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악몽의 하루 걸을 수조차 없어 대장의 품에 안긴 라니는 다시 한번 집을 돌아보았다. ‘많은 일들이 있었어. 행복...했다고 해도 좋을 만큼. 잊지 않을 거야. 아니, 잊지 못하겠지.’ 눈물을 글썽거리는 윤을 보고 라니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안녕, 언니...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언니랑 유진님 참 잘 어울려.” “뭐, 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새빨개진 윤이 펄쩍 뛰었지만 라니는 유진에게 윙크를 해보였다. 모두의 환송을 받으며 차로 가던 라니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오빠를 보면 가슴이 아프지. 난 이게 아직도 뭔지 모르겠어. 근데...’ “내려줘요.” 가냘픈 라니의 목소리에 다로는 조금 망설였지만 왕녀의 명령은 거역할 수 없었다. 라니는 비틀거리며 간신히 몸을 바로잡고 천천히 온에게로 걸어갔다. “라니!” 온은 자신의 앞까지 와서 쓰러지려는 라니를 급히 붙들었다. “읍!” “헉!” “라, 라니...” “전하!” 의미를 알 수 없는 여러 외침 속에서 라니는 온에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온의 얼굴이 금방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기다려, 오빠. 돌아올 거야.” “응... 기다릴께. 네가 오지 않으면 내가 찾아갈 거야. 우주 끝이라고 해도 갈 테니까...” “좋아하는 게 뭔지 아직 잘 몰라. 그래도 오빠가 없으면 너무 아플 것 같아.” 둘은 서로를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간신히 정신을 수습한 다로가 라니를 부축할 때까지도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말썽장이 동생들이라 했더니... 둘 다 외계인한테 뺐기는 거냐.” 조금 쓸쓸한 듯한 한의 목소리가 누구의 귀에도 닿지 못한 채 조용히 스러졌다. ** “에이피! 보안을 점검해!” 라니가 떠난 후에도 멍하니 차가 사라진 방향을 보고 있던 사람들을 현실로 끌어 온 것은 유진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냐?” “젠장! 이 자식들... 습격이야! 어서 집안으로 피해! 윤아!” 라탄의 일행을 따라 유진이 있는 곳을 알아낸 화성인들이 기습을 가한 것이다. 마침 에이피의 보안도 라탄인들을 위해 멈춰놓은 상태여서 그들이 접근하는 것을 알아채지 못 했다. ‘방심했어! 라탄인들을 주시하고 있을 거라고 예상했어야 했는데...’ 윤을 데리고 집안으로 뛰어들려 했지만 이미 그 앞은 화성인들이 막고 있었다. 라탄인들을 위해 MIB에서 골목의 출입을 통제한 덕을 화성인들이 보고 있는 것이다. “무슨 일이야?” 겁먹은 윤의 눈동자에 유진은 결심을 굳혔다. 여기서 집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 그렇다면 정반대의 수를 택할 수밖에. “뛰어!” 한과 온이 화성인들의 마취탄에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유진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윤을 끌어 큰길 쪽으로 뛰어나갔다. “기다리십시오! 유진님!” “저 쪽이다!” 소수라고는 하지만 정예부대다. 쫓기면 잡히는 것이 당연하다. 더구나 이쪽은 전혀 훈련받지 않은 여자까지 데리고 있는 형편이다. 유진은 이를 악물고 새벽의 한산한 도로로 뛰어들었다. 끼이익~ “이것봐!” 급정차를 하느라 길가로 밀려난 택시에서 기사가 몸을 내밀고 소리치는 순간 유진은 윤을 데리고 얼른 타에 올라탔다. “출발해 주세요! 어서요!” “무슨... 헉!” 분분히 뛰어나오는 검은 옷의 사람들을 본 기사가 황급히 엑셀을 밟았다. 부아앙 소리와 함께 차가 엄청난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포기하지 않고 쫓아오는 듯 했지만 차보다는 빠를 수 없다. 유진은 점점 멀어지는 그들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주고 통쾌하게 웃었다. “오빠들... 쓰러졌었는데...” “내가 목표니까 형들한테는 손대지 않을 거야.” “하지만...” 