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가집 초가집이란 볏짚이나 밀짚·갈대 따위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인 집으로, 새마을 운동으로 화장실과 더불어 가장 많이 개선됐다. 지붕도 자주 갈아주어야 하고 불이 나면 금새 다 타버리는 단점도 있지만, 서민들의 주거공간으로 손색없는 조상의 지혜였다. 사진은 전남 순천시 낙안읍성마을 노인들이 마당에 앉아 볏짚으로 초가 이엉을 짜고있는 모습이다. 드높은 파란하늘과 초가의 모습이 잘 어우러진 가을의 풍경이다. 1997년 10월 31일 촬영
▲ 고무신 검정고무신 한켤레라도 얻으려고 부모님을 졸랐던 시절이 있었다. 장에서 사다주신 고무신이 아까워 잘 신지도 않고, 맨발로 산과 들을 뛰놀던 시절 얘기는 이제 옛 이야기가 되버렸지만, 마루밑 섬돌 위에는 역시 검정고무신이 주인(?)이 아닐까....
▲ 요강 어린시절 밤중에 바깥의 뒷간을 가려면 부모님이나 형제들을 깨워 동행을 했다. 너무나 멀던 뒷간을 가다 귀신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러한 무서움에서 벗어나고, 한겨울 한밤중에 덜덜 떨면서 멀리 가지 않고도 크고 작은 일(?)을 방안에서 볼 수 있던 편리한 도구가 요강이다. 수세식 화장실에 비데까지 등장한 요즘에도 아침마다 요강을 부시는 일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 광경을 볼 수 있을까...
▲ 다듬이질 고풍스런 한옥에서 곱게 한복을 입고 다듬이질을 하는 아낙네의 모습이 정겹다. 다듬이의 손길이 닿은 옷감은 유난히 매끈하고 구김도 잘 가지 않는다. 우리네 어머니와 할머니가 다듬이돌 위로 뚝딱뚝딱 만들어 내던 그 소리는 언제 들어도 정겹기만 하다. 오늘날 전기 다리미의 등장으로 보다 쉽게 옷을 다릴 수 있게 됐지만, 다듬이질의 정겨운 소리는 쉽게 들을 수 없는 우리의 소리가 아닐까...
▲ 우물 마을의 공동 급수시설이었던 우물.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까지만 하여도 음료수와 가정 잡용수는 거의 우물물을 이용하였으며, 전답관개에서도 주로 우물물에 의존하였다. 근대화와 함께 공업성장으로 각종 공업용수도 초기에는 거의 지하수에 의존하여 우물파기가 성행하였다. 두레박으로 떠올리는 우물을 지금은 잘 볼 수 없지만, 우리의 기억속에 정겨움과 시원함으로 남아있다. 1993년 촬영
▲ 짚신 짚신은 가는 새끼를 꼬아 날을 삼고, 총과 돌기총으로 올을 삼아서 만드는데 여자용은 총을 가늘고 곱게 하고, 엄지총은 물들인 짚을 섞어 만들기도 하였다. 옛날에는 사서(士庶)를 막론하고 짚신이 평상화로 사용되어 농가에서는 농한기에 머슴들이 사랑방에 앉아 몇 십 켤레씩 짚신을 삼아 식구들의 수요에 충당하고, 시장에 내다 팔아 용돈으로 썼다. 지금도 초상집 상제들은 짚신을 신는 풍습이 있다. 사진은 전남 담양군 용면 두장리 주민들이 농한기를 이용, 짚신 삼기를 하는 모습이다. 상례나 민속놀이 공연용으로 팔리고 있다. 1999년 2월 21일 촬영
▲ 목침 목침은 나무로 만든 베게로 나무의 감촉이 서늘하면서도 체온을 은근하게 유지해 주어 잠을 자거나 쉴 때 많이 사용하였으며 서민층에서는 주로 여름에 썼다. 신침(神枕) 또는 약침(藥枕)이라고 하여 목침 안에 약재를 넣어 사용하거나, 목침 안에 책을 넣어 두어서 사용할 때마다 문향의 우아한 정취가 느껴지도록 하기도 하였다. 보통 감나무·회화나무·오동나무·소나무 등으로 만들었으며 나뭇결을 잘 살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다. 형태는 둥근 모양, 사각 모양, 직사각 모양, 반달 모양, 동물 모양 등이 있는데, 직사각 모양을 가장 일반적으로 썼다. 더운 여름철, 죽부인과 더불어 더위를 잊게 해준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돋보인다.1985년 8월 촬영
