을 어렴풋하게 나마 깨달았던 나는 방에서 방금 나온 의사에게 지금 상황을 물었다.
방금 운명하셨다는 말을 듣고 당시의 나는 왜 그랬는지 그냥 헛웃음이 나왔다. 그냥 그렇게 내 입에서는 계속 헛웃음만 나왔다. 저들처럼 울지 못하고 왜 그렇게 계속해서 웃음이 나왔었는지는 지금 생각해 봐도 나는 잘 모르겠다.
사람이 너무 기가 막히는 일을 당하면 눈물 조차도 안 나오는 것일까. 부모가 죽는 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똑같다고 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저렇게 슬프도록 울고 있는데 나는 왜 그랬을까. 다만, 슬픔을 느끼기도 전에 당시의 상황은 내게 있어서 너무나 황당하고 기가 막힌 일이었고, 방금 몇 분전에 일어났던 그 소용돌이 같은 상황들 속에서 그냥.. 꿈속을 헤메이는 것과도 같은 멍한 정신과 미쳐버릴 것 같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이었다.
시체실 냉장고에 디밀어 지는 내 아버지의 시신을 바라보면서도 나는 그저 무덤덤했다. 눈물을 흘려 슬픈 얼굴로 아버지의 죽음을 그렇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아니.. 별 생각이 없었다. 정말로 머리가 멍한 상태였다. 정말로 마치 꿈속을 헤메는 기분만 들었다.
시신에게 수의를 입힐 때와 장례식 때는 많이 울었다.
그것 마저도 보지 않겠다 뛰쳐나가려 하던 나를 여러 사람이 가로 막았다. 가르마를 타고 단정하게 빗어 내린 여느 때와 같은 내 아버지의 고운 머리결과 오랜만에 편안하게 잠을 주무시고 계신 것만 같은 내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매주 일요일이면 당신의 두 아들들의 팔에 매달려 동네어귀 공중목욕탕에 가는걸 즐기시던 내 아버지의 여전히 다부지고 단단한 몸이었다. 붙잡아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는 내 아버지의 시신을 어떻게 두 눈 똑바로 뜨고 쳐다보고 있으란 말인가.
하얀 천으로 온 몸을 감싸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얼굴이 가려질 때, 난 그 자리에 주저 앉아 버렸다. 그냥.. 난 아직도 저 분께 들려주어야 할 얘기가 너무 많았고, 들어야 할 이야기도 아직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
장례식에선 사람 키만큼 파여 있는 땅속에서 ‘탈관’ 당한 시신의 절반 이상이 흙으로 덮여 가고 있을 때 나는 그런 내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봐야겠다는 절박함과 흙이 다 덮여지고 나면 더 이상은 평생 만날 수 없다는 절망감 뿐이었다. 문득 그 언젠가 자신의 아버지를 떠나 보낸 친구의 동생 생각이 났다. 그래..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이런 슬픔이었겠구나…
세월이 흘렀다. 이미 6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이.
그 6년 동안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 시간을 보냈는지 모를 만큼 순식간이었던 것 같다. 나 역시도 는 참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대학원을 졸업했고 좋은 회사에 취직도 했다. 그리고 아버지 살아생전 당신의 모습을 기억하는 내 아내와 결혼도 했고, 그런 아내와 나를 반반씩 닮았다는 아기도 태어났다.
살아가면서 그렇게 가슴 벅찬 순간들이 오면 나는 언제나 발을 동동 구르며 주위를 둘러보며 내 아버지를 찾는다. 하지만 그렇게도 그리운 내 아버지는 더 이상 내 곁에 오시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곁을 떠나는 그 순간보다, 살아가면서 자기 곁에 없는 것을 문득 깨닳았을 때가 더 가슴 저미는 슬픔으로 느껴질 거라고 한 친구가 내게 그랬다. 이제 그 말의 뜻을 알 것 같다.
‘네가 남들보다 어릿하여 이 세상에 열 두달 만에 태어나던 그날 새벽, 너의 태어남 만큼이나 지리한 가뭄 끝자락 하늘에서 단비가 내렸다. 가뭄 끝의 단비 처럼 너도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그렇게 다가가라..’