유진은 윤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새파랗게 질린 윤은 간신히 정신만을 잡고 있는 사람처럼 불안해보였다. “쉬이... 걱정마. 괜찮아. 괜찮아...”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속삭이는 소리에 윤이 눈을 감았다. 지금은 기댈 것이 필요하다. 불안한 마음에 윤은 유진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학생들, 누구한테 쫓기는 건가?” 백미러로 뒤를 힐끔거리던 기사아저씨가 물어왔다. 유진은 생긋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의 도피죠. 집안의 반대가 심해서요.” 어이없는 말에 윤이 허벅지를 꼬집는다. 유진은 아픔에 땀을 흘리면서도 웃어보였다. “아아... 역시 청춘이구만. 허허허, 나도 옛날 내 마누라랑 연애할 때 어찌나 반대를 하던지 마누라를 데리고 도망쳤던 적이 있지.” “그래서요?” “그래서는 뭐... 한 이틀 뒤에 잡혀서 죽도록 맞고 결혼했어.” “우와, 대단하시네요.” “사랑은 말이야, 쟁취라고! 이것저것 눈치보다보면 한이 없어. 용기도 없는 것들이 사랑하니까 보내주네 어쩌네 하는 거지. 아, 좋으면 눈에 뵈는 게 없는데 머리가 돌아가기나 하나?” “맞습니다! 사랑은 그렇죠. 윤아, 너도 들었지?” “입 좀 다물어. 오빠들 걱정돼서 죽겠는데.” “거, 아가씨가 너무 차네. 생긴 건 이쁜 아가씨가... 그러다가 잘생긴 총각 삐쳐.” 뭐가 그렇게 좋은지 껄껄거리며 이야기하는 기사와 유진을 번갈아 노려보던 윤은 어느새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 ‘따뜻하다... 보들보들 기분 좋아.’ 미소까지 지으며 얼굴을 비비던 윤은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누군가의 목덜미. 윤은 입가에 흐른 침을 쓰읍 닦았다. ‘헉, 묻었다. 쪽팔려라.’ 최대한 깬 티를 안 내고 슬쩍 번들거리는 목덜미를 문질렀다. “일어났냐?” “어? 어...” “그럼 내려. 무거워 죽겠다.” “치사하게...” 입술을 삐죽이며 유진의 등에서 내리던 윤은 갑자기 머리 속을 스치는 현기증에 비틀거렸다. “윤아, 왜 그래?” “괘, 괜찮아...” ‘뭐지? 방금 뭔가가 지나갔는데...’ “어? 여기는...”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가물가물 나타나려는 순간 사라지는 기억에 윤이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은 늦었으니까 여기서 자고 내일 느긋하게 올라가자.” “유진아, 우리 혹시 여기 온 적 있었어?” “뭔가 생각났어?” “아니, 생각은 안 나는데... 이상하게 낯이 익어. 길도 알 것 같고...” “이 근처는 어디나 다 비슷비슷하니까.” “그런가... 이상하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윤을 데리고 들어가며 유진은 주먹을 꼭 쥐었다. 긴장한 손바닥에 땀이 흥건히 괴었다. ‘설마... 기억나는 거야? 여기... 생각나?’ 그냥 한번쯤 다시 가보고 싶은 생각에 선택한 곳은 예전 윤이 친구들이랑 같이 왔던 그 산장이었다. 그때는 아직 자신이 윤을 좋아한다는 것도 몰랐고 윤이 역시 유진을 싫어할 때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최악의 여행이었지...’ 아무 것도 몰랐던 유진 때문에 여행은 엉망이 됐었고 급기야 윤이는 다리까지 다쳤었다. 유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아마 난 그때도 널 좋아하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널 업고 그 길을 걸었지. 지금 와서 말하는 거지만 진짜 죽을 뻔 했어. 하지만... 널 누구한테 맡기고 싶지 않아서 이를 악물고 버텼어. 왜 그런지도 모르면서 말이야.’ “젠장!” 생각에 잠겨있던 유진은 미세한 기척을 알아차리고 다시 윤을 잡아끌었다.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큰일이군. 어쩐다... 여기는 차도 없는데...’ 이제 100미터만 가면 산장이라 마음을 놓은 것이 실수였다. 산길이라 지나가는 사람이 있을 리도 없다. 허를 찌른다는 것이 그만 궁지로 스스로 뛰어들고 만 꼴이 되어버렸다. “나와라.” “오랜만에 뵙습니다, 유진님.”