▲ 금줄 예전엔 아이가 태어나면 대문에 금줄을 걸어놓았는데, 새끼줄에 빨간 고추와 숴솔가지가 매달렸으면 아들이고 솔가지와 숯만 걸리면 딸이었다. 금줄이 걸린 집은 아무리 가까운 친인척도 삼칠일(21일)동안 출입이 금지된다. 저항력이 약한 신생아와 산모를 외부의 질병에 노출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는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 있다. 출생지가 병원인 아이들에게 금줄 문화는 사라져가지만, 잊기에는 소중한 우리 모두의 유산이다. 1985년 9월 촬영
▲ 가마솥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정성스레 밥을 지으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간식거리가 없던 시절 가마솥의 누룽지는 간식중의 최고였다.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솥에 담긴 흰쌀밥의 윤기가 보이는듯하다. 전기밥솥, 압력밥솥으로 밥짓기가 편해진 세상이지만, 그때보다 밥맛이 덜한건 '솥'과 '정성'의 차이가 아닐까. 1993년 10월 12일 촬영
▲ 천일염전 ‘소금 한 말에 쌀 한말’ 지금이야 ‘소금 한말에 쌀 한되’ 정도지만 소금이 귀한시절이 있었다. 가마째 사기 힘든 아낙네들은 “소금 받으러 간다”며 바구니를 들고 종종걸음으로 직접 염전을 찾아 갔고, 소금장수가 마을에 오면 주민들이 몰려들어 흥정하는 풍경이 벌어졌었다.그러나 수퍼마켓에서 포장소금을 팔면서 이런 광경은 사라져 가고 있다. 또한 기계염과 수입염이 들어오고 있는 실정이다. 화학염과 값 싼 중국산 소금이 대량 수입돼 천일염의 가치와 수요가 떨어진 것이다.유년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이들에겐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염전. 지금은 양수기와 손수레가 대신해 그런 풍경을 볼수 없지만 20여년 전만 해도 해도인부들이 수차를 돌려 염전에 갯물을 퍼넣고 목도로 창고에 소금을 지어날랐다. 사진은 백령도 천일염 제조 현장. 1997년 7월 15일 촬영
▲ 지게 등이 휠 것 같은 삶은 무게여....라는 유행가 노랫말처럼 지게는 벗어날 수 없는 농사꾼의 굴레이자 멍에였다. 농경시대 한 가운데를 버티고 있던 이 도구는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지난 60년대 이전까지는 최상의 운반수단으로 군림했다. 이처럼 농사꾼에게 중요했던 지게도 경운기가 등장하고 각종 운반 수단이 나오고 나서부터는 좀처럼 찾기 힘든 물건이 되고 있다. 그래도 간혹 재래시장의 좁은 골목 골목을 종횡무진 달리고 있는 지게와 지게꾼의 모습이 있다. 사진은 13,14대 의원을 지낸 뒤 생업인 농업으로 되돌아 간 박경수씨가 지게를 진채 걸어가는 모습
▲ 연탄 초겨울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때면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연탄이 추억으로 다가온다. 어렵사리 살던 시절에 우리는 연탄 한 장이면 끼니를 해결하고 온가족이 옹기종기 따뜻한 밤을 지낼수 있었다. 지금은 보일러가 보편화되고 기름과 가스가 주 연료로 사용되지만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서민생활에서 연탄은 생활필수품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주변에서 연탄을 때는 가정들이 있다. 서울의 수많은 달동네와 빈민촌에서는 여전히 겨울이 되면 연탄을 나르는 힘겨운 손길이 있다. 사진은 서울시 금천구 고명 연탄공장에서 각 가정에 배달할 연탄을 차량에 싣고 있는 모습. 2002년 10월 14일 촬영
