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진실은 감출 수 없는 법 민혁은 가만히 멜론을 먹기 좋게 적당히 등분하는 하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둣빛 속살을 드러내는 멜론과 길고 가느다란 하연의 손가락이 묘하게 어우러졌다. 귀 뒤로 깔끔하게 잔머리를 넘기고 질끈 묶은 하연의 모습은 예전처럼 단정했지만 뭔가가 달라져 있었다. 솜털이 빳빳하게 곤두 설 정도로 긴장감을 잔뜩 품고 있던 하연의 예전 모습을 떠올리며 민혁의 입술이 미미한 곡선을 그렸다. 야물지게 포크로 한 입 크기의 멜론 조각을 찍어서 건내는 하연의 손목을 가만히 한 손에 쥐어 보았다. 손 안에 들어오고도 약간의 공간이 남을 만큼의 가느다란 손목이 애처롭기만 했다. “손 말고, 포크요, 민혁씨.” “…왠 과일이지?” 아주 잠깐 동안, 하연은 머뭇거렸다. 손목을 통해 전해지는 망설임을 단박에 읽어 버린 민혁이 살짝 기울어진 고개를 바로잡으며 하연의 대답을 기다렸다. 말해야 하나? 불쑥 찾아 온 낯선 손님의 얼굴을 떠올린 하연은 어쩐지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날카롭게 상대방을 꿰뚫는 능력은 부족할지 몰라도, 하연에게는 때 묻지 않은 직감 같은 게 존재했다. 그 직감이, 낯선 손님의 방문에 대해 사실대로 털어놓는 것을 막고 있었다. 대답을 듣기 전엔 절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단호한 민혁의 눈길과 마주치자 저절로 하연의 고개가 떨어졌다. 말한다면 뭐라고 말해야 하지? “…본인 스스로 자신을 감추는 데 턱없이 서투르다는 건 알고 있겠지.” 대답을 재촉하는 말이었지만 결코, 예전처럼 위압적이거나 강제적이지는 않았다. 적어도 이 남자는 옆에 앉아 있는 진하연이라는 여자를 향해서 만큼은 모든 것을 허용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확실히, 민혁과 하연은 점점 서로를 위해 변해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고개를 들어 민혁의 얼굴을 바라보던 하연은 짤막한 숨을 내쉰 뒤 잡혀 있는 손목을 살짝 비틀어 뺐다. “누가 왔었어요.” “누구? 김윤경 실장?” “아뇨. 민혁씨를 만나러 왔다고 했어요.” 순간 민혁의 얼굴에서 생기가 쏴아아, 하며 빠져나가는 듯싶었다. 모든 감정들이 일시에 소멸된 것처럼 굳어버린 민혁의 얼굴을 보며 하연은 빠르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시작한 이야기였기에 차라리 빨리 말해버리고 끝내는 게 좋을 듯싶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직감을 믿을 걸. “여자였어요. 과일 바구니를 한 손에 들고 집에 들어와서 방들을 다 들여다보더군요. 자기가 누군지는 민혁씨에게 물어보면 알 거라고 했어요. 그게 다예요. 이젠 민혁씨 차례에요.” “도대체 왜 아무나 이 집에 발을 들여놓게 해!” 집 안이 쩌렁쩌렁 울릴 듯한 민혁의 고함소리에 하연은 또 다시 바짝 긴장했다. 분노! 온통 어둠뿐인 그곳에서 보여주던 분노가 꿈틀대고 있었다. 하지만 하연은 전처럼 무작정 두려움에 떨지는 않았다. 어렴풋이 이민혁이라는 남자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절대로 아무런 이유 없이는 분노를 터트리지 않는 남자. 사정없이 광폭함을 드러낼 때조차 자신이 다친 것을 돌봐 준 사람이 아니었던가. 다른 사람은 그를 향해 사정없이 난폭하며 차디찬 냉혈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줄지 몰라도 하연만큼은 예외였다. 제멋대로 행동할 때조차 마음 한 구석에는 늘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따스함이 숨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무나 이 집에 들락거리는 거, 불쾌해! 왜 나에게 말을 하지 않았지? 왜 이제야 이야길 하는 거지? 분명히 말하지만 이 집은 내 집이야! 그 어떤 누구라도 함부로 문턱을 넘을 수는 없어!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갔는데도 아무렇지 않던가? 당신이란 여자, 그 정도로 마음이 넓을 줄은 생각 못했는걸!” 그 뱀처럼 교활하고 징그러운 여자가 여기까지 발을 들여 놨단 말이지! 빌어먹을. 