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화성인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유진이 이를 악물었다. “추적기를 붙였군.” “아가씨에게 잠깐 실례했습니다.”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모셔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강제로라도 말이냐?” “되도록이면 그런 무례는 범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하겠다는 소리군. 쉽지는 않을 거다.” 말과 함께 유진이 윤을 돌아보았다. “저 쪽 길가로 내려가. 눈에 띄지 않게 천천히 가면 괜찮을 거야.” “무슨 일이야? 저 사람들 뭐야? 너, 나한테 거짓말했지? 군대같은 걸로 온 사람들 아니지?” “괜찮아, 윤아. 금방 해치우고 따라갈 테니까 걱정말고 가.” “싫어! 같이 있을래. 너만 두고는 못 가.” “네가 있으면 내가 더 힘들어져. 알지?” “하지만...” “어서. 부탁이야.” 간절한 유진의 눈빛에 윤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윤이 주춤거리며 길 쪽으로 물러서는 것을 보고 화성의 포위망이 조금 흔들렸다. 바로 그때 유진이 윤이 사라진 방향을 점령했다. “자, 시작해 볼까?” “용서를! 하지만 두 분 다 이곳에서 빠져나가실 수 없습니다.” 유진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휘둘렀다. 그리고 일대 혼전이 벌어졌다. 일대 다수의 대결이지만 유진에게는 유리한 점이 있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저들은 유진을 때리지 못한다. 그저 눌러 쓰러트리려고 덤비는 것만으로는 독기를 품고 가격하는 사람 상대로 불리하다. 어서 윤이 사정권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며 유진은 있는 힘을 다해 주먹을 휘둘렀다. 하나라도 더 쓰러트려야 이 자리를 빠져나갈 수 있다. 손에 사정을 남겼다가는 결국 쓰러지게 되는 것은 자신임을 전쟁 중에 뼈저리게 배운 유진이었다. 격렬한 타격음을 등지고 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유진이 말하는 뜻 정도는 알고 있다. 자신이 이곳에 있으면 유진에게 짐이 된다.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이 쓰라렸다. 늘 바보같다고 욕하는 드라마의 여자주인공처럼 남아 있고 싶었다. 자꾸만 멈춰서려는 발을 재촉하면서 윤은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다치지 않게 해 주세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유진이 나쁜 애 아니란 거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도와줘요! 제발...’ 얼마나 뛰었을까. 윤은 그 자리에 쓰러져서 숨을 몰아쉬었다. “유진이는 괜찮을 거야... 그럴 거야... ” 주문처럼 유진의 무사를 되뇌며 윤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일으켰다. 폐가 터질 것처럼 아팠다. 바로 그때 누군가 어깨를 잡았다. “!”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놀란 윤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까지밖에 못 온 거야? 아무튼 느리다니까.” “유진아... 흑흑...” “얼른 가자. 아직 쫓아오고 있을 거야.” 싸움 중에 한대도 안 맞기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유진의 몰골은 처참했다. 몸은 온통 흙투성이인데다 입가가 터져서 피가 나오고 볼은 벌써 보라빛으로 물들어서 아파보였다. “너 얼굴이...” “이 정도는 괜찮아. 저 녀석들은 뼈 한두 대씩은 부러졌을 건데.” 싱긋 웃는 유진을 따라 뛰면서 윤은 눈물을 흘렸다. ****************************** “조심해. 길이 험하다.” 어디까지 도망쳤는지도 모른다. 길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숲이었다. 미간을 잔뜩 세운 유진은 불길한 예감을 애써 억눌렀다. ‘숲으로 몰리면 안 되는데... 실수했어. 길이라고 생각했어.’ “유진님, 위험합니다. 뒤로는 물러 설 곳도 없습니다. 그만 포기하고 이쪽으로 오십시오. 