▲ 얼음가게 냉장고가 없거나 희귀했던 시절, 찌는듯한 여름날 '어름가게`로 달려가 얼음 한덩이를 사서 화채를 만들어 먹던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사진은 동양제빙주식회사에 한 근로자가 얼음을 옮기고 있는 모습. 30도가 넘는 복더위를 무색케 한다. 1976년 7월 20일 촬영
▲ 스카이콩콩 한때 인기를 끌었던 스카이콩콩은 스프링이 부착된 쇠막대에 올라타고 외발로 뛰는 어린이들의 놀이기구였다. 당시에는 지금의 인라인스케이트나 퀵보드의 인기에 견줄만 했다. 1981년 10월 28일 촬영
▲ 물레방아 떨어지는 물을 이용한 물레방아. 물레방아는 큰나무바퀴와 굴대에 공이를 장치하여, 쏟아지는 물이 나무바퀴를 돌리면 굴대에 꿴 넓적한 나무가 방아채의 한 끝을 눌러 번쩍 들어올렸다가 떨어뜨리면서 그 끝의 공이가 확 속의 곡식을 찧도록 되어 있다. 방아채와 공이의 동작이 자동으로 되기 때문에 사람이 없어도 찧을 수 있으며, 공이가 양쪽으로 두 개가 물려 있어 엇갈려 찧어지는 것과 한 개만 있는 것 등이 있다. 흐르는 물을 이용해 곡식을 찧던 조상의 지혜를 엿볼 수 있으며, 한여름에는 그 시원함까지 더한다.또한 이 물레방앗간은 데이트 할곳이 변변찮던 그 옛날 젊은이들의 좋은 데이트 장소였다. 1977년 촬영
▲ 메주 각종 장을 만드는데 쓰이는 메주는 콩 ·보리 ·밀 ·쌀 등을 익혀 띄워 만드는데, 장에 따라 메주 만드는 법이 다르다. 그 냄새가 독특해 외국인이 아닌 우리네 또한 메주 냄새에 코를 막지만, 장맛은 이 메주맛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8년 1월 2일 촬영
▲ 맷돌 믹서기가 흔해진 요즘 세상이지만, 재래식 맷돌에 갈던 그 맛을 느낄 수 없다. 빠르고 편리해진 믹서들이 많아졌어도 그 옛날 맛을 찾는 사람들로 아직도 몇몇 음식점에서는 이 재래식 맷돌을 쓰기도 한다. 덜 곱게 갈아지고 시간이 오래 걸려도 믹서기가 이 맛을 따라갈 수 있을까. 할머니의 맷돌 가는 모습에 고향의 맛이 물씬 느껴진다
▲ 떡메질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4호 회다지 선소리의 고장인 횡성군 우천면 정금리 주민들이 설날을 앞두고 마을 민속관에 모여 전통떡메로 인절미를 만드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웬만한 장정의 힘으로는 치기 힘든 이 떡메질은 떡을 더 쫀득하고 찰지게 한다. 1997년 2월 6일 촬영
▲ 대장간 후끈후끈 열기 가득 대장간. 대장간은 쇠를 달구어 각종 연장을 만드는 곳이다. 옛날에는 시골 장터나 마을 단위로 대장간이 있어 무딘 농기구나 기타 각종 연장을 불에 달구어 벼리기도 하고 새로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그런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을 대장장이라고 하는데, 대장장이는 오랜 숙련을 통해 담금질로 쇠의 강도나 성질을 조절한다. 풀무는 손풀무와 발풀무가 있는데 발풀무가 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대장간에는 풀무 외에 모루 ·정 ·메(앞메와 옆메) ·집게 ·대갈마치 ·숫돌 등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진다. 대장간이 없는 마을로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면서 연장을 벼리는 떠돌이 대장장이도 있었다. 자급자족하는 농어촌에서 대장간은 필수적이었다. 사진은 1976년 7월 1일 대장간 모습이다. 대장장이 뒤에 있는 선풍기가 무색할정도로 열기가 후끈 느껴진다
