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야 거리에서 본 일본 여자애들의 모습들 중에 자주 눈에 띄는 광경이 있다. 그건 최첨단의 물들인 머리에 미니스커트 그리고 사다리 부츠를 신은 여자 애들이 아기를 데리고 다니는 광경이다. 속으로 난 뭐 저런것 들이 다 있을까? 라고 생각 하다가 문득 그것은 바로 나의 옛날 모습 이었다는걸 떠올린다.
젠장 ,, 하루아침에 애 아빠가 됐을 때 내 나이 21살 이었다. 그때 난 장발에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었다. 그 당시 어쩌면 난 히피가 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여러가지 직장을 전전해왔다. 광고, 의류, 건설, 부동산, 프랜차이즈, 주류회사의 마케팅, 인테리어,,, 성공에 대한 욕구 보다는 그건 생존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내 나이 21 살의 겨울 어느날
몇달만에 그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병원에 입원 했다고..
난 교통사고라도 났냐고 물었다.
담담하게 아니라고 하더군
난 그럼 평상시 코에 불만이 많더니만 코수술 하냐고 물었다.
아무튼 난 그녀가 알려준대로 잠실쪽의 무슨 외과 병원에 찾아갔다.
배가 남산만한 그녀는 그날 애를 낳았다. 1985년 11월 17일.
21살의 난 하루 아침에 애 아빠가 됐다.
그리고 외과에서는 애를 낳을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으며,1150원이면 남양분유 작은것 한통을 살수 있고 그러면 애가 5일을 먹을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몇일간의 고민끝에 난 많은 것을 포기 해야만 했다. 그것은 바로 나의 꿈 이었다.
JANE 제인 박 제인. 넌 다음에 커서 전 세계 어디 에서라도 홀로 살아갈수 있는 여자가 돼라...
LONG LONG TIME AGO....집안 살림이 모두 길바닥에 나와 있었다. 집달리에 의해서. 전기후라이판, 전기 밥통 하나를 챙겨서 그날부터 동생들과 한동안 여관 생활을 해야했다. 일년이 넘게 아버지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닌 쓰러져 수술을 해야만 했다. 신장결석으로 한쪽 신장을 떼어내는 대수술을 받았다. 수술실에 들어가기전 어머닌 이미 종이조각에 불과한 돈을 받을수 있는 현금보관증같은 증서를 주시며, 내게 동생들을 부탁했다. 절망감이란 이런 것이라고 느꼈다. 담담했다... 이보다 더 상황이 나빠질수는 없었다.
......어느날 어머닌 점쟁이가 됐다... 신이 내린것이다. 단칸 방에 철학원 간판이 걸렸다.
여동생이 어느날 짜증을 부리는 걸 들었다. 남자친구가 철학원 간판을 본 모양이었다. 대학을 때려치우고 골프장 캐디, 보험등 나이에 맞지않는 힘든일을 하고있는 동생에게 소리를 질렀다. " 그래서 싫다는 녀석이라면 오히려 잘됐다." 하지만 그 소리는 사실 소연아 강해져라 라는 소리였었다.
몇년전 세속적인 나의 성공후 내여동생에게 ... 35 살 이라니까 " 참 곱게 늙으셨네요" 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때 사실 동생과 나는 씁쓸했다. 왠지 그 소리가 고생 하나도 하지않고 튕기느라고 시집을 여태가지 않았냐는 소리로 들렸다. 사실 동생은 그 예전에 상처를 받은 것이 분명했다...
내게 연애란 사치한 감정이었다.
이혼이 돼지 않은 상태에 애까지 딸린 남자라면 더더욱.. 애써 냉담했다. 하지만 상대는 그런점이 더욱 끌리게 했었는 모양이다. 언제나 난 냉소적이었다....아니 냉정한 척 했다.
스스로 배다른 자식을 남기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건 사실 이 세상에 그 어떤 여자가 날 감당하리...라는 자조적인 다짐이었다. 부모로 부터 유일하게 물려받은 좋은 인상 덕분에 많은 여자들이 스쳐 지나갔다. 영화배우부터 교수까지.... 그러나 진정으로 날 알아준것 이해한 사람은 화류계 여자였다. 그녀야 말로 가장 깊이 있는 인간성의 여자였다. 그녀와 종지부가 찍어지고... 몇년이 지난뒤 내게 기적이 일어남과 때를 같이해서 JENNY 가 나타났다.