아가씨도 생각하셔야지요. 잘못하면 크게 다치십니다.” “시끄러워! 여기로 몰아붙인 건 너희잖아.” “포기하십시오.” “시끄럽다고 했지.” 쏘아붙인 유진은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뒤는 막혔다. 아직 평지가 조금 더 남아 있었지만 아마도 저들이 말한 대로 그 뒤는 가파른 언덕일 것이다. 잘못하면 낙상하기 십상이다. 초조한 마음에 윤을 보니 의외로 평온한 기색이었다. “안 무서워?” “무섭긴 하지만... 지금 무서워해봐야 아무 도움도 안 되잖아.” 유진은 미소지으며 가만히 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윤아... 사랑해.” “이 상황에서 그게 할 소리냐? 바보!” 빽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돌리는 윤이 사랑스러웠다. ‘어쩌면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이 있을까.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너를 좋아하게 돼. 조금 전보다 지금이, 지금보다 나중이 더 사랑스럽겠지. 그래서 널 놓을 수가 없어. 포기할 수가 없어. 시간이 지난 후 더욱 좋아하게 될 너를 보고 싶어.’ “아앗!” “왜 그래?” “아파... 팔에...” “벌이다.” “너무 아파...” 산에 사는 벌의 침은 가끔 치명적이기도 하다. 윤의 팔은 금세 퉁퉁 부어올랐다. 놀란 유진은 급한 김에 윤의 팔에 입을 대고 빨아내기 시작했다. “윤아, 조금만 참아.” 머리가 핑 돌았다. 하루 종일 사건들의 연속에 급기야는 잠도 못 자고 쫓기기까지... 피곤한 몸에 쏘인 벌의 독은 순식간에 윤의 몸에 불을 지폈다. 어지러움에 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유진을 보다가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윤아, 괜찮아? 정신차려!” “너무 어지러워...” “윤아! 자면 안 돼!” 자면 안 된다는 유진의 부르짖음에 억지로 눈을 떠보지만 시야가 흐릿하다. 윤은 제 살을 꼬집어 가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그때 윤이 기댄 나무가지가 투둑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윤아!” 강한 힘이 윤을 붙잡는다 했더니 순식간에 윤과 유진의 위치가 바뀌었다. 윤은 눈을 크게 뜨고 굴러 떨어지는 유진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유진아! 꺄악!” “유진님!” 화성인들이 분분히 뛰어 올라오는데도 윤은 멍하니 유진이 떨어진 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가... 피가...” “큰일이다. 머리를 다치셨어.” “당장 옮겨. 일단 MIB로 모셔간다.” “유진이 머리에... 피가...” “아가씨, 정신 차리십시오!” “피가...” 찰싹! 뺨에 느껴지는 짜릿한 아픔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윤은 벌떡 일어나 유진에게 다가갔다. 시체처럼 축 늘어진 유진은 창백했다. 풀밭에 누워 눈을 꼭 감은 유진의 모습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어떻게 된 거죠? 설마...” “비켜주십시오! 어서 옮겨야 합니다.” “눈을 떠! 유진아! 안 돼! 눈 뜨란 말이야!” “이러시면 안 됩니다! 어서 옮겨!” “나도 갈래요! 나도 가게 해 줘요!” 윤은 악다구니를 쓰며 유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거친 손들이 유진에게서 떼어놓으려 할 때마다 죽을힘으로 매달렸다. “어쩔 수 없군. 데리고 가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닐리리님, 라엘님, 비야님, 윤호사랑해님, 밥풀님, 시온님, 수정맘님, 희동이마을님, 봄꽃님, 문희정님, 시간이 지나면님.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 저희 패밀리분들, 제가 너무너무 사랑하는 거 아시죠? ^^* 바쁘다고 핑계대고 자주 올리지도 못하는데 정말 죄송해요. ㅠ.ㅠ 그래도 너무 미워하지 말고 가끔 들여다 봐 주세요. ^^;;
[2nd] #20 화성에서 온 왕자님
20. 악몽의 하루
걸을 수조차 없어 대장의 품에 안긴 라니는 다시 한번 집을 돌아보았다.
