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성(城)을 향해 가는 길 [12]-작은 기다림※

미강2004.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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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작은 기다림


 

 

 

 하연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떴다.

 

 

엎드린 채 잠을 자고 있던 몸을 부스스 일으키자 온 몸의 근육들이 몸부림쳤다.

 

 

짧은 신음 같은 한숨을 토해내던 하연은

 

어렴풋한 시선으로 한쪽에 얌전히 벗어 놓은 산호색 드레스를 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터지는 안도의 한숨.

 

 

그래, 꿈이 아니었어. 절대로.

 

하룻밤 달콤한 꿈이 아니었던 거야.

 

 

 

얼마나 불안했는지 모른다.

 

 

꿈이라면 한 순간에 바스라 질까봐.

 

 

오랜만에 돌아온 집은 정겹다기 보다 구석구석이 새로워 보였다.

 

 

서서히 잠기운에서 깨어나던 하연은

 

간밤에 민혁이 했던 말들을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멋대로 도망칠 생각 같은 건 꿈도 꾸지 마! 내가 놔주기 전에는 아무데도 못 가.〕

 

 

〔얌전히 가서 기다리면 돼. 그게 당신 할 일이야. 그래 줄 수 있겠지…?〕

 

 

 

민혁이 했던 말들을 하나씩 되새길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할 정도였다.

 

 

그 사람의 모습을 계속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서,

 

참담한 걱정 속에 지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그 사람의 진심을 확인한 행복감에 아무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더랬다.

 

 

 

그리고 그 사람은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맡겨 둔 마음을 거둬들이지 않는 이상 어디에도 끝은 없어.

 

명심해. 아직 당신 손길이 필요해.〕

 

 

 

 

사랑이 왔나보다…라고 생각했다.

 

 

낯설고도 설레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하연은 불현듯 찾아 온 감정에 어색하기도 했지만

 

잔잔하게 밀려드는 미소만큼은 그녀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딩― 동― 딩― 동― 길게 두 번 울리는 벨소리에 잠깐 얼떨떨했다.

 

 

그러다 문득 하연은 자기가 지금 집에 돌아온 것을 깨닫고는,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대충 머리를 수습한 뒤 문을 열었다.

 

 

 

“해가 중천에 떴어! 아직까지 자고 있었던 거야?”

 

 

“어, 언니…. 윤경 언니!”

 

 

 

여전히 씩씩한 윤경의 말투는 늘 만나던 사이처럼 친근했다.

 

 

운동화를 벗어던진 윤경은 언제나 그랬듯이

 

하연의 집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털썩 주저앉은 윤경은 손가락으로 쓱쓱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한 달 전보다 더 짧아진 머리카락.

 

 

 

“왜 그러고 섰어? 사람 처음 봐? 한 달 만에 사람 보니까 신기해?

 

하긴 그렇기도 하겠다. 야! 손님 대접이 뭐 이래? 물이라도 한 잔 줘야지!”

 

 

 

멍하니 서서 윤경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던

 

하연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후다닥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하연은 다시 거실로 나왔다.

 

 

 

“주방으로 들어가더니 어째 빈손이야?”

 

 

“…없어. 아무 것도.”

 

 

“주어 떼먹고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어? 없을 줄 알고 사 왔어. 앉아.”

 

 

 

윤경은 하하하, 하고 웃으며 손으로 자기 옆자리를 탕탕 쳤다.

 

 

하연은 윤경의 장난에 배시시 웃으며 옆으로 가서 앉았다.

 

옆에 앉은 하연을 한참동안 바라보던 윤경이 짤막하게 한 마디 했다.

 

 

 

“…말랐다. 힘들었나보네. 내가 죄인이지.”

 

 

“…또 짧아졌어. 길러 보라니깐. 왜 좋은 머릿결을 자꾸 쳐내?”

 

 

“항복! 길러 보려고 했는데 영 귀찮아서 말이지. 관두자!

 

어여 옷 입어! 세수하고. 맛난 거 사줄게.”

 

 

“잠깐만 언니. 있지, 나 집에 온 거 어떻게 알았어?”

 

 

“조상현 비서라고 하던가? 그 사람이 연락 했던데. 너 집에 보냈다고.”