▲ 난로위의 도시락 온풍기를 비롯한 각종 난방기구들이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해주지만, 난로처럼 훈훈한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도시락을 올려놓지 못해서일까? 지금의 난방기구처럼 따뜻하고 편리하지 않아도 겨울하면 난로가 생각나는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것같다. 사진은 남이섬 안에 있는 카페 겸 기념품 가게인 '연가지가' 안에 양은 도시락이 연탄난로 위에 쌓여 있다. 어린시절 교실 중앙에 있는 난로에 수북히 올려놓았던 도시락을 생각나게 한다. 2002년 11월 7일 촬영
▲ 줄배 큰 강이나 사람이 직접 건너지 못하는 깊은 냇물에는 대개 줄배가 있었다. 줄을 당겨 왕복하는 줄배를 이용해 중랑천을 건너는 사람들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다. 너무 늦게 가서 일까? 하지만 요즘의 교통체증에 비한다면 짜증은 덜하지 않을까싶은데... 1970년 11월 14일 촬영
▲ 펌프 지금처럼 상수도 시설이 없던 시절, 펌프를 이용해 빨아올린 물로 등목을 하는 기분이란. 사진은 경기도 가평군 북면 소법리의 한 농가 풍경. 아버지가 펌프로 물을 뿌려주고 어머니는 아들의 등을 밀어주고 있다. 1999년 9월 15일 촬영
== 아련한 추억으로 사라져 가는 것들 ==
아련한 추억으로 사라져 가는 것들...
▲ 초가집
초가집이란 볏짚이나 밀짚·갈대 따위로 이엉을 엮어 지붕을 인 집으로, 새마을 운동으로 화장실과 더불어 가장 많이 개선됐다. 지붕도 자주 갈아주어야 하고 불이 나면 금새 다 타버리는 단점도 있지만, 서민들의 주거공간으로 손색없는 조상의 지혜였다. 사진은 전남 순천시 낙안읍성마을 노인들이 마당에 앉아 볏짚으로 초가 이엉을 짜고있는 모습이다. 드높은 파란하늘과 초가의 모습이 잘 어우러진 가을의 풍경이다. 1997년 10월 31일 촬영
▲ 고무신
검정고무신 한켤레라도 얻으려고 부모님을 졸랐던 시절이 있었다. 장에서 사다주신 고무신이 아까워 잘 신지도 않고, 맨발로 산과 들을 뛰놀던 시절 얘기는 이제 옛 이야기가 되버렸지만, 마루밑 섬돌 위에는 역시 검정고무신이 주인(?)이 아닐까....
▲ 요강
어린시절 밤중에 바깥의 뒷간을 가려면 부모님이나 형제들을 깨워 동행을 했다. 너무나 멀던 뒷간을 가다 귀신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러한 무서움에서 벗어나고, 한겨울 한밤중에 덜덜 떨면서 멀리 가지 않고도 크고 작은 일(?)을 방안에서 볼 수 있던 편리한 도구가 요강이다. 수세식 화장실에 비데까지 등장한 요즘에도 아침마다 요강을 부시는 일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 광경을 볼 수 있을까...
▲ 다듬이질
고풍스런 한옥에서 곱게 한복을 입고 다듬이질을 하는 아낙네의 모습이 정겹다. 다듬이의 손길이 닿은 옷감은 유난히 매끈하고 구김도 잘 가지 않는다. 우리네 어머니와 할머니가 다듬이돌 위로 뚝딱뚝딱 만들어 내던 그 소리는 언제 들어도 정겹기만 하다. 오늘날 전기 다리미의 등장으로 보다 쉽게 옷을 다릴 수 있게 됐지만, 다듬이질의 정겨운 소리는 쉽게 들을 수 없는 우리의 소리가 아닐까...