비아냥이 섞인 민혁의 고함소리를 듣는 하연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문득문득 그의 옆 모습과 숨소리,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가끔씩 느껴왔던 감정들이 되살아났다. 그의 강압적인 말투와 당당함에 압도되기만 하는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착각이었다. 오히려 우위에 서 있는 건 자신이라는 걸 아주 가끔씩 느끼곤 하는 하연이었다. 가슴을 후벼파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신랄하기 그지없는 비아냥이지만, 그의 눈빛은 정 반대였다. 혹시라도 상처 입힐까봐 전전긍긍하는 불안한 눈동자. 세상에서 단 한 사람에게 크나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게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하다는 걸 하연은 새록새록 느껴가고 있는 중이었다. 당신은 또 거짓말을 하고 있네요. 당신의 마음속을 환하게 들여다 볼 수는 없지만 저절로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어요. 차라리 그 걱정이 담긴 눈동자라도 감추고 화를 내지 그래요. 아픈 소리를 하는 사람은 훨씬 더 아픈 법인데. “…그 어떤 누구라도의 범위 속에 저도 포함되나요?” “그런 말이 아니잖아, 지금!” “당신을 만나러 온 사람이니까. 나라고 감정도 없겠어요? 아무런 양해도 없이 집에 들이닥친 사람에게 경계심이 없다고 생각해요? 당신을 만나러 온 손님이니까. 그거면 날 용서해 줄 이유가 되나요?” 순간적으로 온 몸을 감싸고 있던 분노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공허해 진 내부에 들어차는 건 옆에 앉아서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는 여자를 향한 사랑이었다. 그녀의 숨소리, 살짝 떨리는 속눈썹과 흘러내린 잔머리, 곧게 뻗은 목선과 말할 때마다 살짝 벌어지는 도톰한 입술들을 예민한 촉각으로 느낄 때마다 미칠 듯한 소유욕이 끓어올랐다. 하지만 찾아온 행복을 덥썩 단숨에 잡아 버리면 알 수 없는 존재가 그것을 앗아 갈까봐 민혁은 그 감정들을 억눌렀다. 이젠 화조차 제대로 낼 수 없는 머저리가 되어 버린 모양이군! 스스로를 향해 한껏 자조적인 비난을 퍼부어 봤지만 별로 불쾌하진 않았다. 한 사람에게 모든 감정을 맡겨놓고 나니 편하다는 느낌 뿐. 그녀로 인해 감정이 좌지우지 된다는 사실은 오히려 만족감을 가져다주었다. “용서 받을 사람은 나야! 그리고 분명히 말하지만, 이 공간은 당신을 위해서 만들어진 거야. 만약 누군가 이 공간을 짓밟으려 한다면 내 손으로 직접 목숨을 거둬들이고 말겠어!” 하연은 소름이 돋았다. 그의 분노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끔찍한 소리를 읊조리는 민혁을 향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의 분노가 두려웠다. “…그런 말은…하는 게 아니에요. 만약 짓밟아서 망가트린다면 당신이 다시 만들어 주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요.” 당신이라는 사람은 도무지 화를 낼 줄 모르는 군. 지나치게 잘 믿고, 쉽게 용서하고. 아무 것도 모르는 대책 없는 여자. 세상을 자신만의 잣대로 잴 수는 없는 법인데. 예전에도 말했지만, 정을 너무 헤프게 베풀면 결국 상처 받는 건 자기 자신이야. 망가트리면 다시 만들어 주면 된다고? 과연 그럴까. 다시 만들어주지 못하게 나까지 짓밟아 버린다면 그 때도 당신은 그런 말을 할까. 완전히 소멸 한 뒤엔 재건도 없는 법. 어떻게 해야 할까. 도대체 이런 여자를 어떻게 지켜줘야만 할까. “이리 와 봐.” 민혁은 하연을 끌어당겨 품속에 가두었다. 그 포근함이 좋아서 민혁은 자기도 모르게 하연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이름 모를 들꽃향기를 흠뻑 맡으며 민혁은 자꾸만 하연의 어깨를 보듬었다. 하연은 단단한 민혁의 어깨춤에 얼굴을 묻은 채 가만가만 말했다. “나도 알아야 하잖아요. 누구에요? 누군지 아니까 화 낸 거잖아요.” “…잠깐만, 아주 잠깐이면 돼.” 민혁은 하연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뜻을 전달했다. 하연도 그의 품속에 있는 것이 무작정 좋아서 그의 뜻을 오롯이 받아 들였다. 눈을 감고 서로를 느끼는 시간들. 무언(無言)의 몸짓 속에 구석구석 스미는 행복감을 맛보며 한없이 따스함에 빠져들었다. 