 

 

“아…!”

 

 

“뭐냐? 그 의미심장한 눈빛은? 이상한 집에 갔다 오더니 너까지 이상해졌다. 쯧쯧쯧.”

 

 

 

윤경의 혀 차는 소리에 하연은 배시시 웃었다.

 

윤경은 하연의 웃는 얼굴을 보더니

 

손가락을 맞부딪쳐 딱, 하는 소리를 냈다.

 

 

깜짝 놀라는 하연의 어깨를 철퍽 치면서 윤경이 말했다.

 

 

 

“그래! 그거야! 그건 안 변했네. 웃는 거…. 이쁘다, 우리 하연이!”

 

 

“잠깐 기다려, 언니. 오랫동안 집을 비워 놓아서 대접할 만한 것도 없다.

 

일단 나 씻고 밖에 나가자.”

 

 

“얼마든지! 그 동안 못잔 잠 좀 자고 있어야겠다, 난.”

 

 

“맨바닥에 그냥 누우면 어떡해? 방에 가서 자.”

 

 

“놔둬. 난 맨바닥이 더 편해. 신경 꺼줘.”

 

 

 

이미 벌렁 드러누워 버린 윤경은 하연의 말에도 꿈쩍하지 않고 눈을 감아 버렸다.

 

 

금세 잠에 빠져든 윤경을 보고 있노라니

 

이제야 집에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

 

 

윤경이 하연의 집으로 직접 찾아와서 들이닥칠 때는 딱 두 가지 상황이었다.

 

 

잠잘 곳이 필요하거나, 배가 고프거나.

 

하연은 방에서 얇은 이불을 가져와 윤경에게 덮어주고

 

베개를 살짝 머리 밑에 넣어 주었다.

 

 

 

욕실로 들어간 하연은 조심스레 수도꼭지를 돌려 물을 틀었다.

 

 

한 달 남짓 물을 한 번도 틀어주지 않아서 그랬는지

 

처음에는 꾸루룩, 꾸루룩하는 소리가 났다.

 

 

푸루루룩 소리를 내며 물이 나오기 시작했을 때

 

하연은 차가운 물을 세면대에 받아 놓고 한참동안 두 손을 담근 채 거울을 보았다.

 

 

 

부드러운 거품을 몸에 칠하면서 하연은 향긋한 비누 향기와 또 다른 향기를 맡았다.

 

 

아직도 미미하게 그 사람의 체취가 남아 있었다.

 

 

탄탄한 가슴팍, 얼마든지 매달려도 될 것 같은 힘찬 팔,

 

그리고 자신의 귓가에 속살거리던 나지막한 목소리.

 

 

손가락 사이에 잡혀 있던 부드럽고 숱 많은 그 사람의 머리카락 감촉까지

 

모두 되살아났다.

 

 

하연은 아무도 없는 욕실에서 혼자 화끈거리는 얼굴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하지만 하연은 저돌적이면서도 따스하고 부드러운 입맞춤의 느낌이 생생히 떠올라

 

얼굴을 향해 샤워기로 물을 확 끼얹을 수밖에 없었다.

 

 

온 몸에 묻어 있는 물기를 재빨리 닦아내던 하연은

 

발그레하게 상기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나 있었다.

 

 

기다릴 준비.

 

 

얌전히 기다리라고 말한 이상, 그 사람이 반드시 찾아오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절대로 마음에도 없는 겉치레 말을 즐겨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무언(無言)의 믿음.

 

 

막연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다.

 

 

그 사람이 자신 앞에서 두 발로 단단하게 딛고 일어난 순간,

 

이미 어둠의 장막을 찢고 나와 발걸음을 내디뎠다는 사실을.

 

 

그리고 당분간은 영역 구축을 위해 바삐 움직일 것이라는 사실을.

 

 

일종의 예감이었다.

 

 

그 사람은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

 

 

하연은 그가 제시한 기다림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더랬다.

 

 

 

“…하연아? 잠들었어? 너무 피곤해서 잠들었나…? 진하연!”

 

 

어느 새 잠에서 깨어난 윤경이 욕실 문을 탕탕 두들기고 있었다.