3년 동안 군 생활을 하던 그 무의식의 시간에 내 아버지는 내게 그렇게 편지를 쓰셨다. 그 편지에서 아버지는 내게 남자가 되는 법을 가르쳐 주셨고, 여럿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되도록이면 필요한 존재로 살아가는 법도 가르쳐 주셨다. 젊은 날의 시행착오와 지혜롭지 못함에서 오는 오만함에 대해서 꾸짖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거기에서 나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법도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그 편지를 꺼내어 읽지 못한다. 나중에.. 아주 먼 나중에, 그리움을 아픔으로 느끼지 않고 그리움 그 자체로만 느끼며 살아갈 용기가 생길 때쯤 꼭 다시 한번은 그 편지를 꺼내 읽어 내 아버지를 느끼리라…
대신..
나는 혼자 힘으로 일어서기 벅찰 만큼 외롭고 지칠 때면 언제고 내 아버지의 묘비 앞에 앉는다. 그 앞에서 한참을 앉아 백골이라도 이 땅 별로 깊지 않은 곳에 누워 계실 내 아버지의 환영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언제는 아버지 누워계신 그 자리 봉분 위에 얼굴을 부벼 소리 죽여 내내 울기도 하고, 언제는 나와 함께 하는 이 세상에 대해 많은 소식을 전한다. 그렇게.. 그렇게 시간은 내달리기만 한다.
6년 전, 발버둥치며 눈물을 흘리던 바로 이 자리, 내달리는 시간 한자락에서 이따금씩 내 아버지의 표정이 느껴지는 나의 딸아이가 아장아장 걸어와 내 무릎에 앉아 얼굴한번 뵌 적 없는 할아버지의 묘비를 바라다본다.
여기서 자주 울지 말아야겠다.
여기서 나 혼자 몰래 우는 사이 나도 모르게 어느덧 나 역시 아버지라는 존재가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내 아버지가 내게 보여주고 떠나셨을 때 처럼 나도 언제나 산처럼 우뚝 선 모습으로만 보여져야 겠다. 그래서 어느 날 나도 홀연히 떠나는 날이 오더라도 살아남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언제나 그렇게 산과 같은 존재로 남아 있어야 겠다. 내 사랑하는 아버지 처럼..
군대 신병시절 내 아버지가 면회 오시던 그날..
이미 마음은 온통 내무반의 그 살벌한 분위기에만 가 있었기에 서둘러 떠밀듯 아버지를 보냈다. 왜 그랬을까. 이렇게 금새 아버지를 영영 떠나보낼 것이었다면, 그 때 한번만이라도 아버지를 꽉 안아봤었다면 좋았을 것을..
2001년 오월 어느날 아버지 묘비앞에서 쓰다.
군에 입대해서 자대 배치를 받고, 내무반 고참들 얼굴도 다 기억하지 못할 만큼 새파란 신참 때였다. 토요일 오전일과를 다 끝내고, 내무반 침상에 꼿꼿한 부동자세로 앉아 고참들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한 중간 고참쯤 되는 행정병이 내무반으로 뛰어들어와 다짜고짜 침상에 앉아 있던 나를 노려보더니 군화발로 가슴팍을 내려 찍었다. TV를 보고있던 내무반장이 그걸 보고 왜 그러냐니까 저 신병놈 아버지가 면회를 왔단다. 난 내가 이 부대로 전입 온걸 집에 알릴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도 안되고.. 하지만 어떻게 나 있는 곳을 아셨는지 지금 내 아버지는 나를 찾아오셨다. 군에 전입 온지 1달 뒤에야 공식적인 면회가 가능한 것을 그새를 못참고 내 아버지가 찾아오신 모양이었다. 모두들 내가 몰래 집에 연락을 한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었다. 고참들은 절대 면회를 시키면 안된다고 방방 뛰고 있었지만 선임하사는 여기까지 찾아오신 분을 그냥 보내냐고 면회를 허락하였다. 나를 앞에 세우고 연실 퉁퉁거리며 면회장 까지 가는 길 내내 내무반장은 면회 끝나고 두고 보자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른 오후, 저만치 면회소에 홀로 앉아 계신 내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부대가 서울 한복판에 있었다. 그리고 근처가 아버지의 사무실이었다. 퇴근하여 집에 가시는 길에 당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여기까지 찾아 오게 됐노라고, 혹여 이 일로 하여 내 아들에게 불이익이 생기는 거라면 그냥 가겠노라고..