▲ 우물
마을의 공동 급수시설이었던 우물.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까지만 하여도 음료수와 가정 잡용수는 거의 우물물을 이용하였으며, 전답관개에서도 주로 우물물에 의존하였다. 근대화와 함께 공업성장으로 각종 공업용수도 초기에는 거의 지하수에 의존하여 우물파기가 성행하였다. 두레박으로 떠올리는 우물을 지금은 잘 볼 수 없지만, 우리의 기억속에 정겨움과 시원함으로 남아있다. 1993년 촬영
▲ 짚신
짚신은 가는 새끼를 꼬아 날을 삼고, 총과 돌기총으로 올을 삼아서 만드는데 여자용은 총을 가늘고 곱게 하고, 엄지총은 물들인 짚을 섞어 만들기도 하였다. 옛날에는 사서(士庶)를 막론하고 짚신이 평상화로 사용되어 농가에서는 농한기에 머슴들이 사랑방에 앉아 몇 십 켤레씩 짚신을 삼아 식구들의 수요에 충당하고, 시장에 내다 팔아 용돈으로 썼다. 지금도 초상집 상제들은 짚신을 신는 풍습이 있다. 사진은 전남 담양군 용면 두장리 주민들이 농한기를 이용, 짚신 삼기를 하는 모습이다. 상례나 민속놀이 공연용으로 팔리고 있다. 1999년 2월 21일 촬영
▲ 목침
목침은 나무로 만든 베게로 나무의 감촉이 서늘하면서도 체온을 은근하게 유지해 주어 잠을 자거나 쉴 때 많이 사용하였으며 서민층에서는 주로 여름에 썼다. 신침(神枕) 또는 약침(藥枕)이라고 하여 목침 안에 약재를 넣어 사용하거나, 목침 안에 책을 넣어 두어서 사용할 때마다 문향의 우아한 정취가 느껴지도록 하기도 하였다. 보통 감나무·회화나무·오동나무·소나무 등으로 만들었으며 나뭇결을 잘 살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다. 형태는 둥근 모양, 사각 모양, 직사각 모양, 반달 모양, 동물 모양 등이 있는데, 직사각 모양을 가장 일반적으로 썼다. 더운 여름철, 죽부인과 더불어 더위를 잊게 해준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돋보인다.1985년 8월 촬영
▲ 금줄
예전엔 아이가 태어나면 대문에 금줄을 걸어놓았는데, 새끼줄에 빨간 고추와 숴솔가지가 매달렸으면 아들이고 솔가지와 숯만 걸리면 딸이었다. 금줄이 걸린 집은 아무리 가까운 친인척도 삼칠일(21일)동안 출입이 금지된다. 저항력이 약한 신생아와 산모를 외부의 질병에 노출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는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 있다. 출생지가 병원인 아이들에게 금줄 문화는 사라져가지만, 잊기에는 소중한 우리 모두의 유산이다. 1985년 9월 촬영
▲ 가마솥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정성스레 밥을 지으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간식거리가 없던 시절 가마솥의 누룽지는 간식중의 최고였다. 뚜껑을 열지 않아도 솥에 담긴 흰쌀밥의 윤기가 보이는듯하다. 전기밥솥, 압력밥솥으로 밥짓기가 편해진 세상이지만, 그때보다 밥맛이 덜한건 '솥'과 '정성'의 차이가 아닐까. 1993년 10월 12일 촬영
▲ 천일염전
‘소금 한 말에 쌀 한말’ 지금이야 ‘소금 한말에 쌀 한되’ 정도지만 소금이 귀한시절이 있었다. 가마째 사기 힘든 아낙네들은 “소금 받으러 간다”며 바구니를 들고 종종걸음으로 직접 염전을 찾아 갔고, 소금장수가 마을에 오면 주민들이 몰려들어 흥정하는 풍경이 벌어졌었다.그러나 수퍼마켓에서 포장소금을 팔면서 이런 광경은 사라져 가고 있다. 또한 기계염과 수입염이 들어오고 있는 실정이다. 화학염과 값 싼 중국산 소금이 대량 수입돼 천일염의 가치와 수요가 떨어진 것이다.유년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이들에겐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염전. 지금은 양수기와 손수레가 대신해 그런 풍경을 볼수 없지만 20여년 전만 해도 해도인부들이 수차를 돌려 염전에 갯물을 퍼넣고 목도로 창고에 소금을 지어날랐다. 사진은 백령도 천일염 제조 현장. 1997년 7월 15일 촬영