손가락 끝만 맞닿아도 모든 것을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었다. 어느 새, 민혁도 하연에게서 베풂을 배워나가고 있었다.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한 마음으로 그녀를 느꼈다. 팔에서 하연을 풀어준 뒤, 민혁은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들을 준비 됐어요. 말해 봐요, 그 여자는 누구죠? 내가 먼저 말할까요? 그 여자의 얼굴에서 민혁씨를 발견했어요. 알 듯 말 듯 그렇게 닮아 있었죠.”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진실이지. 그건.”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마주보는 게 나아요. 난 그렇게 생각해요.” “…누님이야. 절반만 피를 나눴지. 하지만 그 호칭마저도 아까워.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했을 뿐이지.” “그랬군요. 민혁씨 가족이었군요.” 가족! 그 단어가 민혁의 귓가에 들리자 가슴 한켠이 얼어붙었다. 정답고 따사로워야 할 단어가 민혁에게 있어서는 고통스러운 과거의 또 다른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소름끼칠 듯한 차디찬 조소가 민혁의 얼굴에 떠올랐다. 결코 허락 될 수도 허락하고 싶지도 않은 관계! 억만겁의 세상이 다한다 해도 절대로 악연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될 사람들. 순식간에 냉혹함을 드러내는 민혁의 얼굴을 본 하연의 표정에 흐린 기색이 깔렸다. “…행복한 기억은 없겠지만…그래도….” “다시는 내 앞에서 가족이라는 얼토당토 않는 말로 엮으려 하지 마! 이 세상엔 처음부터 나 혼자였을 뿐이야. 뱃속으로 낳아 준 어미마저도 팽개친 나였어! 그들 사이에서 난 불청객이었고 환영받지 못할 저주 받은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 인간의 의지대로 혈연관계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것, 그거 하나만 인정해. 다른 건 절대로 인정 못 해!” 사정없이 후려치는 채찍처럼 민혁은 그렇게 스스로를 자책했고 학대했다. 하연은 달래는 듯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민혁씨 말처럼 혈연관계는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나에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기회조차 없어요. 난 날 낳아 주신 분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어요. 고작 사진 한 장으로 그리움을 달랬을 뿐이죠. 민혁씨처럼 원망할 수도 없어요. 인정할 건 그냥 인정해요.” 민혁은 이미 하연의 성장과정을 얼추 알고 있었다. 속속들이 파헤치진 않았지만 적어도 표면적인 것은 대부분 알고 있었다. 지금 그녀 곁에는 가족이라고 부를 대상조차 없다!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며 엄마라고 막연히 불러보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떠올리자 격한 감정을 다스리지 못했던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무책임한 건 용서받을 수 있는 거예요. 버림받았다는 기분, 그게 뭔지 알아요? 그걸 인정하려면 얼마나 자신과 공허한 싸움을 해야 하는 지, 민혁씨는 모를 거예요. 당신은 어머니나 아버지 모두에게 버림받지는 않았잖아요. 다만 인정하지 않을 뿐이죠. 내 말…틀렸나요?” “…전에도 말했지만, 날 억지로 설득하려 하지 마!” “설득할 생각은 없어요. 다만, 분명히 알아야 할 건 절대로 진실은 감춰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아무리 아니라고 부인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진실인 거예요.” 방금 전의 신랄한 자책들을 부인하기라도 하듯, 민혁은 말할 수 없이 평온한 얼굴로 포크를 들고 멜론을 입에 넣었다. 비록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지만 멜론의 달콤함은 여전했다. 