절대 그럴 일 없으니 시간에 구애 받지 마시고 얘기 많이 나누시라며 내무반장이 나를 아버지 앞으로 잡아 끌었다.
“네가 너무 보고 싶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여기까지 왔다.”
그 후 아버지와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지금은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면회가 끝나고 부랴부랴 들어선 내무반에서는 이미 살벌한 분위기가 가득했었고, 나는 여러 고참들에게 태어나 난생 처음으로 떡이 되도록 맞았다.
노인네.. 왜 쓸데없이 나를 찾아와 가지고..
복학 후, 대학 4학년 때 동기녀석의 아버님이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사실, 웬만한 경우가 아니면 벌써부터 우리들의 부모가 돌아가실 만큼 연세를 많이 드신 경우는 드문 일이었다. 처음에 친구 아버님의 부고를 들었을 때 솔직히 나는 무덤덤 했었다. 나와 관계 없는 이의 죽음에 솔직히 슬프다는 생각 따위는 전혀 들지 않기도 하였거니와 3일 후에 있을 중간고사에 대한 부담감과 그저 약간.. 그 친구가 안됐다는 생각만 잠시 해 보았다.
다른 친구들과 부랴부랴 밤늦게 들어선 초상집은 그야말로 잔칫집이었다. 초저녁부터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이와, 긴 밤을 지세우기 위해 벌써부터 화툿장을 매만지는 이들, 그리고 부산스럽게 음식을 나르는 사람들… 슬프고 가슴 아픈 이들은 오로지 유족들만이 아니었을까.
4월 말인가 5월 초인가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와이셔츠에 얇은 양복저고리만 걸쳐 입은 나로서는 3일장을 치루는 내내 쌀쌀한 밤공기를 견뎌내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저 장례가 끝나면 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이불 속에서 늘어지게 자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친구 아버님의 장례일.
생각보다 무거운 망자의 관을 짊어지고 산을 올랐다. 어깨가 떨어질 것 같았고 사실 그 동안의 밤샘으로 적지 않게 피곤 했다. 옆에서 내내 들려오는 친구와 유족들의 울음소리보다는 관을 지고 가며 끙끙대는 사람들의 용쓰는 소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그 친구의 집안풍습은 ‘탈관’이었다. 관 뚜껑을 열고 그 안에 누워 있던 망자를 꺼내 미리 파놓은 땅에 그냥 묻는 풍습이었다. 사실 나는 그때 처음 죽은 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친구의 남동생이 많이 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뿌려지는 흙에 시신의 절반 이상이 가려질 때쯤 발을 동동 구르며 울던 그 남동생의 모습을 보며 그냥 막연하게나마 처음으로 슬프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하지만 정말 그 때의 그 감정이 슬펐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장례를 무사히 마치고 학교 기숙사로 돌아와 나는 곧바로 시작되는 중간고사에 그 안스럽던 기억을 되새길 여유가 없었다.
어떻게 시험이 끝났는지 지금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시험이 끝나고 오랜만에 집으로 갔다. 밤늦게까지 안방에서 T.V를 보다가 그만 잠이 들어 버렸던 것 같다. 동도 트지않은 새벽녘에 불현듯 잠이 깨어서 장소를 분간할 수 없는 혼란스러움 속에서 문득 옆에 누워 주무시고 계신 내 아버지의 숨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항상 뻣뻣하고 두터운 그 아버지의 손을 잠시 잡아보았다. 아버지를 잃고 슬퍼하고 있을 그 친구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들과 상관없이 지금 내 옆에서 저렇게 건강하고 우뚝 선 나무와도 같이 살아계신 내 아버지께 새삼 감사함을 느끼며 언제까지나 그렇게 내 옆에서 우뚝 서 계시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야무지고 당당한 내 아버지의 몸이 점점 야위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저 환절기의 이유 없는 증상이려니 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입고 계시던 바지춤에 주먹이 두개가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야위어만 가던 아버지의 두 뺨은 이미 좋지 못한 병마가 몸 전체를 뒤덮었음을 알려주듯이 거무죽죽하게 타 들어 가기 시작했다.
