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위험한 접근 접선의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민혁이 접선을 시도한 사람들은 과거 흥진그룹을 반석 위에 세우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일등 공신들로 고(故) 이혁준 명예회장의 측근들이었다. 보수적인 세력들인 만큼 죽은 줄로만 알았던 후계자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회사를 통째로 꿀꺽한다는 사실에 격분했고, 일단 반대세력 제거를 필요로 했던 민혁은 그들을 가차 없이 회사에서 내쳐 버렸다. 이혁준 명예회장의 사위이자 전 회장이었던 한태서 마저도 그들을 상대로 뭘 어떻게 해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렇다고 과거의 영화를 지키기 위해 새파랗게 젊은 놈 앞에 고개를 수그릴 위인들도 아니었기에 대충 회사 사정이 수습지어지자 민혁 쪽에서 먼저 굽히고 들어간 것이었다. “우리 같은 뒷방 늙은이들은 뭣 하러 불렀는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지만 민혁은 결코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이미, 감정을 조정하는 방법은 깨우쳤다! 민혁은 전혀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조였다, 풀었다를 반복하며 보수세력들의 구미를 당겼다.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훨씬 짧은 그들이었으니. 이대로 물러나 스러질 수만은 없다는 것을 이용한 작전이었다. 민혁은 절대 그들을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주었다. 회사를 위해 바친 청춘은 얼마든지 보상해줄 것이며 명예까지 보장해줄 것을 약속했다. 곳곳하게 전혀 누그러질 기미가 없었던 그들은 결국 못이기는 척 고집을 꺾었다. 물론 살아생전의 이혁준 명예회장이 직접 점찍어 둔 후계자라는 명분도 어느 정도 작용했음이리라. “젊은 사람이 대단하구만. 우리 같은 늙은이들 고집까지 꺾을 수 있는 걸 보니. 과연 명예회장님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어! 좋네, 우리는 자네 뜻에 따르겠네.” 늙은 너구리같은 것들! 명예와 그 동안 누려왔던 안락함을 보장해주겠다는 약속을 하자 표정부터 달라졌던 사람들. 절대로 방심할 수 없다! 눈앞의 이익을 좇는 사람들은 언제 또다시 등을 돌릴지 모른다. 한태서가 대권을 잡을 수 있도록 이원영의 뒤를 돌봐 준 사람들도 그들이 아니었던가! 어쨌든, 그들에게 이원영은 더 이상 재기능력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못밖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차에 타자마자 상현의 핸드폰이 울렸다. 상현은 정확히 삼 초 후 전화를 받았다. “네. 접니다.” “…긴말 필요 없어. 바꿔!” 뒷좌석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던 민혁에게 상현이 전화기를 건넸다. 민혁은 눈도 뜨지 않은 채 상현이 건네는 전화기를 받아 귀에 댔다.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저 편에서 들려왔다. “안 본 사이, 아주 영리해졌더구나. 벌써부터 그 늙은 영감들을 구워삶다니 말이야!” “정보가 빨라서 좋군.” “괜히 겁먹은 걸 감추려고 하지 마! 넌 지금 겁먹었어. 예전부터 날 두려워했지. 안 그래? 그래봤자, 넌 날 못 이겨! 오늘 아침 신문은 어땠지? 꽤나 재미있는 기사가 실렸던데.” “아주 재미있을 뿐 아니라 흥미롭기까지 하더군. 고작 생각하는 게 그런 식으로밖에 안 되나? 난 그런 식으로 에둘러서 후려치지 않아! 정확하게 뒤통수를 치지. 바로 조금 전처럼 말이야.” 분명 민혁과 헤어지자마자 원영에게 거부의사를 밝힌 게 분명했다. 백전노장이라고 했던가! 그들은 누구의 손을 잡아야 할지 벌써 잘 알고 있었다. 그 점만큼은 민혁도 높이 평가하고 있는 중이었다. 전화기 저 편으로 쨍그랑, 하며 무엇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분을 이기지 못하고 도자기나 꽃병 나부랭이를 던졌겠지. 곧이어 뽀드득, 이를 갈며 원영이 말했다. “너무 빨리 샴페인을 터트리면 좋지 않아. 네놈이 미련스럽게 네놈만의 방식을 고집하는 동안 나는 내 방식대로 하겠어! 어차피 그들은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으니까, 상관없어.” “아닐걸. 