부드럽게 혀끝에서 녹아내리는 멜론의 속살을 느끼며 하연의 말을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차라리 완벽하게 버림 받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완전한 해방감으로 하늘 아래 두 발로 우뚝 설 수 있었을까. 적어도 흥진 그룹 총수를 아버지로 둔 덕분에 정규교육을 비롯한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었고, 배고픔과 가난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아버지라는 존재를 증오했던 건 아니었다. 빈 술병과 악취 속에 버려져 있던 자신을 데리러 왔을 때, 지긋지긋한 생활 속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감도 있었다. 그 기대감은 미래를 스스로 설계해 보겠다는 당당한 계획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고 크나큰 오해였다. 악마의 소굴에 데리고 온 아버지라는 작자를 밤이면 밤마다 원망했고 증오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들과 섞일 수 없다는 것에서 오는 철저한 소외감. 무책임한 어머니보다 견디기 힘든 건 벌레 보듯 싸늘한 눈초리를 던지는 새어머니였고, 악취 가득한 단칸방을 나뒹구는 술병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건 어머니와 누나의 입을 통해 쏟아지는 칼날 같은 독설이었다. 독설들이 날아들 때마다 죽이고 싶은 살의(殺意)를 느끼곤 했었다. 그들이 보여준 살의(殺意)와 자신이 보여 준 살기(殺氣)! 〔네 에미를 닮아서 네놈 눈초리도 살기 등등 하구나! 더러운 것 같으니!〕 〔다시 한 번만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네 눈을 찔러 버리겠어! 누나라고 부르지도 마, 더러워! 싫어!〕 어울릴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 모든 것들을 견뎌내기가 오히려 쉬웠다. 짓밟고 무시하고 더러운 것이라 욕했던 그들에게 보란 듯이 냉혹하게 대했고, 쉴 새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아버지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던 실날같은 희망도 툭, 하고 끊어졌다. 〔그놈은 재목이야! 나중에 우리 회사를 튼튼하게 받쳐 줄 재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그런 놈이 하나 버티고 있어야 아무도 넘보질 못 해. 남들 보기에 모양새도 적당히 갖춰졌고.〕 그 이후로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 따위는 애초부터 갖지도 않았다. 그리고 기꺼이 회사를 위한 전쟁병기가 되는 데 동의했다. 스스로 선택했던 길이었고, 언젠가는 딛고 올라서리라는 의지 하나로 버텨 나갔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다가 온 추락! 갑자기 입 속에 들어있는 달콤함이 씁쓸하게만 느껴졌다. 타협 가능성 제로. 반드시 양쪽 날개를 잘라 버린 뒤 서서히 떨어지며 추락하는 모습을 지켜보리라! “…버림받은 것에 대한 원망은 없나?” 언제나 그렇듯 하연은 민혁이 생각을 끝낼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고맙게도. 민혁이 생각을 끝내고 입을 열자 배시시 웃음을 흩뿌렸다. 바람에 분분히 휘날리는 꽃잎처럼 부스러지는 하연의 미소가 하염없이 좋았다. ************************************************************************************* 주말 잘 보내셨나요? ^^ 오늘은 '처서'랍니다. 옛 속담에 '처서에 비가 오면 독의 곡식도 준다.'는 말이 있는데요.. 처서 날에 비가 오면 흉년이 든다는 뜻이랍니다. ^^ㅎ 제가 있는 곳은 맑은 햇살이 떠 있는데 님들 계신 곳은 어떤가요? ㅎ 활기찬 월요일 되시길 바랍니다~ *************************************************************************************
※비밀의 성(城)을 향해 가는 길 [19-①]-진실은 감출 수 없는 법※
19. 진실은 감출 수 없는 법
민혁은 가만히 멜론을 먹기 좋게 적당히 등분하는 하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연둣빛 속살을 드러내는 멜론과
길고 가느다란 하연의 손가락이 묘하게 어우러졌다.