‘많은 일들이 있었어. 행복...했다고 해도 좋을 만큼.
잊지 않을 거야. 아니, 잊지 못하겠지.’
눈물을 글썽거리는 윤을 보고 라니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안녕, 언니...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언니랑 유진님 참 잘 어울려.”
“뭐, 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새빨개진 윤이 펄쩍 뛰었지만 라니는 유진에게 윙크를 해보였다.
모두의 환송을 받으며 차로 가던 라니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오빠를 보면 가슴이 아프지. 난 이게 아직도 뭔지 모르겠어. 근데...’
“내려줘요.”
가냘픈 라니의 목소리에 다로는 조금 망설였지만 왕녀의 명령은 거역할 수 없었다.
라니는 비틀거리며 간신히 몸을 바로잡고 천천히 온에게로 걸어갔다.
“라니!”
온은 자신의 앞까지 와서 쓰러지려는 라니를 급히 붙들었다.
“읍!”
“헉!”
“라, 라니...”
“전하!”
의미를 알 수 없는 여러 외침 속에서 라니는 온에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온의 얼굴이 금방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기다려, 오빠. 돌아올 거야.”
“응... 기다릴께. 네가 오지 않으면 내가 찾아갈 거야.
우주 끝이라고 해도 갈 테니까...”
“좋아하는 게 뭔지 아직 잘 몰라. 그래도 오빠가 없으면 너무 아플 것 같아.”
둘은 서로를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간신히 정신을 수습한 다로가 라니를 부축할 때까지도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말썽장이 동생들이라 했더니... 둘 다 외계인한테 뺐기는 거냐.”
조금 쓸쓸한 듯한 한의 목소리가 누구의 귀에도 닿지 못한 채 조용히 스러졌다.
**
“에이피! 보안을 점검해!”
라니가 떠난 후에도
멍하니 차가 사라진 방향을 보고 있던 사람들을
현실로 끌어 온 것은 유진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냐?”
“젠장! 이 자식들... 습격이야! 어서 집안으로 피해! 윤아!”
라탄의 일행을 따라 유진이 있는 곳을 알아낸 화성인들이 기습을 가한 것이다.
마침 에이피의 보안도 라탄인들을 위해 멈춰놓은 상태여서
그들이 접근하는 것을 알아채지 못 했다.
‘방심했어! 라탄인들을 주시하고 있을 거라고 예상했어야 했는데...’
윤을 데리고 집안으로 뛰어들려 했지만 이미 그 앞은 화성인들이 막고 있었다.
라탄인들을 위해 MIB에서 골목의 출입을 통제한 덕을 화성인들이 보고 있는 것이다.
“무슨 일이야?”
겁먹은 윤의 눈동자에 유진은 결심을 굳혔다.
여기서 집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 그렇다면 정반대의 수를 택할 수밖에.
“뛰어!”
한과 온이 화성인들의 마취탄에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유진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윤을 끌어 큰길 쪽으로 뛰어나갔다.
“기다리십시오! 유진님!”
“저 쪽이다!”
소수라고는 하지만 정예부대다. 쫓기면 잡히는 것이 당연하다.
더구나 이쪽은 전혀 훈련받지 않은 여자까지 데리고 있는 형편이다.
유진은 이를 악물고 새벽의 한산한 도로로 뛰어들었다.
끼이익~
“이것봐!”
급정차를 하느라 길가로 밀려난 택시에서 기사가 몸을 내밀고 소리치는 순간
유진은 윤을 데리고 얼른 타에 올라탔다.
“출발해 주세요! 어서요!”
“무슨... 헉!”
분분히 뛰어나오는 검은 옷의 사람들을 본 기사가 황급히 엑셀을 밟았다.
부아앙 소리와 함께 차가 엄청난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포기하지 않고 쫓아오는 듯 했지만 차보다는 빠를 수 없다.
유진은 점점 멀어지는 그들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주고 통쾌하게 웃었다.
“오빠들... 쓰러졌었는데...”
“내가 목표니까 형들한테는 손대지 않을 거야.”