JENNY와 지난 5년간은 행복 했었다. 무엇보다 내가 진작에 포기한 내 아들을 낳아주었다.
미국인이었던 JENNY 는 서류 정리가 않됀 나를 이해했다.
그리고 우린 미국에서 두 아들을 낳았다.
가끔 시찌푸스와도 같은 신의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원하는 여자는 다 가져라...그러나 결코 영원히 가질수는 없다."
지난해 아주 힘든 상황을 겪었다.
한순간 나의 모든것을 다 잃고 외국인인 JENNY는 강제 출국 당했다.
그동안 죽어도 이혼은 않됀다던 JANE이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아마도 십수년간 같이 살지 않았지만 서류상 이혼이 돼 있지 않아서 좀 귀찮은 상황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야말로 간단히 합의 이혼을 하고 점심을 먹고 악수하고 헤어졌다.
...JENNY 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 1년을 기다려 보기로 작정을 했으니 좀더 기다려 보자....이상은 내 블로그에도 밝힌 내용이고...
이달 말이면 그 1년이 됀다.
... 호의로 다가온 어떤 사람을 만났었지 ... 나의 상황을 다 밝혔기에 전부 받아 들일수는 없었지..그건 당신도 잘 알것이오 ..그랬기에 ... 치사스러운 이야기 일테지만 ... 당신에게 술 한잔도 얻어먹지 않았고 ... 택시를 잡아보낼때도 창문으로 택시비를 밀어넣어 준것 이었지 ...
나는 이제 차츰 안정과 정리가 돼가고 있다오...부디 마음의 평화를 찾기를 바라겠소.
....나는 아직은 나의 JENNY 를 기다려야만 한다오.
p.s. 여자와의 다툼은 그간 내가 절대 피해왔고..
어떤 이에게..인간대 인간..아니 남자의 세계에서 결코 서로 이용하지 말아야 할 금기사항이 있다네...자네는 그 금기 사항을 건드렸다네... 앞으로 사람들에게 바보같이 이용 당하지 말고 똑바로 살게.
독백.
독백.
시부야 거리에서 본 일본 여자애들의 모습들 중에 자주 눈에 띄는 광경이 있다.
그건 최첨단의 물들인 머리에 미니스커트 그리고 사다리 부츠를 신은 여자 애들이 아기를 데리고 다니는 광경이다.
속으로 난 뭐 저런것 들이 다 있을까? 라고 생각 하다가 문득 그것은 바로 나의 옛날 모습 이었다는걸 떠올린다.
젠장 ,, 하루아침에 애 아빠가 됐을 때 내 나이 21살 이었다. 그때 난 장발에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었다. 그 당시 어쩌면 난 히피가 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여러가지 직장을 전전해왔다.
광고, 의류, 건설, 부동산, 프랜차이즈, 주류회사의 마케팅, 인테리어,,,
성공에 대한 욕구 보다는 그건 생존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내 나이 21 살의 겨울 어느날
몇달만에 그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병원에 입원 했다고..
난 교통사고라도 났냐고 물었다.
담담하게 아니라고 하더군
난 그럼 평상시 코에 불만이 많더니만 코수술 하냐고 물었다.
아무튼 난 그녀가 알려준대로 잠실쪽의 무슨 외과 병원에 찾아갔다.
배가 남산만한 그녀는 그날 애를 낳았다. 1985년 11월 17일.
21살의 난 하루 아침에 애 아빠가 됐다.
그리고 외과에서는 애를 낳을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으며,1150원이면 남양분유 작은것 한통을 살수 있고 그러면 애가 5일을 먹을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몇일간의 고민끝에 난 많은 것을 포기 해야만 했다. 그것은 바로 나의 꿈 이었다.
JANE 제인 박 제인. 넌 다음에 커서 전 세계 어디 에서라도 홀로 살아갈수 있는 여자가 돼라...
LONG LONG TIME AGO....집안 살림이 모두 길바닥에 나와 있었다. 집달리에 의해서.
전기후라이판, 전기 밥통 하나를 챙겨서 그날부터 동생들과 한동안 여관 생활을 해야했다.
일년이 넘게 아버지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닌 쓰러져 수술을 해야만 했다.
