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적절한 남자(28)

리드미온2004.08.08
조회4,921

많은 일들을 겪고 혼자가 된 첫날 밤을 보내고 핸드폰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아침에 눈을 뜨면 현수 눈치를 보며 늦게 잠든 현수를 깨울까봐 조용조용 씻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었다. 텔레비전을 켜고 출근 준비를 했다. 집을 나오려는데 목욕탕 불을 껐는지 갑자기 걱정되어 문을 잠그다 말고 다시 들어갔다.

문든 현수가 있었을 땐 이런 걱정은 없었는데 싶었다.

출근하는 전철 안에서 정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받지 않았다. 받고 싶었지만...

출근하자마자 중국팀장이 말을 걸어왔다.

"강팀장? 알아봤어? 중국어 할 줄 아는 사람?"

며칠 전에 나한테 부탁한 것이 그냥 지나가는 말이라 생각해서 신경쓰지 않고 있었는데 막상 이렇게 물으니 당황스러웠다.

"제 주변에 중국어 할 줄 아는 사람은...."

거기까지 말하고 나니 현수가 떠올랐다. 그 동안은 현수가 내 주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였는지 중국 팀장의 말을 들으면서 현수는 전혀 떠올리지 않았었다.

"있어?"

"한 명 있긴 한데.."

"그래? 지금 무슨 일 하는데..?"

"지금은 회사 쉬고 있는데..."

"그럼 잘 됐네. 당장 출근할 수 있겠네..."

"한번 연락해볼게요. 이 일을 하려고 하는지도 모르겠고.."

"무조건 나한테 넘겨. 내가 꼬셔볼게. 연락처 알아?"

"그래도 제가 먼저 얘기라도 하고..."

중국 팀장은 급하긴 급한 모양이었다. 먹이를 덥썩 무는 하이에나처럼 당장이라도 현수를 데려다 면접이라도 볼 듯했다.

나는 며칠 전에 받았던 전화 목록 중에서 현수것으로 추정되는 것을 찾아서 전화를 걸었다.

"아...민아씨? 오랫만이네요. 저 없으니 좋죠?"

"고마워요."

"뭐가요? 전 어느 쪽이든 괜찮았으니 신경쓰지 마세요."

"저...뭐 여쭤볼 게 있어서..."

"뭐요?"

"저 우리 회사에서 중국 유학 파트에서 일할 사람을 찾는데요."

"그래요?"

"우리 중국 팀장에게 연락처를 알려줘도 될까요?"

"아...네. 음...일단 그러세요."

나는 현수가 반가워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굉장히 망설이는 말투라서 내가 괜한 말을 한 게 아닌가 당황스러웠다.

일을 고르는데 뭔가 까다로운 조건이 있는 건지 아니면 내가 너무 하찮은 일을 소개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는 백수에게 일 소개해준 것은 어쨌든 잘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현수와 통화하는 사이 또 정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무슨 일일까 싶었다. 나는 다 끝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정훈은 왜 전화를 할까 싶었다.

나는 중국 팀장에게 현수의 전화번호를 알려줬고 중국 팀장은 현수에게 바로 전화를 해서 통화를 하는 것 같았다.

"강팀장...고마워. 낼 바로 면접보기로 했어."

아까 현수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눈치같았는데 아마도 중국팀장의 언변에 넘어간 모양이었다. 그녀는 역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능력이 있었다. 상담을 받으로 온 학생들도 쉽게 유학 결정을 하는 것을 보며 그녀는 대단한 기술을 가졌다는 생각을 여러 번하곤 했었다.

점심 약속을 몇 번 거른 엄마는 드디어 전화를 걸어서 점심을 먹자고 했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에 오랜만에 엄마를 만나는 것 같았다. 엄마와 점심 약속을 하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엄마는 그냥 집에서나 보는 사람으로만 생각했던 고정관념 탓이었을까...

"바빴나봐?"

나는 전처럼 새우볶음밥을 주문해놓고 물었다.

"그래..넌 어떠니?"