 

 

하연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돌돌 말아 넣고는

 

황급히 욕실을 나왔다.

 

 

두 팔을 위로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켜는 윤경의 모습은 은근히 멋졌다.

 

 

예쁘거나 아름다운 것과는 거리가 좀 있을지 몰라도

 

뭐랄까, 중성적인 매력이 물씬 풍기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살짝 눈을 감은 윤경의 속눈썹은 하연보다도 훨씬 길었다.

 

 

얼핏 보면 선머슴 같은데 조목조목 살펴보면 선한 심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

 

 

문득 하연은 상현을 떠올리고는

 

멋대로 두 사람을 나란히 세워 보았다.

 

 

은근히 어울리는 것도 같은데.

 

 

하긴, 윤경은 언제나 말했었다.

 

 

유머감각 없고 무뚝뚝한데다 이겨먹지 못하는 남자는 딱 질색이라고.

 

윤경은 가만히 서 있는 하연의 이마를 콩, 하고 때리며 말했다.

 

 

 

“기집애. 너무 피곤해서 그대로 잠든 줄 알았잖아.

 

얼른 머리 말리고 준비해. 후아암~

 

아, 진짜 너네 집에 오면 사람 사는 집 같아서 잠이 잘 와.

 

토막잠을 자도 가뿐 하다니깐.”


 

 

 

☆★☆

 

 

 

 

 하연은 한 손에 스트로베리 샤베트를 들고서

 

윤경의 손에 이끌려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다 녹아버려서 이젠 음료수처럼 변해버린 샤베트를 한모금 마신 하연이 사정조로 말했다.

 

 

 

“언니, 우리 어디 좀 앉자. 응? 나 다리 아파.”

 

 

“아차! 너 다리 힘 딸리는 거 생각 못했구나. 그래, 앉자! 아구구~ 힘들다!”

 

 

 

오랜만에 북적대는 시내에 나와 보니 길거리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도 생소했다.

 

 

사람도 넘치고, 화려한 쇼윈도우와 경쾌하게 흘러 다니는 음악소리,

 

목청껏 외쳐대는 장사꾼들의 호객,

 

고함을 지르며 뛰어다니는 아이들.

 

 

그 사람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인적도 드문 그 곳에서 유유히 떠다니는 클래식 선율을 들으며

 

어둠과 함께 살아가던 사람인데.

 

 

단 한 달 머물렀던 자신조차 이렇게 밝은 빛 속에 서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생소한데

 

그 사람은 괜찮을까.

 

 

만약 잘 적응하지 못하면 어쩌나. 아니야, 잘 해내고 있겠지.

 

 

그는 그만큼 강한 사람이니까.

 

두려움 없이 계획했던 대로 하나씩 차근차근 해나가고 있겠지.

 

그것이 뭔지는 모르지만.

 

 

갑자기 짝―! 하는 소리에 하연은 화들짝 놀랐다.

 

 

윤경이 손바닥을 맞부딪쳐 낸 소리였다.

 

 

그것도 하연의 귀에 바짝 들이대고 말이다.

 

멍멍해진 귀를 문지르며 하연이 말했다.

 

 

 

“…언니는 그 동안 나 없이 어떻게 지냈어? 나 놀라게 하는 재미에 살았을 텐데.”

 

 

“아유, 삐죽거리는 것도 이뻐요. 그래! 너 없어서 외롭더라!

 

그러니깐 후딱 달려왔지.

 

이 언니 아니면 너 생각해 줄 사람이 또 있는 줄 알아?”

 

 

 

하연은 대답 대신 노란색 빨대를 입에 물었다.

 

그제서야 좀 진지해진 윤경이 하연에게 바짝 다가오며 물었다.

 

 

 

“…너 그 집에서 무슨 일 있었지?”

 

 

“이, 일은 무, 무슨 일. 아무 일도 없었어. 무슨 일 있을 게 어딨어.”

 

 

“근데 왜 그렇게 말을 더듬어? 내가 무슨 말 하는 줄 알고?”

 

 

 

윤경은 눈을 가늘게 뜨며 하연을 관찰하듯 쳐다보기 시작했다.