귀 뒤로 깔끔하게 잔머리를 넘기고 질끈 묶은 하연의 모습은
예전처럼 단정했지만 뭔가가 달라져 있었다.
솜털이 빳빳하게 곤두 설 정도로 긴장감을 잔뜩 품고 있던 하연의 예전 모습을 떠올리며
민혁의 입술이 미미한 곡선을 그렸다.
야물지게 포크로 한 입 크기의 멜론 조각을 찍어서 건내는
하연의 손목을 가만히 한 손에 쥐어 보았다.
손 안에 들어오고도
약간의 공간이 남을 만큼의 가느다란 손목이 애처롭기만 했다.
“손 말고, 포크요, 민혁씨.”
“…왠 과일이지?”
아주 잠깐 동안, 하연은 머뭇거렸다.
손목을 통해 전해지는 망설임을 단박에 읽어 버린 민혁이
살짝 기울어진 고개를 바로잡으며
하연의 대답을 기다렸다.
말해야 하나?
불쑥 찾아 온 낯선 손님의 얼굴을 떠올린 하연은
어쩐지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날카롭게 상대방을 꿰뚫는 능력은 부족할지 몰라도,
하연에게는 때 묻지 않은 직감 같은 게 존재했다.
그 직감이,
낯선 손님의 방문에 대해 사실대로 털어놓는 것을 막고 있었다.
대답을 듣기 전엔 절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단호한 민혁의 눈길과 마주치자
저절로 하연의 고개가 떨어졌다.
말한다면 뭐라고 말해야 하지?
“…본인 스스로 자신을 감추는 데 턱없이 서투르다는 건 알고 있겠지.”
대답을 재촉하는 말이었지만
결코, 예전처럼 위압적이거나 강제적이지는 않았다.
적어도 이 남자는 옆에 앉아 있는 진하연이라는 여자를 향해서 만큼은
모든 것을 허용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확실히, 민혁과 하연은 점점 서로를 위해 변해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고개를 들어 민혁의 얼굴을 바라보던 하연은
짤막한 숨을 내쉰 뒤 잡혀 있는 손목을 살짝 비틀어 뺐다.
“누가 왔었어요.”
“누구? 김윤경 실장?”
“아뇨. 민혁씨를 만나러 왔다고 했어요.”
순간 민혁의 얼굴에서
생기가 쏴아아, 하며 빠져나가는 듯싶었다.
모든 감정들이 일시에 소멸된 것처럼 굳어버린 민혁의 얼굴을 보며
하연은 빠르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시작한 이야기였기에
차라리 빨리 말해버리고 끝내는 게 좋을 듯싶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직감을 믿을 걸.
“여자였어요.
과일 바구니를 한 손에 들고 집에 들어와서 방들을 다 들여다보더군요.
자기가 누군지는 민혁씨에게 물어보면 알 거라고 했어요.
그게 다예요. 이젠 민혁씨 차례에요.”
“도대체 왜 아무나 이 집에 발을 들여놓게 해!”
집 안이 쩌렁쩌렁 울릴 듯한 민혁의 고함소리에
하연은 또 다시 바짝 긴장했다.
분노! 온통 어둠뿐인 그곳에서 보여주던 분노가 꿈틀대고 있었다.
하지만 하연은 전처럼 무작정 두려움에 떨지는 않았다.
어렴풋이
이민혁이라는 남자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절대로 아무런 이유 없이는 분노를 터트리지 않는 남자.
사정없이 광폭함을 드러낼 때조차
자신이 다친 것을 돌봐 준 사람이 아니었던가.
다른 사람은 그를 향해
사정없이 난폭하며 차디찬 냉혈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줄지 몰라도
하연만큼은 예외였다.
제멋대로 행동할 때조차 마음 한 구석에는
늘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따스함이 숨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무나 이 집에 들락거리는 거, 불쾌해!