한태서의 미망인이라는 위치를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대상들 아니었나? 미망인만큼 동정표를 끌어내기 쉬운 것도 없지. 게다가 비명횡사한 남편의 미망인이라면.” 부들부들 떨리는 분노가 여기까지 느껴지는 듯 했다. 민혁은 짜릿한 승리감을 맛보며 천천히 전화를 끊었다. 과연 어디까지 꼴사납게 변할 수 있는 지 두고 보겠어! 이번에야말로 민혁의 승리가 틀림없었다. 과거 아버지와의 인연을 들먹이며 미망인이 된 애처로운 처지를 내세운다면 그들은 얼마든지 원영의 편으로 돌아설 게 분명했다. 상대가 새파랗게 젊은 놈일 바에야! 정치 쪽의 비자금과도 관련이 되어 검찰을 들락거리며 조사를 받는 도중 한태서가 자살을 선택했기에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그 여자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쉬운 일에 속했다. 마음대로 눈물을 흘리다가도 뒤 돌아서면서 활짝 웃을 수 있는 무서운 여자였기에. 원영은 오래 전에 자신이 알고 있던 동생의 모습을 기억하다가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은 꼴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자꾸 이런 식으로 자극하셔도…괜찮으시겠습니까?” “무서운 여자지. 하지만 독기만으로는 부족해. 날 이기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하지.” “제가 염려하는 건 회장님이 아닙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상현의 말만 듣고도 민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 누구도 가만 두지 않아! 뼈 마디마디를 모조리 끊어 놓을 테다! 그녀를 다치게 하는 자, 상처 입히는 자, 괴롭게 하는 자들 모두가 적인 것이다!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녀를 아프게 한다면 안간힘을 쓰며 붙잡고 있던 인내심을 한꺼번에 놓아 버릴 지도 몰랐다. 미미하게 분노가 피어오르는 민혁을 힐끔 돌아 본 상현은 다시 한 번 민혁의 분노를 자극했다. 때때로 필요한 자극은 확실한 행동을 이끌어 내는 법.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합니다. 지킨다는 건 말보다 행동이 효과적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자네는 가끔 지독할 만큼 신랄해. 그거 알고 있나?” “회장님께서는 언제나 신랄하시지 않으십니까.” “집어치워. 내가 지시한 건 어떻게 됐지?” “…찾아냈습니다. 예상하신대로 생존해 있었습니다.” 상현은 조금 자유로운 한 손을 이용해 뒷좌석에 앉아 있는 민혁에게 작은 쪽지 한 장을 건넸다. 반듯하게 접혀진 쪽지에는 주소 하나가 적혀 있었다. 한적한 외곽에 위치한 어느 보호소의 주소였다. 곧이어 민혁은 상현에게 즉시 지시를 내렸다. “방향 바꿔. 이곳에 가봐야 할 것 같군.” 아무리 분주한 일정이라 해도 이미 찾아낸 이상 미적거릴 이유는 없었다. 각 부서에서 올라온 보고서들이 책상 위에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민혁은 그 모든 일정을 뒤로 미뤘다. 실질적인 일정 관리를 맡고 있는 상현도 민혁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곧장 방향을 바꿨다. 차체가 약간 흔들리며 방향을 틀었을 때, 앞 유리창에 가느다란 빗방울이 투둑, 툭, 하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금세 빗줄기가 굵어지며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늘 안으로 그칠 것 같지는 않군. 민혁은 다시 뒷좌석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상현에게 말했다. “비가 오는 날엔 첼로 선율이 어울리겠지.” 현의 미세한 떨림들이 고스란히 흘러 나왔다. 쏴아아아, 하며 쏟아지는 빗소리와 함께 처연하게 흐르는 첼로의 선율이 나지막하게 깔렸다. ☆★☆ 원영은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고 있었다. 이미 그녀에게선 위스키 냄새가 짙게 풍기고 있었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온 몸을 가늘게 떨며 안절부절 못하던 그녀는 섬뜩한 숨소리를 내뱉으며 생각에 잠겼다. 원래부터 인정머리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놈이었다. 