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와 그 여자의 이야기 [3]

표류교실2004.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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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집들이는 하고 가라는 진아의 투정에도 불구하고 결국 태빈과 서현은 곧바로 미국으로 출국했다. 공항에서 돌아오는 길에 진아는 재석에게마저 투정을 부렸다. 서현의 집이 얼마나 좋았을거냐는 추측과 함께 맛있는 집들이 음식을 놓쳤다며 아쉬워했다. 물론 재석은 그런 진아의 모습에 운전하면서 키득키득 웃을 뿐이었다. 이래서 결혼하면 좋은거였나보다. 연애할때는 그저 마냥 좋은 애인이었지만 결혼을 하고나니 그 이상이 되어버렸다. 때로는 여동생처럼 누나처럼 또 영원한 애인처럼.

 

“그러고보니 준하씨는 집들이 안하나?”

“준하씨는 왜.”

“그렇잖아. 집을 서울로 옮겼으니까 이사한거잖아. 집들이 해야지.”

“당신 왜렇게 집들이에 신경써? 정작 우리도 안해놓고는.”

“그래도 우리는 속초에서 한번 거하게 했었잖아.”

 

빨간 신호에 차를 멈춘 재석은 핸들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신호가 바뀌길 기다렸다.

 

“그래도 그 사람 혼자사는 사람인데 무슨 집들이. 포기해.”

 

장난스런 말투로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있는 아내에게 말했다. 알겠다는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는 아직도 불만스런 표정이었다.

 

 

 

간단히 햄버거와 콜라를 시킨 지우가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는동안 자리에 앉아있던 준하는 창밖으로 보이는 그의 병원 건물을 잠시나마 쳐다봤다. 지우는 햄버거와 콜라가 담긴 트레이를 들고 걸어왔다.

 

“내가 계산했어야하는건데.”

“괜찮아요, 이쯤은. 저녁에 거하게 사주시면 되잖아요.”

“저녁에?”

 

준하의 맞은편에 앉은 그녀는 콜라를 그의 앞에 놓아주며 말했다. 햄버거를 그녀로부터 받아든 그는 저녁이라는 말에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기억속에 항상 저장해두었던 의대 동기생 모임이 생각났기때문이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있을때 지우는 이미 벌써 먼저 햄버거를 먹고있었다. 저녁에 만나는게 당연한 일이라는듯 전혀 신경안쓰고 열심히 먹고있었다.

 

“글쎄, 안되겠는데.”

 

말도안된다는듯 놀란 눈으로 지우는 준하를 쳐다봤다.

 

“뭐라구요?”

“안된다고, 오늘은.”

“꼭 어젯밤에도 만났던것처럼 말하네요.”

“어?”

 

그녀는 더이상 대꾸하지않고 콜라를 마셨다. 그리고는 눈길도 주지않고 다시 햄버거를 먹는데 열중했다. 이 여자만 보면 그도 모르게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귀찮아서는 절대 않았지만 그도 모르게 나왔다.

한 5분동안 서로 아무말도 하지않고 서먹서먹한 분위기안에서 각자 먹는데만 열중했다. 역시 그녀는 성격이 굉장히 급한지 준하가 한 5입 먹었을때 벌써 손을 툭툭 털고있었다.

 

“그렇게 먹고도 소화가 잘되는거보면 정말 신기해.”

“날 오래전부터 알았던것처럼 말하지말아요.”

 

단단히 화가 난듯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고 앉아있었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가 만든 쓰레기를 주워들어 쓰레기통에 버리고 다시 자리에 돌아왔다. 순간 그녀가 화가나서 밖으로 그냥 나가버리는 줄 알았다. 또다시 한숨이 나왔다.

 

“나만 보면 왜 그렇게 한숨을 쉬는거예요? 사람 기분나쁘게.”

“말 잘해.”

 

뜬금없이 무슨 말이야? 지우는 그를 노려봤다. 저 남자 햄버거 먹고있는 모습 더이상은 못봐주겠다. 빵가루 하나도 흘리지않고 저렇게 깨끗이 먹는사람은 태어나 처음본다. 먹을때마다 입가에 케챱이 묻지도 않는다. 혹시 완벽주의자 아니야? 아니면 결벽증이 심하다던가.

 

“말을 잘하라뇨?”

“아니, 말 잘한다고. 미국에서 얼마나 살았어?”

“꾀 많이요.”

 

정말 화난것처럼 여전히 그를 노려보고있었지만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쳐져있었다. 그걸 스스로 아는지 모르는지 표정관리를 제대로 하지못하고있다.

 

“구체적으로?”

“초등학교 1학년때 갔었거든요. 난 수학못하니까 스스로 계산해요.”