당신께서 밤마다 시달리는 육체의 고통은 이미 젊은 시절부터 앓고 계시던 신경통의 되풀이가 아닌 듯 싶었다. 거친 숨까지 몰아 쉬며 밤잠을 못 이루시던 아버지의 고통을 보며 우리 가족들은 그냥 놔두어서는 안될 일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런 일을 예감하셨는지 병원 가기를 꺼려하기만 하시던 아버지를 식구들이 반 강제로 병원에 입원시켰다. 상태가 나쁜 것인가 묻던 나의 질문에 가족들은 아무도 나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다. 의사들도 뚜렷하고 명료하게 상황을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고 하였다. 그저 한결같이 좀 더 지켜 보자는 말뿐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당시 대학원 과정의 빠듯한 일정 때문에 거의 집을 못 들어 가는 형편이었는데, 마침 아버지가 입원해 계시던 병원 근처에 새살림을 낸 고등학교 동창녀석의 집들이에 초대를 받아 가는 길이어서 오랜만에 아버지를 보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병원으로 가는 내내 짜증스러운 교통체증을 헤치고 병원 정문을 들어서니 이미 저녁을 지나 깜깜한 밤중이었다. 그 때 차에서 내려 병원 건물쪽을 바라보는데 병원 건물 뒤로 나 있는 대로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대형 트럭이 대로를 폭주하는 굉음이었는데 마치 무슨 통곡소리도 같았다. 하지만 그때의 그 섬뜩하고 기분 나쁜 느낌은 왠지 나와 내 가족들에게 앞으로 닥쳐올 슬픈 소식을 알려주는 암시와 같은 것으로만 느껴졌다.
친구 집들이에 가서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기들을 만나 참 오랫동안 이야기하고 술을 마셨다. 자리를 옮겨 다니며 새벽 서 너 시 까지 술을 마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친구들은 아버지의 병환에 대해 물었고, 별일이야 있겠냐고 나는 대답했다. 그 다음 날이 연휴였기 때문에 나는 술이 깨는 대로 병원으로 가서 하루종일 아버지와 함께 있으리라는 계산으로 너무 늦은 시간 집으로 들어와 아무렇게나 쓰러져 잠이 들었다.
둘째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 차 집에 와 있던 누나가 다급하게 나를 잡아 흔들어 깨우던 게 아마도.. 아침 여섯시 쯤. 대충 두시간 밖에 못 잔 상태 여서 정신이 잠시 멍한 상태였다.
아버지 상태가 갑자기 나빠지셨단다. 그러니 빨리 병원으로 가잔다.
불안해 하는 누나를 옆에 태우고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나는 별일 아닐 거 라고 누나를 위로했다. 하지만 사실 나도 도무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매우 혼란스러웠다.
병실문을 들어서니 한달 내내 아버지 병수발에 몸이 녹초가 되신 어머니가 오히려 병자 같은 모습으로 아버지 침대 옆에 불안한 기색으로 앉아 계셨고, 어머니 만큼이나 피곤에 지친 내 형이 그 곁에 서 있었다. 이미 눈동자가 흐릿해진 아버지의 양 콧구멍에는 산소공급용 카테터가 꽂혀 있었고 듣고 있기에도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한 고통스러운 신음소리와 두 눈에 맺힌 눈물…
왜 우시는 거였을까... 가족들도 알아볼 수 없는 혼수상태 였지만 곧 숨이 끊어질 거라는 두려움을 느끼고 계셨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사랑하는 가족들을 남겨두고 떠나는 것에 대한 슬픔이었을까, 아니면 단지 육신의 통증에 대한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까.
그 광경을 보면서도 나는 별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별일이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때 내 나이 스물 아홉, 내 아버지 예순 하나.. 우리가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할 만큼 세상을 오래 살아온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병실 복도에 나와서 창밖을 바라 보면서도 나는 내내 저러다 아버지가 곧 일어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니, 그게 아니다. 저렇게 고통스러워 할거면 차라리 지금 당장 돌아가시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얼마 후 갑자기 병실에서 누군가가 후다닥 뛰어나와 어디론가 황급히 뛰어갔고, 이윽고 젊은 의사들과 간호사들과 함께 병실로 뛰어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누워계신 침대를 끌고 나와서 가족들과 함께 어느 방인가로 급하게 이동을 하였다. 가슴이 철렁 하고 내려 앉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좋은가.. 나는..