그러나 한 번도 반격을 가한 적은 없었다. 과거의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 봐도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후려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이건 아냐! 아니라고! 네놈은 반격 따위는 할 줄 몰랐어야 해! 그런데 무엇인가가 달라져도 단단히 달라졌다. 자신의 남편이었던 한태서마저도 늘 속내를 알 수 없는 여자라며 두려움을 나타냈었다. 그런데 감히! 핏줄도, 근본도 없는 것이 감히 내게! 단순한 분노? 아니다. 문득 원영의 머릿속을 스치는 한 사람이 떠올랐다. 가끔은 직감을 믿어야 할 때도 있는 법. 원영은 천천히 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휘청, 하며 쓰러지려던 원영을 곁에 서 있던 기사가 부축했다. 그녀는 표독스럽게 잡힌 팔을 빼내며 소리쳤다. “놔! 네놈 도움 따위는 필요 없어! 나가서 차나 대기시켜 놔!” “…술이 과하신데 어디를 가려고 하십니까.” “닥쳐! 넌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앙칼진 그녀의 대꾸에 기사는 고개만 꾸벅 숙인 뒤, 밖으로 나갔다. 누군가를 힘으로 억압할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묘한 흥분감을 가져다주었다. 원영은 온 몸에 저릿하게 퍼지는 흥분감을 느끼며 백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야말로 네놈의 명줄을 제대로 끊어 놓으리라. 산비탈에서 등을 밀어버린 그 막되 먹은 놈을 결코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굴러 떨어진 자신을 보며 마음껏 비웃고 있을 놈의 얼굴을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얼마든지 웃어라! 그 웃음을 완전히 앗아 갈 테니까. 몸달아하지 않아도 어두컴컴한 땅 속에 네놈을 처박을 시간은 얼마든지 남아 있으니까. “…정말…협상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겁니까?” 차에 탄 원영에게 운전석에 있던 기사가 물었다. 어딘지 모르게 안쓰러움이 묻어나는 어조였다. 그러나 모든 것에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원영으로서는 꽤나 신경에 거슬리는 질문이었다. 속눈썹을 파르르르 떨며 원영이 매서운 눈을 치켜떴다. “협상의 여지? 처음부터 그런 것 따위는 없었어!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야!”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된 만남 일 지도 몰랐다. 아버지 이혁준이라는 사람을 거쳐야만 겨우 연결될 수 있는 가족이라는 존재. 생각해 보면 원영과 민혁의 첫 만남부터가 삐걱거림의 연속이었다. 인연이라기보다는 악연에 가까운 둘 사이의 다툼에서 협상의 여지는 전혀 없었다. 게다가 협상의 여지가 조금이나마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응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무서운 한숨을 내쉬던 기사가 고개를 들어 백미러에 비친 원영의 모습을 보았다. 백미러를 쏘아보며 원영이 딱 잘라 말했다. “두 사람 다 머물 수 있는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어! 살든 죽든 선택은 하나 뿐이야!” “…그래도 돌아가신 아버님께서는…!” “아버지? 누가? 근본도 모르는 천것을 후계자라고 데려다 놓고 애지중지했던 분이 내 아버지? 그 따위 되먹지 못한 설교를 하려면 이 차에서 내려! 운전 같은 건 나도 할 수 있으니까!” “죄송합니다.” 차가 출발하기 시작하자 원영은 천사처럼 순진한 얼굴을 하고서 눈을 감았다. 가볍게 허밍으로 들리는 노랫가락은 마치 소풍을 온 어린애들의 콧노래 같았다. 그런 순진한 얼굴 속에 분노를 곱씹고 있는 또 다른 얼굴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한태서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여자. 피도 눈물도 없다는 말은 그녀를 위해 준비된 말 같았다. 뽀얗고 보드라운 살결 속에 날카로운 발톱이 숨어 있었다. 콧노래를 부르던 원영은 핸드백 속에서 작고 하얀 약병을 꺼내어 그 속에 들어 있는 알약 한 알을 입에 넣었다. 약기운을 빌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했고, 불안정하게 뛰는 심장박동을 가라앉힐 수도 없었다. 