"이제 독립 생활에 완전 적응했어. 일만 열심히 하면 될 것 같아."

"그래...어제 민석이랑 현아가 왔었다. 현아가 임신했더구나. 아버지는 눈치 못챈 거 같은데...민석이 무릎을 꿇고 아버지에게 현아와 결혼시켜 달라고 했다."

"아빠는 뭐라셔?"

"그냥 침묵 상태....1시간쯤 그렇게 있다가 민석과 현아는 집을 나갔다."

"그러고나서 엄마랑 아빠랑 얘기했어?"

"단 조건이 하나...붙었다. 네가 먼저 결혼해야 한다는 거다."

"응?"

민석과 현아과 허락을 받았다는 일은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거기에 붙은 조건은 내가 기뻐할 일이 아니었다.

"말도 안돼."

"아버지가 워낙 완강해서...나도 뭐라고 했는데 그 고집을 누가 꺾겠니?"

"음..."

"정훈이라면 가능성 있지 않아?"

엄마도 또 정훈의 얘기를 꺼냈다. 그러고보니 정훈이 나에게 연락을 했던 것은 나보다 엄마가 먼저였다. 나쁜 자식, 내가 아니라 엄마까지 기만하다니...

"정훈은 아닌 것 같아."

"왜? 만나보긴 한 거야?"

"응."

"근데?"

"그런 말이 있대. 여자는 헤어지고 나면 골목길을 돌아가기 때문에 뒤돌아 봐도 헤어진 남자가 보이지 않고 남자는 여자와 헤어지면 똑바로 된 길을 걸어가기 때문에 뒤돌아 보면 헤어진 여자가 보인다고..."

내가 엄마를 설득시키기 위해 하는 말이면서도 정훈을 웬지 이해하는 말같아서 마음은 무거워졌다.

"음..."

"그래서 옛날 그 정훈이 아닌 것 같아서 실망했어."

"그랬구나..."

언제부터인가 엄마에게는 걱정할 일을 걱정하지 않을 일로 둔갑시키는 기술을 발휘하고 있었다.

"아무튼 현아 결혼은 너한테 달렸다."

"아휴...엄마! 아빠 의견이 그렇게 중요해?"

난 따지듯이 물었다.

"너네들이 내 딸만이 아니잖니. 나야 뭐 너희들 원하는 대로 하고 싶지만..."

임신까지한 현아가 걱정되었다. 그렇다고 지금 내가 도와줄 방법은 전혀 없었다.

"나 연주회 참가하기로 했다."

그렇게 말하는 엄마는 유치원 아이가 재롱잔치에서 주연을 맡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얼굴이 발그레졌다.

"연주회?"

"응. 그러니까 프로들 말고 아마추어들이 모여서 연습하고 연주회 준비하고 그러는데를 선생님이 소개시켜 주더라고. 내 실력은 문화강좌나 다니기엔 아깝다고...요즘엔 거기서도 많이 연습하고 그래."

엄마가 그래서 요즘 통 연락이 없었다 싶었다. 요즘 엄마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분명히 피아노임에 틀림 없었다.

"언제 하는데? 꽃다발 들고 갈게."

"응 좀 남았어. 한 달 후..."

엄마는 기쁜 소식-연주회에 참석한다는 것과 나쁜 소식-현아가 결혼하려면 내가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을 동시에 남기고 황급하게 사라졌다.

오후가 되서 또 정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에는 받아서 확실하게 말해두는 편이 나으리라 생각해서 받았다.

"민아야. 나 저녁 때 회사 앞으로 갈게."

내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그렇게 전화는 끊어졌다. 도대체 정훈이 부인이 나에게 전화를 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혼동스러웠다.

정훈이 먼저 전화를 한 이상 만나서 확실한 얘기로 끝맺음을 하자 싶었다. 3년 전처럼 그렇게 애매한 상황을 다시 만드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 퇴근 시간이 되자 정훈은 회사 앞이라고 전화를 걸어왔고 나는 심호흡을 하고 정훈을 만나러 갔다.

"바빴어? 전화 계속 안받더라."