“코드 블루 이ㅇㅇ!”, “코드 블루 이ㅇㅇ!” 내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병원 천정 스피커에서 다급하게 외치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젠가 환자 하나가 죽어나갈 때 똑 같은 방송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의사들이 하나 둘 아버지가 계신 방으로 급하게 뛰어들어갔고, 이윽고 누군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방에서 나와 복도에 멍청히 서있던 나를 다급하게 불렀다. 임종의 순간….
임종을 하는 아버지를 본다는 것이 당시 나한테는 슬픔 보다는 망설임이었다. 내 평생을 살면서 내내 내 머릿속에 그 가슴 아픈 장면을 각인 시켜 놓고 싶지 않았다. 그것을 기억하면서 평생을 살아갈 용기가 내게는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숨이 막 끊어지려는 순간이라고 느꼈을 때 다시 그 병실을 뛰어 나갔고,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라는 누군가의 말에 참견 말라며 소리지르며 욕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난 어쩌면 좋단 말인가..
환자의 맥박이 끊어졌음을 알리는 신호음이 한동안 길게 늘어지는 것이 내 귀에 들렸고, 아직 저렇게 숨을 쉬고 있지 않냐고, 죽은 게 아니라고 의사의 가슴을 두 주먹으로 치며 절규하는 내 어머니, 그리고 오열하는 누나와 형…
복도로 도망쳐 나와 있다가 가족들의 울음소리를 듣고서 아버님이 임종하셨음을 어렴풋하게 나마 깨달았던 나는 방에서 방금 나온 의사에게 지금 상황을 물었다.
방금 운명하셨다는 말을 듣고 당시의 나는 왜 그랬는지 그냥 헛웃음이 나왔다. 그냥 그렇게 내 입에서는 계속 헛웃음만 나왔다. 저들처럼 울지 못하고 왜 그렇게 계속해서 웃음이 나왔었는지는 지금 생각해 봐도 나는 잘 모르겠다.
사람이 너무 기가 막히는 일을 당하면 눈물 조차도 안 나오는 것일까. 부모가 죽는 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똑같다고 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저렇게 슬프도록 울고 있는데 나는 왜 그랬을까. 다만, 슬픔을 느끼기도 전에 당시의 상황은 내게 있어서 너무나 황당하고 기가 막힌 일이었고, 방금 몇 분전에 일어났던 그 소용돌이 같은 상황들 속에서 그냥.. 꿈속을 헤메이는 것과도 같은 멍한 정신과 미쳐버릴 것 같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이었다.
시체실 냉장고에 디밀어 지는 내 아버지의 시신을 바라보면서도 나는 그저 무덤덤했다. 눈물을 흘려 슬픈 얼굴로 아버지의 죽음을 그렇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아니.. 별 생각이 없었다. 정말로 머리가 멍한 상태였다. 정말로 마치 꿈속을 헤메는 기분만 들었다.
시신에게 수의를 입힐 때와 장례식 때는 많이 울었다.
그것 마저도 보지 않겠다 뛰쳐나가려 하던 나를 여러 사람이 가로 막았다. 가르마를 타고 단정하게 빗어 내린 여느 때와 같은 내 아버지의 고운 머리결과 오랜만에 편안하게 잠을 주무시고 계신 것만 같은 내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매주 일요일이면 당신의 두 아들들의 팔에 매달려 동네어귀 공중목욕탕에 가는걸 즐기시던 내 아버지의 여전히 다부지고 단단한 몸이었다. 붙잡아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는 내 아버지의 시신을 어떻게 두 눈 똑바로 뜨고 쳐다보고 있으란 말인가.
하얀 천으로 온 몸을 감싸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얼굴이 가려질 때, 난 그 자리에 주저 앉아 버렸다. 그냥.. 난 아직도 저 분께 들려주어야 할 얘기가 너무 많았고, 들어야 할 이야기도 아직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
장례식에선 사람 키만큼 파여 있는 땅속에서 ‘탈관’ 당한 시신의 절반 이상이 흙으로 덮여 가고 있을 때 나는 그런 내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봐야겠다는 절박함과 흙이 다 덮여지고 나면 더 이상은 평생 만날 수 없다는 절망감 뿐이었다. 문득 그 언젠가 자신의 아버지를 떠나 보낸 친구의 동생 생각이 났다. 그래..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이런 슬픔이었겠구나…
세월이 흘렀다. 이미 6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이.