알콜 기운이 아직 남아 있을텐데. 약을 복용해도 괜찮을까. 말없이 운전대를 잡고 있던 남자의 눈빛에 걱정스러움이 언뜻 스쳤다. 퇴근 시간대와 겹쳐진 교통 상황에 시달리던 차가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윤기사는 가만히 시동을 끄고 원영이 깨어나길 기다렸다. 잠든 모습조차 괴로움으로 일그러져 있는 여자의 모습. 무엇이 저토록 그녀를 몰아세우는 걸까. 마음속에 들어 있던 욕심이 혈관 구석구석 독(毒)이 되어 깊이 퍼져가는 모습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할까. 그녀의 표독함은 흘러간 세월들이 만들어 놓은 독기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윤기사였다. 설마 숨을 쉬지 않고 있는 건 아니겠지. 조심스레 손가락을 뻗어 여자의 숨결을 느껴본 뒤 안도하는 남자는 물끄러미 잠든 여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잠든 모습은 이토록 한없이 약한 모습인데. 부스스 눈을 뜨자마자 여자의 눈꼬리에 힘이 들어갔다. 잠이 덜 깬 듯한 어수선함은 아예 없었다. 방금 전 죽은 듯이 잠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또렷한 눈빛이었다. “…도착했습니다. 깨어나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정말 과녁에 집중하면서 손에 땀을 쥐고 양궁 경기 중계를 보았답니다. *^-^* 덕분에 글 다듬는 것도 늦어지고 댓글도 다 달지 못했습니다. ^^긁적. 남은 댓글은 내일 달께요~ 늦어서 죄송하고... 정말이지 비 피해가 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있는 곳은 빗줄기가 세진 않지만 천둥번개를 동반한 세찬 비가 내리는 곳이 많다고 하네요. 빗길에 운전 조심하시구요, 힘차게 하루 맞이하시길..^^ *************************************************************************************
※비밀의 성(城)을 향해 가는 길 [18-①]-위험한 접근※
18. 위험한 접근
접선의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민혁이 접선을 시도한 사람들은
과거 흥진그룹을 반석 위에 세우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일등 공신들로
고(故) 이혁준 명예회장의 측근들이었다.
보수적인 세력들인 만큼
죽은 줄로만 알았던 후계자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회사를 통째로 꿀꺽한다는 사실에 격분했고,
일단 반대세력 제거를 필요로 했던 민혁은 그들을 가차 없이 회사에서 내쳐 버렸다.
이혁준 명예회장의 사위이자 전 회장이었던 한태서 마저도
그들을 상대로 뭘 어떻게 해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렇다고 과거의 영화를 지키기 위해
새파랗게 젊은 놈 앞에 고개를 수그릴 위인들도 아니었기에
대충 회사 사정이 수습지어지자 민혁 쪽에서 먼저 굽히고 들어간 것이었다.
“우리 같은 뒷방 늙은이들은 뭣 하러 불렀는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지만 민혁은 결코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이미, 감정을 조정하는 방법은 깨우쳤다!
민혁은 전혀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조였다, 풀었다를 반복하며
보수세력들의 구미를 당겼다.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훨씬 짧은 그들이었으니.
이대로 물러나 스러질 수만은 없다는 것을 이용한 작전이었다.
민혁은 절대 그들을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주었다.
회사를 위해 바친 청춘은 얼마든지 보상해줄 것이며
명예까지 보장해줄 것을 약속했다.
곳곳하게 전혀 누그러질 기미가 없었던 그들은 결국 못이기는 척 고집을 꺾었다.
물론 살아생전의 이혁준 명예회장이
직접 점찍어 둔 후계자라는 명분도 어느 정도 작용했음이리라.
“젊은 사람이 대단하구만.
우리 같은 늙은이들 고집까지 꺾을 수 있는 걸 보니.
과연 명예회장님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어! 좋네, 우리는 자네 뜻에 따르겠네.”
늙은 너구리같은 것들!
명예와 그 동안 누려왔던 안락함을 보장해주겠다는 약속을 하자
표정부터 달라졌던 사람들.