 

 

괜시리 고스란히 자기 생각이 드러나는 것 같아

 

윤경의 눈을 피하며 하연은 허겁지겁 바닥에 조금 남아 있던 샤베트를 다 마셔 버렸다.

 

 

 

“뭔 일 있네. 뭔 일 있어.”

 

 

“이, 일은 무슨! 아무 일도 없다니깐.”

 

 

“…근데 왜 그 조비서라는 사람이 나한테 전화해서 너한테 다른 일주지 말라고 그러냐?

 

너 말 더듬는 것도 그렇고.

 

대체 나 모르게 무슨 밀약(密約)이라도 있었던 거야?”

 

 

“아냐, 그런 거….”

 

 

“흐응…. 어쨌든 니 눈 보니까 당장 일할 생각은 없는 거 같다.

 

다른 사람한테 넘겨야지, 뭐.

 

밀약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도움이 필요할 땐 언제나 헬프미 신청해라. 알겠냐?”

 

 

“…응, 그럴게.”

 

 

 

윤경이 지닌 장점 중 가장 큰 장점은

 

상대방의 대답을 굳이 요구하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일단 덮어놓고 이해했다.

 

 

당장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해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숨기고 싶어하는 부분은 기꺼이 덮어놓을 수 있게끔 해주었다.

 

 

나무 그늘 밑에 마련된 쉼터에 앉아있던 윤경은

 

옆에 놓인 조형물 근처에 떨어져 있던 무가지(無價紙) 한 부를 주워왔다.

 

 

신문을 뒤적거리던 윤경은 두 손으로 신문을 가지런히 접어 앞에 척 놓고서 말했다.

 

 

 

“참…. 아무리 대단해도 망하는 건 순식간이야. 그치?”

 

 

“…무슨 소리야? 신문에 뭐 볼 만한 기사거리라도 났어?”

 

 

 

구구거리며 길거리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를 쪼아 먹고 있던

 

흰 비둘기 두 마리를 바라보며 하연이 무심히 말했다.

 

 

한 달 동안 텔레비전, 뉴스, 신문, 잡지,

 

세상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존재들과 인연을 끊고 살았으니 무심할 법도 했다.

 

 

 

“흥진그룹 말야. 흥진그룹이 어떤 회사냐?

 

우리나라 사람들 아무나 붙잡고 물어도 그 회사 모르는 사람 없다.

 

코흘리개 꼬맹이들도 알아, 그 회사. 너도 알지?”

 

 

“응. 알아. 근데 그 회사가 왜? 망했대?”

 

 

“완전히 부도나서 망가진 건 아니고…겉모습만 갖고 있을 뿐이지

 

내부적으로는 싹 붕괴됐나봐. 흥진그룹 총수도 자살했다지, 아마?”

 

 

 

흥진그룹 총수라면 언젠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하연도 본 적 있었다.

 

 

갓 40대에 접어드는 사람이었지만

 

외국 기업들에서 특별 연수를 받으러 올 만큼이나 탁월한 경영 능력으로 주목받았던 인물.

 

 

 

“아…! 나도 알아. 그 사람 한…뭐였더라…?”

 

 

“한태서. 흥진그룹 사위로 들어가서 뒤를 이었잖아.

 

사실 어떻게 보면 행운아였지.

 

그 젊은 나이에 밑바닥에서 시작했으면 꿈이나 꿨겠어?

 

근데 머리는 지독하게 좋았나봐.

 

하여튼 그런 사람이 하루아침에 불귀의 객이 되다니.

 

아, 진짜 인간 세상만사 세옹지마야. 안 그래?”

 

 

 

하연은 세상 육십 년 살아 버린 사람처럼 읊조리는 윤경의 말에

 

동의하는 시선을 던졌다.

 

 

신문을 한 장 넘긴 윤경은 커다랗게 난 개봉 영화 광고에

 

손가락으로 딱 짚으며 하연에게 말했다.

 

 

 

“이거 보자! 짱 재미있대! 오래전부터 개봉하기 기다렸던 영환데. 가자!”

 

 

 

언제나 충동적인 것처럼 그때그때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행동하는 듯싶은 윤경은

 

사실 지나치리만큼 철두철미한 성격이었다.