신장결석으로 한쪽 신장을 떼어내는 대수술을 받았다.
수술실에 들어가기전 어머닌 이미 종이조각에 불과한 돈을 받을수 있는 현금보관증같은 증서를 주시며,
내게 동생들을 부탁했다. 절망감이란 이런 것이라고 느꼈다. 담담했다... 이보다 더 상황이 나빠질수는 없었다.
......어느날 어머닌 점쟁이가 됐다... 신이 내린것이다. 단칸 방에 철학원 간판이 걸렸다.
여동생이 어느날 짜증을 부리는 걸 들었다.
남자친구가 철학원 간판을 본 모양이었다.
대학을 때려치우고 골프장 캐디, 보험등 나이에 맞지않는 힘든일을 하고있는 동생에게 소리를 질렀다.
" 그래서 싫다는 녀석이라면 오히려 잘됐다."
하지만 그 소리는 사실 소연아 강해져라 라는 소리였었다.
몇년전 세속적인 나의 성공후 내여동생에게 ... 35 살 이라니까 " 참 곱게 늙으셨네요" 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때 사실 동생과 나는 씁쓸했다. 왠지 그 소리가 고생 하나도 하지않고 튕기느라고 시집을 여태가지 않았냐는 소리로 들렸다.
사실 동생은 그 예전에 상처를 받은 것이 분명했다...
내게 연애란 사치한 감정이었다.
이혼이 돼지 않은 상태에 애까지 딸린 남자라면 더더욱..
애써 냉담했다. 하지만 상대는 그런점이 더욱 끌리게 했었는 모양이다.
언제나 난 냉소적이었다....아니 냉정한 척 했다.
스스로 배다른 자식을 남기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건 사실 이 세상에 그 어떤 여자가 날 감당하리...라는 자조적인 다짐이었다.
부모로 부터 유일하게 물려받은 좋은 인상 덕분에 많은 여자들이 스쳐 지나갔다.
영화배우부터 교수까지.... 그러나 진정으로 날 알아준것 이해한 사람은 화류계 여자였다.
그녀야 말로 가장 깊이 있는 인간성의 여자였다. 그녀와 종지부가 찍어지고...
몇년이 지난뒤 내게 기적이 일어남과 때를 같이해서
JENNY 가 나타났다.
JENNY와 지난 5년간은 행복 했었다. 무엇보다 내가 진작에 포기한 내 아들을 낳아주었다.
미국인이었던 JENNY 는 서류 정리가 않됀 나를 이해했다.
그리고 우린 미국에서 두 아들을 낳았다.
가끔 시찌푸스와도 같은 신의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원하는 여자는 다 가져라...그러나 결코 영원히 가질수는 없다."
지난해 아주 힘든 상황을 겪었다.
한순간 나의 모든것을 다 잃고 외국인인 JENNY는 강제 출국 당했다.
그동안 죽어도 이혼은 않됀다던 JANE이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아마도 십수년간 같이 살지 않았지만 서류상 이혼이 돼 있지 않아서 좀 귀찮은 상황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야말로 간단히 합의 이혼을 하고 점심을 먹고 악수하고 헤어졌다.
...JENNY 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 1년을 기다려 보기로 작정을 했으니 좀더 기다려 보자....이상은 내 블로그에도 밝힌 내용이고...
이달 말이면 그 1년이 됀다.
... 호의로 다가온 어떤 사람을 만났었지 ... 나의 상황을 다 밝혔기에 전부 받아 들일수는 없었지..그건 당신도 잘 알것이오 ..그랬기에 ... 치사스러운 이야기 일테지만 ... 당신에게 술 한잔도 얻어먹지 않았고 ... 택시를 잡아보낼때도 창문으로 택시비를 밀어넣어 준것 이었지 ...
나는 이제 차츰 안정과 정리가 돼가고 있다오...부디 마음의 평화를 찾기를 바라겠소.
....나는 아직은 나의 JENNY 를 기다려야만 한다오.
p.s. 여자와의 다툼은 그간 내가 절대 피해왔고..
어떤 이에게..인간대 인간..아니 남자의 세계에서 결코 서로 이용하지 말아야 할 금기사항이 있다네...자네는 그 금기 사항을 건드렸다네... 앞으로 사람들에게 바보같이 이용 당하지 말고 똑바로 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