절대로 방심할 수 없다!
눈앞의 이익을 좇는 사람들은 언제 또다시 등을 돌릴지 모른다.
한태서가 대권을 잡을 수 있도록 이원영의 뒤를 돌봐 준 사람들도 그들이 아니었던가!
어쨌든, 그들에게 이원영은
더 이상 재기능력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못밖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차에 타자마자 상현의 핸드폰이 울렸다.
상현은 정확히 삼 초 후 전화를 받았다.
“네. 접니다.”
“…긴말 필요 없어. 바꿔!”
뒷좌석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던 민혁에게 상현이 전화기를 건넸다.
민혁은 눈도 뜨지 않은 채 상현이 건네는 전화기를 받아 귀에 댔다.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저 편에서 들려왔다.
“안 본 사이, 아주 영리해졌더구나.
벌써부터 그 늙은 영감들을 구워삶다니 말이야!”
“정보가 빨라서 좋군.”
“괜히 겁먹은 걸 감추려고 하지 마!
넌 지금 겁먹었어. 예전부터 날 두려워했지. 안 그래?
그래봤자, 넌 날 못 이겨!
오늘 아침 신문은 어땠지? 꽤나 재미있는 기사가 실렸던데.”
“아주 재미있을 뿐 아니라 흥미롭기까지 하더군.
고작 생각하는 게 그런 식으로밖에 안 되나?
난 그런 식으로 에둘러서 후려치지 않아!
정확하게 뒤통수를 치지. 바로 조금 전처럼 말이야.”
분명 민혁과 헤어지자마자 원영에게 거부의사를 밝힌 게 분명했다.
백전노장이라고 했던가!
그들은 누구의 손을 잡아야 할지 벌써 잘 알고 있었다.
그 점만큼은 민혁도 높이 평가하고 있는 중이었다.
전화기 저 편으로 쨍그랑, 하며 무엇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분을 이기지 못하고 도자기나 꽃병 나부랭이를 던졌겠지.
곧이어 뽀드득, 이를 갈며 원영이 말했다.
“너무 빨리 샴페인을 터트리면 좋지 않아.
네놈이 미련스럽게 네놈만의 방식을 고집하는 동안 나는 내 방식대로 하겠어!
어차피 그들은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으니까, 상관없어.”
“아닐걸. 한태서의 미망인이라는 위치를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대상들 아니었나?
미망인만큼 동정표를 끌어내기 쉬운 것도 없지.
게다가 비명횡사한 남편의 미망인이라면.”
부들부들 떨리는 분노가 여기까지 느껴지는 듯 했다.
민혁은 짜릿한 승리감을 맛보며 천천히 전화를 끊었다.
과연 어디까지 꼴사납게 변할 수 있는 지 두고 보겠어!
이번에야말로 민혁의 승리가 틀림없었다.
과거 아버지와의 인연을 들먹이며 미망인이 된 애처로운 처지를 내세운다면
그들은 얼마든지 원영의 편으로 돌아설 게 분명했다.
상대가 새파랗게 젊은 놈일 바에야!
정치 쪽의 비자금과도 관련이 되어 검찰을 들락거리며 조사를 받는 도중
한태서가 자살을 선택했기에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그 여자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쉬운 일에 속했다.
마음대로 눈물을 흘리다가도
뒤 돌아서면서 활짝 웃을 수 있는 무서운 여자였기에.
원영은 오래 전에 자신이 알고 있던 동생의 모습을 기억하다가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은 꼴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자꾸 이런 식으로 자극하셔도…괜찮으시겠습니까?”
“무서운 여자지. 하지만 독기만으로는 부족해.
날 이기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하지.”
“제가 염려하는 건 회장님이 아닙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상현의 말만 듣고도 민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 누구도 가만 두지 않아!
뼈 마디마디를 모조리 끊어 놓을 테다!
그녀를 다치게 하는 자, 상처 입히는 자,
괴롭게 하는 자들 모두가 적인 것이다!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녀를 아프게 한다면
안간힘을 쓰며 붙잡고 있던 인내심을 한꺼번에 놓아 버릴 지도 몰랐다.
