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처녀의 로맨스](34)깊어버린 오해

瓚禧2004.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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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깊어버린 오해





그날 저녁, 차안에서 그와 나는 앉아있었다. 내 집앞에 주차 시켜놓고, 그는 나에게 할말이 있다고 했다.



지이잉 소리가 나며 부드럽게 창문이 열리고, 그는 담배를 꺼내어 한모금 물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마도 아버님에게 한소리를 들은 모양이였다. 세현이 가고 난 그 자리에서 한참을 울어버려 부운눈을 하고서 만나자는 그를 향해 갔다. 그는 아무말 없이 나를 집앞으로 데리고 왔고,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흠..... 너 담배 피니?!”




다 피어버린 담배 꽁초를 비벼 끄며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나에대한 불신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그정도 눈치는 29년동안 살면서 알게 모르게 터득한 나만의 노하우였다.


물론 그가 아니라고 애써 부인한다면 할말은 없지만, 여자로써 직감이란 것은 무서운 것이다.




“날 믿지 못하는거예요?!”


“.............”




때론 아무말 없음이 긍정이 될 수도 있었다.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그에게 그건 아니다라고 말할 기분도 아니였다. 이미 나에게 불신을 갖은 그는 더 이상 내가알던 그가 아니였다. 마음속 저끝에서부터 자존심이 상해왔고, 눈물이 금방이라도 흐를 것처럼 차올랐다. 애써 그에게 그런 약한모습 보이기 싫어 나는 말없이 문을열고 집으로 향했다.




-이제 당신과는 끝이야!!!!!





아무말 없이, 그냥 평소같이 나는 집 계단을 올라가고 그는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우리는 평소같지 않은 하루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계단 하나하나를 밟으며 그가 나를 잡아주길 바랬지만, 그는 매정하게 차를 몰고 언덕아래를 향해 가고 있었다.



난 가득차 버린 눈물을 또로록 흘리며, 저 멀리 가고 있는 그의 차를 옥상에서 한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눈물흘려버린 눈은 더 선명하게 그의 차를 비춰주고 있었고, 내 가슴은 찢어지는것과같은 고통이였다.





“이젠 정말 당신과 끝이야....안녕.....”





다음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회사에 출근했다. 다른날 보다 더 화사한 옷차림을 하고, 다른날 보다 더 많이 웃었으며, 다른날 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아파하는 내 모습 조차 그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혜진씨, 올해로 입사 5년차죠?! 그럼 휴가 써도 되겠네??!”


“무슨 휴가요?!”


“혜진씨 몰랐어요?! 입사 5년, 입사 10년 이렇게 5년단위로 나가는 사람은 장기 근속휴가 쓸수 있잖아! 그게 한 10일 되지??! 게다가 월차 연차까지 쓰면 아마 못써도 보름은 쉴수 있을껄?! 여행 보조자금도 지원해 준다던데?!”




뜻밖의 기회였다. 하필이면 시기 적절하게 그 이야기를 듣게 되다니...나에게는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더 이상 두세번 생각하고 망설일 것도 없었다. 나는 무작정 서류를 꾸며 그에게 가져갔고,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문서를 바라보지도 않은채 습관적으로 싸인만 해버렸다.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나온 나와 퇴근 시간 맞춰서 ‘이제 휴가가겠네?!’라는 최대리와 김지영씨의 야유를 받으며 회사를 나왔다. 늦가을이라서 그런지 벌써 해는 떨어져 가고 있었다.



정처없는 발걸음이였다. 29살에 또다시 난 혼자가 되어버린것이다.



날 못믿는그도...이렇게 되어버린 나 자신도 모두다 싫었다. 그와 헤어져! 라고 입밖으로 꺼내어 공식화 하는 과정을 겪지는 않았지만, 그도 나도 이게 마지막이라는걸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를 잡지 않았다.




플라타너스 나뭇잎이 가득 깔린 거리를 사각 거리면서 걷는동안 나는 그와의 추억에 빠져 있었다.




처음 그와 맞선 본날, 그를 회사에서 다시 만난 날, 그와의 첫날밤, 그와 사귀었던 날, 그의 달콤한 입맞춤, 그의 빨간 바구니 가득 담긴 장미꽃 받은날.....




그와의 추억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그를 기억하면 기억할수록 가슴 한쪽이 알싸하게 통증으로 아려오기 시작했다. 난 그 통증을 즐기듯 애써 미소를 지으며 걷고 또 걸었다.



난 웃고 있었지만, 난 울고 있었다.



난 그렇게 아파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난 핸드폰을 꺼놓은채, 깊은 잠에 빠졌다. 어짜피 내일부터 휴가 처리를 했고,그렇게 급하게는 안된다는 인사부의 말에도 애써 우겨 급하게 잡은 휴가였다.



죽은 듯이 잤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원없이 자고 눈을 떴을때는 이미 오후를 한참 넘긴 시간이였다. 거의 하루를 꼬박 잠든채로 있었던 것이다.



지긋이 지는 해를 작은 쪽창문을 향해 바라보던 나는 옷장을 열어 가방을 찾아내었다. 언제 샀는지 조차 까마득한 여행용 가방....



그동안 일에 치여 어딜 놀러갈 여유가 없었던 나였다.



난 먼지 가득한 가방을 털어내고, 주섬 주섬 옷 몇벌을 챙겼다. 정말 간단한 여행가방이였다. 그리곤 훌훌 옷을 벋어던지고, 짙은 베이지색 면바지와 하얀색 남방을 받쳐입고, 베이지색 벙거지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화장도 하지 않은 채였다. 나이가 들수록 화장은 예의라고 했던가??! 하지만 그 예의조차 이제 나에겐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당분간 나에겐 없어질 것이다.


애써 벙거지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여전히 꺼져 있는 핸드폰을 그대로 둔채... 집을 나섰다.



딱히 어디로 가야지 라고 생각한건 아니였기에 그냥 발길 닿는대로 일단은 역으로 향했다. 북적이는 서울역으로 가, 바로 기차가 있는 강릉으로 향했다.



어두운 밤을 가로질러 무서운 속도로 움직이는 기차에 몸을 맡긴채, 보이지도 않은 차창을 바라보며, 난 깊은 상념에 빠졌다.


항상 떠나가는 내 주변의 남자들과, 내 행동들... 지금까지 29년 살면서 나에게 있었던 일들.... 난 수많은 이별을 겪어왔고, 또 그 이별에 이젠 익숙해 졌다고 믿었는데 아닌가 보다. 난 아픔에 몸서리치는 한낱 연약한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