 

 

겉보기에는 털털해 보이고 왠만한 일에는 상처 따위 받지 않을 것 같은데다

 

돌발행동에 실수만 연발할 것 같은 윤경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윤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생각이었고

 

사실 윤경은 일 분 일 초까지 머릿속에 계획을 세워두고 살아갔다.

 

 

영화를 보자며 하연의 팔을 잡아끄는 것도

 

사실은 하루 일정을 미리 머릿속에 짜놓고 있을 것이라며

 

하연은 못이기는 척 그대로 끌려갔다.

 

참 좋은 사람.

 

 

 

“언니, 나 공포물 싫어하는데.”

 

 

“…무서우면 내 등 뒤에 숨어! 넌 담력 좀 키워야 돼. 겁 많잖아, 너.”

 

 

 

윤경은 표까지 미리 예매해 두었더랬다.

 

주머니 속에서 꺼낸 표 2장을 자랑스레 들고 있는 윤경의 표정에는 웃음이 가득했고

 

하연은 그런 표정을 보며 걱정스러워졌다.

 

 

분명 언니가 좋아하는 걸 보면 만만치 않은 호러 영화일 텐데.

 

 

예쁘장한 여배우가 머리 풀어헤치고 나와서 등 뒤에 서 있다가

 

기겁하게 만드는 차원은 이미 넘어선 영화일 텐데.

 

 

게다가 좌석 번호를 힐끗 보니,

 

사운드(Sound)가 크게 들리고 커다란 대형 스크린이 너무나 잘 보이는 위치였다.

 

이럴 땐 어떡해야 하나.

 

 

 

“아직 30분 남았는데. 표 바꿀 수 없을까?”

 

 

“영화 속에 등장하는 유령들 전부 다 분장 한 거야. 특수분장. 알지?

 

다 살아있는 사람이니까 걱정 붙들어 매.”

 

 

 

이렇게 가슴 졸여 하는 순간조차 그 사람에게서 자유로울 수 없다니.

 

 

하연은 특수분장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민혁의 얼굴을 떠올리고 말았다.

 

 

시도 때도 없이 아무런 예고조차 없이, 그렇게 불쑥불쑥

 

하연의 기억 속으로 민혁이 찾아왔다.

 

 

한 번 기억 속에 찾아오면 머릿속과 가슴 속을 온통 휘저어 놓기 전에는

 

절대로 가지 않았다.

 

 

하나가 떠오르면 다른 한 가지가 생각나고,

 

또 다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들.

 

 

정신을 차렸을 땐 윤경이 손으로 눈앞을 휘젓고 있는 중이었다.

 

 

 

“얘가 이상하네. 말해 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헤실헤실 웃지를 않나, 멍하니 정신을 빼놓고 있지를 않나.

 

너 원래 안 그랬었다는 것 정도는 알지?”

 

 

“…언니, 누굴 좋아해 본 적 있어?”

 

 

“나? 나야 많지! 너도 좋아하고, 후배놈들도 귀여운 아그들이고!”

 

 

“그런 거 말고. 진심으로…. 안 보이면 보고 싶고,

 

연관된 물건만 봐도 그 사람 생각에 정신 못 차리고. 그런 거 말야….”

 

 

“연애?”

 

 

“연…애…라고 해야 되나? 하여튼! 그런 감정 느껴본 적 있어?”

 

 

“…내 인생 스물아홉 해 살아가믄서 그런 감정 느낄만한 남자라도 곁에 있었어야지.

 

그건 내 전공과목 아니다. 딴 데 가서 알아 봐.”

 

 

 

알면서도 모르는 척 슬그머니 딴청을 피우며 하연의 말문을 막은 윤경은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옮겼다.

 

 

윤경의 뜻은 간단했다.

 

 

네 자신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막연한 감정을 굳이 말로 설명하려고 노력할 필요 없어.

 

 

그러니까 그냥 마음 가는대로 두는 게 나을 거야.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다만 텔레비전에서 시선은 떼지 않은 채 느릿하게 물어왔다.

 

 

 

“…누구냐? 그 상대가.”