“하지만...”
유진은 윤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새파랗게 질린 윤은 간신히 정신만을 잡고 있는 사람처럼 불안해보였다.
“쉬이... 걱정마. 괜찮아. 괜찮아...”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속삭이는 소리에 윤이 눈을 감았다.
지금은 기댈 것이 필요하다. 불안한 마음에 윤은 유진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학생들, 누구한테 쫓기는 건가?”
백미러로 뒤를 힐끔거리던 기사아저씨가 물어왔다. 유진은 생긋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의 도피죠. 집안의 반대가 심해서요.”
어이없는 말에 윤이 허벅지를 꼬집는다. 유진은 아픔에 땀을 흘리면서도 웃어보였다.
“아아... 역시 청춘이구만.
허허허, 나도 옛날 내 마누라랑 연애할 때 어찌나 반대를 하던지
마누라를 데리고 도망쳤던 적이 있지.”
“그래서요?”
“그래서는 뭐... 한 이틀 뒤에 잡혀서 죽도록 맞고 결혼했어.”
“우와, 대단하시네요.”
“사랑은 말이야, 쟁취라고! 이것저것 눈치보다보면 한이 없어.
용기도 없는 것들이 사랑하니까 보내주네 어쩌네 하는 거지.
아, 좋으면 눈에 뵈는 게 없는데 머리가 돌아가기나 하나?”
“맞습니다! 사랑은 그렇죠. 윤아, 너도 들었지?”
“입 좀 다물어. 오빠들 걱정돼서 죽겠는데.”
“거, 아가씨가 너무 차네. 생긴 건 이쁜 아가씨가... 그러다가 잘생긴 총각 삐쳐.”
뭐가 그렇게 좋은지 껄껄거리며 이야기하는 기사와 유진을 번갈아 노려보던 윤은
어느새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
‘따뜻하다... 보들보들 기분 좋아.’
미소까지 지으며 얼굴을 비비던 윤은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누군가의 목덜미. 윤은 입가에 흐른 침을 쓰읍 닦았다.
‘헉, 묻었다. 쪽팔려라.’
최대한 깬 티를 안 내고 슬쩍 번들거리는 목덜미를 문질렀다.
“일어났냐?”
“어? 어...”
“그럼 내려. 무거워 죽겠다.”
“치사하게...”
입술을 삐죽이며 유진의 등에서 내리던 윤은 갑자기 머리 속을 스치는 현기증에 비틀거렸다.
“윤아, 왜 그래?”
“괘, 괜찮아...”
‘뭐지? 방금 뭔가가 지나갔는데...’
“어? 여기는...”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가물가물 나타나려는 순간 사라지는 기억에 윤이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은 늦었으니까 여기서 자고 내일 느긋하게 올라가자.”
“유진아, 우리 혹시 여기 온 적 있었어?”
“뭔가 생각났어?”
“아니, 생각은 안 나는데... 이상하게 낯이 익어. 길도 알 것 같고...”
“이 근처는 어디나 다 비슷비슷하니까.”
“그런가... 이상하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윤을 데리고 들어가며 유진은 주먹을 꼭 쥐었다.
긴장한 손바닥에 땀이 흥건히 괴었다.
‘설마... 기억나는 거야? 여기... 생각나?’
그냥 한번쯤 다시 가보고 싶은 생각에 선택한 곳은
예전 윤이 친구들이랑 같이 왔던 그 산장이었다.
그때는 아직 자신이 윤을 좋아한다는 것도 몰랐고 윤이 역시 유진을 싫어할 때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최악의 여행이었지...’
아무 것도 몰랐던 유진 때문에 여행은 엉망이 됐었고
급기야 윤이는 다리까지 다쳤었다. 유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아마 난 그때도 널 좋아하고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널 업고 그 길을 걸었지.
지금 와서 말하는 거지만 진짜 죽을 뻔 했어.
하지만... 널 누구한테 맡기고 싶지 않아서 이를 악물고 버텼어.
왜 그런지도 모르면서 말이야.’
“젠장!”