미미하게 분노가 피어오르는 민혁을 힐끔 돌아 본 상현은
다시 한 번 민혁의 분노를 자극했다.
때때로 필요한 자극은 확실한 행동을 이끌어 내는 법.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합니다.
지킨다는 건 말보다 행동이 효과적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자네는 가끔 지독할 만큼 신랄해. 그거 알고 있나?”
“회장님께서는 언제나 신랄하시지 않으십니까.”
“집어치워. 내가 지시한 건 어떻게 됐지?”
“…찾아냈습니다. 예상하신대로 생존해 있었습니다.”
상현은 조금 자유로운 한 손을 이용해 뒷좌석에 앉아 있는 민혁에게
작은 쪽지 한 장을 건넸다.
반듯하게 접혀진 쪽지에는 주소 하나가 적혀 있었다.
한적한 외곽에 위치한 어느 보호소의 주소였다.
곧이어 민혁은 상현에게 즉시 지시를 내렸다.
“방향 바꿔. 이곳에 가봐야 할 것 같군.”
아무리 분주한 일정이라 해도 이미 찾아낸 이상 미적거릴 이유는 없었다.
각 부서에서 올라온 보고서들이
책상 위에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민혁은 그 모든 일정을 뒤로 미뤘다.
실질적인 일정 관리를 맡고 있는 상현도
민혁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곧장 방향을 바꿨다.
차체가 약간 흔들리며 방향을 틀었을 때,
앞 유리창에 가느다란 빗방울이 투둑, 툭, 하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금세 빗줄기가 굵어지며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늘 안으로 그칠 것 같지는 않군.
민혁은 다시 뒷좌석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상현에게 말했다.
“비가 오는 날엔 첼로 선율이 어울리겠지.”
현의 미세한 떨림들이 고스란히 흘러 나왔다.
쏴아아아, 하며 쏟아지는 빗소리와 함께
처연하게 흐르는 첼로의 선율이 나지막하게 깔렸다.
☆★☆
원영은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고 있었다.
이미 그녀에게선 위스키 냄새가 짙게 풍기고 있었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온 몸을 가늘게 떨며 안절부절 못하던 그녀는
섬뜩한 숨소리를 내뱉으며 생각에 잠겼다.
원래부터 인정머리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놈이었다.
그러나 한 번도 반격을 가한 적은 없었다.
과거의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 봐도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후려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이건 아냐! 아니라고!
네놈은 반격 따위는 할 줄 몰랐어야 해!
그런데 무엇인가가 달라져도 단단히 달라졌다.
자신의 남편이었던 한태서마저도 늘 속내를 알 수 없는 여자라며
두려움을 나타냈었다.
그런데 감히! 핏줄도, 근본도 없는 것이 감히 내게!
단순한 분노? 아니다.
문득 원영의 머릿속을 스치는 한 사람이 떠올랐다.
가끔은 직감을 믿어야 할 때도 있는 법.
원영은 천천히 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휘청, 하며 쓰러지려던 원영을 곁에 서 있던 기사가 부축했다.
그녀는 표독스럽게 잡힌 팔을 빼내며 소리쳤다.
“놔! 네놈 도움 따위는 필요 없어! 나가서 차나 대기시켜 놔!”
“…술이 과하신데 어디를 가려고 하십니까.”
“닥쳐! 넌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앙칼진 그녀의 대꾸에 기사는 고개만 꾸벅 숙인 뒤, 밖으로 나갔다.
누군가를 힘으로 억압할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묘한 흥분감을 가져다주었다.
원영은 온 몸에 저릿하게 퍼지는 흥분감을 느끼며 백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야말로 네놈의 명줄을 제대로 끊어 놓으리라.
산비탈에서 등을 밀어버린 그 막되 먹은 놈을
결코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굴러 떨어진 자신을 보며 마음껏 비웃고 있을 놈의 얼굴을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얼마든지 웃어라!
그 웃음을 완전히 앗아 갈 테니까.
몸달아하지 않아도 어두컴컴한 땅 속에 네놈을 처박을 시간은 얼마든지 남아 있으니까.
“…정말…협상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겁니까?”