▲ 지게
등이 휠 것 같은 삶은 무게여....라는 유행가 노랫말처럼 지게는 벗어날 수 없는 농사꾼의 굴레이자 멍에였다. 농경시대 한 가운데를 버티고 있던 이 도구는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지난 60년대 이전까지는 최상의 운반수단으로 군림했다. 이처럼 농사꾼에게 중요했던 지게도 경운기가 등장하고 각종 운반 수단이 나오고 나서부터는 좀처럼 찾기 힘든 물건이 되고 있다. 그래도 간혹 재래시장의 좁은 골목 골목을 종횡무진 달리고 있는 지게와 지게꾼의 모습이 있다. 사진은 13,14대 의원을 지낸 뒤 생업인 농업으로 되돌아 간 박경수씨가 지게를 진채 걸어가는 모습
▲ 연탄
초겨울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때면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연탄이 추억으로 다가온다. 어렵사리 살던 시절에 우리는 연탄 한 장이면 끼니를 해결하고 온가족이 옹기종기 따뜻한 밤을 지낼수 있었다. 지금은 보일러가 보편화되고 기름과 가스가 주 연료로 사용되지만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서민생활에서 연탄은 생활필수품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주변에서 연탄을 때는 가정들이 있다. 서울의 수많은 달동네와 빈민촌에서는 여전히 겨울이 되면 연탄을 나르는 힘겨운 손길이 있다. 사진은 서울시 금천구 고명 연탄공장에서 각 가정에 배달할 연탄을 차량에 싣고 있는 모습. 2002년 10월 14일 촬영
▲ 얼음가게
냉장고가 없거나 희귀했던 시절, 찌는듯한 여름날 '어름가게`로 달려가 얼음 한덩이를 사서 화채를 만들어 먹던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사진은 동양제빙주식회사에 한 근로자가 얼음을 옮기고 있는 모습. 30도가 넘는 복더위를 무색케 한다. 1976년 7월 20일 촬영
▲ 스카이콩콩
한때 인기를 끌었던 스카이콩콩은 스프링이 부착된 쇠막대에 올라타고 외발로 뛰는 어린이들의 놀이기구였다. 당시에는 지금의 인라인스케이트나 퀵보드의 인기에 견줄만 했다. 1981년 10월 28일 촬영
▲ 물레방아
떨어지는 물을 이용한 물레방아. 물레방아는 큰나무바퀴와 굴대에 공이를 장치하여, 쏟아지는 물이 나무바퀴를 돌리면 굴대에 꿴 넓적한 나무가 방아채의 한 끝을 눌러 번쩍 들어올렸다가 떨어뜨리면서 그 끝의 공이가 확 속의 곡식을 찧도록 되어 있다. 방아채와 공이의 동작이 자동으로 되기 때문에 사람이 없어도 찧을 수 있으며, 공이가 양쪽으로 두 개가 물려 있어 엇갈려 찧어지는 것과 한 개만 있는 것 등이 있다. 흐르는 물을 이용해 곡식을 찧던 조상의 지혜를 엿볼 수 있으며, 한여름에는 그 시원함까지 더한다.또한 이 물레방앗간은 데이트 할곳이 변변찮던 그 옛날 젊은이들의 좋은 데이트 장소였다. 1977년 촬영
▲ 메주
각종 장을 만드는데 쓰이는 메주는 콩 ·보리 ·밀 ·쌀 등을 익혀 띄워 만드는데, 장에 따라 메주 만드는 법이 다르다. 그 냄새가 독특해 외국인이 아닌 우리네 또한 메주 냄새에 코를 막지만, 장맛은 이 메주맛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8년 1월 2일 촬영