생각에 잠겨있던 유진은 미세한 기척을 알아차리고 다시 윤을 잡아끌었다.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큰일이군. 어쩐다... 여기는 차도 없는데...’
이제 100미터만 가면 산장이라 마음을 놓은 것이 실수였다.
산길이라 지나가는 사람이 있을 리도 없다.
허를 찌른다는 것이 그만 궁지로 스스로 뛰어들고 만 꼴이 되어버렸다.
“나와라.”
“오랜만에 뵙습니다, 유진님.”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화성인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유진이 이를 악물었다.
“추적기를 붙였군.”
“아가씨에게 잠깐 실례했습니다.”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모셔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강제로라도 말이냐?”
“되도록이면 그런 무례는 범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하겠다는 소리군. 쉽지는 않을 거다.”
말과 함께 유진이 윤을 돌아보았다.
“저 쪽 길가로 내려가. 눈에 띄지 않게 천천히 가면 괜찮을 거야.”
“무슨 일이야? 저 사람들 뭐야? 너, 나한테 거짓말했지? 군대같은 걸로 온 사람들 아니지?”
“괜찮아, 윤아. 금방 해치우고 따라갈 테니까 걱정말고 가.”
“싫어! 같이 있을래. 너만 두고는 못 가.”
“네가 있으면 내가 더 힘들어져. 알지?”
“하지만...”
“어서. 부탁이야.”
간절한 유진의 눈빛에 윤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윤이 주춤거리며 길 쪽으로 물러서는 것을 보고 화성의 포위망이 조금 흔들렸다.
바로 그때 유진이 윤이 사라진 방향을 점령했다.
“자, 시작해 볼까?”
“용서를! 하지만 두 분 다 이곳에서 빠져나가실 수 없습니다.”
유진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휘둘렀다. 그리고 일대 혼전이 벌어졌다.
일대 다수의 대결이지만 유진에게는 유리한 점이 있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저들은 유진을 때리지 못한다.
그저 눌러 쓰러트리려고 덤비는 것만으로는 독기를 품고 가격하는 사람 상대로 불리하다.
어서 윤이 사정권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며 유진은 있는 힘을 다해 주먹을 휘둘렀다.
하나라도 더 쓰러트려야 이 자리를 빠져나갈 수 있다.
손에 사정을 남겼다가는 결국 쓰러지게 되는 것은 자신임을
전쟁 중에 뼈저리게 배운 유진이었다.
격렬한 타격음을 등지고 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유진이 말하는 뜻 정도는 알고 있다. 자신이 이곳에 있으면 유진에게 짐이 된다.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이 쓰라렸다.
늘 바보같다고 욕하는 드라마의 여자주인공처럼 남아 있고 싶었다.
자꾸만 멈춰서려는 발을 재촉하면서 윤은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다치지 않게 해 주세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유진이 나쁜 애 아니란 거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도와줘요! 제발...’
얼마나 뛰었을까. 윤은 그 자리에 쓰러져서 숨을 몰아쉬었다.
“유진이는 괜찮을 거야... 그럴 거야... ”
주문처럼 유진의 무사를 되뇌며 윤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일으켰다.
폐가 터질 것처럼 아팠다. 바로 그때 누군가 어깨를 잡았다.
“!”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놀란 윤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까지밖에 못 온 거야? 아무튼 느리다니까.”
“유진아... 흑흑...”
“얼른 가자. 아직 쫓아오고 있을 거야.”
싸움 중에 한대도 안 맞기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유진의 몰골은 처참했다.
몸은 온통 흙투성이인데다 입가가 터져서 피가 나오고
볼은 벌써 보라빛으로 물들어서 아파보였다.
“너 얼굴이...”
“이 정도는 괜찮아. 저 녀석들은 뼈 한두 대씩은 부러졌을 건데.”
싱긋 웃는 유진을 따라 뛰면서 윤은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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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해. 길이 험하다.”
어디까지 도망쳤는지도 모른다. 길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숲이었다.
미간을 잔뜩 세운 유진은 불길한 예감을 애써 억눌렀다.
‘숲으로 몰리면 안 되는데... 실수했어. 길이라고 생각했어.’