차에 탄 원영에게 운전석에 있던 기사가 물었다.
어딘지 모르게 안쓰러움이 묻어나는 어조였다.
그러나 모든 것에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원영으로서는
꽤나 신경에 거슬리는 질문이었다.
속눈썹을 파르르르 떨며 원영이 매서운 눈을 치켜떴다.
“협상의 여지? 처음부터 그런 것 따위는 없었어!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야!”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된 만남 일 지도 몰랐다.
아버지 이혁준이라는 사람을 거쳐야만
겨우 연결될 수 있는 가족이라는 존재.
생각해 보면 원영과 민혁의 첫 만남부터가 삐걱거림의 연속이었다.
인연이라기보다는 악연에 가까운 둘 사이의 다툼에서
협상의 여지는 전혀 없었다.
게다가 협상의 여지가 조금이나마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응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무서운 한숨을 내쉬던 기사가 고개를 들어
백미러에 비친 원영의 모습을 보았다.
백미러를 쏘아보며 원영이 딱 잘라 말했다.
“두 사람 다 머물 수 있는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어!
살든 죽든 선택은 하나 뿐이야!”
“…그래도 돌아가신 아버님께서는…!”
“아버지? 누가?
근본도 모르는 천것을 후계자라고 데려다 놓고 애지중지했던 분이 내 아버지?
그 따위 되먹지 못한 설교를 하려면 이 차에서 내려!
운전 같은 건 나도 할 수 있으니까!”
“죄송합니다.”
차가 출발하기 시작하자 원영은
천사처럼 순진한 얼굴을 하고서 눈을 감았다.
가볍게 허밍으로 들리는 노랫가락은
마치 소풍을 온 어린애들의 콧노래 같았다.
그런 순진한 얼굴 속에 분노를 곱씹고 있는
또 다른 얼굴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한태서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여자.
피도 눈물도 없다는 말은 그녀를 위해 준비된 말 같았다.
뽀얗고 보드라운 살결 속에 날카로운 발톱이 숨어 있었다.
콧노래를 부르던 원영은 핸드백 속에서 작고 하얀 약병을 꺼내어
그 속에 들어 있는 알약 한 알을 입에 넣었다.
약기운을 빌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했고,
불안정하게 뛰는 심장박동을 가라앉힐 수도 없었다.
알콜 기운이 아직 남아 있을텐데.
약을 복용해도 괜찮을까.
말없이 운전대를 잡고 있던 남자의 눈빛에 걱정스러움이 언뜻 스쳤다.
퇴근 시간대와 겹쳐진 교통 상황에 시달리던 차가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윤기사는 가만히 시동을 끄고 원영이 깨어나길 기다렸다.
잠든 모습조차 괴로움으로 일그러져 있는 여자의 모습.
무엇이 저토록 그녀를 몰아세우는 걸까.
마음속에 들어 있던 욕심이
혈관 구석구석 독(毒)이 되어 깊이 퍼져가는 모습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할까.
그녀의 표독함은 흘러간 세월들이 만들어 놓은 독기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윤기사였다.
설마 숨을 쉬지 않고 있는 건 아니겠지.
조심스레 손가락을 뻗어 여자의 숨결을 느껴본 뒤 안도하는 남자는
물끄러미 잠든 여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잠든 모습은 이토록 한없이 약한 모습인데.
부스스 눈을 뜨자마자 여자의 눈꼬리에 힘이 들어갔다.
잠이 덜 깬 듯한 어수선함은 아예 없었다.
방금 전 죽은 듯이 잠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또렷한 눈빛이었다.
“…도착했습니다. 깨어나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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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과녁에 집중하면서 손에 땀을 쥐고 양궁 경기 중계를 보았답니다. *^-^*
덕분에 글 다듬는 것도 늦어지고 댓글도 다 달지 못했습니다. ^^긁적.
남은 댓글은 내일 달께요~ 늦어서 죄송하고...
정말이지 비 피해가 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있는 곳은 빗줄기가 세진 않지만 천둥번개를 동반한 세찬 비가 내리는 곳이
많다고 하네요.
빗길에 운전 조심하시구요, 힘차게 하루 맞이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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