평소라면 나를 걱정했을 고마운 말이었지만 웬지 뻔뻔하게 느껴졌다.

"배고파. 저녁먹으면서 얘기해."

나는 차안에서 할 얘기는 아니다 싶어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어디 갈래?"

"가까운데..."

정훈이 데리고 간 것은 예전의 일마레였다. 참으로 사연 많은 레스토랑이다 싶었다.

"우리 이제 만나지 말자."

나는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결별 선언을 했다. 어차피 당할 일 먼저 해버리자는 생각이었다.

"무슨....일 있었어?"

정훈은 당황해하며 물었다. 그렇다면 부인이 나에게 전화한 일을 모른단 말인가?

나는 마지막으로 모든 걸 정확히 말하고 싶었다. 3년 전엔 엄마가 만나지 말라고 한 내가 모르는 일이 있었다. 지금도 내가 말을 하지 않으면 정훈은 왜 헤어지는지 모를 것이다.

그런데 무언가 숨겨진 이별보다는 확실한 이별이 좋을 것 같았다.

"오빠 부인이 전화했어."

"뭐?"

정훈은 정말 몰랐는지 적잖이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래, 숨기려는 게 아니라 말할 기회가 없었겠지...안 그래? 별거 중이니 이혼할 생각도 있었겠고..."

나도 말하고 싶은 것을 그대로 말하고 있었다.

"미안하다. 이혼하려는 생각중이었어."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평생 날 사랑해달라는 그런 요구한 적도 없지만 다른 사람과 결혼한 후에 다시 돌아와서 날 더러 어쩌라고?"

"넌 살다보면 그런 적 없니?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서 돌이키고 싶을 때 말야. 그런 게 결혼일 수도 있잖아."

"그렇다고치자. 그렇다면 타이밍이 틀린 거야. 확실하게 이혼을 하고 찾아오던가...한 문제를 해결하지도 않고 오빤 또 다른 문제를 일으켰어.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거라고. 오빠가 좀 더 신중했어봐. 부인과 확실히 이혼하고 정리된 상태에서 날 찾아와서 솔직하게 얘기를 했다면 일이 이렇게 됐겠어? 오빠 부인한테 전화받은 내 심정 알아? 난 이미 결심이 섰어. 끝이야."

내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말하고 있었다.

"너 냉정하다..."

정훈답지 않게 내 동정심을 자극하고 있다.

"3년 전에도 지금도 냉정한 건 오빠야. 말한마디 없이 떠났고 결혼한 것도 말하지 않았어. 그런 오빠보다 내가 냉정하다고?"

"너랑 헤어지고 날 위로해주는 여자를 만나서 결혼했어. 그리고 애정이 없다는 걸 깨달은 거야. 그래서 후회했어. 그것뿐이라고..."

"그래. 나머지 인생은 오빠가 벌려 놓은 일 책임지고 살아. 더 이상 날 끌어들이지 말라고..."

"널 잊을 수 없을 거야..."

정훈의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정훈의 말이 모두 진실이라 믿고 싶었다. 아니 진실일 수도 있다. 세상 모든 결혼이 사랑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까...설명하기 어려운 이러저런 인연으로 이루어지는 게 결혼이다. 엄마도 아빠와 원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는 말도 했었고 후회한다는 말도 했었다. 어쩌면 나도 결혼을 하고 나서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갈 수 있다.

지금 내 상황으로선 정훈을 받아줄 수 없었다.

"난 3년 전에 잊었어."

나는 그렇게 말하고 일어서버렸다. 더 이상 음식을 먹을 기분도 아니었고 대화를 계속할 기분도 아니었다. 지금 이 시간 이후로 정훈에 관한 것은 모두 잊고 싶었다.

서울의 시내 한복판에 혼자 있는 기분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식구들을 만나기 위해 혹은 연인을 만나기 위해 혹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 목적지로 향하는 듯했다. 나에게 목적지라는 것은 빈집으로 향하는 것뿐이었다

 

http://blog.nate.com/blogon

 

☞ 클릭, 시기적절한 남자 (29편) 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