“유진님, 위험합니다. 뒤로는 물러 설 곳도 없습니다.
그만 포기하고 이쪽으로 오십시오. 아가씨도 생각하셔야지요.
잘못하면 크게 다치십니다.”
“시끄러워! 여기로 몰아붙인 건 너희잖아.”
“포기하십시오.”
“시끄럽다고 했지.”
쏘아붙인 유진은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뒤는 막혔다.
아직 평지가 조금 더 남아 있었지만 아마도 저들이 말한 대로
그 뒤는 가파른 언덕일 것이다. 잘못하면 낙상하기 십상이다.
초조한 마음에 윤을 보니 의외로 평온한 기색이었다.
“안 무서워?”
“무섭긴 하지만... 지금 무서워해봐야 아무 도움도 안 되잖아.”
유진은 미소지으며 가만히 윤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윤아... 사랑해.”
“이 상황에서 그게 할 소리냐? 바보!”
빽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돌리는 윤이 사랑스러웠다.
‘어쩌면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이 있을까.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너를 좋아하게 돼.
조금 전보다 지금이, 지금보다 나중이 더 사랑스럽겠지.
그래서 널 놓을 수가 없어. 포기할 수가 없어.
시간이 지난 후 더욱 좋아하게 될 너를 보고 싶어.’
“아앗!”
“왜 그래?”
“아파... 팔에...”
“벌이다.”
“너무 아파...”
산에 사는 벌의 침은 가끔 치명적이기도 하다.
윤의 팔은 금세 퉁퉁 부어올랐다.
놀란 유진은 급한 김에 윤의 팔에 입을 대고 빨아내기 시작했다.
“윤아, 조금만 참아.”
머리가 핑 돌았다.
하루 종일 사건들의 연속에 급기야는 잠도 못 자고 쫓기기까지...
피곤한 몸에 쏘인 벌의 독은 순식간에 윤의 몸에 불을 지폈다.
어지러움에 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유진을 보다가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윤아, 괜찮아? 정신차려!”
“너무 어지러워...”
“윤아! 자면 안 돼!”
자면 안 된다는 유진의 부르짖음에 억지로 눈을 떠보지만 시야가 흐릿하다.
윤은 제 살을 꼬집어 가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그때 윤이 기댄 나무가지가 투둑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윤아!”
강한 힘이 윤을 붙잡는다 했더니 순식간에 윤과 유진의 위치가 바뀌었다.
윤은 눈을 크게 뜨고 굴러 떨어지는 유진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유진아! 꺄악!”
“유진님!”
화성인들이 분분히 뛰어 올라오는데도 윤은 멍하니 유진이 떨어진 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가... 피가...”
“큰일이다. 머리를 다치셨어.”
“당장 옮겨. 일단 MIB로 모셔간다.”
“유진이 머리에... 피가...”
“아가씨, 정신 차리십시오!”
“피가...”
찰싹! 뺨에 느껴지는 짜릿한 아픔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윤은 벌떡 일어나 유진에게 다가갔다. 시체처럼 축 늘어진 유진은 창백했다.
풀밭에 누워 눈을 꼭 감은 유진의 모습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어떻게 된 거죠? 설마...”
“비켜주십시오! 어서 옮겨야 합니다.”
“눈을 떠! 유진아! 안 돼! 눈 뜨란 말이야!”
“이러시면 안 됩니다! 어서 옮겨!”
“나도 갈래요! 나도 가게 해 줘요!”
윤은 악다구니를 쓰며 유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거친 손들이 유진에게서 떼어놓으려 할 때마다 죽을힘으로 매달렸다.
“어쩔 수 없군. 데리고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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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리리님, 라엘님, 비야님, 윤호사랑해님, 밥풀님, 시온님, 수정맘님,
희동이마을님, 봄꽃님, 문희정님, 시간이 지나면님.
모두모두 감사합니다. ^^
저희 패밀리분들, 제가 너무너무 사랑하는 거 아시죠? ^^*
바쁘다고 핑계대고 자주 올리지도 못하는데 정말 죄송해요. ㅠ.ㅠ
그래도 너무 미워하지 말고 가끔 들여다 봐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