그 6년 동안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 시간을 보냈는지 모를 만큼 순식간이었던 것 같다. 나 역시도 는 참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다. 대학원을 졸업했고 좋은 회사에 취직도 했다. 그리고 아버지 살아생전 당신의 모습을 기억하는 내 아내와 결혼도 했고, 그런 아내와 나를 반반씩 닮았다는 아기도 태어났다.
살아가면서 그렇게 가슴 벅찬 순간들이 오면 나는 언제나 발을 동동 구르며 주위를 둘러보며 내 아버지를 찾는다. 하지만 그렇게도 그리운 내 아버지는 더 이상 내 곁에 오시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곁을 떠나는 그 순간보다, 살아가면서 자기 곁에 없는 것을 문득 깨닳았을 때가 더 가슴 저미는 슬픔으로 느껴질 거라고 한 친구가 내게 그랬다. 이제 그 말의 뜻을 알 것 같다.
‘네가 남들보다 어릿하여 이 세상에 열 두달 만에 태어나던 그날 새벽, 너의 태어남 만큼이나 지리한 가뭄 끝자락 하늘에서 단비가 내렸다. 가뭄 끝의 단비 처럼 너도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그렇게 다가가라..’
3년 동안 군 생활을 하던 그 무의식의 시간에 내 아버지는 내게 그렇게 편지를 쓰셨다. 그 편지에서 아버지는 내게 남자가 되는 법을 가르쳐 주셨고, 여럿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되도록이면 필요한 존재로 살아가는 법도 가르쳐 주셨다. 젊은 날의 시행착오와 지혜롭지 못함에서 오는 오만함에 대해서 꾸짖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거기에서 나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법도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그 편지를 꺼내어 읽지 못한다. 나중에.. 아주 먼 나중에, 그리움을 아픔으로 느끼지 않고 그리움 그 자체로만 느끼며 살아갈 용기가 생길 때쯤 꼭 다시 한번은 그 편지를 꺼내 읽어 내 아버지를 느끼리라…
대신..
나는 혼자 힘으로 일어서기 벅찰 만큼 외롭고 지칠 때면 언제고 내 아버지의 묘비 앞에 앉는다. 그 앞에서 한참을 앉아 백골이라도 이 땅 별로 깊지 않은 곳에 누워 계실 내 아버지의 환영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언제는 아버지 누워계신 그 자리 봉분 위에 얼굴을 부벼 소리 죽여 내내 울기도 하고, 언제는 나와 함께 하는 이 세상에 대해 많은 소식을 전한다. 그렇게.. 그렇게 시간은 내달리기만 한다.
6년 전, 발버둥치며 눈물을 흘리던 바로 이 자리, 내달리는 시간 한자락에서 이따금씩 내 아버지의 표정이 느껴지는 나의 딸아이가 아장아장 걸어와 내 무릎에 앉아 얼굴한번 뵌 적 없는 할아버지의 묘비를 바라다본다.
여기서 자주 울지 말아야겠다.
여기서 나 혼자 몰래 우는 사이 나도 모르게 어느덧 나 역시 아버지라는 존재가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내 아버지가 내게 보여주고 떠나셨을 때 처럼 나도 언제나 산처럼 우뚝 선 모습으로만 보여져야 겠다. 그래서 어느 날 나도 홀연히 떠나는 날이 오더라도 살아남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언제나 그렇게 산과 같은 존재로 남아 있어야 겠다. 내 사랑하는 아버지 처럼..
군대 신병시절 내 아버지가 면회 오시던 그날..
이미 마음은 온통 내무반의 그 살벌한 분위기에만 가 있었기에 서둘러 떠밀듯 아버지를 보냈다. 왜 그랬을까. 이렇게 금새 아버지를 영영 떠나보낼 것이었다면, 그 때 한번만이라도 아버지를 꽉 안아봤었다면 좋았을 것을..
2001년 5월 어느날 아버지의 묘비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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