“16년?”

“그런가보죠 그럼.”

 

지우는 관심없다는듯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만 마음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있었다. 드디어 이 남자가 나한테 관심을 보이는건가? 미국에서 얼마나 살았냐고 물어보고. 내심 기분이 좋아지는 자신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걸 느낀 그녀는 헛기침을 하고서 다시 표정관리에 집중했다.

 

“우와. 오래 살았는데 말 잘한다.”

 

누가 이사람을 보면 30살이 넘은 노총각이라고 생각할까. 방금 놀란 표정과 함께 보인 짧은 웃음은 그녀의 숨이 막혀오게했다. 욕심이 난다. 첫사랑 이후 처음으로 드는 감정이었다. 추스릴수 없을정도로 강해서 그의 곁을 한시라도 떨어질수없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그런 나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것 같다. 이제는 그녀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왠 한숨?”

“아뇨. 그래서, 오늘 저녁에 못봐요? 무슨일인데요?”

“어. 약속이 있어.”

“혹시..여자?”

 

지우의 의심스러워하는 말투에 준하는 엄청 재밌었는지 호탕하게 웃었다. 저렇게 웃는 그의 모습을 처음으로 본 그녀로서는 조금 난감했다. 내 발음이 또 이상했나?

 

“여자라. 그랬으면 좋겠다. 아니야, 여자. 의대 동기생들 모임이 있어서 그래. 하도 오래간만에 가보는거라 빠질수가 없어.”

 

지우는 잠시 생각을 하는듯 했다. 어느새 대화를 나누면서 햄버거를 모두 먹은 준하는 빵가루가 묻은 손을 털어냈다. 시계를 쳐다봤을때 점심시간을 10분이나 넘긴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지우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주길 바랬지만 그녀는 그에게 눈빛조차 보내지 않고있었다.

 

“저기..”

 

불러도 대답도 없고. 트레이를 들고 그는 거의 자리에서 일어나다시피했다.

 

“거기 동기생들만 모여요?”

“응?”

“동기생들이 애인들도 데리고 오고 그래요?”

“글쎄..”

 

잠시 성운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성운은 제작년에 모였던 모임에서 약혼녀를 아주 업고 와서 놀림대상이 되었었다. 그러고보면 그의 친구들은 자주 애인들을 데리고왔다. 결혼한 친구들은 가끔 와이프와 같이 나타나기도 했다.

 

“뭐, 가끔은 같이들 와. 왜?”

“그럼 저도 같이가요!”

“어..어?”

 

준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 애인행세라도 하겠다는건가. 갑자기 가슴 한구석이 씁쓸해져왔다. 내심 지우가 그를 좋아하는건 아닐까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지웠다. 단순히 친구가 필요했던 여자였다. 단순히..친구. 그래, 친구인데 어떤가? 같이 가는게 뭐 그리 큰 대수라고.

 

“그러던지.”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그에게서 이상한 뉘앙스가 풍겨져왔지만 지우는 애써 무시하며 좋든듯 환하게 미소만 지었다. 이래서 이 남자한테 끌린다. 성의없어보여도 알고보면 무척 생각해주는것 같다.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분명 그는 나를 귀찮아하지는 않는다. 진실된 친구가 되어주고 싶어보인다. 정말 한국에는 아무도 없는 나를. 외로운 나를.

 

“그런데요. 준하씨는 동반하는 여자가 친구들 앞에서 도도하고 섹시했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조신하고 얌전했으면 좋겠어요?”

 

같이 가자고 괜히 말한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이렇게 생각하지도 못할만한 엉뚱한 질문들은 골라서 잘하는지. 지우를 만난지 겨우 두번째인데 벌써부터 그녀를 많이 알아온듯 익숙해져있었다. 그냥 무심코 웃어 넘길수 있을정도로 몸에 베인 느낌이었다. 모든 사람들한테 이렇게 붙임성이 좋은 여자인가보다. 왜 갑자기 지은이 떠오르는걸까. 태빈에게 자신감으로 다가가던 그녀가 떠올랐다. 하지만 물론 지우와 틀렸다. 모든면에서 틀렸다. 생긴것부터 남자를 대하는 것까지. 그렇지만 계속해서 지은이 그리워지면 질수록 태빈에게 향한 원망은 커져만 갔다. 그러면 안되는데. 그러지 말자고 스스로 수도없이 다짐하고 명령하지만 쉽지만은 않다.

 

“별 상관 안해.”

“정말요? 아무거나 입고 나가도 되요?”

“벗고만 나오지마.”

 

피식 웃으며 준하는 말했다. 이럴때는 정말 성의없고 무관심해보인다. 지우는 입술을 앞으로 쭉 내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