왜 나에게 말을 하지 않았지?
왜 이제야 이야길 하는 거지?
분명히 말하지만 이 집은 내 집이야!
그 어떤 누구라도 함부로 문턱을 넘을 수는 없어!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갔는데도 아무렇지 않던가?
당신이란 여자, 그 정도로 마음이 넓을 줄은 생각 못했는걸!”
그 뱀처럼 교활하고 징그러운 여자가 여기까지 발을 들여 놨단 말이지!
빌어먹을.
비아냥이 섞인 민혁의 고함소리를 듣는 하연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문득문득 그의 옆 모습과 숨소리,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가끔씩 느껴왔던 감정들이 되살아났다.
그의 강압적인 말투와 당당함에 압도되기만 하는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착각이었다.
오히려 우위에 서 있는 건 자신이라는 걸
아주 가끔씩 느끼곤 하는 하연이었다.
가슴을 후벼파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신랄하기 그지없는 비아냥이지만,
그의 눈빛은 정 반대였다.
혹시라도 상처 입힐까봐 전전긍긍하는 불안한 눈동자.
세상에서 단 한 사람에게 크나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게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하다는 걸
하연은 새록새록 느껴가고 있는 중이었다.
당신은 또 거짓말을 하고 있네요.
당신의 마음속을 환하게 들여다 볼 수는 없지만
저절로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어요.
차라리 그 걱정이 담긴 눈동자라도 감추고 화를 내지 그래요.
아픈 소리를 하는 사람은 훨씬 더 아픈 법인데.
“…그 어떤 누구라도의 범위 속에 저도 포함되나요?”
“그런 말이 아니잖아, 지금!”
“당신을 만나러 온 사람이니까.
나라고 감정도 없겠어요?
아무런 양해도 없이 집에 들이닥친 사람에게 경계심이 없다고 생각해요?
당신을 만나러 온 손님이니까.
그거면 날 용서해 줄 이유가 되나요?”
순간적으로 온 몸을 감싸고 있던 분노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공허해 진 내부에 들어차는 건
옆에 앉아서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는 여자를 향한 사랑이었다.
그녀의 숨소리, 살짝 떨리는 속눈썹과 흘러내린 잔머리,
곧게 뻗은 목선과
말할 때마다 살짝 벌어지는 도톰한 입술들을 예민한 촉각으로 느낄 때마다
미칠 듯한 소유욕이 끓어올랐다.
하지만 찾아온 행복을 덥썩 단숨에 잡아 버리면
알 수 없는 존재가 그것을 앗아 갈까봐
민혁은 그 감정들을 억눌렀다.
이젠 화조차 제대로 낼 수 없는 머저리가 되어 버린 모양이군!
스스로를 향해 한껏 자조적인 비난을 퍼부어 봤지만
별로 불쾌하진 않았다.
한 사람에게 모든 감정을 맡겨놓고 나니 편하다는 느낌 뿐.
그녀로 인해 감정이 좌지우지 된다는 사실은
오히려 만족감을 가져다주었다.
“용서 받을 사람은 나야!
그리고 분명히 말하지만,
이 공간은 당신을 위해서 만들어진 거야.
만약 누군가 이 공간을 짓밟으려 한다면 내 손으로 직접 목숨을 거둬들이고 말겠어!”
하연은 소름이 돋았다.
그의 분노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끔찍한 소리를 읊조리는 민혁을 향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의 분노가 두려웠다.
“…그런 말은…하는 게 아니에요.
만약 짓밟아서 망가트린다면 당신이 다시 만들어 주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요.”
당신이라는 사람은 도무지 화를 낼 줄 모르는 군.
지나치게 잘 믿고, 쉽게 용서하고.
아무 것도 모르는 대책 없는 여자.
세상을 자신만의 잣대로 잴 수는 없는 법인데.
예전에도 말했지만, 정을 너무 헤프게 베풀면
결국 상처 받는 건 자기 자신이야.
망가트리면 다시 만들어 주면 된다고?
과연 그럴까.
다시 만들어주지 못하게 나까지 짓밟아 버린다면
그 때도 당신은 그런 말을 할까.