 

 

“그 사람…. 간병 의뢰한 사람.”

 

 

“그 비서?”

 

 

“아니. 상현씨 말고.”

 

 

 

그제서야 윤경은 비스듬히 등받이에 기댄 채 앉아있던 자세를 고치며

 

휘둥그레 뜬 눈으로 하연을 바라보았다.

 

 

하연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하고 아무런 변화 없는 표정이었다.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걸까.

 

자기가 듣기로는 일하는 아주머니와 돌볼 환자분, 그리고

 

조비서 세 사람 뿐이라고 애초부터 전해 들었었는데.

 

 

설마 아주머니와 사랑에 빠졌다는 얘기는 아닐 테고,

 

조비서도 아니라면 남은 사람은 딱 한 사람 뿐 이었다.

 

 

 

“너…환자와 사랑에 빠진 거야?”

 

 

 

유난히 크고 시원스러운 윤경의 목청 때문에 하연은 기겁하며 윤경의 입을 막았다.

 

 

곁에 앉아서 영화가 시작되길 기다리던 사람들이

 

하연을 힐끔 건너다보았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진정시키고 흥분하지 않겠다는 윤경의 눈빛을 받고 난 뒤에야

 

손을 뗐다.

 

 

환자와 사랑에 빠지다.

 

 

이렇게 말하니까 왠지 모르게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 같았다.

 

 

윤경이 자리를 다잡으며

 

하연에게 뭔가를 말하려던 찰나 멀티플렉스 영화관 스텝이 힘차게 외쳤다.

 

 

 

“1관 입장 하십시오! 1관! 들어가셔서 좌석 확인 부탁드립니다!”

 

 

“꼭 이럴 때 말허리가 뚝 잘리지. 들어가자, 1관 입장하란다.”

 

 

 

입맛을 다시며 어쩔 수 없이 아쉬운 표정을 하고서

 

상영관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윤경을 보며 하연은 배시시 웃었다.

 

 

언제 봐도 정겨운 사람.

 

 

윤경은 의외로 세심한 구석이 있었고 따스했다.

 

 

자리를 잡고 영화를 보기 위해 앉자마자 윤경은 하연의 손을 꼬옥 잡아 주었다.

 

겨우 예고편이 하고 있을 때였는데 말이다.


 

 

 

☆★☆

 

 

 

 

 하연은 데려다 주지 않아도 되겠냐는 윤경을 부득부득 말리고서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희미하게 깜박거리고 있는 가로등을 지나 터덜터덜 집으로 오는 길.

 

 

어둑신하게 깔린 나무 그림자를 보자

 

그 사람과 함께 봤던 블루문이 떠올랐다.

 

 

바스락거리며 밟히던 잔디, 아련하게 들려오던 풀벌레 소리,

 

그리고 얼굴로 사정없이 쏟아져 내리던 별무리들과 푸르스름한 달빛.

 

 

왜 이럴까. 왜 이렇게 사무치도록 보고 싶은 걸까.

 

 

 

허공에 비어버린 공기를 손바닥으로 더듬고 싶을 만큼 그리워졌다.

 

작은 기다림조차 그 사람을 위해서 해줄 수 없는 걸까.

 

돌아가신 아버지를 한동안 그리워하던 그런 심정과는 전혀 달랐다.

 

 

막연히 집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를 상상 속에서 그려보듯 그런 그리움과도 달랐다.

 

 

 

말할 수 없는 갈증이었고, 서늘함이었다.

 

 

 

빨리 와요. 되도록이면 빨리.

 

내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내 말 들리나요?

 

 

귓가를 스치고 살랑살랑 불어오던 여름날의 밤바람에

 

하연은 자신의 마음을 고스란히 실어 보냈다.

 

 

 

마치 그런 하연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그 바람은 오소소소, 나뭇잎들을 휩쓸며 갔다.

 

 

선혈이 낭자한 하드코어 스릴러 공포물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하연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영상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영화 속에 짙게 깔려 있는 어둠도 무섭지 않았다.

 

 

이미 어둠을 떠올릴 때면 하연에게 있어서 그 사람을 떠올리게 되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마는,

 

하연은 보이지 않는 뭔가로 반드시 이어져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무심히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선 하연은 불을 켜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주저앉았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주방 의자에 앉아있던 민혁의 모습이었다.