▲ 맷돌
믹서기가 흔해진 요즘 세상이지만, 재래식 맷돌에 갈던 그 맛을 느낄 수 없다. 빠르고 편리해진 믹서들이 많아졌어도 그 옛날 맛을 찾는 사람들로 아직도 몇몇 음식점에서는 이 재래식 맷돌을 쓰기도 한다. 덜 곱게 갈아지고 시간이 오래 걸려도 믹서기가 이 맛을 따라갈 수 있을까. 할머니의 맷돌 가는 모습에 고향의 맛이 물씬 느껴진다
▲ 떡메질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4호 회다지 선소리의 고장인 횡성군 우천면 정금리 주민들이 설날을 앞두고 마을 민속관에 모여 전통떡메로 인절미를 만드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웬만한 장정의 힘으로는 치기 힘든 이 떡메질은 떡을 더 쫀득하고 찰지게 한다. 1997년 2월 6일 촬영
▲ 대장간
후끈후끈 열기 가득 대장간. 대장간은 쇠를 달구어 각종 연장을 만드는 곳이다. 옛날에는 시골 장터나 마을 단위로 대장간이 있어 무딘 농기구나 기타 각종 연장을 불에 달구어 벼리기도 하고 새로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그런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을 대장장이라고 하는데, 대장장이는 오랜 숙련을 통해 담금질로 쇠의 강도나 성질을 조절한다. 풀무는 손풀무와 발풀무가 있는데 발풀무가 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대장간에는 풀무 외에 모루 ·정 ·메(앞메와 옆메) ·집게 ·대갈마치 ·숫돌 등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진다. 대장간이 없는 마을로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면서 연장을 벼리는 떠돌이 대장장이도 있었다. 자급자족하는 농어촌에서 대장간은 필수적이었다. 사진은 1976년 7월 1일 대장간 모습이다. 대장장이 뒤에 있는 선풍기가 무색할정도로 열기가 후끈 느껴진다
▲ 난로위의 도시락
온풍기를 비롯한 각종 난방기구들이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해주지만, 난로처럼 훈훈한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도시락을 올려놓지 못해서일까? 지금의 난방기구처럼 따뜻하고 편리하지 않아도 겨울하면 난로가 생각나는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것같다. 사진은 남이섬 안에 있는 카페 겸 기념품 가게인 '연가지가' 안에 양은 도시락이 연탄난로 위에 쌓여 있다. 어린시절 교실 중앙에 있는 난로에 수북히 올려놓았던 도시락을 생각나게 한다. 2002년 11월 7일 촬영
▲ 줄배
큰 강이나 사람이 직접 건너지 못하는 깊은 냇물에는 대개 줄배가 있었다. 줄을 당겨 왕복하는 줄배를 이용해 중랑천을 건너는 사람들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다. 너무 늦게 가서 일까? 하지만 요즘의 교통체증에 비한다면 짜증은 덜하지 않을까싶은데... 1970년 11월 14일 촬영
▲ 펌프
지금처럼 상수도 시설이 없던 시절, 펌프를 이용해 빨아올린 물로 등목을 하는 기분이란. 사진은 경기도 가평군 북면 소법리의 한 농가 풍경. 아버지가 펌프로 물을 뿌려주고 어머니는 아들의 등을 밀어주고 있다. 1999년 9월 15일 촬영
여백이 많아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수정하는 단계에서 그만...실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