완전히 소멸 한 뒤엔 재건도 없는 법.
어떻게 해야 할까.
도대체 이런 여자를 어떻게 지켜줘야만 할까.
“이리 와 봐.”
민혁은 하연을 끌어당겨 품속에 가두었다.
그 포근함이 좋아서 민혁은 자기도 모르게
하연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이름 모를 들꽃향기를 흠뻑 맡으며
민혁은 자꾸만 하연의 어깨를 보듬었다.
하연은 단단한 민혁의 어깨춤에 얼굴을 묻은 채 가만가만 말했다.
“나도 알아야 하잖아요. 누구에요? 누군지 아니까 화 낸 거잖아요.”
“…잠깐만, 아주 잠깐이면 돼.”
민혁은 하연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뜻을 전달했다.
하연도 그의 품속에 있는 것이 무작정 좋아서
그의 뜻을 오롯이 받아 들였다.
눈을 감고 서로를 느끼는 시간들.
무언(無言)의 몸짓 속에 구석구석 스미는 행복감을 맛보며
한없이 따스함에 빠져들었다.
손가락 끝만 맞닿아도 모든 것을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었다.
어느 새, 민혁도 하연에게서 베풂을 배워나가고 있었다.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한 마음으로 그녀를 느꼈다.
팔에서 하연을 풀어준 뒤,
민혁은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들을 준비 됐어요.
말해 봐요, 그 여자는 누구죠?
내가 먼저 말할까요?
그 여자의 얼굴에서 민혁씨를 발견했어요.
알 듯 말 듯 그렇게 닮아 있었죠.”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진실이지. 그건.”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마주보는 게 나아요.
난 그렇게 생각해요.”
“…누님이야. 절반만 피를 나눴지.
하지만 그 호칭마저도 아까워.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했을 뿐이지.”
“그랬군요. 민혁씨 가족이었군요.”
가족!
그 단어가 민혁의 귓가에 들리자 가슴 한켠이 얼어붙었다.
정답고 따사로워야 할 단어가 민혁에게 있어서는
고통스러운 과거의 또 다른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소름끼칠 듯한 차디찬 조소가 민혁의 얼굴에 떠올랐다.
결코 허락 될 수도 허락하고 싶지도 않은 관계!
억만겁의 세상이 다한다 해도
절대로 악연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될 사람들.
순식간에 냉혹함을 드러내는 민혁의 얼굴을 본 하연의 표정에 흐린 기색이 깔렸다.
“…행복한 기억은 없겠지만…그래도….”
“다시는 내 앞에서 가족이라는 얼토당토 않는 말로 엮으려 하지 마!
이 세상엔 처음부터 나 혼자였을 뿐이야.
뱃속으로 낳아 준 어미마저도 팽개친 나였어!
그들 사이에서 난 불청객이었고
환영받지 못할 저주 받은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
인간의 의지대로 혈연관계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것, 그거 하나만 인정해.
다른 건 절대로 인정 못 해!”
사정없이 후려치는 채찍처럼 민혁은 그렇게 스스로를 자책했고 학대했다.
하연은 달래는 듯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민혁씨 말처럼 혈연관계는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나에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기회조차 없어요.
난 날 낳아 주신 분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어요.
고작 사진 한 장으로 그리움을 달랬을 뿐이죠.
민혁씨처럼 원망할 수도 없어요.
인정할 건 그냥 인정해요.”
민혁은 이미 하연의 성장과정을 얼추 알고 있었다.
속속들이 파헤치진 않았지만
적어도 표면적인 것은 대부분 알고 있었다.
지금 그녀 곁에는 가족이라고 부를 대상조차 없다!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며 엄마라고 막연히 불러보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떠올리자
격한 감정을 다스리지 못했던 자신이 후회스러웠다.
“무책임한 건 용서받을 수 있는 거예요.
버림받았다는 기분, 그게 뭔지 알아요?
그걸 인정하려면 얼마나 자신과 공허한 싸움을 해야 하는 지, 민혁씨는 모를 거예요.
당신은 어머니나 아버지 모두에게 버림받지는 않았잖아요.