 

 

 

 

“헉…! 노, 놀랬잖아요! 하아…, 정말이지 당신이란 사람은

 

날 놀라게 만드는 취미라도 갖고 있는 건가요?”

 

 

“아니, 기다리는 것을 포함해서 누군가를 놀라게 하는 취미 따위는 없어! 늦었군.”

 

 

“…네. 조금 늦었어요. 오랜만에 윤경 언니를 만나느라….”

 

 

“알아!”

 

 

“네? 아, 안다뇨? 뭘요?”

 

 

“누굴 만났는지, 만나서 뭘 했는지, 군것질로 뭘 사먹었는지 등등.”

 

 

“…놀랍군요. 여긴 어떻게 들어왔나요?”

 

 

“손잡이에 스티커가 있더군. 잠긴 문 열어 준다는.”

 

 

“…날이 밝으면 당장 그 스티커부터 떼어 내야 겠군요.”

 

 

 

분명 제정신이 아닌 것이다.

 

누군가 줄곧 자신의 뒤를 따라다니며 미행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져야 했고,

 

허락도 없이 주인 없는 집에 함부로 들어와서 당당하게 구는 이 남자에게도

 

화를 내야 했다.

 

 

그런데 하연은 지금 반가운 손님이라도 맞아들이듯 웃고 있었다.

 

 

둘 중 하나 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바보라도 되어 버렸나보다.

 

 

오히려 거침없이 자신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온 눈앞의 남자를 향해

 

경탄을 하고 있던 하연은

 

민혁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난 뒤에야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차는 필요 없어!”

 

 

“왜, 왜요? 벌써…가려구요? 차라도 한 잔 하고 가지…!”

 

 

“…나와 함께 갈 곳이 있어! 지금 당장!”

 

 

“아, 저, 어, 어딘데요? 난 아직 준비도 안 됐고, 짐도 챙기지 못했고…!”

 

 

 

하연은 짐 가방들을 놓아 둔 거실 한 구석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나 피곤해서 들어오자마자 짐정리 할 생각은 꿈도 못 꾼 채,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는데.

 

 

분명 얌전히 놓아 둔 가방들은 온데간데없었다.

 

 

이미 민혁은 현관을 나서고 있었다.

 

그리고 하연은 짧은 기다림을 뒤로 한 채 그 남자의 뒤를 따라나서리라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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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더위에 맥을 못 추고 있는 미강이 왔습니다. ^^

 

정말 많은 분들이 제 건강 염려해주시고, 소중한 발자취와 추천들을 날려 주셔서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왔답니다. 

 

 

다음 이야기를 향한 예측들을 보면서 참 많이 행복합니다.

 

민혁이가 서 있을 거라는 추측들을 해주신 걸 보고는 놀라기도 했지만 기분만큼은

 

날아갈 듯 좋았답니다. 그만큼 제 글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읽어 주신다는 거니까요.

 

 

쪽지들에 대해 간단히 답변 드립니다.

 

우선, [이야기바다]에 있는 제 작가 페이지는 지금 현재 닫힌 상태입니다. ^^

 

찾아가 보시겠다던 님들께 죄송합니다. 전자책을 출간하면서 이바 사이트에 올려진

 

제 글들을 내렸고, 반겨주는 글도 없이 작가페이지를 지니고 있다는 게 

 

왠지 양심적이지 못한 것 같아서 관리자님께 폐쇄를 부탁드렸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저의 싸이월드 미니홈피 주소를 아직도 물어 보시는 님들이 간혹

 

있는데요.

 

http://www.cyworld.com/mikang0226

 

이랍니다. ^^

 

 

전자책과 관련된 사항은 따로 쪽지 날려 드렸습니다.

 

책 출간에 관한 질문은 쪽지 살짜쿵 날려 주세요. ^^ 답쪽지 날아갑니다~

 

 

지난 이야기 댓글 모두 달아 놓았답니다. 여러분, 살인 더위 조심하세요~

 

담주 월욜 밤에 찾아 오겠습니다. 행복한 주말 되세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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