다만 인정하지 않을 뿐이죠.
내 말…틀렸나요?”
“…전에도 말했지만, 날 억지로 설득하려 하지 마!”
“설득할 생각은 없어요.
다만, 분명히 알아야 할 건 절대로 진실은 감춰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아무리 아니라고 부인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진실인 거예요.”
방금 전의 신랄한 자책들을 부인하기라도 하듯,
민혁은 말할 수 없이 평온한 얼굴로 포크를 들고 멜론을 입에 넣었다.
비록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지만 멜론의 달콤함은 여전했다.
부드럽게 혀끝에서 녹아내리는 멜론의 속살을 느끼며
하연의 말을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차라리 완벽하게 버림 받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완전한 해방감으로 하늘 아래 두 발로 우뚝 설 수 있었을까.
적어도 흥진 그룹 총수를 아버지로 둔 덕분에
정규교육을 비롯한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었고,
배고픔과 가난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아버지라는 존재를 증오했던 건 아니었다.
빈 술병과 악취 속에 버려져 있던 자신을 데리러 왔을 때,
지긋지긋한 생활 속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감도 있었다.
그 기대감은 미래를 스스로 설계해 보겠다는 당당한 계획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고 크나큰 오해였다.
악마의 소굴에 데리고 온 아버지라는 작자를
밤이면 밤마다 원망했고 증오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들과 섞일 수 없다는 것에서 오는 철저한 소외감.
무책임한 어머니보다 견디기 힘든 건
벌레 보듯 싸늘한 눈초리를 던지는 새어머니였고,
악취 가득한 단칸방을 나뒹구는 술병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건
어머니와 누나의 입을 통해 쏟아지는 칼날 같은 독설이었다.
독설들이 날아들 때마다 죽이고 싶은 살의(殺意)를 느끼곤 했었다.
그들이 보여준 살의(殺意)와 자신이 보여 준 살기(殺氣)!
〔네 에미를 닮아서 네놈 눈초리도 살기 등등 하구나! 더러운 것 같으니!〕
〔다시 한 번만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네 눈을 찔러 버리겠어!
누나라고 부르지도 마, 더러워! 싫어!〕
어울릴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 모든 것들을 견뎌내기가 오히려 쉬웠다.
짓밟고 무시하고 더러운 것이라 욕했던 그들에게
보란 듯이 냉혹하게 대했고, 쉴 새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아버지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던 실날같은 희망도 툭, 하고 끊어졌다.
〔그놈은 재목이야!
나중에 우리 회사를 튼튼하게 받쳐 줄 재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그런 놈이 하나 버티고 있어야 아무도 넘보질 못 해.
남들 보기에 모양새도 적당히 갖춰졌고.〕
그 이후로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 따위는 애초부터 갖지도 않았다.
그리고 기꺼이 회사를 위한 전쟁병기가 되는 데 동의했다.
스스로 선택했던 길이었고,
언젠가는 딛고 올라서리라는 의지 하나로 버텨 나갔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다가 온 추락!
갑자기 입 속에 들어있는 달콤함이 씁쓸하게만 느껴졌다.
타협 가능성 제로.
반드시 양쪽 날개를 잘라 버린 뒤 서서히 떨어지며 추락하는 모습을 지켜보리라!
“…버림받은 것에 대한 원망은 없나?”
언제나 그렇듯 하연은 민혁이 생각을 끝낼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고맙게도.
민혁이 생각을 끝내고 입을 열자 배시시 웃음을 흩뿌렸다.
바람에 분분히 휘날리는 꽃잎처럼 부스러지는 하연의 미소가 하염없이 좋았다.
*************************************************************************************
주말 잘 보내셨나요? ^^
오늘은 '처서'랍니다. 옛 속담에 '처서에 비가 오면 독의 곡식도 준다.'는 말이 있는데요..
처서 날에 비가 오면 흉년이 든다는 뜻이랍니다. ^^ㅎ
제가 있는 곳은 맑은 햇살이 떠 있는데 님들 계신 곳은 어떤가요? ㅎ
활기찬 월요일 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